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화가이자 판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17세기 서양 미술사에 있어서 뛰어난 천재 가운데 한사람. 1606년 7월 15일 라이덴(Leiden)에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라틴어 학교를 거쳐 14세 때 라이덴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몇 달 만에 자퇴하였다. 처음에 스바넨부르크(J.I. van Swanenburgh)에게 미술을 배운 렘브란트는 1624년경에 암스테르담(Amsterdam)으로 가서 라스트만(P. Lastman)으로부터 주로 사사를 받았다. 라스트만은 종교적이고 우의(寓意)적인 내용을 담은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작업하였던 화가로, 렘브란트의 첫 작품으로 여겨지는 <스테파노의 순교>(1625)를 보면 라스트만의 영향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1625년 고향 라이덴으로 돌아온 렘브란트는, 독학으로 친척이나 이웃 노인 또는 성서에서 소재를 얻어 꾸준히 그림을 그렸는데, 그 동안의 노력이 점차 열매를 맺어 1631년경 암스테르담의 의사 조합으로부터 위촉받은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가 크게 호평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였고, 뛰어날 정도로 명확한 기교로 실재감 있는 초상화를 그려 당시 명망 있던 암스테르담의 초상화가들을 제치고 순식간에 일인자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40점 이상의 초상화가 1632년 혹은 1633년에 그려진 것으로 미루어 보아 얼마나 많은 의뢰가 들어왔는 지를 짐작할 수 있다.
1634년 렘브란트는 부유한 집안의 딸 사스키아(Saskia van Uylenburgh)와 결혼하여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었고 높은 명성과 더불어 많은 수입 및 제자들을 얻었는데, 1635년에 제작된 자신의 부인과 함께 그려진 자화상에 이때의 윤택한 생활이 잘 나타나 있다. 이후에 그려진 <눈먼 삼손>(The Blinding of Samson, 1636)과 같은 종교화 역시 그의 화려한 화풍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점차 성숙해짐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 기호이던 평범한 초상화 등에 만족할 수 없게 되어 외면적인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것, 인간성의 깊이를 묘사하고자 하는 의식이 생기면서 종교적 또는 신화적 소재나 자화상의 작품들이 많아졌다. <야경>(The Night Watch, 1642)의 제작을 고비로 갑자기 세속적 명성에서 멀어졌는데, 그 이유는 렘브란트가 이 작품에 드는 비용을 분담한 모든 인물들을 똑같은 비중을 두어 그리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고, 일군의 인물들을 자의적으로 명암의 대비와 역동적인 움직임 안에 배치하여 표현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보다 내면으로 사색하면서 자신의 자유로운 표현 양식을 추구하게 되자, 부유한 계층의 의뢰인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더욱이 1642년에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함으로써 아내와 인기를 동시에 잃은 그의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위대한 예술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특히 아들 티투스(Titus)의 성장과 1645년경부터 동거하기 시작한 스토펠스(Hendrickje Stoffels)의 내조는 그의 예술을 더욱 원숙하게 하였는데, 오늘날 대표작으로 인정되는 작품들은 164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또한 그는 몇몇 통찰력 있는 후원자들을 만나 그의 정신 세계를 점차 깊이 있게 추구할 수 있었다. 1654년에 그린 <바쎄바>(Bathsheba)에서 볼 수 있듯이, 그가 초기에 그렸던 종교화에서 보여지는 극적인 면은 제거되고 불완전한 육체를 솔직하게 묘사하면서 조용하게 체념하고 있는 바세바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뛰어난 심리적 통찰력은 40년 간 그가 제작한 자신의 자화상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가 초기에 그린 표정 묘사, 자신감 넘치는 눈 그리고 화려한 복장을 강조했던 자화상에 비해, 후기의 자화상들은 차츰 단호한 인내심과 위엄을 형상화한 성숙한 단계에 이르러 그 어느 것보다도 감동적이다. 그러나 생활은 날로 어려워져서 1656년에는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아 놓은 방대한 미술품들을 매각해야만 하였고, 1662년에는 부인 스토펠스가 세상을 떠나고 1668년에는 티투스마저 죽자 자신도 이듬해 10월 4일 유대인 지역의 초라한 집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이 없이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이 재발견되기까지는 100년이 채 걸리지 않았고 그의 명성은 길이 기억되고 있다.
