레지오 마리애

〔라〕Legio Mariæ · 〔영〕Legion of 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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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에 있는 레지오 마리애 세계 본부(왼쪽)와 창시자 프랭크 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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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에 있는 레지오 마리애 세계 본부(왼쪽)와 창시자 프랭크 더프.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 단체의 하나. 1921년 9월 7일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Dublin)에서 파트리시오 성당 빈천시오회의 지도 신부인 토훠 신부와 공무원인 청년 프랭크 더프(Frank Duff, 1889~1980)를 비롯한 20대 여성 15명이 모여 '자비의 모후' 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 모임을 가진 것이 그 시작이다. 이 모임에서는 매주 수요일 정기 모임을 갖고 회원 2명씩 짝을 지어 병원으로 환자를 찾아가 위로하도록 파견하였다. 이 합의는 《레지오 마리애 교본》에 명시되어 오늘의 쁘레시디움 주회(단헌 8, 5)와 행동 단원의 주간 활동(단헌 28, 2)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레지오 마리애의 모체가 되는 이 지단(支團)의 이름이 '자비의 모후' 였기에 한동안 '자비의 모후회'로 알려졌다. 이 회의 탄생 동기는 빈천시오 아 바오로회(St. Vincent de Paul Society)의 몇몇 회원이 주일마다 모여 기도와 영적 독서를 하고 활동 중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을 해결하고 '교구 빈민원' 의 환자들을 보다 잘 위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모임을 가지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레지오 마리애의 뿌리는 '빈천시오 아 바오로회'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 회(會)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레지오 마리애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와는 달리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활동을 금하는데(단헌 38, 2), 이것은 영신적 선물을 모든 사람에게 가져다 준다는 원리를 바탕으로 설립한데 기인한다.
〔발 전〕 레지오 마리애의 탄생 첫해에는 4개의 쁘레시디움이 창단되었으며, 5년 동안에 9개 쁘레시디움으로 확장됨에 따라 1925년 11월 간부 회의에서 충성, 용맹, 규율, 인내 그리고 성공 등의 상징으로 불리는 로마 군대 조직의 명칭을 도입하여 오늘날과 같은 레지오 마리애(마리아의 군대)로 명명하게 된 것이다. 조직은 점차 확장되어 마침내 1927년에는 다른 교구로, 1928년에는 스코틀랜드, 오스트리아, 캐나다 등지로 전파되고 첫 남성 쁘레시디움이 창단되었다. 이 확장 계획은 계속 이어져서 세계 2,000여 교구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 단체 가운데 가장 큰 조직체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현황(1983. 3.31 현재)을 살펴보면 중앙 평의회인 '꼰칠리움 레지오니스' (Concilium Legionis)를 레지오 마리애의 발상지인 아일랜드 더블린에 두고 150여 국가에 1개 또는 그 이상의 세나투스를 두고 있는데(단헌 20, 4), 레지오 마리애의 단위체인 26만 개 쁘레시디움 안에 1,100만 명의 단원(행동 단원 260만 명, 협조 단원 750만 명)이 소속되어 있다. 꼰칠리움 레지오니스는 이 조직을 관리하기 위해 200여 명의 통신원(봉사 활동)을 두어 주로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등으로 세계여러 나라의 세나투스와 직접 연락을 취하고 있으며, 현재 단원들이 사용하고 있는 교본은 40개 국어로 발행되고 있다.
〔조직 운영〕 레지오 마리애의 조직은 단위체인 쁘레시디움(支團, Praesidium), 평의회인 꾸리아(Curia), 꼬미시움(Comitium), 레지아(Regia), 국가 평의회인 세나투스(Senatus), 그리고 중앙 평의회인 끈칠리움 레지오니스로 체계를 갖추어 관리 운영되고 있다.
