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

〔그〕λόγος · 〔라 · 영〕log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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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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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된다.

로고스는 그리스어로서 매우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다. 어원은 레고(λέγω)에서 왔는데, 이 동사는 크게 두가지의 뜻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하나는 '(질서 있게)모으다' , '셈하다' 란 뜻이고, 다른 하나는 '말하다' 란 뜻이다. 로고스의 다양한 의미도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의 뜻에서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로고스는 단어, 말〔話), 논의, 설명, 이설(異說), 평가, 수산(數算) 측정, 비례, 선언(청원), 원리, 이성(理性) 등을 의미한다.
I . 성서에서의 로고스
성서 안에서 로고스의 개념은 사전적 의미를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 성서의 언어는 당시 시대적인 언어요, 대중 언어였기에 성서 안에 받아들여져 사용됨으로써 독특한 의미를 지닌 개념으로 탈바꿈되었다. 성서에서는 일반적으로 '말씀' 으로 번역된다.
〔구약성서〕 로고스에 해당하는 용어들 : 로고스에 해당하는 구약성서의 용어로 히브리어 다바르(דָּבָר), 에메르(עֵמֶת), 이므라(אִמְרָה), 밀라(מִלָּה) 등을 들 수 있는데, 다바르가 로고스에 가장 가까운 뜻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70인역 성서에서는 다바르가 그리스어 해마(ῥῆμα)로도 번역된다. 즉 다바르가 로고스와 헤마로 번역되어 이 두 낱말이 동일한 뜻으로 혼용된다. 통계적인 자료에 따르면, 헤마는 모세 오경과 역사서에, 로고스는 예언서와 지혜 문학에 주로 사용된다. 이것은 문학 양식상의 특징과 관련되어 있다. 즉 로고스는 헤마에 비해서 신탁(神託)이나 예언 그리고 지혜에 관련된 의미에 더 역점이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해마보다 로고스가 월등하게 많이 사용된다. 헤마나 로고스 모두 우리말 성서에서는 '말씀' 으로 번역되어 있다.
구약성서의 다바르는 대부분 '하느님의 말씀' 을 가리키는데, '말씀' 이란 의미 외에도 '보고' (창세 37, 14), '명령' (창세 24, 33 ; 에스 1, 12. 19), '생각' (에제 38, 10), '약속' (1열왕 2, 4), '충고' (민수 31, 16 ; 2사무 17, 6) 및 '일, 사건, 문제' (잠언 11, 13 : 17, 9 ; 전도 7, 8 ; 1 열왕 15, 5 ; 민수 18, 7 ; 1사무 10, 16) 그리고 단순히 막연한 것을 가리키는 '어떤 것' (아모 3, 7 ; 1사무 22, 15 ; 전도 1, 10)이나 형용사와 더불어 '어떤 것' (좋은 것, 나쁜 것 등)을 뜻한다(신명 17, 1 : 민수 31, 23 : 레위 5, 2 ; 1사무 26, 16 ; 예레 29, 10). 즉 다바르는 입에서 표현되는 내적인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외적인 것까지 뜻한다. 달리 말하자면, 행위가 반드시 수반되고 이루어지는 행위적인 말이다. 이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이사야서(55, 10-11)의 말이 한마디로 잘 요약해 준다. 이처럼 다바르는 진실을 그 고유한 특성으로 지닌다. 따라서 표현된 '말' 에는 반드시 어떤 '일' , 곧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그 '일' 은 '말' 로써 인식되며, 또한 '말' 이 그 '일' 의 내용과 분리될 수가없다. 즉 다바르는 내적인 것(정신, 의지, 뜻)의 표출로서 반드시 그 내용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다바르를 받아들여 이해한다는 것은 그 내용을 파악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바르는 특히 '다바르 야훼' (하느님의 말씀)라는 구약성서적인 표현에서 인간에게 계시되는 하느님의 말씀, 곧 하느님의 예언적인 말씀을 나타내어 그 예언적 계시를 부각시킨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나 의지, 그리고 명령을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되고 하느님의 창조적인 행위를 드러내는 완곡 어법의 역할을 하는 데에도 기여한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다바르는 역동적인 힘과 창조적인 효능을 지닌 것으로 이해된다. 사실상 하느님의 예언적 · 명령적 · 창조적 말씀은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문사(文詞)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다바르가 사람들의 수용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현존하는 능력으로 가득 차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하느님의 다바르가 진리 그 자체임을 반증하기도 한다. 따라서 수용된 하느님의 다바르는 경험적인 사실에 의거한 것이다. 70인역 성서의 로고스는 히브리어 성서의 다바르를 번역한 용어이기 때문에, 그 로고스는 다바르 개념에 따라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성서 안에서의 로고스는 다바르의 영향을 받아 역동적인 요소를 취한 개념으로 된 것이다.
