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 마

〔라〕Roma · 〔영〕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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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중심지였던 포로 로마노의 유적(왼쪽)과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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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중심지였던 포로 로마노의 유적(왼쪽)과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

이탈리아 공화국의 수도. 라치오(Lazio) 지방에 속하는 면적 1,507.60k㎡의 도시. 티레노(Tirreno) 해로부터 25km 떨어져 있는 평원으로, 평균 해발이 20m 정도이나 곳에 따라 139m 되는 곳도 있다. 테베레(Tevere) 강을 중심으로 주요 도시의 거점들이 발달하였는데, 로마시는 기원전 8세기에 이 강을 끼고 형성된 도시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고대 유물과 그리스도교 유물, 그리고 르네상스와 바로크 예술이 있는 도시로, 고고학적으로나 예술 · 문화 면에서 가장 으뜸되는 도시 중의 하나이다. 또 현재는 이탈리아 정부의 정치 · 행정 · 경제의 중심지로, 정부의 주요 기관이 있고 세계 각국의 대사관과 교황청 대사관, 국제 식량 기구(FAO) 등이 주재하고 있다. 1년에 1천만 명 이상이 다녀가는 세계 최대의 관광 도시이기도 하다.
I . 고대 · 이교적 로마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로마의 기원은 기원전 9세기 말엽부터 기원전 7세기 초까지 팔라티노(Palatinum) 언덕에서 살았던 목동들과 농부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는 기원전 754~753년경 라틴족, 사비니(Sabim)족, 그리고 에트루리아(Etruria)족의 요소들이 최초로 융화되는 시기로 잡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에 세워졌다고 하여, 고대 로마인은 이 날을 큰 축제로 정해 기념하였다. 로마(Roma)라는 명칭의 유래는 두 가지로 해석되는데 첫 번째는 강(flumen)의 도시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는 전설적인 왕 로물루스(Romulus)나 루마(Ruma)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다.
현재 서양 문화의 기반이 되고 있는 로마 문화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로마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로마 역사는 왕정 시대, 공화정 시대, 로마제국 시대로 구분된다. 로마 발생의 시초는 일곱 왕의 전설 시대로부터이며, 전설에 의하면 에네아스(Aeneas)의 후손으로부터 발생하였다고 한다.
전승에 의하면 로물루스와 레무스(Remus) 형제는 레아 실비아(Rea Silvia)와 마르스(Mars) 신의 아들이었지만, 버려져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다. 이들은 성장한 뒤 팔라티노 언덕에 도시를 세웠는데 둘 사이에 알력이 생겨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살해하고 로마의 왕이 되었다고한다. 로물루스 이후 라틴족의 왕으로는 누마 폼필리오 (Numa Pompilio), 툴로 오스틸리오(Tullo Ostilio), 안코 마르지오(Anco Marzio)가 기원전 715~614년까지 로마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라틴족은 에트루리아인에게 왕좌를 내주게 되었고, 이어 타르귀니오(Tarquinio) 가문이 계속 왕좌를 계승하였다(Taquinio Prisco, Servio Tullio, Tarquinio il Superbo). 마지막 왕은 기원전 509년에 로마인들에 의해 추방당하였다. 이로써 왕정 시대는 끝나고 공화정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기원전 509년에 세워진 로마 공화국의 정치 형태는 귀족 정치 형태로, 최고의 권력은 원로원으로부터 나오게 되며 2명의 행정(사법)관과 집정관을 원로원에서 매년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후 귀족 정치에 반기를 들고 나타난 평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대표자를 원로원이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였다. 이로 인해 기원전 445년에 귀족과 평민 간의 혼인 불가 제도가 폐지되었고, 평민도 실질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기원전 366년에는 집정관까지 될 수 있는 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이 통과되기 전까지 귀족과 평민 간의 투쟁은 거의 20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귀족과 평민으로 구성된 새로운 계급이 대두되면서 로마의 세력은 강화되어갔으며, 라치오 지방 전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항상 에트루리아족 · 사비니족 볼쉬(Volsci)족들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기원전 390년에 로마는 갈리(Galil)족의 침략으로 황폐화되었으나 즉시 복구되었으며, 기원전 271년에는 이탈리아 연방 국가를 구축하게되었다.
카르타고(Cartago)와의 기원전 264년 이후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으로 로마의 영토는 지중해 연안과 스페인, 북부 아프리카까지 확대되었다. 기원전 140년에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정복했으며, 기원전 64년에는 시리아를, 기원전 63년에는 팔레스티나를 정복했다. 로마 영토 확장 전쟁에 공헌한 이들은 폼페이우스(Pompeius), 체사르(J.Caesar) , 그리고 체사르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Octavinanus)였는데,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함으로써 로마 최대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사실 옥타비아누스 때부터 공화정 시대는 실질적 의미를 잃고있었으며, 이때부터 로마 제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27년 원로원으로부터 받은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명칭으로 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 시대의 원로원 · 집정관 · 호민관 제도를 유지하고 국방과 행정을 다지는 한편 예술과 학문 분야를 발전시키는 등 로마 제국의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의 통치 이후 200년 동안 계속된 로마 번영의 시기를 '로마의 평화' (Pax Romana)라고 부른다. 제국의 확장과 번영은 그의 아들인 티베리우스(Tiberius, 14~37)와 후계 황제인 클라우디우스(Caudius, 41~54)에 의해 계속되어 갔다. 그러나 네로(Nero) 황제처럼 로마에 정치적 혼란을 초래한 경우도 있었다.
플라비아누스(Flavianus) 가문의 황제들(Vespasianus, Titus, Domitianus)은 절대 군주제 노선을 따르면서 여러 집정관들을 임명함으로써 원로원이 로마 제국의 주요 역할을 하는 기관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다키아(지금의 루마니아)의 대부분의 지역들을 정복한 트라야누스(Trajanus, 98~117) 황제 때, 로마 제국은 북쪽으로는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와 아시리아,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를 포함하는 로마 제국 최대의 영토를 이루게 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Hadrianus, 117~138) 황제는 제국의 통합을 유지하면서 평화 정치를 폈으며, 그 후에 철학자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1~180)가 등극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 콤모두스(Commodus, 180~192)가 사망하자 로마 제국은 후계자에 대한 새로운 위기를 맞게 되어 192년부터 211년까지 황제가 3명이나 바뀌었다. 하지만 세베로(Severo) 가문 출신들이 황제가 된 후에는 원로원을 재정비하고 군사력을 강화시켰으며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땅까지 영역을 넓혔다. 세베로 가문의 마지막 황제 알렉산더(Alexander, 222~235)는 평화를 수호하는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군인들의 반란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후 로마 제국은 외부적으로는 게르만족의 공격에 의해 타격을 받았고, 내부적으로는 군인 황제 시대라고 알려진 권력의 불안정으로 인해 3세기에 이르러 제국이 쇠퇴하였다. 발레리아누스(Valeianus, 253~260) 황제는 페르시아인들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또한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us, 270~275) 황제는 다키아 지역을 포기해야 하였으며(271), 로마시를 새 성벽으로 둘러쌓았다. 디오클레시아누스(Diocletianus, 284~305) 황제에 의해 로마 제국이 부흥하였는데, 그는 제국을 보다 잘 방어하기 위해 로마 제국을 둘로 나누어 자신은 동로마의 황제가 되고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286~305)로 하여금 서로마의 황제가 되게 하였다. 306년에 서로마 황제가 된 콘스탄틴 대제는 313년에 동로마 황제 루치아누스(Lucians)와 함께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선포하였다. 이때부터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가 종교로서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또 콘스탄틴 대제는 324년에 동로마 황제를 무너뜨리고 수 도를 비잔시움(Byzantium)으로 옮긴 후 330년에 콘스탄티노플(Costantinopolis)이라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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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 로마 교회의 기원
로마 교회는 '로마' 와 '교회' 의 합성어로서 자의적(字義的)으로는 로마의 지역 교회를 말한다. 그러나 로마가 정치의 중심인 수도였기에 이미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교회사적으로는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순교지라는 특수한 배경 때문에 필연적으로 베드로의 수위권과 함께 그 후계자들인 교황들도 연관된다. 말하자면 로마 교회는 로마라는 정치적 의미와 교회라는 구원사적 신비의 복합체로서, 로마라는 지역을 넘어선 보편 교회의 대명사 또는 압축으로도 이해된다. 그렇기에 초기 교회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로마 교회는 일치의 기준이 되었고 가시적 정점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자체로 신비체이기에 로마라는 정치, 역사, 지역의 특수 상황이 때로는 교회를 훼손하고 그 일방적 지역 중심을 통해 제도화, 관료화되는 한계도 지니고 있다.