신앙 생활에 충실한 천주교 신자이면 누구나 단원이 될 수 있으며, 단원은 행동 단원과 협조 단원으로 구분된다. 행동 단원은 단헌에 따라 자신의 성화(聖化)에 힘쓰며 평신도 사도직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목적, 단헌 2)하는 단원을 말한다. 19세 이상의 신자는 성인 단원으로 입단하여 3개월 간의 수련을 받고, 선서를 함으로써 정규 단원이된다. 18세 이하의 신자일 경우는 소년 단원으로 입단하게 되는데 이 단원은 수련기에 관한 규정을 적용받지 않으며 선서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정규 단원이 되기 위해서는 수련을 받고 선서를 하여야 한다. 단원 가운데는 일반 행동 단원보다 높은 등급의 단원이 있는데 쁘레또리움(Praetorium, 로마 군대의 정예 부대) 단원이라 한다. 단원의 양성은 도제 제도(徒弟制度)식을 따르는데 주간 활동은 성인 2시간, 소년 1시간 이상을 해야 하며 이는 쁘레시디움 주관하에 수행하게(단헌 38, 11) 되어 있으므로 단원 개개인의 기호에 따라 임의로 착수할 수 없다. 그리고 물질적 도움을 주는 활동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금하고(단헌 38, 2) 있다. 특히 조직력을 정치적 목적이나 정당을 돕는 일에 개입하지 못하게 한(단헌 38, 23) 것은 "가톨릭 운동은 모든 정당 위에, 그리고 그 밖에 존재하며 어떤 정당의 이념을 발전시키고자 하지 않는다"(교황비오 11세)는 이념을 구현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협조 단원은 사제, 수도자, 평신도 누구나 될 수 있는데, 협조 단원이란 행동 단원의 임무를 이행할 수 없거나 이행하려 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레지오 마리애의 이름으로 기도를 함으로써 레지오 마리애에 참여하는 단원을 말한다. 협조 단원은 첫 단계 협조 단원과 윗 단계 아듀또리움(Adjutorium) 단원으로 구분한다. 첫 단계 협조 단원을 협조 단원이라고 부르는데, 그 임무는 뗏세라(Tessera)에 있는 기도문과 묵주 기도 5단을 매일 바치는 것이다. 윗 단계 아듀또리움 단원은 멧세라의 모든 기도문을 매일 바치고, 매일 미사 참례와 영성체를 하고, 교회가 인정한 성무 일도를 한 가지 바쳐야 한다.
〔한국의 레지오 마리애〕 태동 : 아일랜드에서 레지오 마리애를 창단한 지 32년째 되는 해인 1953년 5월 31일, 목포 산정동 본당에서 창단되었다. 당시 광주교구장 서리였던 하롤드 헨리(H. Henry, 玄) 신부와 토마스 모란(T. Moran, 안) 신부가 산정동 본당의 신자들과 함께 '치명자의 모후' (단장 : 김남철 아우구스티노)와 '평화의 모후' (단장 : 원봉숙 세실리아)라는 이름으로 모여 첫 까떼나를 바친 것이 그 첫걸음이다. 창단의 산파역을 한 해리 로우랜드(Herie Rowland) 신부는, 일본에서 헨리 신부에게 레지오 마리애를 소개하면서 한국 교회의 사목 여건상 이 조직의 필요성을 인식시켰다. 그래서 헨리 신부는 첫째로는 레지오 마리애가 추구하는 "선교사의 일꾼" (단헌 39, 9)이라는 조직의 원리를 통해야만 선교 사업을 체계적으로 수행해 나갈 수 있으며, 마리아의 모성적 감화력이 큰 요소가 될 때 강한 복음적 메시지를 모든 이에게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둘째로는 당시 6 25 동란으로 나라가 황폐화되어 실의에 빠져 있는 국민에게 성모의 신심과 덕행을 정신적 지주로 삼게 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발전 : 창단 원년에는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교구 관할지역 안에서 활동을 하였으며 이듬해인 1954년 2월 15일, 충북 청주 북문로(현 서운동) 본당에서 '하자 없으신 모후 쁘레시디움' 을 창단한 것을 계기로 다른 교구로 뻗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55년에는 원주, 전주, 서울, 춘천, 제주 등지로 확장되었고, 특히 10월 9일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평의회인 '목포 매괴의 모후 꾸리아' 가 설립되어 '꼰칠리움 레지오니스' 의 지시를 받으면서 광주교구 일원의 단원을 관리하게 되었다. 1956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조직이 부산, 진해 등 영남 지방으로 확장되었으며 같은 해 8월 7일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 꾸리아' (당시의 이름 : 메디아 트리치스)가 설립되어 12월6일에 '꼬미시움' 으로 승격되었다. 