예언적 계시로서의 말씀 : '다바르 야훼' 라는 표현은 우선적으로 '하느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는 것을 특징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예언서에 이 표현이 두드러지게 많은데 사실상 예언자들은 하느님, 곧 하느님의 영과 말씀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자들이 선포한 말들이 '하느님의 말씀' 으로 표현된 것이다(호세 1, 1 ; 미가 1, 1 ; 스바 1, 1). 인간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 이란 표현은 특히 예언자들의 시대에 자주 사용된 용어로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인간에게 전달되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특성, 곧 예언적인 특성과 계시성을 시사한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이 말씀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기에 하느님의 예언과 계시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또한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예레 1, 4. 11 ; 2, 1 ; 13, 8 ; 16, 1 ; 24, 4 ; 28, 12 ; 29, 30 에제 3, 16 6, 1 ; 7, 1 ; 12, 1)
구약성서를 보면, 하느님은 어떤 특정한 사람(성조, 판관, 예언자)을 선정하여 말씀하고, 또한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도록 명한다. 하느님이 말씀하는 방법은 물론 다양하다. 환상이나 꿈(민수 12, 6 ; 1열왕 22, 13-23), 내심의 영감(2열왕 3, 14-19 ; 예레 1, 4-10)을 통하여 말씀하거나 대면하듯 직접적으로도 말씀한다(민수 12, 8 ; 1사무 3, 10). 반면에 하느님 말씀의 계시 방법이 전혀 서술되지도 않은 채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창세 12, 1)라는 식으로 그 결과만 언급되기도 한다. 하느님의 말씀에 접한 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저항할 수 없는 말씀의 위력을 체험한다(아모 7, 15 ; 8, 11 ; 에제 2, 8-3, 3 ; 예레 15, 16 ; 20, 7). 사실상 구약성서에서 하느님 말씀의 계시 방법 그 자체보다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말씀한다는 사실과, 하느님의 말씀에 인간이 압도되어 살아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자각하고 하느님과 접촉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 개개인의 삶의 방향을 설정해 주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삶이 바로 이를 잘 대변해 준 역사적인 사실이다.
하느님의 예언적인 말씀에는 하느님과 부름을 받은 예언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만남과 인간에게 선포해야 할 말씀이 그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 예언자로서의 사명 의식이 말씀의 선포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인격적인 만남은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그 절정을 이룬다. 또한 예언자가 선포하는 말씀의 권위는 사명을 부여한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예언자 자신도 하느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말씀을 선포하고 또한 선포해야만 한다는 의식을 갖는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예언자 사이에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관계가 유지되어 간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말씀을 선포하기 전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또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 '야훼의 말씀을 들어라' 라는 공식적인 어구를 사용한다(호세 4, 1 : 아모 3, 1 ; 7, 16 ; 예레 10, 1).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어느 특정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 전체에게 전해져야 할 메시지라는 특성도 시사해 준다. 하느님은 다만 대변자를 통해서 당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할 따름이다(히브 1, 1). 하느님의 말씀은 일부 신비가들만이 체험할 수 있는 극히 제한적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대변자로 하여금 그 말씀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며(예레 1, 6-10 ; 에제 3, 16-21 ; 33, 1-9), 역동적인 실재로서 하느님의 뜻이 틀림없이 실현되는 힘을 지닌다(여호 21, 45 ; 23, 14 ; 판관 13, 12 ; 1열왕 2, 27 ; 8, 56 : 예레 28, 9 ; 이사 55, 10-11 ; 시편 33, 6. 9). 그리하여 말씀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삶의 원동력이 되고, 하느님 백성의 역사는 그 말씀이 실현되는 터전이요 과정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피조물을 존재하게 하는 위력의 매체(창세 1장)요, 진실된 모든 예언을 요약한 것이며, 계시의 수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계약 및 율법 계시로서의 말씀 : 하느님 말씀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는 하느님 뜻의 선포이다. 이 선포는 '계약의 말씀' 으로 소개되고(출애 34, 27-28), 십계명으로 칭해진다(신명 4, 13 ; 10, 4). 이 계명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을 체결하고 나서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하느님의 뜻이 표현된 것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세세대대로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끊임없이 준수해야 할 기본적인 법과 규범이다(출애 20, 1-17 ; 신명 5, 6-22). 이 계약의 사건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당신의 근본적인 요구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깨닫게 해준 중대한 사건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의 생각이나 뜻과 일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하며 삶의 방식과 법, 곧 율법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하느님의 뜻이 계시되는 것으로 이해되며, 특히 신명기에서는 율법이 하느님의 말씀과 병행되어 하느님의 뜻을 나타낸다(4, 10.36 ; 5, 5 ; 12, 18 ; 15, 15 ; 24, 18. 22 ; 28, 14). 또한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읽혀져서 하느님을 경외하며, 율법의 모든 말씀을 준수하도록 한다(신명 31, 11-12).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이 생명임을 가르쳤고(신명 8, 3 ; 32, 47), 현인들이나 시편 작가는 율법을 행복의 원천으로 여기며 찬양하였다(잠언 16, 20 ; 18, 13 ; 시편 19, 7-10). 사실상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로서 구원의 토대가 되었고(느헤 9장 ; 말라 3, 6-12), 지혜와 동일시되었다(집회 24장 지혜 6-10장). 그리고 율법을 완전히 지킬 때 메시아가 온다고 여겨 율법을 희망의 원천으로 표현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이사 24-27장 : 에제 38-39장 ; 다니 12, 4).