〔성서적 배경〕 이스라엘 역사에서 로마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마카베오 상 8장이다. 기원전 161년경 마카베오 형제들이 시리아의 침공에 맞서 싸울 때 로마 제국의 위력을 알고 로마에 도움을 청하며 우호 조약을 맺었다. 그 후 기원전 63년에 폼페이우스(Pompeius)가 팔레스티나를 정복하여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사실 예수는 로마의 통치하에서 탄생하였고(루가 2장), 로마 총독인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루가 23장). 로마가 직접 복음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로마 황제들의 지배는 분명하게 언급되고 암시되어 있다(마르 12, 13-17 ; 마태 22, 15-22 ; 루가 20, 20-26 ; 요한 11, 48). 또한 49년에는 클라우디우스의 칙령으로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되었고 그중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는 고린토에서 바오로를 만나게 되었다(사도 18, 2).
〔로마의 첫 그리스도인〕 로마에 첫 그리스도인이 언제 정착하였고 어떻게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바오로의 로마 서간을 근거로 적어도 그 집필 연대인 58년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로마에 존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오로는 59~61년 사이에 로마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그는 로마 시외의 아피오 광장과 트레스 타베르네까지 마중을 나온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기도 하였다(사도 28, 15). 바오로는 약 2년 간 로마에 머물면서 비록 감시 상태였지만 방문객들을 맞을 수 있었고 예수와 복음에 대해 그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사도 28, 17 이하). 아마 바오로는 두 번째로 트로아스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왔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2디모 1, 16-17 ; 4, 13).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로마 도착 사실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글레멘스의 <고린토 서간>과 외경인 <베드로 복음>과 <베드로 행전>이 베드로의 로마 체류 사실과 함께 그의 순교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따라서 초기 교회의 전승을 종합할 때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가 네로 박해 때에 로마에서 함께 순교하였음은 근거 있는 주장이다. 타치투스(Tacitus)는 순교의 해를 64년으로(《연대기》 15), 에우세비오는 67년(《교회사) 2. 25, 1-8)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의 발상지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로마가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은 정치 상황 등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다. 우선 유대교의 처지에서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분파로 이해되었고,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 문제로 유대교와 늘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실 사도 행전에서 확인되듯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집회 장소는 유대인의 성전과 회당이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다음에는 예루살렘이 더 이상 중심지 역할을 못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이 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집중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주역인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로마에서의 순교는 로마 교회의 굳건한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로마 주교, 로마 교회의 중요한 역할〕 로마 주교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사실은 고린토 교회의 내부 분쟁에 글레멘스가 직접 개입하였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글레멘스는 <고린토 서간>을 통해 분쟁 이전의 아름답고 모범적이었던 고린토 공동체를 예찬하면서 분열된 모습을 지적하였다. 특히 질서와 순종, 그리고 화목을 강조하면서 구약을 기초로 공동체 내의 위계 질서를 상기시키고 있다. 또한 자신과 로마 공동체가 고린토 공동체에 대하여 마치 스승과 같이 개입해야 할 책무와 권리가 있음을 구체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글레멘스는 또한 "로마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의 교회"가 발신자임을 밝히며 1인칭 복수로 자신을 나타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도 인근 지역 교회에 대하여 위계 질서와 일치를 강조하였지만 그의 <로마 서간>에서는 이단에 대한 경고나 가르침을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서간 서두에서 로마 교회를 가리켜 "로마인들의 지역에서 주도하는 교회" 그리고 "합당하고 순결한, 사랑을 주도하는 교회" 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서 '주도하다' 와 '사랑' 이란 표현은 지역 교회 내에서 행사되는 구체적인 권위와, 사랑과 실천이 앞선 모범성과 보편성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된다. 그 외에 "여러분은 다른 이들을 가르쳤습니다"라는 표현은 다른 서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로마 교회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가르침을 받은 권위 있는 공동체이기에 결과적으로 자신은 로마 교회에 대해 가르치거나 권고할 자격이 없다는 뜻을 내포하며, 비록 간접적이지만 그 우선성을 말하고 있다.
에우세비오와 예로니모에 의하면 로마의 8대 주교인 텔레스포로(Telephons, 125~138)가 부활 전 단식 규정과 미사 전례 규범에 있어서 지도자적 역할을 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또 《헤르마스의 목자》를 쓴 저자의 형인 비오 1세(142~154/155?) 역시 144년에 마르치온(Marcion) 등 이원론의 그노시스주의 사상을 단죄함으로써 로마는 더욱 분명히 그리스도교 문화의 중심과 정통 교회의 보루가 되었다. 사실 당시 지역 공동체 지도자들은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 공동체와의 일치를 확인하고 보장받곤 하였다. 아베르치우스 비문과 헤제시푸스 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더구나 마르치온, 발렌티누스 등 그노시스주의자들과 이단 학파들도 그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로마의 확인을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회도 많은 부끄러움을 안고 있었다. 《헤르마스의 목자》에서 지적되고 있듯이 교회 공동체 안에는 의인과 죄인, 성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성직자들과 오만불손하며 야욕에 찬 사제들, 더구나 과부와 고아들을 위한 희사금을 횡령하는 부제들도 있었다. 순교자가 있는가 하면 배교자가 있고 뉘우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악습에 젖은 무리도 있고, 열교인이 있는가 하면 주저와 망설임의, 용기와 확신이 부족한 사람도 있고, 선의의 무지한 신앙인이 있는가 하면 위선과 기만에 찬 악한 무리도 있었다. 때문에 로마 교회는 또한 자기 고발과 양심 성찰을 통해 끊임없이 정화되고 원래의 소명으로 되돌아가려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65년에 순교한 유스티노(100~165)는 두 차례 로마를 방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로마에 학습원(schola)을 세워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152년경에는 《제1 호교론》을 저술하여 피우스(Pius) 황제와 로마 원로원에 제출하였다.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포는 아니체토(154/155~166?) 로마 주교를 방문하였고 리용의 이레네오는 엘레우테로(174~189?)를 방문하여 몬타누스파에 대한 엄격한 반대 조치를 완화해 줄 것을 직언하였다. 또한 부활 축일의 날짜 문제로 로마의 주교 빅톨 1세(189~198/199?)가 소아시아의 전통적 유대 관습을 단죄하려 할 때 이레네오는 그에게 여러 차례 서한을 보내 불목을 청산하고 일치와 화해를 이루도록 요청한 일도 있다. 그노시스주의의 정체를 폭로하면서 정통 교리를 수호하였던 이레네오는 당시 주교 인명록을 수록하면서 그중 예범으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창설하고 조직한 그리고 사도들로부터 전승된 로마 교회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이단 논박》Ⅲ, 3, 2). 더욱 중요한 것은 원문인 그리스본은 유실되었지만 라틴어 역본에는 "모든 교회는 이 교회가지니는 특수한 권위로 인하여 마땅히 이 교회와 일치해야 할 것이다. 모든 교회는 전세계에 있는 신자들을 말하며 교회 안에서 신자들은 사도들로부터 이어 온 전승을 잘 보존해왔던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권위로 번역된 프린치팔리타스' (principalitas)는 권위라는 의미 외에도 '권한, 보편, 주도, 첫째' 등의 뜻으로 '뛰어난 그 무엇' 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가톨릭의 모든 학자들은 로마 교회의 수위권으로 이해하고 있다.