〔작 품〕 현존하는 렘브란트의 작품은 유화 약 100점, 판화 300점, 소묘 1천여 점으로, 종교화 · 신화화 · 초상화 · 풍경화 · 풍속화 · 정물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목자들의 경배>(1645~1646)에서 그는 빛으로 여러 무리의 사람들을 돋보이게 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렘브란트가 그린 복음서의 주제들이 지니고 있는 성스러움은 광채를 발하는 반투명의 후광(後光)에 있다. <병자를 고치는 그리스도>에서는 광채를 발하는 반투명의 빛이 어둠을 밀어내고 동판화를 후광으로 둘러싸고 있다.
렘브란트의 제자들이나 모방자들, 즉 '렘브란트풍의 화파' 들에 의해 모작이나 위조품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당시 시대에 있어서 거장(巨匠)에 대한 경의로 간주되었다. 세계적으로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알려졌던 <황금 투구를 쓴 남자>와 〈사울 앞에서 하프를 연주하는 다윗>은 위작으로 판명된 작품이다. 렘브란트는 1654~1660년 사이에 성서에서 소재를 얻은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다. 〈횃불 아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리다>와 <그리스도의 매장>은 한 판을 찍은 후 다음 판으로 넘어가면서 점점 어둡게 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렘브란트 마지막 시기의 부식 동판화의 특징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 혹은 무릎을 꿇은 성 프란치스코>(1657)와 <성전 문 앞에 있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처럼 어두운 밤과 대립되는 보다 밝은 장면이 등장하는 작품들도 있다. <방황하는 아들의 귀향>은 1669년에 제작된 260cm 높이의 그림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감동적인 작품이다.
중년 이후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혀졌으나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고, 더구나 그의 예술은 시대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 오늘날 그를 가리켜 '혼(魂)의 화가' 또는 '명암의 화가' 라고 말하거니와 초기에 이탈리아의 카라바조(Caravaggio)풍의 명암법을 익혔다고 하지만 마침내 그는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게 되었다. 즉 그의 작품에서는 색이나 모양이 모두 빛 그 자체이며 명암은 생명의 흐름이었다. 대상을 그림에 있어서 렘브란트만큼 철저하게 사실적인 사람도 없을 것이다. 종교적 소재에서도 마리아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렘브란트만큼 네덜란드의 정서 생활에서 표현한 사람도 없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은 높은 종교적 정감과 기쁜 인간 심정의 움직임이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은 특유의 명암법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인간애 정신이 넘치고 있어 그가 그리는 작품에는 한없이 따뜻한 애정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또 그는 100여 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렘브란트만큼 많은 자화상을 그린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자화상은 언제나 겸허한 모습이었고, <야경>을 비롯한 <엠마오의 그리스도>, 〈야곱의 축복>,<유대인의 신부(新婦)>, <세 그루의 나무>, <병자를 고치는 그리스도>, <3개의 십자가> 등에서도 그의 인간애를 엿볼 수 있다. 또 에칭(etching)의 모든 기술은 너무도 탁월하여 렘브란트에 의하여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렘브란트의 위대함은 도우(G.Dou), 드 겔더(deGelder) , 파브리시우스(C. Fabritius) 등 당대의 주요 화가들을 사사하였다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 참고문헌 H.W. Janson, History of Art, New York, Harry N. Abrams, 2nd ed., 1977(김윤수 외 역,《미술의 역사》, 삼성출판사, 1987)/ 《세계미술 대사전 : 서양 미술사》 I, 한국미술연감사, 1985/ The Illustrated Library of Art-Part I, New York, Portland House, 1981, p. 869/ O.J.Rothrock, 《NCE》 12, pp. 336~339. 〔鄭泳沐〕
렘브란트, 하르멘츠 반 레인 Rembrandt, Harmensz van Rijn(1606~1669)
글자 크기
4권

1 / 5
렘브란트(자화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