신명기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모세에 의해 선포된 계약 및 율법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어 가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가르치며, 하느님과 맺은 계약 사건을 상기시킨다(신명 1, 1). 따라서 율법으로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영원히 효력을 발휘하는 계시로서 항상 현실적으로 요구되는 계명이고, 동시에 역사 가운데서 끊임없이 새롭게 선포되는 예언적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 말씀의 메시지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에 충실하도록 이끌어 주며, 구원하는 하느님께로 돌아와 함께 머물러야 한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인간의 응답이 요구된다.
창조적 권능을 지닌 말씀 : 창조 설화에서는 세상의 기원이 하느님의 말씀에 있다고 언급한다(창세 1장). 이런 내용은 예언서(에제 37, 4-10 ; 이사 40, 10-26)나 시편(33, 4-11 ; 147, 15-18) 그리고 집회서(39, 17-18. 31 ; 43, 10. 26)에도 언급되어 있다. 창조적인 권능을 지닌 하느님의 말씀은 사실상 하느님의 역사적 주도권을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달리 말하자면, 말씀에 의한 창조는 이스라엘의 계약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토대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역동적인 실재로서 하느님이 의도하는 것을 틀림없이 실현하는 효능을 갖는다. 하느님은 또한 당신의 말씀이 실현되는지를 깨어 지켜본다(예레 1, 12).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우주 안에서 끊임없이 활약하여 우주를 지배하며, 역사적 사건이든 자연계의 제반 현상에 관한 것이든 또는 종말에 일어날 일이든 간에 예고한 대로 이루어진다(민수 23, 19 ; 이사 55, 10-11). 따라서 인간 세계의 역사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성취되어 가는 터전이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 한마디에 모든 것이 생성되었다" 고 노래한 시편 작가의 고백(시편 33, 6-9)은 창조적 권능을 지닌 하느님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해 준 내용으로 볼 수 있다(애가 3, 37 : 유딧 16, 14 : 지혜 9, 1 ; 집회 42, 15).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자연을 다스리며, 모든 피조물을 생성 유지시킨다고 믿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율법서나 예언서 어디서든 하느님의 계시를 지니고 있기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자연의 창조에도 역시 하느님의 계시가 담겨져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창조 말씀은 예언과 율법에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가 있다. 바로 이 점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에서의 독특하고 고유한 면이다.
의인화된 말씀 :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지혜 또는 하느님의 영과 함께 가끔씩 의인화되어 묘사된다. 특히 하느님의 계시를 행동으로 드러낼 때(시편 119, 89)와 하느님의 뜻을 이행할 때(시편 107, 20 ; 147, 15 ; 지혜 18, 14-16)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의인화된 하느님의 말씀은 인격의 실체와는 거리가 멀다. 달리 말하자면, 요한 복음서의 서언에서 인격의 실체로 언급된 로고스(1, 1. 14)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다만 지상에서 활동하는 하느님 말씀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의인화되었을 따름이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속성을 의인화하여 표현한 대목이 상당수에 달한다(시편 85, 10-13 ; 89, 14 ; 79, 8 ; 이사 55, 11). 이것은 의인법에 익숙한 구약성서 작가들의 표현 기법 때문이다. 설령 그들이 이교도들의 문헌에서 하느님과는 다른 어떤 신비적인 형체로 의인화된 개념(특히 지혜)을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자신들의 유일신관(唯一神觀)을 위협하는 요소들을 배제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신약성서〕 다양한 의미 : 로고스는 신약성서에서 필레몬서, 유다서와 요한 2서를 제외한 모든 책에서 폭 넓게 언급된다. 그러나 그 의미는 문맥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일상 생활적인 의미(2베드 2, 3 ; 에페 5, 6 ; 필립 4, 15-16 ; 갈라 6, 6)에서부터 심오한 신학적인 의미, 곧 그리스도론적인 의미(요한 1, 1. 14)에까지 이르며, 의미상의 차이를 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진술(마태 5, 37 ; 루가 20, 20), 언사(마태 12, 32 : 15, 12), 보고(마태 28, 15), 격언(요한 4, 37), 신탁(요한 2, 22), 질문(마르 11, 29), 명령(루가 4, 36), 소문(마르 1, 45 ; 루가 5, 15 ; 사도 11, 22), 강화(마태 5, 2), 어법(1고린 15, 2), 책(사도 1, 1), 구전(사도 15, 27 ; 2고린 10, 10), 사건(마르 9, 10 ; 사도 8, 21), 설명(로마 14, 12), 동기(사도 10, 29), 교훈(루가 4, 32 ; 10, 39 ; 요한 4, 41 ; 17, 21), 관계(필립 4, 15)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입으로 발설된 말씀' 이란 의미가 그 기본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로고스는 형용사와 함께 사용되거나 독립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소유격 명사와 함께 사용되어 구체적인 뜻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말씀, 주님의 말씀, 왕국의 말씀, 약속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성서의 말씀, 예수의 말씀 등이다. 특히 요한계 문헌에서는 로고스가 인격화되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데(요한 1, 1. 14 ; 1요한 1, 1 ; 묵시 19, 13), 이 점은 매우 독특하다.