Ⅲ. 교황좌로서, 그리스도교 세계의 중심지로서의 로마
로마는 제국의 수도로서 이미 특혜의 도시였다. 그래서 교회 또한 비록 심한 박해 속에서도 그 특혜를 자연스럽게 누리게 되었다. 3세기 중엽 박해가 잠시 멈추고 비교적 오랜 평화가 지속될 때 그리스도인들은 나름대로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고 갈리스도 1세(217~222) 교황 때에는 상당한 교회 재산과 묘지 등도 관리하게 되었다. 더구나 313년 콘스탄틴 대제(306~337)의 밀라노 관용령 이후에는 더욱 많은 자유를 얻어 수도원을 비롯한 종교 단체들의 역할이 커지고 큰 힘을 발휘하였다. 콘스탄틴 대제는 모후인 헬레나의 영향으로 라테란 성당, 예루살렘의 십자가 성당, 베드로 성당, 그리고 로마 시외에 성바오로 성당 등을 건립하여 로마 교회에 봉헌하였으며 로마 주교에게 큰 특
혜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틴 대제는 원로원 의원 등 기득권 세력의 반감을 사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하면서 폭 넓은 융화 정책을 펼쳤다. 수많은 입교자들로 교회는 더욱 많은 성당을 짓게 되고 날로 성장을 거듭하였다. 또한 아리우스 논쟁으로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가 열렸고, 이에 대한 후속 조치와 교회의 확인 등, 이 모든 것의 중심이 로마였기에 로마의 역할은 더욱 두드러졌으며, 여러 차례 로마에서 교회 회의를 갖게 되었다. 더구나 이제껏 신학적으로 뒤졌던 로마가 라틴 교회의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황제의 보장과 함께 훌륭한 학자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예로니모, 그레고리오 1세 교황 등 이른바 라틴 교회의 4대 교부의 눈부신 활약과 함께 다마소 교황(304~384) 때에 이룩된 라틴어 성서 번역은 로마 교회의 신심에 큰 활력을 불어넣기도 하였다. 당시는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지상에 실현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감격하였던 교회의 절정기였다.
〔구심점이 된 교황] 로마 교회의 중요성은 로마의 주교인 교황과 직결된다. 콘스탄틴 대제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뒤(330) 로마와 서방의 위치가 다소 약화되기는 하였지만, 그와 함께 오히려 교황의 자립성이 확인되면서 교황의 종교적 권위가 더욱 두드러지게 되는 반사 이익도 얻게 되었다. 343년의 사르디카(Sardica) 규정은 로마 주교의 전통적 위치를 재확인하여 교리는 물론 법 제도 면에서도 로마 교회가 최후의 결정 기구로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각 지역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교황은 정통 교리를 확인하고 미묘한 신학적 내용에 대해서도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
시리치오(384~39) 교황은 규범과 규정을 통해, 인노천시오 1세(402~417) 교황은 펠라지우스주의(Pelgianismus)를 단죄함으로써, 철레스티노 1세(422~432) 교황은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단죄하여 은총론의 체계를 이룩하였고, 대교황 레오 1세(440~461)는 에우티케스(Eutyches)파를 단죄하여 그 권위를 드러냈다. 5세기에 로마는 가끔 갈리아, 스페인, 아프리카 그리고 동방 여러 지역 교회의 일들을 조정하였다. 물론 로마의 정치적 위기로 교회도 함께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아틸라와 훈족의 침입(452), 가이세릭과 반달족의 침입(455)으로 이탈리아는 쇠퇴하고 로마의 행정은 마비되어 교회도 함께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은 백성들을 위해 물심 양면에 서 그 중심이 되었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3~4세기에 부제들의 일은 더욱더 많아졌다. 과부 · 고아 · 병자 · 노인들을 보살펴야 했고 5~6세기에는 시칠리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전역의 재산을 관리하게 되었다. 대교황 레오 1세는 교황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여러 법률 장치도 마련하였다. 또한 부활절에서 성탄 축일에 이르는 교회의 전례 주기를 설정하고, 주교 · 성직자 · 일반 신자들과 함께 사순절 순회 성당에서 직접 미사를 봉헌하며 성인 공경 등 특별한 지향의 기도 모임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그리스도교 경 신례의 기틀을 형성하고 전례의 체계화를 꾀하였다. 반면 사람들에 의해 많은 신전들이 폐허화되고 고트족의 침입과 442년의 엄청난 지진 피해로 로마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로마 총독들은 콘스탄틴 욕탕을 수리하고 에스퀼리노 광장을 복원하였으며, 특히 동고트 왕인 테도리쿠스(Thedoricus, 475~526)는 로마의 유적들을 보호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옛 문화가 보존되었고, 아름답게 꾸미려는 노력으로 로마는 새롭게 탄생되었다.
〔침략 위기에서의 교황의 역할〕 410년 로마는 서고트족의 알라릭 왕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어 451년에는 훈족들이 침입해 왔으나, 서방 황제들은 속수 무책이었다. 이에 대교황 레오 1세는 직접 훈족의 아틸라(Atila) 왕을 마중 나가 로마를 구출하였다(452).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약탈할 때에도 레오 1세는 가이세릭으로부터 로마를 구할 수 있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였지만(476) 로마 교회의 위치는 레오 1세에 의해 확고해졌다.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는 고트족에 대한 반격전을 통해(535~558) 이탈리아를 다시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568년에는 스칸디나비아의 롬바르디인들이 침입하여 롬바르디 왕국을 세웠다(568~774). 로마와 이탈리아의 처지는 비참하였다. 사실 당시의 이탈리아는 프랑스 남부의 툴루즈를 수도로 하는 서고트 왕국(418~509), 스페인의 서고트 왕국,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429~534), 론느 지방의 부르군드 왕국 등과 아리우스파, 게르만 왕국 등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기 때문에 로마가 기댈 곳은 오로지 동방뿐이었지만 도움은 불가능하였다.
침략의 폐허 속에서 교황은 백성들의 보호자요 부양자 였으며 정치적 협상의 지도자였다. 교황들은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교회의 지방 소유지로부터 곡식과 식량을 조달하는 등 옛 황제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때의 그리스도교는 로마인들 마음속에서 사실상의 조국이었고 유일한 지도 체제였다. 때문에 종교를 기초로 한 새로운 로마 제국이었고 교황은 사실상 또 하나의 황제가 된 것이다.
로마는 롬바르디족과 북방 민족들의 잇단 침략과 아랍인들의 위협으로 어려운 식량난을 겪었다. 그러나 교황 요한 5세(685~686)와 코논(686~687) 등은 시칠리아 등 남부 지방에서 농사를 지어 유지하였지만, 교황 그레고리오 3세(731~741) 때에는 성화상 논쟁으로 동로마 교회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식량 공급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자카리아(741~752) 교황은 라시움(Latium)과 로마 근교의 캄파냐에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한편 아가토 (678~681), 레오 2세(682~683) 교황 등은 수도원들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돕고 순례객들을 위한 숙소도 건설하여 삭슨족, 프리지아인, 프랑크족, 롬바르디인 등을 위한 교화를 시도하고 그들을 위해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때 많은 성당들이 건립되었다. 로마의 지리를 표시한 순례 지도도 작성되었고, 특히 진료 봉사를 위한 성당부속 집회소가 18곳이나 건립되었다. 당시 성당은 옛 로마 건물이나 그 인접한 곳 등 비교적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았고, 옛 로마 시장은 곡물 창고 등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교황 펠라지오 2세(579~590)와 호노리오 1세(625~638) 때에는 순교자 기념 성당 등이 건립되기도하였다.
