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교회

間島敎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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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렬(왼쪽)과 최규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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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렬(왼쪽)과 최규녀.

간도 지역에 이룩된 가톨릭 교회의 총칭. 19세기 말 한국인에 의해 복음이 전래되고 이후 공소와 본당들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공산당에 의해 세 차례의 청산을 당하면서 일시 지하 교회가 되었다가 후에 다시 부활되었고, 1946년 중국 교회 안에 교계 제도가 설정됨에 따라 중국 봉천대교구(奉天大敎區) 소속이 되었다. 간도 지역은 본래 동간도(즉 北間島)와 서간도로 구분되는데, 일반적으로 불리는 간도는 북간도의 훈춘(琿春) · 왕청(汪淸) · 연길(延吉) · 화룡(和龍)의 4현을 가리킨다. 현재 이곳은 행정 구역상 연변(延邊) 조선족 자치주로 편성되어 있으며, 1980년대 이후 이곳의 한인 교회와 한국 교회와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
〔복음의 전파〕 간도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909년의 간도협약(間島協約)으로 이 지역이 청에 할양(割讓)되기 이전이었다. 이곳 최초의 신자인 김영렬(金英烈, 요한)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 천주교 신앙이 받아들여졌고, 이들에 의해 공소와 본당이 차례로 설립되어 나갔다. 흔히 '간도 복음의 사도' 라고 불리는 김영렬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계기는 스승 김이기(金以器)를 만난 데 있었다. 김이기는 본래 서울 사람이었는데, 훗날 간도로 이주하여 호천개[湖泉浦], 알미대(즉 鶴棲臺) 등 지에 학당을 설립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때 김영렬은 1892년경 그의 제자로 들어가 2년 뒤인 1894년 겨울 스승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해 듣고, 다음해 스승이 동학도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회령(會寧)에서 사망한 뒤부터 천주교를 알기 위해 노력하다가 1896년 봄 서울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원산 본당의 제6대 주임으로 있던 베르모렐(Vermoral, 張若瑟)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이 해 5월 16일(성신 강림 대축일 전날) 영세와 견진성사를 동시에 받고, 베르모렐 신부로부터 천주교 서적과 성물들을 받아 가지고 즉시 고향 호천개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김영렬은 베르모렐 신부의 지시대로 친척과 동료들에게 교리를 전하며, 한편으로는 원산 부근의 눈다리라는 곳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여 전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에 의해 간도 지역에 전래된 복음은 곧 이웃으로 번져가게 되었다. 먼저 최규녀(崔規汝, 그레고리오)와 유패룡(劉覇龍, 라우렌시오)이 김영렬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원산의 눈다리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1897년 봄 영세를 받았다. 한편 김영렬은 다시 호천개로 돌아가 입교를 원하는 친지들을 모으고, 이들과 함께 원산 근처에 머물면서 그들이 교리를 충실히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후 1897년 5월 원산 본당의 제7대 주임으로 부임한 브레(Bret, 白類斯) 신부는 성신 강림 대축일을 맞이하여 간도 지역의 신자들 12명에게 영세와 동시에 견진성사를 주고, 이들에게 "북관(北關)의 12종도" 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들 12종도 가운데 8명은 즉시 간도로 돌아가 전교에 임하였고, 나머지는 원산에 정착하였다. 그중 회령과 간도 땅의 초대 회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박연삼(朴連三, 루가)이었는데, 이때 브레 신부의 복사이자 원산의 회장인 조 요셉이 그와 함께 간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 동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간도 땅에는 평신도들로만 구성된 신앙 공동체가 탄생하게 되었다.
〔공소의 설립과 성장〕 처음에 신자들은 연길현, 화룡현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교우촌을 형성해 갔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예비자의 수가 110명에 이르자 브레 신부는 신자들의 활동을 돕기 위해 서둘러 간도 지역을 방문하고 처음으로 공소를 설정하게 되었다. 브레 신부가 회령 지역과 간도를 방문한 것은 12종도가 탄생한 해인 1897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였다. 이때의 순방에서 그는 간도 일대뿐만 아니라 만주의 길림성(吉林省) 지역까지 방문하였으며, 1898년 1월 3일에는 신자들이 구입해 놓은 회령의 공소 기와집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이와 같이 브레 신부가 첫 방문을 끝낸 1898년 3월 무렵 간도의 신자수는 모두 176명이었고, 그중 161명은 이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당시 간도 지역은 사목 관할 면에서 중국의 만주교구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신자들과 주민 대부분이 한국인이었으므로 만주교구장이던 귀용(Guillon) 주교는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요청을 수락하여 조선 선교사들의 활동을 용인하였고,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관에서도 조선 선교사들에게 여권을 발급해 주었다.