예수의 말씀 : 특히 공관 복음서에서 로고스는 예수의 가르침이나 말씀, 곧 복음을 칭하는 데에 사용된다(마르 2, 2 ; 4, 14. 33 ; 8, 32 ; 마태 7, 24. 28 ; 8, 16 ; 13, 19 ; 19, 1 ; 루가 5, 1 ; 11, 28 ; 사도 10, 36). 또한 예수의 메시지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마태 24, 35). 예수는 인간 세계에 임박한 '하느님의 나라' 를 선포하고(마르 1, 14-15 ; 마태 10, 7 ; 루가 10, 9), 그 나라가 이미 자신의 인격과 말씀 가운데 시작되었음도 알린다(루가 11, 20).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 이라는 구약성서적인 표현을 예수의 말씀 가운데서 찾아볼 수는 없다. 이것은 예수 자신이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구약의 예언자들과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마르 13, 31), 또는 "나의 아버지께서는 내게 모든 것을 넘겨주셨습니다"(마태 11, 27)라는 예수의 말은 이를 확증해 준다. 즉 하느님과 예수 자신과의 일치(요한 10, 30),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과의 일치를 말해 준다(마태 5, 21 이하). "진실히 나는 여러분에게 이릅니다"(마르 3, 28 ; 8, 12 등)라는 예수의 말씀에도 예수의 신적인 권위가 내포되어 있다. 이 말씀은 예수 자신에 대한 신적 확신의 표현이며, 예수의 말씀에 대한 신적 자기 인증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 신적인 권위는 자신의 말을 듣고 실행에 옮기도록 촉구하는 대목(마태 7, 24 ; 루가 6, 47)에도 나타나 있다. 사실상 예수는 신적인 권위로써 사람들의 죄를 사해 주었고(마르 2, 10-12 ; 마태 9, 6-8 ; 루가 5, 24-26 : 7, 48-50 : 요한 8, 11), 안식일의 '주인' 으로서 행세를 하였다(마르 2, 28 ; 마태 12, 8 ; 루가 6, 5). 예수의 말씀이 지닌 권위는 또한 예수의 부름에 즉각 순응하였다는 제자들의 소명 사화(마르 1, 16-20 ; 2, 14 ; 3, 13-15 ; 요한 1, 35-51)에도 잘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권위에 반론을 제기한 유대 지도자들과 예수와의 논쟁 사화(마르 2, 1-3, 6 ; 7, 1-23 ; 11, 27-12, 40 ; 요한 5, 16-47 : 6, 52-58 ; 7, 45-52 ; 8, 39-58)에도 예수의 권위가 시사되어 있다. 예수의 말씀이 지닌 이런 놀라운 능력은 청중의 반응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마르 1, 22. 27 ; 마태 7, 29 ; 루가 4, 32).