〔카롤링거 시기〕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반달족과 동고트족을 정복하여 잠시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아랍인들의 지중해권 장악으로 무함마드와 그의 후계자들을 통해 급성장한 이슬람 국가의 위력은 다마스커스 · 예루살렘을 정복하였으며, 이어 페르시아 ·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남부까지도 점령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이에 맞서 대항하느라고 로마에 도움을 줄 처지가 못 되었다. 또한 서방에서는 롬바르디족이 이탈리아 북부에 왕국을 세운 뒤 로마까지 포위하여 세력을 확장해 왔다. 로마는 위기 상황에 처하였다. 이때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가 롬바르디족과 맞서 대화와 설득으로 로마를 지켰고 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긴장은 계속되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3세가 롬바르디족을 쫓아내기 위해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청하였으나 이 두 왕국은 동맹 관계에 있었던 터라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프랑크 내에 왕권 승계로 문제가 생겼다. 자카리아 교황은 피핀(688~754)을 편들어 프랑크 왕이 되게 하였다. 이로써 시작된 프랑크 왕국과 로마와의 친밀한 관계는 교황권의 중세적 틀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동로마에 의존해 왔던 권력 구조가 완전히 서구로 바뀌었고 이때부터 교회 문화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피핀은 롬바르디 왕국의 일부인 이탈리아 중부를 교황에게 기증하였고 이로 인해 교황령이 생겨났다. 피핀을 승계한 카알(763~814)은 프랑크 왕국을 확장하여 교황과 로마 교회와 동맹적 관계에서 교회의 보호를 받으며 유럽 전역을 거의 장악해 나갈 수 있었다. 카알은 신정(神政) 정치를 꾀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제국의 확장은 곧 그리스도교의 확장이었다. 카알은 제국을 통치하며 동시에 교회의 내적 개혁을 꾀해 결과적으로는 교회의 내부 생활에까지 간섭하게 되었다. 그는 구약의 다윗을 모범으로 삼아 자신을 왕과 사제(Rex et sacerdos)로 부르도록 하였고, 자신을 또한 그리스도교의 정통적 수호자로 생각하였다. 나아가 자신을 프랑크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생각하여 주교와 수도원장 임명에 직접 간여하였고 성직자들에게 국가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사목과 국가 통치에 혼선을 가져왔다. 그렇지만 카알은 명실공히 로마 제국의 황제(imperator)는 아니었다. 이에 그는 동로마 제국과는 결혼 책략을 통해, 로마 교황과는 지속적 접촉을 통해 황제 칭호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성화상 공경 문제로 동서 교회가 대립되었다가 787년 제2차 니체아 공의회를 통해 성화상 문제가 결정적으로 해결되었다. 반면 로마는 동로마 제국 내의 황제 승계 갈등으로 동로마 제국과 결별하였다. 이 사건은 동로마 제국의 여황제 이레네(Irene, 797~802)가 아들 콘스탄틴 4세의 지배권을 차지하고자 그를 수감하였고, 마침내 797년 그의 눈까지 멀게 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 사건으로 교황 레오 3세는 전례서에서 동로마 제국 황제의 이름을 삭제하였고, 이에 카알은 반사적 이익을 얻게 되었다. 즉 800년 예수 성탄축일에 레오 3세에 의해 그는 황제로 대관되었다. 이때 부터 로마 교회는 카알 황제의 비호를 받으며 콘스탄틴 대제 초기에 누렸던 번영을 다시 되찾게 되었지만, 동시에 권력에 예속된 교회이기도 하였다.
〔교회의 암흑 시기〕 교황 레오 4세(847~855), 니콜라오 1세(858~867) 때 잠시 자립했던 로마 교회는 그 후 침체기로 들어갔다. 니콜라오 1세는 속권으로부터 교회의 자립권을 확립한 교황이었다. 그는 후속 교황들,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와 인노첸시오 3세(1198~1216)의 기초가 된 셈이다. 그러나 니콜라오 1세의 사망 이후 교황직은 몰락하였다. 사실 카롤링거 왕조의 멸망과 함께 황제의 보장을 상실한 로마는 로마 귀족 가문의 분쟁에 휘말리면서 그 보편성을 상실하였다. 따라서 카롤링거 왕조 말부터 그레고리오 개혁 시초(880~1046)를 교회의 암흑기라 부른다. 이 기간 동안 48명의 교황 중 몇몇 교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부끄러운 삶을 살았다. 사실 로마 교회는 보편성과 윤리적 도덕력도 상실하고 지방 교회의 수준이 되었다. 오토 대제(936~973) 때에 프랑크 왕국은 회복세를 보였다. 이와 함께 교황직도 지방 권력의 수중에서 벗어나 보편성을 회복하였다. 오토는 국가 통일과 안정을 위하여 교회를 나름대로 이용하였다. 주교, 수도자들에게 온갖 특권을 주며 재산을 소유함으로써 제국에 충실한 교회를 만들었다. 반면 교회는 평화롭고 안정된 가운데 뜻한 바를 실현할 수 있고 모든 면에 있어서 그리스도교화가 가능하였다. 독일 전역에서 훌륭한 성직자들이 배출되었고 종교 신심과 예술 면에 있어서도 전성기를 맞았다. 교회는 부귀 영화, 화려함, 영광, 바로 그 자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왕들은 성직자에 대한 임명권을 발휘하여 교회 전체를 간섭하게 되었다. 오토의 교회관은 자신을 교황직의 수호자로 생각하였고 황제직을 준성사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963년 12월 4일 요한 12세(955~963) 교황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도록 하였으며 황제의 동의 없이는 교황도 선출할 수 없다는 선서까지 받아 냈다. 말하자면 오토 대제는 교황 위에 군림한 황제였다.