이후 간도 지방에는 신자수가 증가하고 여기저기에 공소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그중 첫번째로 설정된 공소는 부처골[佛洞] 공소였다. 부처골은 용정(龍井)에서 8리 가량 떨어진 곳으로 1898년 초 신자들이 이룩한 교우촌이었는데, 1898년 말 브레 신부의 방문으로 공소가 된 이래 신자들에 의해 대교동(大敎洞)이라 불리면서 복음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 부처골과 함께 공소로 설정된 곳은 호천개 · 싸리밭골 · 삼원봉(三元峰, 즉 英岩村) 등이었고, 이어 화룡현과 연길현 각처에 공소가 설립됨으로써 간도의 신자수는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1899년 전반기까지 싸리밭골에 71명, 삼원봉에 37명 호천개에 30명, 부처골에 74명 등 모두 212명의 신자가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또 신자들의 노력에 의해 1900년경 연길현 용정촌(龍井村)에, 그리고 1903년 조양하(朝陽河)에도 교우촌이 이루어졌으며, 얼마 안되어 이곳도 공소로 설정되었다. 이처럼 교세가 확대되면서 신자들이 노력을 기울인 부분은 교육 활동이었다. 이미 공소 설립 때부터 교리와 함께 한글을 가르치는 소규모의 학교가 여러 교우촌에 있었고, 1899년까지 싸리밭골 · 호천개 · 부처골에 각각 1개의 교리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학교의 명칭이 정식으로 붙여진 것은 1906년 용정에 설립된 삼애학교(三愛學校)였다. 이에 이어 삼원봉 공소에서도 1908년 화룡서숙(和龍書塾)을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는 훗날 덕흥학교(德興學校), 대립자 해성학교(大拉子 海星學校)로 성장하여 간도 천주교회의 중요한 교육 기관이 되었다.
물론 간도 지역의 교회가 순조롭게 성장한 것만은 아니었다. 때때로 무정부 상태가 되어 약탈이 끊이지 않았으며, 공소의 강당이 전소되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04년에는 러일전쟁(露日戰爭)으로 인해 브레 신부가 공소 순방을 중단해야만 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도 교회의 교세는 계속 확대되고 있었다. 1907년경 훈춘과 그 인근인 팔지(八池)에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간도 북쪽인 길림성에서도 신자가 탄생하였다. 그 결과 1909년 간도 지역의 신자수는 모두 2,362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브레 신부는 임시 본당 신부로 넓은 지역을 맡아 사목에 노력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08년에 선종하고 말았다.
〔본당의 설립과 변모〕 뮈텔 주교는 브레 신부가 사망한 다음해 5월 1일, 공주 본당에 있던 퀴를리에(Curlier, 南一良) 신부를 영암촌으로,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신부(1907년 입국)를 용정으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그때까지 원산 본당 소속 공소들로 구성되어 있던 간도 지방에는 한 번에 2개의 본당이 설립될 수 있었다. 이후 라리보 신부는 영암촌을 중심으로 연길현과 훈춘현 일대의 동쪽 지역에서, 그리고 퀴를리에 신부는 용정 일대와 화룡현 · 연길현 등 서쪽 지역에서 주로 사목을 담당하였다. 간도 부임 첫 해에 그들이 방문한 신자들은 모두 2,723명(용정 1,444, 영암촌 1,279)이었다. 한편 뮈텔 주교는 두 신부 파견에 이어 1910년 9월 26일자로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를 다시 간도 지방으로 파견했는데, 그는 조양하 본당을 중심으로 간도의 북쪽 지역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로써 간도 지역에는 모두 3개의 본당이 자리 잡게 되었고, 전교 지역의 확대뿐만 아니라 성당이나 공소 강당의 건립, 교리 학교의 설립 등 여러 활동들이 보다 활발해질 수 있었다. 1914년 이곳의 총 신자수는 5,418명, 공소수는 50개소, 성당은 12개소였다.