예수의 권위적인 행위는 복음서의 여러 기적 사화에서 볼 수 있듯이 말씀으로 인해 이루어진다. 즉 예수의 말씀은 신적인 행위를 유발시키는 권능과 창조적인 위력을 지닌다. 이것은 예수의 언행 가운데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의 기적 행위는 말씀에 종속되고(마태 8, 8 ; 루가 7, 7), 또한 예수의 말씀으로 선포되는 하느님의 나라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표징도 된다(루가 4, 16-21).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신적인 권위를 지닌 예수의 인격과 연관되며, 예수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은 영원한 결정력을 지닌다(마르 8, 38 ; 요한 6, 63. 68). 예수의 말씀이 이런 놀라운 권위를 지니는것은 사실상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의 말씀이 곧 하느님의 말씀인 것이다(요한 14, 24 ; 14, 10 ; 17, 8). 따라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의 말씀을 성서와 동등하게 여겼고, 또한 그 말씀을 믿고 따랐던 것이다(요한 2, 22 : 5, 47).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느님에 대한 소식을 가장 신빙성 있게 알려 줄 수가 있고(요한 1, 18 : 마태 11, 27), 아들 예수와 아버지 하느님은 서로 '하나' 이기 때문에(요한 10, 30 : 14, 10 ; 17, 11. 21), 아들을 보는 자는 곧 아버지도 보는 것이 된다(요한 12, 45 : 14, 9). 또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참된 계시자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 (골로 1, 15)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 :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선포된 말씀 곧 복음의 계시를 가리킨다. 그 로고스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도 가리킨다(마태 13, 19. 21-23 ; 마르 4, 14. 33). 이 복음은 사실상 역사적인 예수의 말씀과 사건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사도 10, 36 이하), 이것이 곧 복음 선포의 규범적인 주제를 이룬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나 설교 내용은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마르 16, 20 ; 사도 4, 1-2. 29. 31 : 6, 2. 4. 7-8 : 10, 36. 44 ; 11, 1-19 ; 히브 2, 2-4 ; 13, 7. 22).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메시지를 로고스라고 칭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로고스라고 칭한 대목들(루가 1. 2-4 ; 사도 1, 1 : 2, 41 : 4, 4 ; 6, 2. 4. 7)은 이를 잘 반영해 준다. 따라서 로고스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루가 1, 2 ; 사도 17, 11 ; 18, 5). 바오로 역시 같은 뜻으로 사용하였다(1데살 1, 6 ; 1고린 14, 36 ; 갈라 6, 6).
특히 마르코 복음 8장 32절의 로고스는 문맥상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는 것을 시사한다. 바오로가 받아들이고 선포한 복음의 내용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인데, 거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 죽음과 부활이 그 핵심을 이룬다(1고린 15, 1-5). 바오로는 이 선포의 핵심을 '십자의 말씀' (1고린 1, 18)으로 표현하여 복음 선포의 유일한 내용으로 삼았던 것이다(1 고린 2, 2). 그리고 바오로는 이 십자가의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가 바로 부활한 그리스도이듯이, '생명의 말씀' (필립 2. 16), '화해의 말씀' (2고린 5, 19)으로도 언급하였다.
공관 복음사가들처럼 바오로도 복음을 로고스와 동일하게 이해하였다(로마 9, 6 ; 2고린 1. 18 ; 2, 17 ; 4, 2 ; 5, 19 ; 6. 7). 그에게 있어서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이다(1고린 1, 23 : 2고린 4, 1-6 ; 갈라 3, 1). 하지만 공관 복음사가들이나 바오로는 요한 복음사가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로고스와 직결시키지는 않았다. 그들은 로고스를 그리스도론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서 요한 복음사가는 복음서의 서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육' (肉)을 취한 로고스로 표현하였다(1, 1-3. 14). 즉 로고스를 인격화시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한 것이다. 하지만 서언 이외의 다른 대목에서는 로고스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칭하지 않았다. 아마도 선재(先在)한 로고스(1, 1)가 육을 취해 사람이 되었다는(1, 14)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사실상 로고스의 선재와 육화 사상은 요한 복음서에서 여러 가지 양상으로 서술된다(1, 30 ; 3, 13. 31 ; 6, 33. 38. 46. 50-51. 62 ; 8, 23. 38. 42 ; 16, 28. 30 ; 17, 5).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 복음사가들은 예수의 전도, 곧 말씀의 선포를 인간에게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주는 말씀으로 증언한다. 즉 예수의 말씀은 구약의 하느님 말씀과 동일한 것이고 인간에게 효력을 발휘하는 역동적인 힘이며, 계시하는 빛이다. 특히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12, 49 : 17, 14), 그리고 예수의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언급하였다(14, 10. 24 ; 17, 8). 즉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 을 말하며(3, 34),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14, 10), 오로지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을 말한다(8, 28 : 12, 50). 그러기에 예수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 이다(6, 63). 따라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과 동일하다(5, 24 ; 8, 51 ; 12, 48 ; 14, 24 ; 15, 3 ; 17, 14. 17). 예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역동적인 힘이나 그 위력이 나타난 것이다. 바오로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능력' 이다 (1고린 1, 23-2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고(요한 5, 24 ; 8, 51 ; 14, 23),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이 따른다(요한 12, 47-48 ; 마르 8, 38 ; 루가 9, 26). 이것은 예수의 말씀이 예수의 인격을 나타내고 동시에 하느님을 드러낸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런 맥락 속에서 예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 (2고린 6, 7 ; 에페 1, 13 : 골로 1, 5), '구원의 말씀' (사도 13, 26), '생명의 말씀' (1요한 1, 1 ; 필립 2. 16) 등으로 표현된 것이다.