1958년 4월 6일 한글로 된 정규 교본이 발간되었고, 그 해 7월 13일에는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 꼬미시움이 국가 최상급 평의회인 '세나투스' 로 승격되었다. 이로써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투스' (단장 : 이청운, 영적 지도자 : 허 미카엘 신부)는 한국 일원의 레지오 마리애 관할권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 창단 5년 만에 이룩된 일이었다. 또 8월 21일에는 수원 양지 본당에 '매괴의 모후 쁘레시디움' 이 창단됨으로써 드디어 한국의 모든 교구에서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 25주년을 맞은 1978년에는 1,830개 쁘레시디움에 7만 명(행동 단원 29,268, 협조 단원 37,619)의 단원이 있는 커다란 단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방대한 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투스는 확장 분할 계획을 수립하여 12월 23일 '서울 무염 시태 레지아' 를 세나투스로 승격시키고 이듬해 2월 25일 명동 성당에서 서울 세나투스 발족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로써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투스' 는 광주 · 대구대교구와 대전 · 마산 · 부산 · 안동 · 전주 · 제주 · 청주 교구(대전, 청주는 1979년 9월 8일 서울로 이관) 내의 단원을, '서울 무염 시태 세나투스 는 서울대교구와 수원 · 원주 · 인천 · 춘천 교구 내의 단원을 각각 관장하여 관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직 체제를 통해 양 세나투스는 한국 교회가 요구하는 레지오마리애 단원의 사명을 재인식하고 선교의 과학화를 기하는 등 활동 방향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1979년 7월 16일 '민족 복음화 활동' 을 선포하였다. 이 활동은 한국 천주교회 선교 200주년을 맞이하는 1984년에 한국 교세 200만을 목표로 10만여 명의 행동 단원이 기도하며 활동에 돌입하여 마침내 그 이듬해인 1985년에 그 목표를 이루게 되었다. 또한 1986년 10월 25일에는 한국 선교 3세기를 향한 새 장(章)을 열게 됨에 따라 방대한 조직을 다시 선교에 수용함으로써 1990년에 교세 300만을 목표로 하는 '3세기를 향한 민족 복음화 활동' 을 선포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이 활동의 성과는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1988년부터 교세 신장률이 현저하게 둔화됨으로써 목표 연도보다 2년 후인 1992년에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1996년 4월 현재, 한국의 레지오 마리애는 쁘레시디움 25,545개, 꾸리아 1,491개, 꼬미시움 148개, 레지아 8개, 세나투스 2개에 행동 단원 275,177명과 협조 단원 228,873명 등 모두 504,050명의 단원이 있다.
※ 참고문헌  김해걸, <한국 가톨릭 교회의 레지오 마리애 운동>, 《한국 가톨릭 문화 활동과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pp.367~393/ 김해걸, <성화의 길 따라 서른여섯 해>, 《레지오 마리애》 13호, 1989, pp. 14~21/ 레지오 마리애 한국 세나투스 편, 《3세기를 향한 민족 복음화 운동 결과 보고서》, 1990/ T.P. Carroll, 《NCE》 8, pp.616~617/ L.C. Morand, The Character ofthe Legion ofMary in the Law of the Church, London, 1955/ L.J. Suenes, Theolgy of the Apostolate of the Legion of Mary, Westmimster, 1954. 〔金海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