〔그레고리오 개혁과 교권 회복〕 10세기경에는 클뤼니(Cluny) 수도원을 중심으로 교회 내의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권력의 통제로 속화된 교회의 정화, 철저한 쇄신, 외부 권력으로부터의 자유, 교회의 내면화와 깊은 신심을 지향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개혁 운동은 복음에의 충실이며 교회에 대한 각성 운동이었다. 수도원 개혁 운동은 황제에 예속된 교회와 교황직을 해방하는 정신적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1073~1085) 교황과 젊은 왕 하인리히 4세(1056~1106)의 대결은 유명하다. 하인리히 4세는 여전히 오토 제국의 왕으로서 신정 정치의 사제요, 왕으로 자처하였다. 이러한 하인리히 4세를 파문 조처로 굴복케한 그레고리오 7세의 행동은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물론 그레고리오 7세 이후에도 제국과 교회 사이의 분쟁은 계속되었다. 어쨌든 1100년에는 추기경들이 직접 교황을 선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 즉 적발제(赤髮帝) 바르바롯사(Barbarossa, 1152~1190)는 다시 황제 지배 이념을 주장하여 알렉산델 3세(1159~1181) 교황과 대결하였다. 로마 교회는 그 이후에 황제 쪽에서 내세운 4명의 대립 교황 때문에 20년 동안 어려웠으나 교황 선출에 있어서 황제의 간섭은 배제되고 교황권은 확립되었다.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권은 지역 교구에 대한 감독과 함께 교황 사절 제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교황은 유럽 전역의 교구 주교들과 수도원에 대해 최고 심판관이 되었다. 로마 교회의 수위성이 확인되면서 11세기부터 대주교들은 팔리움(Pallium)을 받기 위해 로마로 왔고 12세기부터는 특별한 순명 선서를 하고, 4년마다 로마를 방문해야 하는 교황청 정기 방문(Ad Limina)제도도 마련되었다. 로마 교회의 수위성은 교회의 자립성과 함께 청빈 운동, 십자군 운동(1209),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를 통해 절정을 이루었으며 국가에 대한 교회의 우월과 평신도에 대한 성직자들의 우월주의인 이원론 등이 교회 문화 전반에 스며들어 초국가주의를 이룩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는 교권 회복과 함께 황제권을 교황권에 예속시켰다. 이는 교회의 보편성 실현이라는 면에서는 긍정적이었지만 신자들을 배제한 철저한 성직자 중심의 교계 제도의 우월이라는 부정적 결과도 가져왔다.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교황 선출에 3분의 2 다수결의 원칙이 정해졌다. 인노첸시오 3세(1198~1216) 교황은 다시 교황권을 드높여 유럽 전역을 주도하게 되었다. 1274년에 그레고리오 10세(1271~1276)는 콘클라베(conclave) 제도를 설정하여 오늘날까지 지속되고있다. 따라서 클뤼니 수도회의 개혁 운동에서 출발한 교회의 자립 운동은 그레고리오 7세를 통해 구체적 실현되었고 교회 안팎의 개혁과 함께 교황권의 독자성과 우선권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비뇽의 교황들(1309~1378)〕 아비뇽 사건은 교회사에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프랑스 왕권의 강화와 프랑스 추기경수의 증가로 프랑스 교황이 선출되었다. 글레멘스 5세(1305~1314) 교황은 리용에서 착좌식을 거행하고 1309년에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겼다. 로마 교회는 이제 프랑스 교회, 아비뇽의 교회가 된 것이다. 70년 동안의 이 단절은 교회의 큰 부끄러움이지만 한편 로마를 떠나서도 교회가 건재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역설적인 은총의 작용이기도 하다. 어쨌든 교황들은 아비농 근처의 대지를 매입하여 교황령을 이루었지만 결국 프랑스의 통제를 받아야만 했다. 아비농 사건 이후 대립 교황들의 문제가 생겨났으며 그 해결을 위해 교황에 대한 공의회의 우위라는 의식이 생겨났고 때문에 서구의 대이교 사건(1378~1417)이 발생하게 되었다.
교황 글레멘스 5세는 필립 왕의 끈질긴 압력으로 선임자 보니파시오 8세(1294~1303)를 단죄하고, 성전 기사 수도회를 해산하여 회원들을 체포하고 많은 이들을 화형에 처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도록 했다. 요한 22세(1316~1334)는 한층 더 프랑스에 종속되어 1323년에 독일 황제 루드비히(1314~1347)를 일방적으로 정직(停職)시켰다가 루드비히에 의해 1324년에 국가 회의에 고소당하였다. 이에 황제는 학자들을 통해 교계 제도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교황 수위권의 신적기원을 부정하고 교회 내의 최상권은 신앙 공동체이고 신자에 대한 성직자의 우월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즉 교황, 주교, 신부는 모두 동등하며 다만 신자 공동체(congregatio fidelium)로부터 직무를 위탁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교황권을 현실적으로 상대화했으며 공의회에 예속시켜 공의회 우위설의 논리를 정착시켰다.
아비뇽은 교황청 유지를 위해 부정 부패와 성직 매매같은 무리한 재정 조달 방법을 강구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회복된 교황의 독자성과 신성성은 모두 상실된 채 교황직은 한낱 행정 기구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로마계 교황들과 아비농계 교황들이 병존하는 대립 상태였으니 혼란 그 자체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394년에 파리 대학은 양보나 합의, 또는 공의회를 통한 해결을 제안하였다. 이에 일치와 화해를 위한 공의회가 1414년 콘스탄츠에서 열렸으나 요한 23세는 자기 뜻에 어긋나자 약속을 위반하고 도주하였다. 1415년에는 그레고리오 12세가 자진 퇴위하였고 1417년 11월 11일에 마르티노 5세(1417~1431)가 새로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다음해인 1418년에 공의회는 폐회되었다. 교황과 공의회 우위설 사이의 갈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우제니오 4세(1431~1447)는 1431년에 바젤 공의회를 개최하였으나 논란 끝에 1437년에 회의 장소를 페라라로 옮겼고 1439년에는 다시 피렌체로 장소를 바꾸어 공의회 우위설에 종지부를 찍고 교황 수위권을 재확립하였다.
〔문예 부흥기〕 15~16세기의 로마는 황금기 문화의 중심지였다. 마르티노 5세 교황은 마솔리노, 마사치오, 젠탈레 다 파브리아노 등 당대의 유명한 미술가들과 조각가들을 중심으로 많은 성당들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니콜라오 5세(1447~1455) 때에 안젤리코 수사는 바티칸의 라우렌시오 성당을 장식하였다. 교황은 아울러 1450년을 성년(聖年)으로 선포하고 시대적 부도덕성을 꾸짖고 교회의 내적 쇄신을 꾀하였다. 또한 그리스 · 라틴 고전 연구를 강조하였는데, 이 문화 정책은 후임자들인 비오 2세(1458~1464)부터 레오 10세(1513~1521)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많은 외국인들이 교황청에서 일하게되어 국제적 시야가 넓어지고 특히 이슬람 세계에 대한새로운 대응 방법도 연구되었다. 레오 10세는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1517)를 통해 칙서를 반포하여 추기경들의 로마 거주, 주교들의 지역 내 거주를 강조하고 성직매매와 축첩 생활을 엄하게 단죄하였다. 이 규정들이 잘 준수되었다면 종교 개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수주의와 가문 이기주의 등이 할거하여 추기경 · 주교 임명에 부당하게 간섭했다. 메디치(Medici), 스파노키(Spannochi) 키지(Chigi) 등 권력 가문들은 교황의 재정 후원자들이었기에 교황청과 교황 사절직들을 독점하여 교회를 부패하게 하였다. 이들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 성당을 장식하던 많은 예술인들과 그 가족들이 로마에 거주하게 되어 큰 성황을 이루었다. 반면 십자가의길, 예수의 오상(五傷) 공경 등이 예술과 결합되어 독특한 대중 신심을 이룩하였으며, 수도회 제3회(第三會) 운동을 통해 엄한 극기와 보속, 기도와 성사 생활, 자선과 애덕 등 모범적 그리스도인의 삶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또한 기숙사, 양로원, 병원, 고아원 등이 세워지고 매춘 여성을 위한 안식처 등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이탈리아어로 성서가 부분적으로 번역되었고 그리스도교 교리서가 발간되기도 하였다. 율리오 2세(1503~1513) 때에는 가예타노 추기경을 중심으로 수도회가 건립되면서 기도와 사랑의 실천 운동이 성직자와 신자들을 통해 새롭게 전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변화된 교회의 모습도 종교 개혁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종교 개혁과 트리엔트 공의회〕 로마 교회의 부패와 속화는 사보나롤라(Savonarola, 1452~1498)와 같은 뜻 있는 사람들의 무서운 질타를 받았다. 입으로만 외치는 쇄신과 개혁, 교황과 성직자들의 타성적 삶, 족벌주의, 재정 낭비, 신학 교육의 부재 등은 결국 종교 개혁의 원인이 되었다. 루터(1483~1546)는 로마에서 이 모든 문제들 특히 교황청의 부패와 그 권력 남용을 직접 보고 로마와의 결별을 단행하게 되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정치, 사회, 신학적으로 연계된 다른 이유들도 많이 있었다. 루터는 오캄(1290~1349)의 유명론(唯名論)에 영향을 받아 개인적인 신심으로 치달았다.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관계는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성사적(聖事的) 교회, 그 전례의 제도적 위력을 무력화하였다.