예수의 말씀을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로 분명하게 언급한 것은 요한 복음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14, 6. 14. 17).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 자체로 칭한 것도 요한 복음서의 서언에서만 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만 로고스가 독립적으로 사용되어 절대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선재한 로고스가 '육' 을 취해 사람이 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1, 1-18). 따라서 로고스가 새로운 개념으로 탈바꿈된 셈이다. 즉 로고스는 영원 속에 하느님과 함께한 분으로서 본질적으로 하느님이지만, 위격적으로 구별된다(1, 1-2). 또한 로고스는 하느님과 함께 모든 것을 창조하였을 뿐만 아니라(1, 3), 인간에게 '빛' 과 '생명' 을 준다(1, 4. 9). 바로 이 로고스가 육화하였지만 하느님의 '영광' 을 계속 지니며, 지상에서 인간적인 실존을 취함으로써(1, 14) 인간은 실제로 그 로고스로부터 구원의 은총을 받으며(1, 16), 또한 보지도 못한 하느님을 알게 된다(1, 18).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로고스는 이와 같이 신적인 본질을 갖춘 참 하느님이요, 동시에 지상에 실존한 역사적인 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신학 사상은 사실상 예수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 이요, '그리스도' 라는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 내용이 로고스의 개념으로 선포된 셈이다. '육' 을 취한 로고스는 신적인 영광 속에서, 역사적인 객관성과 인간적인 무상함 내지는 죽음이라는 실재를 취한 하느님 자신인 것이다. 따라서 로고스의 육화는 '육' 안에서 하느님 자신의 현존을 뜻한다. 즉 로고스의 육화는 단순하게 예수의 말씀들 안에서의 하느님의 현재적인 활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인격 안에서 하느님의 역동적인 현존을 가리킨다. 이제 하느님은 육화한 로고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고 당신의 모든 계획과 목적을 이행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 으로써 하느님의 계시자요 인간의 구원자라고 선포되는 것이다.
〔의 의〕 로고스의 성서적 개념에서 중요한 핵심은 로고스라는 낱말 그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는 점, 곧 '하느님의 말씀' 에 있다. 그래서 로고스는 어떤 단순한 개념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선포된 '말씀' 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리고 성서의 로고스는 고전적인 의미에서 볼 수 있는 '이지적인 면' 보다는 오히려 성서적인 맥락에서만 이해 될 수 있는 '역동적인 면' 이 더욱 부각되어 있다. 따라서 로고스는 하느님의 창조, 예언, 계시, 율법, 구원 등의 역동적인 말씀으로 이해된다. 또한 로고스는 인간 세계에서의 하느님의 섭리와 내재 및 신현(神顯)과 관련을 지으면서 그리스도의 선재 내지는 신성과 강생을 설명하는 데에 기여한다. 이와 같이 성서의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연관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役事)하는 하느님의 현존을 선포하고 설명하는 데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달리 말하자면, 하느님의 역동적인 말씀으로서의 로고스는 육화함으로써 한 위격을 지닌 실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완결을 이룬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로고스를 주기도 하지만, 또한 자신이 바로 로고스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이 로고스의 성서적인 의미의 고유한 특성이다. (⇦ 말씀 ; → 요한의 복음서 ; 필로)
※ 참고문헌  A. Debrunner, 《ThWNT》 4, pp. 69~140/ E. Fuchs, 《RGG》 4, pp. 434~440/ G. Ch. Stead, 《TRE》 21, pp. 432~444/ J.Bergmann · Lutzmann · W.H. Schmidt, דָּבָר, 《ThWAT》2, pp. 89~133/B.Jendorff, Der Logosbegrif, Frankfurt, 1976/ H. Langkammer, Zur Herkunftdes Logostitels im Johannesprolog, 《BZNF》 9, pp. 91~94/ R. Schnackenburg, Die Herkunft und Eigenart des joh. Logos-Begriffis, Das Johamesevangelium, Teil 1, Freiburg, 1972, pp. 257~2691 P. Hofrichter, Im Anfang war der Johamessprolog, Regensburg, 1986/ G. Neyrand, Le sens de logos dans le prologue de Jean, 《NRT》 106, 1984, pp. 59~71/ M. Theobald, Die Fleischwerdung des Logos, Münster, 1988/ 이영헌, <로고스의 성서적 개념에 관한 고찰>, 《신학 전망》 103호(1993. 겨울), 광주가톨릭대학전망 편집부, pp. 70~85. 〔李永憲〕
II . 철학에서의 로고스
로고스가 철학적으로 중요성을 갖는 것은 이 단어가 가지는 '모음' 이라는 의미 때문이다. '모음' 이란 사물의 개별성과 지식의 보편성과의 상관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하는데, 이 양자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즉 구체적인 사물은 경험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고 이것은 보편성을 가진 지식을 줄 수 없다. 보편적 지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개별적인 것들에 있는 공통적인 것을 모아서 일반화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일반화의 근거, 즉 개별적인 것들의 밑바닥에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 로고스인데, 이는 항상 철학적 논의의 중심 대상이 되어 왔다.
