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현대 독일의 가톨릭 교회사가. 특히 종교 개혁사가. 1887년 12월 13일 룩셈부르크의 그르펜마허(Grevemmacher)에서 태어나 로마, 프라이부르크, 본 등지에서 공부하였으며 1910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20년에는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3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본에서 《가톨릭 저술집》(Corpus Catholicorum)을 편찬, 발행하는 학회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에르하르트(A. Erhard)와 그르핑(J.Greving) , 그리고 성서신학을 가르쳐 준 틸만(Fritz Tillman)을 알게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사가로서의 로르츠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은 교회 사가인 세바스티안 메르클(W. Sebastian Merkle)이었다. 그의 지도하에 로르츠는 1923년 대학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파사우(Passau)에서 대학 강좌를 맡았고, 1929년에는 브라운스베르크(Braunsberg)의 국립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였고, 1933년에는 뮌스터 대학의 선교사(宣敎史)와 중세 및 근대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을 점령한 영국군으로부터 교수직을 빼앗긴 로르츠는, 트리어에서 교회사 강의를 하다가, 1950년 마인츠에서 서양 종교사 교수로 활동하였다. 또한 프리츠 케른(Fritz Kern, 1884~1950)과 함께 '유럽사 연구소' 를 설립하여 25년 동안 이 연구소의 서양 종교사 부분을 담당했는데, 이 연구소는 로르츠를 세계적 명성을 얻게 하였다. 국가적이고 신앙적인 선입견을 극복하자는 취지로 세운 이 연구소를 통하여 그는, 여러 신앙을 가진 각국의 젊은 학자들을 공동으로 참여하게 하여 역사 신학적 과업을 성취하려 하였다. 평생 가톨릭측의 종교 개혁 연구와 프로테스탄트측 연구와의 학문적 조화를 추구하여 교회 일치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교황청 고위 성직자, 명예 박사, 국가 십자 훈장 등 많은 명예를 얻은 로르츠는, 1975년 2월 21일 룩셈부르크에서 사망하였다. 1987년에는 마인츠에서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역사를 서술하고 역사를 만든 역사가, 요셉 로르츠" 라는 주제 아래 학술 강연이 있었다.
〔사상과 저작〕 로르츠에게 있어서, 역사란 과거 사실을 확인하는 데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로 이어지고 미래를 향해 있으며 따라서 우리에게 하나의 과제를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1932년에 《이념사적인 교회사》(Geschichte der Kirche in ideengeschichtlicher Betrachtung)를 저술했다. 교회사는 그 모든 위반과 모순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살아 있는 전체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여러 방식으로 교회에 도전해 오는 세상과의 만남 안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방어가 아니라 나눔이며, 자위(自衛)가 아니라 모험이요, 안전이 아니라 파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향은 1933년에 저술한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가톨릭적 접근》(Katholischer Zugang zum Nationalsozialisms)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에서 그는 국가 사회주의에 내재하고 있는 이교적인 자연주의의 경향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은총의 힘을 증거할 의무가 있음을 거듭 강조하였다. "진리는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요한 8, 32)는 확신을 가졌던 로르츠는 교회사 이해에 있어서 항상 진리와 올바름을 혼돈하고, 이단처럼 교회에 위험요소로 간주되는 것을 경고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종교 개혁의 원인과 문제를 교계의 제도나 정치적인 문제로서가 아닌 교회 안에서 다루기를 원하였다.
로르츠에 의하면 루터는 교회의 대표자들 즉 교황과 주교들이 요구하는 의무에 응하지 않은 것이 과연 합당한가 하는 데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독일 종교 개혁》(Die Reformation in Deutschland I , 1939)에서 루터에 대해 "루터는 체험에 크게 영향을 받았고 근본적으로 주관주의적이었다"고 비판하였다. 종교 개혁의 전제와 영향은 1917년 이래 로르츠의 특별한 연구 대상이었다.
두 권으로 된 《독일 종교 개혁》에서 그는 루터와 종교 개혁의 상황을 묘사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된 "종교 개혁은 또한 가톨릭적인 원인 안에서 일어난 가톨릭의 사건이었다··· 우리는 이를 가톨릭의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루터의 좋은 점들을 가톨릭 교회로 끌어들이도록 부름을 받았다" (Ⅲ , 242)고도 하였다.
마지막 작품인 《진리 없는 교회 일치?》(Ökumenismus ohne Wahrheit?, 1975)에서 로르츠는 "오늘날 교회 일치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고 있는 왜곡의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또 그는 "말씀과 성사 안에서 진리를 우위에 두고 교회의 화해를 논쟁으로 풀려고 하거나, 혹은 주님이시고 구세주이신 예수의 뜻이라 하며 보편 교회에 편입시키거나 개종을 통해 교회 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 선교의 기본 방법인가”(Ⅳ, 25)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진리관은 '교회 일치' 를 위해 왕성한 활동을 전개할 수 있게 하였고, 학문 연구를 통해 그는 가톨리시즘안에서 루터 상(像)에 대한 변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1957년에 열린 국제 학회는 그의 이러한 연구 저작에 경의를 표하였다.
로르츠는 또한 라로스(Matthias Laros)와 메츠거(Max Josef Metzger)와 함께 독일에서 우나 상타(Una-Sancta) 운동의 개척자이기도 하였다. 이 운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고, 아버지께 기도하였던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생생한 진리 안에서 알고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도록하였다. 그는 "사랑으로 참되이 살며" (에페 4, 15)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로르츠는 신앙의 쇠퇴와 증가되어가는 신학적인 불명료성 속에서 교회 일치의 대화가 더욱 무거운 부담이 되어 감을 알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학적인 협력 속에서 "가톨릭과 대립되는 이들의 내적인 목표와 의도에 대해서 선의와 지혜롭게 대하고 아울러 논박하기보다는 오히려 복음 안에서 교회 분열의 책임을고백하고 참회하면서 서로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느낀 인물이었다.
※ 참고문헌 Rolf Decot · Rainer Vinke Hg., Zum Gedenken an Joseph Lortz. Beitr. zur Rejormationsgesch u. Ökumene Stuttgart, 1989/ 《西洋人名辭典》, 東京, 岩波書店, 1956, p. 1751/ E. Iserloh, 《TRE》 21, pp. 466~468. 〔편찬실〕
로르츠, 요셉 Lortz, Joseph(1887~1975)
글자 크기
4권

로르츠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