루터의 개혁은 로마의 반발을 가져왔고 이냐시오 등에 의한 새로운 쇄신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루터가 제기한 문제와 붕괴된 교회, 질서에 대한 해답을 꾀하였으며 결속을 위한 규율적 조치를 마련하였다. 루터에 대한 대응적 자세로 교계 제도와 성사가 강조되고 '성서만' 이라는 주장에 반대하여 '성전' (聖傳)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부각되었다. 결국 트리엔트 공의회는 철저한 로마 중심의 제도적 장치로 교황 중심의 중앙 집권적 교회론을 강조하였으며 그 기본 정신은 현재까지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근대와 현대 시기의 로마〕 종교 개혁의 후유증으로 심한 상처를 입은 로마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교권 중심의 반종교 개혁을 통해 교황의 권위를 더욱 분명히 설정하였다. 일치와 쇄신 등 모든 것이 교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교황청 스스로도 개혁을 통해 모범을 보여 권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식스토 5세(1585~1590)는 추기경 회의를 개편하고 교황 대사들에게 실권을 부여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에 크게 반대하였다. 그들은 교회 보편주의보다 국가주의를 우선시하였다. 프랑스는 200여 년에 걸쳐 갈리아주의, 국가 절대주의, 얀센주의, 에피스코팔리즘(episcopalism) 등의 사조를 통해 끊임없이 교회와 대립하였다. 한편 독일의 라이프니츠(1646~1716) 등이 수용한 계몽주의는 이성과 정신의 자율성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이성 자유 선언은 계시에 종속된 그리스도교 전 문화를 근원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18세기의 독일 교회는 이 사상을 수용하여 오히려 교회 쇄신의 새로운 활력의 계기로 삼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프랑스 혁명(1789)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과 교회의 근대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혁명 초기에는 반교회적 상황은 아니었으나 교회 재산 문제로 상황이 급변하면서 혁명은 반교회적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 교회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로마 점령으로 교회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고 큰 시련을 맞게 되었다. 비오 7세(1800~1823) 교황은 1804년에 나폴레옹을 황제로 도유하고도 로마의 점령을 꾸짖었다하여 1809년에 그에게 감금당하는 모욕과 수치를 받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무례는 사람들에게 교황에 대한 연민을 갖게 하여 오히려 교황의 도덕적 힘을 마련하는 새로운 계기도 되었다.
교황청 소유의 영토는 교황의 위력이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역사적으로 큰 짐이 되기도 하였다. 19세기 중엽부터 싹튼 이탈리아의 독립 운동과 교황청은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힘으로 유지된 교황의 영토는 이탈리아의 국가 통일 운동(Risorgimento)과 독립 운동가들에게는 공격의 대상이었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초기에 자유주의자였지만 교황령을 고수하는 처지에서는 이탈리아의 독립 운동과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교황청은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독립군들에 의해 점령되어 모든 영토를 빼앗기고 1929년 2월 1일 라테란 조약을 통해 오늘의 바티칸 형태로 귀결되었다.
학자들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를 트리엔트 공의회의 부속 정도로 평가하는데, 이는 미완성 공의회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시대 사조인 범신론, 자연주의, 유리주의(唯理主議)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관련된 80개의 금서 목록(Syllabus)을 작성하였고 공의회를 통해 단죄하였다. 그런데 어떤 것은 그 당시에도 시대 착오적인 것으로 지적되었다. 특히 많은 논란 끝에 교황의 무류성이 신조로 선언되었다.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 그리스도의 대리자,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서 전세계, 각 지역교구에 대해 윤리 · 도덕 · 규율 · 통치 등 전반에 걸쳐 전권을 행사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로마 교회는 이때부터 더욱 분명하게 보편 교회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교황 중심의 교회관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교단성' (主教團性, collegialitas episcoporum)이란 주제로 교황과 함께 주교단이 강화되어 보완되었다.
비오 9세를 계승한 레오 13세(1878~1903)는 노동자에 대한 관심 표명 등으로 교황의 위치를 드높였으며 비오 10세(1903~1914)는 근대주의를 단죄하여 교회의 위기를 자초하였으나 신심 강조로 이를 보완하였고, 비오 11세(1922~1939)는 평신도의 소명을 강조하였다. 비오 12세(1939~1958)는 히틀러 치하에서 교회의 내적 영역을 강조하였다. 이어 가난한 이들의 벗이며 농부 출신인 요한 23세(1958~1963)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여 교회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펼쳐 놓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로마의 주교, 로마 교회의 목자임을 자각하여 로마 교구 내의 여러 지역과 단체를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로마 교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로마의 지역 교회이다. 때문에 로마의 교회는 복음에 충실한 모범적 삶을 통해서만 이웃 교회들을 위한 일치의 기준, 길잡이가 될수 있고 그 보편성이 확인된다. 바오로 6세(1963~1978)는 로마 교회의 보편성을 드러내기 위해 교황청 기구를 국제화했으며 교회 회의를 통해 각 지역 교회의 의견을 수렴하도록 하였다.
※ 참고문헌  《EC》/ M.E. Williams, 12, pp. 562~563/ C.J.Barry, Readings in Church History, Christian Classics, 1985/ W.H. Carroll, The Foumding ofChristendom, Christendom Press, 1985/ M.P. Harney, The Catholic Church through the Ages, Boston, 1980/ H. Kiing, Structures de I'Eglise, Desclee, 1963/ -, L'Eglise, Desclee, 1968/L. 보프, 유종순 역, 《교회의 권력과 은총》, 성요셉출판사, 1986/ A. 프란츤, 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한국 천주교의 현재와 미래>, 《신학 전망》 107호, 광주 가톨릭대학, 1994. 〔咸世雄〕
IV. 교회 예술상의 로마
로마는 예술적 걸작과 유물에 있어 옛 시대의 것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장소이다. 로마의 아름다움은 바로 수세기 동안의 예술 · 문화의 특성과 흐름을 보여 주는 다양함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대 로마의 건축 : 왕정과 공화정 시대의 로마 예술은 에트루리아인 문화가 대(大)그리스(Magma Graecia)라고 불리는 남부 이탈리아의 문화와 접촉함으로써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에 앞서 기원전 6세기 에트루리아인이 로마 왕이 되면서 신전들을 세우게 되었는데, 캄포 디 마르치오(Campo di Marzio)에 쥬피터와 쥬노네(Giunone) 신상이 세워지는 등 많은 신전들이 세워졌으나, 기원전 390년 갈리족의 침략으로 현재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기원전 378년에 에트루리아인으로 로마 왕이었던 세르비오 툴리오(ServioTullio) 왕이 건립한 세르비아네(Seriane) 성벽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조각상으로는 쥬피터상과 청동으로 된 늑대상이 남아 있다. 조각상은 주로 신이나 신화적인 인물이 주를 이루며 석관, 분묘에 대한 조각도 신화적 · 상징적 특징을 띠고 있다.
기원전 191년에 위대한 어머니(Magna Mater) 신전이 팔라티노 언덕에 세워지고 캄피돌리오 언덕에 쥬피터 신전이 다시 건축되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라르고 아르젠티나(Largo Argentina)의 폐허는 당시의 베스타와 포르투나(Fortuna) 여신들의 신전 자리이다.