이후 간도 지역의 본당들은 1921년까지 몇 차례 변모되었는데, 우선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 선교사들 중 일부가 전쟁에 참전함에 따라 한국 전체의 사목 구역이 재조정되면서 영암촌 본당에 있던 라리보 신부가 충청도 합덕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다음으로 1919년에는 조양하 본당의 최문식 신부가 마적에게 납치되어 다음해 2월에 풀려 나온 사건이 발생하였다. 뮈텔 주교는 이를 보완하는 조치로서 황해도 사리원 본당의 백남희(白南熙, 베드로) 신부로 하여금 조양하 본당을 돌보도록 하였고, 1919년 9월 26일에는 페랭(Perin, 白文弼) 신부를 영암촌 본당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1920년 8월 5일 원산교구(元山敎區)가 서울교구로부터 분리 설정됨에 따라 간도 지역은 함경도 지역과 함께 다음해 3월 19일자로 성 베네딕도 수도회[芬道會]에 위임되었다.
초대 원산교구장으로 임명된 사우어(Boniftiuius Sauer, 辛) 주교는 교구 지역을 인수하면서 용정 본당에 히머(K. Hiemer, 任) 신부를, 팔도구(조양하) 본당에 퀴겔겐(C. Kiigelgen, 具) 신부를, 삼원봉(영암촌) 본당에 다베르나(K. D'Avernas, 羅) 신부를 임명하였다. 원산교구에 편입된 이후에도 간도 지역의 교세는 계속 증가하였다. 이에 사우어 주교는 1922년 12월 간도의 중심지라 할 연길(延吉, 즉 局子街)에 새 본당(延吉下市本堂의 전신)을 설립하고 브레허(T. Breher, 白) 신부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1923년 훈춘현 팔지(즉 六道泡)에 본당을 설립하고 퀴겔겐 신부를 임명하는 동시에 빙거(M. Bainger, 方) 신부를 보좌로 임명하였다. 한편 각 본당에서는 교육 활동을 확대해 나가는 데 힘써 1923년까지 30개소의 사립 학교를 설립하였고, 1926년까지 41개소의 4년제 초등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아울러 1928년까지 간도 지역의 본당은 8개소로 증가되었는데, 위의 표에서 보는 것처럼 이 중 7개는 간도성 지역에, 1개는 길림성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무렵 사우어 주교는 중국 땅에 속해 있는 간도 지역의 정치적 위치를 고려하여 이 지역을 독립시킬 생각을 갖고 그 의견을 교황청에 제출하였다. 그 결과 1928년 7월 19일 간도 지역이 연길교구(延吉敎區, 정식 명칭은 延吉知牧區)로 설정되었으며, 이듬해 2월 5일 브레허 신부가 초대 연길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연길교구는 설립 당시 간도성의 화룡현 · 훈춘현 · 연길현 · 왕청현과 길림성의 돈화현 · 액목현 · 영안현 · 목단강현을 사목 관할 지역으로 하였는데, 이 지역 안에는 8개의 본당과 12명의 선교사, 그리고 11,764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한편 간도성의 북쪽 지역은 의란(依蘭) 지목구에 속해 있었으며, 1935년 이 지역이 티롤의 카푸친회(Tioler Kapuziner)에 양도되면서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연길로 철수하였다. 연길교구는 그 후 교세 확대에 노력하는 한편 본당 · 학교 · 단체를 증설하고, 1931년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들을 초청하는 등 성장을 계속하여 1937년 대목구로 승격되었으나, 해방 후 공산당이 이곳에 진주하면서 세 차례의 청산을 당한 뒤 지하 교회로 변모하였다. (→ 연길교구)
※ 참고문헌  韓允勝, <金以器와 그 弟子〉, 《가톨릭 청년》 41호(1936. 10)/ 韓興烈, 〈延吉教區 天主教略 史〉, 《가톨릭 청년》 41호(1936. 10)/ P.H. Walter, 《승리의 십자가》, 분도출판사, 1978.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