〔그리스 철학에서의 로고스〕 로고스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의미 있는 말' 을 뜻한다. 로고스는 단순히 서술하는 말(μῦθος)이 아니라, 합리화하며 설명하는 말(λόγος)이다. 다른 한편으로 로고스는 억견(臆見, δόξα)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보편 타당성을 가지는 지식을 가리키며, 또 감각에 의존하는 지각(知覺, αἴσθησις)과 대비되는 이성적 지식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나 로고스는 말에 의해 논리적 형태로 표현될 수 있는 지식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그리스 철학이 인도나 중국의 철학에 비해 가지는 큰 특징 중 하나이다. 그리스 철학은 신화에서 독립된 논리적 · 이성적 사유에 의해 우주 만물의 근원(ἀρχή)과 만물의 생성, 소멸을 넘어서 존재하며 이들의 근거가 되는 것을 탐구하는 일로 시작하였다.
만물은 끊임없이 유전(流轉)한다고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기원전 544~483경)는 끊임없는 우주 전체의 변화 속에서도 그 속에 변화를 규제하는 불변의 원리가 내재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그는 로고스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그는 철학적 용어로 로고스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철학자가 되었다. 또 물(物) 자체에 생명력이 내재한다는 물활론(物活論)적인 경향을 가졌던 그는 로고스를 불〔火〕이라고 보았다. 해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객관적 실재와 사유의 세계 간에, 또 사고와 언어 양자 간에 긴밀한 상관 관계가 있고, 인간은 자신의 사고와 언어가 보편적 원리(logos)와 합치할 수 있는 한에서만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에게서 로고스가 가지는 세 가지 의미, 즉 세계 질서(실재), 질서의 체계적 파악(인식), 그리고 이것의 표현(언어)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와는 반대로 우주에서의 생성과 변화를 부정한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기원전 540~470경)는 극단적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언급되고 사유될 수 있는 것은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도 사유(νόημα), 언어, 실재의 3자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나, 의미 있는 사유와 언어적 표현은 실재하는 것만을 대상으로 하는 점과 이 실재에 대해서는 변화가 부정된다는 점이 다르다. 이런 이론 구성 아래 로고스는 진리의 길(존재)과 오류의 길(비존재) 사이에 있는 제3의 길로서 진리로 향하는 길, 즉 인간의 인식을 말한다. 따라서 로고스는 탐구하고 판단하는 이성적 논증을 뜻한다. 파르메니데스의 극단적 합리론이 무우주론(無宇宙論, acosmismus), 즉 현상 부정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자 이의 해결을 위한 이론으로 엠페도클레스(Empedokles)의 4원소설(四元素說)과 데모크리토스(Demokritos)의 원자론(原子論) 같은 기계론적인 우주관이 대두하였다. 이들은 존재의 가변성(可變性) 자체는 파르메니데스와 같이 부정하였으나, 이들 존재를 세분화하고 한정함으로써(불 · 공기 · 물 · 흙의 4원소, 또는 원자),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공간을 확보하였다. 즉 이들 원소 내지 원자는 생성되거나 소멸하지 않지만 혼합과 분리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파르메니데스의 단일(單一) 존재가 가지는 부동성(不動性)의 어려움에 빠지지 않고 현상계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결합과 분리의 비율을 말한다.
파르메니데스의 현상 부정론에서 벗어나기 위한 다른 하나의 노력은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기원전 499~427경)의 목적론적 세계관이다. 그에 따르면 기계론자가 말하는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인과(因果) 관계는 충분하지 못하며, 목적 개념을 도입해야만 비로소 세계가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형상론적-목적론적(eidetischteleologisch)인 존재의 해명은 논리적이며 역동적인 한 가지 원리를 전제함으로써 가능한데, 이것을 그는 누우스(νοῦς, 정신)라고 불렀다. 사고의 힘이며 동시에 의지의 힘이기도 한 이 '누우스' 는 만물에 있어서 운동의 근원 이며 질서의 원리이다. 이 누우스는 무한하고 자주적이며,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전지하며, 전능하고, 만물을 지배한다. 그러나 아낙사고라스는 이 정신을 '미세하고 순수한 질료' 로 보았기 때문에 물체적인 것과 완전히 구분하지는 못하였다.
