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소속 본당.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30-3 소재. 1949년 9월 명동 본당에서 분리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관할 구역은 가회동, 계동, 원서동, 안국동, 재동, 삼청동, 팔판동, 화동, 소격동, 사간동, 송현동, 운니동과 와룡동, 익선동, 낙원동, 경운동, 관훈동, 견지동, 수송동 일부 지역. 〔역대 신부〕 초대 윤형중 마태오(1949~1950), , 2대 방유룡 레오(1950~1952), 3대 박우철 바오로(1952~1955. 2), 4대 박성춘(朴聖春) 레오(1955. 2~1957. 6), 5대 신인균(申麟均) 요셉(1957. 6~1966. 12), 6대 조인환 베드로(1966. 12~1967. 7), 7대 최익철 베네딕도(1967. 7~1970. 1), 8대 최석우 안드레아(1970. 1~1972. 5), 9대 이창숙(李昌淑) 그레고리오(1972. 5~1973. 5), 10대 이계광(李啓光) 요한(1973. 5~1978. 9), 11대 임응승 요한(1978. 9~1983. 9), 12대 김형식(金亨植) 베드로(1983. 9~1989. 13대 박순원(朴蕣遠) 이냐시오(1989. 2~1994. 2), 14대 소원석(邵元碩) 가브리엘(1994. 2~현재).
〔설립과 정착〕 해방 당시 명동 본당의 가회동 구역 - 일명 '북촌 19동' 으로 광화문에서 동으로 종로 3가, 북으로 삼청동에 이르는 지역 - 에는 신자수가 많지 않았지만, 본당에서는 이곳의 전교를 활성화함으로써 또 하나의 본당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에 신자들은 임병팔(林秉八) 구역 회장을 중심으로 우선 가회동에 방 하나를 구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체 모임을 갖다가 1949년 4월 이웃의 한옥 한 채를 매입하게 되었다. 그러자 명동 본당의 장금구(莊金龜) 신부가 이해 6월 이곳을 방문한 뒤 신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이어 교구의 결정에 따라 동년 9월 하순에 본당 설립을 보게 되었다. 당시 본당의 신자수는 4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초대 본당 신부로 임명된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신부는 당시 거처가 없었으므로 명동에서 오가며 미사 집전을 하다가 전임되고, 뒤이어 복자 수도회의 방유룡(方有龍, 레오) 신부가 부임하였으나 6 · 25 동란이 발발함으로써 신자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게 되었다. 전후 본당 신부로 부임한 사람은 황해도에서 남하한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였다. 그러나 전쟁 중에 성당으로 사용하던 한옥이 인민일보의 사옥으로 사용되면서 퇴락하였고, 전후에는 수리해서 사용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므로 박 신부와 신자들은 주한 미군 민간 원조단(A.F.A.K.)의 원조 아래 성당 신축에 노력하여 1954년 12월 3일에는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성장과 변모〕 성당 신축으로 안정된 신앙 생활을 하게 된 신자들은 이후 주일학교를 개설하고 레지오, 복사단, 학생회를 설립해 나갔다. 그리고 조인환(曹仁煥, 베드로) 신부 재임시인 1966년에 사제관 신축을 발의하여 제7대 주임 최익철(崔益喆, 베네딕도) 신부 재임기인 1968년 6월 8일에 이를 준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1969년에는 유치원을 개원하고, 경기도 벽제에 본당 묘지를 마련하였으며, 제8대 주임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 신부 재임시인 1970년에는 성당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동시에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을 초청하였다. 이후 본당에서는 내실에 주력하여 신심 및 전교 활동을 강화함과 아울러 신심 활동 단체들을 확대시켜 나갔고, 제11대 주임 임응승(林應承, 요한) 신부 재임시인 1981년에는 성당 개축 공사를 실시하는 등 내실과 안정의 길을 열어 나가게 되었다. 다만 본당이 한옥과 일반 주택 지대를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는 관계로 타본당으로 전출하는 신자가 많았고, 따라서 신자수도 1981년에 1,711명, 1983년에 1,877명, 1993년 현재 2,075명으로 완만한 증가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 서울대교구) 〔車基眞〕
가회동 본당
嘉會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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