기원전 1세기부터 로마 예술은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섬세한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실라(Silla)폼페이우스, 체사르 황제들의 신전과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영묘, 체칠리아 메텔라(Cecilia Metella) 묘, 마르철로(Marcello) 극장, 티베리아누스 저택(Domus Tiberiano) 등이다. 헬레니즘 영향은 건축뿐 아니라 체사르와 아우구 스투스 황제의 상반신상(上半身像) 조각에도 잘 나타나며 안토니오(Antonio) 초상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로마 고유의 예술은 기원전 175년경 체사르 황제에 의해 시작된 로마 황제들의 광장(廣場, forum) 건축 양식에 잘 나타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줄리오(Giulio), 아우구스투스, 네르바(Nerva)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와 가장 화려한 트라야누스 황제의 광장이 있다. 평화의 제단(Ara Pacis)과 티투스의 개선문도 전형적인 로마 양식을 따른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부터 건축에는 종전과는 달리 벽돌이 사용되었는데, 벽돌은 정면을 쉽게 바꿀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115~123년에 지어진 판테온(Pantheon)과 212~216년에 세워진 카라칼라(Caracalla) 공중 목욕탕이 대표적인 것으로, 판테온은 한 원형 지붕의 직경이 43.3m나 된다. 벽돌 공법은 로마 시민들의 건축에도 많이 사용되었는데, 대가족들이 살기 위해 여러 층으로 된 집들을 짓게 되었고 벽돌 사용은 이 건축을 가능하게 하였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개선문, 목욕탕, 시장 등을 건설했으며,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는 판테온이 재건축되었다. 그는 자신의 영묘(靈廟)인 천사의 성을 만들었는데 후대에는 성으로 사용되었다. 세베루스 황제 때는 거대한 건물이 세워졌는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과 337m나 되는 카라칼라 목욕탕, 성대한 통과의 길이라는 옛 아피아의 길(Via Appia antiqua)을 만들었다. 이 길은 바오로 사도가 로마로 올 때 로마 교회 신자들이 마중 나왔던 길이다. 또 2세기 때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증거하는 카타콤바(Catacomba, 지하 무덤)가 옛 아피아 길가에 생겨났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의해 20여km나 되는 로마 성벽(Mura Aureliana)을 쌓게 되는데, 이것은 군사 건축물로 대표적인 것이다. 315년 세워진 콘스탄틴 황제 개선문은 황제가 세운 마센지오(Massenzio) 회당과 함께 로마 건축의 위대함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로마 이방인의 최후의 유적이다. 이러한 고대 로마 건축물들은 그리스도인과 중세, 문예 부흥, 바로크 예술 형태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4~15세기의 건축과 예술 :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됨에 따라 고대 로마 예술은 4세기부터 그리스도교 안에서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이때 무엇보다도 황제의 안배 아래 4대 대성전의 건설이 시작되었는데 성 바오로 성당, 라테란 성당, 마리아 성당, 그리고 성 라우렌시오 성당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중 어떤 것도 원형 그대로 오늘날까지 보존된 것은 없다. 단지 마리아 성당 앞면은 바로크풍으로 변했으나 구조는 처음 것과 같다. 성 바오로 성당은 유일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지만 1823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처음 설계대로 재건되었고, 라테란 성당은 17세기에 완전히 변경 재건되었으며, 성 라우렌시오 성당은 여러 세기를 거쳐 개수되었다.
마리아 대성전은 초기 그리스도교(paleocristiano)양식으로 지어진 성 사비나(S. Sabina) 성당과 함께 5세기에 확장 · 개축되었다. 4세기에는 성 코스탄자(S. Costanza), 성 아네스(S. Agnese) 성당들이, 5세기에는 성 스테파로톤도(S. Stefano Rotondo)와 라테란 성당의 세례대가 만들어졌으며 이때 모자이크 예술이 나타났다. 6~7세기에는 성 마리아 코스메딘(S.Mania in Cosmedin) 성당이 세워졌는데, 이 성당 촛대는 성 바오로 대성전의 촛대와 함께 유명하다. 6~8세기의 벽화는 옛 형태를 유지하면서 여러 장식으로 부드러운 분위기를 주고 있으며, 성 고스마와 다미아노 성당과 성 마리아 코스메딘 성당의 벽화가 유명하다. 9세기에는 다시 초대 그리스도교 건축 양식이 나타나는데, 그중 도미니카의 성 마리아(S. Maria in Dominica) 성 프라세데(S.Prassede) 성당이 손꼽힌다.
수도원의 회랑과 바닥 모자이크는 7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수도원 회랑으로는 성 라우렌시오 성당, 성체칠리아(S. Cecilia) 성당, 트라스테베레 성 마리아 성당(S. Maria in Trastevere)이, 바닥 모자이크는 성 글레멘테(S.Clemente) , 성 마리아 코스메딘 성당이 유명하며, 8세기에 만들어진 세 개의 분수(Tre Fontane) 성당이 있다. 성 글레멘테 성당의 아래층 경당 벽화는 비잔틴 양식이 아닌 로마 양식을 띠고 있는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벽화, 모자이크들은 비잔틴 예술의 영향으로 추상화되어 가면서 성스러운 면을 더해 갔다. 색상은 다양해지고 화려해졌다. 로마 예술에서 동방의 영향은 저조하며 고딕 형태는 거의 없다. 단지 로마식과 고딕이 혼합된 것으로는 13세기에 건축된 아라첼리 성 마리아 성당(S.Maria d'Aracaeli : 몸체는 4~5세기에 만들어짐)이며 유일한 고딕 형태는 1280년에 건립된 미네르바 성 마리아 성당(S. Maria Sopra Minerva)이다. 그러나 이 성당도 정면은 르네상스 양식을 따르고 있다.
르네상스, 바로크, 현대 예술 : 15세기 말엽에는 건축 · 회화 · 조각 면에서 문예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국민의 성 마리아 성당(S. Maria del popolo)이 1447년에 세워지고, 16세기 초부터 로마 예술은 율리오 2세 교황과 레오 10세 교황의 예술가에 대한 재정적 후원과 배려로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활약한 화가들로는 브라만테(Bramante) , 라파엘로(Raffaelo)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등이 있다. 몬토리오(Montorio)에 의해 성베드로 성당이 건축되기 시작하면서 미켈란젤로는 본체와 시스티나 경당의 벽화, 성 다마스코(S. Damasco) 성당의 정원과 캄피돌리오 광장을 체계화하고, 평화의 성 마리아 성당(S. Maria dellla Pace)을 만들었다. 그는 또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S. Maria degli angeli)을 설계 건축하였었다. 브라만테는 몬토리오 성 베드로 성당(S. Pietro in Montorio)을 설계하고 지었으며, 대법원(Palazzo della Cancelleria)을 설계하였고, 라파엘로는 마다마 저택(Villa Madama)을 설계하였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까지는 비놀라(Vignola)가 주된 역할을 하는데 그는 예수 성당(Chiesa di Gessi)을 건축하였다. 이외에도 승리의 성 마리아 성당(S. Maria della Vittoria)은 베르니니(Bernini)가 조각한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의 탈혼>이란 작품이 있어 유명하다. 로마 예술에 있어 미켈란젤로의 새롭고 용기 있는 개혁 풍토는 카라바지오의 특수한 예술 방식으로 이어졌다. 그의 그림은 성 루이 성당(S. Luigi dei Francesi)에 보관되어 있다.