플라톤(Platon)에 있어서도 사고와 언어는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데, 사고는 영혼이 자기 자신과 나누는 내적인 대화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이미 진리를 소유하고 있으나 단지 대화를 통해 이를 자각시킬 필요가 있을 뿐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따라서 플라톤에 있어서 모든 대화는 로고스와 이에 대한 저항인 비존재의 싸움이며, 로고스는 진리와 인식을 향한 대화의 지침이다. 또 사고와 언어의 긴밀한 상관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게서도 발견되는데, 인간은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로서 언어와 이성으로서의 로고스를 통해 비로소 하등 동물과 구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인식의 방법으로 불명확한 개념에서 출발하여 점차 인식의 대상에 도달하는 플라톤의 대화적 방법을 비판하고 그 대신 정의(定義)를 출발점으로 한 삼단 논법의 사용을 제창하였다. 실재론자인 그는 이에 더하여 본질의 삼단 논법도 주장하였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로고스는 이론적 · 실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도덕적 행위란 올바른 윤리적 판단(ὀρθὸς λόγος)에 부합하는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로고스를 우주적인 힘, 우주 내의 모든 사건에 내재하는 원리로 파악하면서, 운명 · 섭리 · 신성(神性) 등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절대적 힘이 작용하는 세계에는 악(惡)이 존재할 여지가 없다. 그들에 따르면, 생명체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이성적 능력을 가졌는데, 이 능력은 또 내적인 로고스(로고스의 일부로서의 모든 인간의 혼)와 외적인 로고스(사상의 표현)로 구별될 수 있다. 인간들 사이에 합의가 가능한 것은 보편적 로고스로부터 어떤 인식이 나오는 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하였다. 스토아 학파에서 로고스는 동시에 도덕적 행위의 규범을 뜻한다. 모든 인간은 이미 우주적인 힘인 로고스에 의해 꽉 차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벌써 세계사(世界史)이며, 그래서 인간은 단지 자신을 완전히 '합리화'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합리화는 개별적 로고스를 보편적 · 우주적 로고스에 합치시키는 것을 뜻하며 감정의 동요를 제거하고, 정열을 배제하는 것(ἀπάθεια)을 그 내용으로 한다.
절충주의 학파로 분류되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기원전 20~서기 50경)는 유대교의 영향을 반영하는 로고스 사상을 가졌는데, 그는 로고스를 여러 다른 의미로 사용하였다. 두 번째 신 또는 신의 아들, 신과 세계의 중간자, 계시된 신의 말, 계시된 신의 명령 또는 인간을 위한 율법, 신으로 향하는 도상에서 신도가 머무르는 곳, 신의 모상, 창조 이전 세계의 이데아, 만물을 통괄하고 조화롭게 형성하는 우주의 연결, 혼동 속에 분리와 차등을 가져오는 질서, 하늘 등이 그것이다.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비판하면서도 파르메니데스의 무우주론을 피하고자 한 플로티노스(Plotinos, 205~270경)는 유출설(流出說, emanation)을 핵심으로 하는 범신론적 신비주의 세계관을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로고스는 이성으로부터 나와 세계 혼으로 들어가는데, 이를 통해 후자는 이성적으로 되며, 모든 것은 로고스에 참여함으로써 합리화되고 형성된다.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로고스는 그 밖에 인간 영혼의 본질을 말하는데 이런 뜻으로 로고스는 자아(自我)와 일치하며, 그것은 추론적 사고를 행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로고스는 대상을 차례로 하나씩 인식하는 인간의 고유한 인식 방법으로서, 이성의 낮은 단계를 말한다.
〔의의와 발전〕 그리스 철학에서의 로고스는 상술한 바와 같이 우주적 원리와 인간적 사유의 원칙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진다. 먼저 우주적 원리로서의 로고스는 우주가 삼라 만상의 무질서한 퇴적이 아니라 정리된 전체를 이룬다는 생각으로, 우주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정신에 의해 형성되었고, 이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이념이다. 사고의 원칙으로서의 로고스는 인식론적인 의미뿐 아니라 윤리적 의미로도 중요하다. 인식론적으로 로고스는 인간이 진리에 도달하는 고유의 방법, 즉 순차적 추론 과정을 통한 인식 방법을 말하며, 윤리적으로는 인간 행위의 기준을 형성한다. 그에 따라 모든 비합리적 행위는 극복되거나 이성에 굴복된다.
후에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는 그리스도교의 창조의 로고스와 융화되어 새로운 철학적 사상의 기초로 발전하였는데, 플라톤적 전통과 그리스도교의 결합은 아우구스티노에게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과 그리스도교의 결합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철학은 합일되어 완전한 창조의 로고스가 나타난다.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는 창세기 1장 1절과 요한 복음 1장 1절 이하의 로고스와 서로 일치하고, 여기서 그리스 철학의 어려운 문제가 한꺼번에 풀린다. 또한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는 토마스 주의를 형성한다. 이렇게 형성된 토마스주의는 중세 말기부터 정통 토마스주의, 신토마스주의, 반토마스주의 등 다양한 형태로 이어지고 있고 또한 비판받고 있지만 존재론적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어떤 형태로든 다시 토마스주의에 복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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