1600년대는 조각가이며 건축가인 두 거성 베르니니와 보로미니(Bomomin)가 활동한 시기였다. 이 두 사람에 의해 로마는 바로크 형태를 가진 도시가 되었다. 그들은 바르베리니 궁(Palazzo Barberini) 건물 앞면을 나누어 건축하면서 경쟁을 시작하였다.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광장을 설계 · 체계화하였고, 트리토네 분수, 라테란 성전 기둥, 그리고 로마의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형태의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을 설계 · 체계화하였으며, 지금의 이탈리아 국회 의사당이 된 몬테치토리오 궁을 만들었다. 반면에 보로미니는 성 아네스 성당(S. Agnese in Agone), 성 카롤리나 성당(S. Carlo alla Quatro Fontane), 포교성(Propaganda Fidei) 건물을 만들었다. 당시의 또 다른 바로크식 건물로는 귀리날레 궁(Palazzo del Quirinale : 16세기에 시작하여 18세기에 완성), 트레비(Trevi) 분수, 개선문, 파르네즈 광장(Piazza Farnese), 보르게제 공원(Villa Borghese) 등이 있다. 18세기의 건축은 조각가 카노바(A.Canova)에 의해 인도되는 신고전주의 경향을 띠고 있었고 이 흐름은 19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다.
신고전주의 경향은 트리니타 델 몬테(Trinità del Monte)성당과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 사도 성당(Basilica dei SS. Apostoli)의 건축 양식에서 볼 수 있다. 1870년에는 행정청(Palazzi dei ministri)이 건축되었다. 중요한 건축가들은 갈데리니(G. Galderini), 삭코니(G. Sacconi), 코크(G. Koch) 등이며, 회화는 주로 전시실을 통해 알려지게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로마 대성전들의 반 이상이 파괴되었다.
※ 참고문헌  F. Ermini, Medioevo Latino, Modena, 1938/ P. Vigo, Storia degli Ultimi trentànni del sec. XIX, vol. 6, Milano, 1908~1913/ P.Paschini, Roma nel Rinascimento, Bologna, 1940/ 一, Roma nel Cinqucento, Bologna, 1948/ R. Auberr, Le pontificat de Pie IX(1846~1878), Paris, 1952/ G. Gasponi, Roma ancora, Trento, Editoria Trento, 1981/ AAVV.,Citta da scoprire, Torino, Touring Club Italiano, 1984/ → Roma, Torino, Touring Club Italiano, 1986/ M. Gall · W. Prosinger, Rom, Freiburg · Basel · Wien, Herder, 1990/ R. Raffalt, Rom, I~I, München, Prestel Verlag, 1965~1978/J. Patrick . F. Relton, Rome, (DB)4, pp. 306~311/L.Duchesne, Hist. ancienne de L'Eglise, vols. 3, Paris, 1910~1920/ H. Grisar, Analecta Romana, Roma, 1899/ P. Batiffol, L'Eglise Naissante et le Catholicisme, Paris, 19271 G. Romano · A. Solmi, Le dominaz, barbariche in Italia, Milano, 1940/ 0. Bertolini, Roma difronte a Bisanzia e ai Longobardi, Bologna, 1941~1942/ F. Gregorovius, Storia della citta di Rome nel medioevo, Roma, 1912/ A. Lapotre, L'Europe et le Saint-Siese a L'Epoque carolingieme, Paris, 1895/ E. Duper, Theseider, Roma dal comume di popo10 alla signoria ponificia(1232~1377), Bologna, 1952/ R. Javicoli, Roma sbagliata · Anatomia della città, Roma, Arti Grafiche Nemi, 1976/ S.Q.Gigli, Roma, fuori la mura, Roma, Newton Compton, 1980/ D. Borghese, Geliebtes Altes Rom, Freiburg im Breisgau, Karl Alber, 1964/ G.G. Belli, Die Wahrheiten des G.G. Belli, Frankfurt, Insel Verlag, 1984/ V. Buccino, Heiliges Jahr 1975 : Rom in der Welt, die Welt in Rom, Lugano, Giubileo S.A., 1975. 〔李再淑〕
V . 로마 교구
로마 교구의 본래 이름은 로마 대리구(vicariato)인데, 이는 로마 교구의 본 목자는 보편 교회의 목자인 교황이며 실제 통치는 교황에 의해 지명된 대리자(vicarius)에의해 교황의 이름으로 행사되기 때문이다. 로마 교구청의 기원과 발전은 로마의 주교이며 보편 교회의 최고 목자인 교황을 대리해 로마 교구를 통치하는 대리 추기경(cardinalis vicarii urbis)의 역사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고대 시대부터 특별히 교황의 부재중에 로마 교구의 통치 권한이 대리 추기경(혹은 대주교, 주교)에게 부여되었는데, 1558년 바오로 4세 교황 때부터 주교가 아닌 추기경으로 임명되기 시작하였다. 성 비오 10세 교황은 1912년 로마 대리구의 교계 조직을 개편하여 사목 활동을 하느님 경배와 사도적 방문, 성직자와 하느님 백성의 규율, 사법 활동, 교회 재산 관리의 네 가지 영역으로 분할하고 각각 고위 성직자를 임명하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77년에 로마 교구에 대한 교황령을 발표하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사목 활동이 증진되도록 새롭게 구조 개편을 단행하였다.
교황을 대신해 로마 교구에서 주교 직무를 행사하는 대리 추기경의 권한은 정규 권한이지만 다른 교구장과는 달리 교황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대리 권한이며, 로마 교구의 정규 재판관으로서 교황의 공석 중에도 중단되지 않는다. 그러나 로마 교구 안에 있는 베드로 대성전의 대사제 추기경과 바티칸 시국의 총대리, 성밖의 바오로 대성전의 수도원장의 재치권은 인정되며 구분된다. 대리 추기경을 보좌하는 총대리 역시 교황에 의해 임명되며 대주교에 보임된다. 그는 대리 추기경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역시 정규 대리 통치권을 행사한다. 대리 추기경은 그 자신을 포함하여 총대리 대주교, 보좌 주교들과 함께 주교 평의회를 구성한다. 보좌 주교들은 주교 대리의 직무를 수행하며 교구의 일정 지역이나 특별 사목 활동을 관할한다.
로마 교구청 역시 다른 교구와 마찬가지로 위원회, 사무처, 사목 부서 및 사무실, 그리고 법원으로 구성되어있다. 위원회로는 사제 평의회와 사목 평의회가 있고, 사목 부서로는 사무국, 교리 교육 및 복음화국, 예절 및 시성국, 사회 봉사 및 인성회 사무국이 있으며, 그 외에 법인 및 법률 사무소, 기술 관리 사무소 등이 있다. 법원은 로마 교구의 통상 법원과 혼인 무효 소송을 위한 라지오(Lazio) 주 연합 법원, 그리고 상소(2심) 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7년에 다른 법원들과는 구분되는 상소(2심) 법원을 로마 교구 안에 새로 설립하였는데, 나폴리와 칼리아리의 연합 법원에서 올라온 혼인 무효 소송의 제2심뿐 아니라 로마 교구 법원, 라지오 주에 있는 다른 교구 법원들의 제2심을 담당한다.
교황청 통계국에서 발표한 1994년 현재 로마 교구의 현황은, 로마 인구 268만 7,552명에 신자수는 261만 명이며, 본당 325, 교회 691, 교육 기관 593개소이다. 또 거주 사제 1,669, 종신 부제 44, 신학생 265, 남자 수도자 5,346, 여자 수도자 29 700명이며 1994년에 서품된 사제는 34명이고 영세자는 19,673명이다. (⇦ 로마 교구청 ; 로마 교회 ; → 라테란 조약 ; 로마 문제 ; 로마법 ; 로마 제국 ; 로마 종교)
※ 참고문헌  바오로 6세, 로마 대리구의 새로운 구조를 위한 교황령 〈Vicariae Potestatis〉, 《AAS》 69, 1977, pp. 5~18/ 1995 Annuario Pontificio, pp. 571, 1792~1793. 〔朴東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