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문제

問題

[라]QuaesiooRomanana · [영]Roman Ques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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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문제 해결을 위해 라테란 조약에 서명하는 무솔리니.

로마 문제 해결을 위해 라테란 조약에 서명하는 무솔리니.

1861년 3월 27일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로마가 통일된 이탈리아 반도의 수도로 선포되고, 1870년 9월 20일에는 이탈리아 군대에 의해 로마와 교황령이 점령됨으로써 이후 교황청과 새로운 이탈리아 왕국사이에 일어난 정치적 · 종교적 분쟁. 이 분쟁은 1929년까지 약 60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교황령이 붕괴되었다.
〔과 정〕 당시 유럽의 정세는 교황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더 이상 교황 비오 9세(1846~1878)를 도울 능력이 없음을 통보해 왔고,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는 그들의 종교적 · 정치적인 동기로 이탈리아에 더 호의적이었다. 교황의 유일한 후원자는 프랑스 가톨릭계의 압력을 받은 나폴레옹 3세뿐이었지 1870년 9월 1일 세당(Sédan)에서의 패전으로 교황은 국제적인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고립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는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가 로마를 무력으로 점령하도록 방치하였는데, 통일 이탈리아는 앞으로 교황에 의해 로마가 다시 장악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새 왕국의 수도를 로마로 정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 정부는 즉시 전세계에 퍼져 있는 가톨릭 신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세계 각국의 외교관들 및 세계의 모든 가톨릭 교회들과 교황청 간의 자유로운 통신과 왕래를 보장하고, 교황청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한다는 이른바 '보장법' (Legge delle Guarentigie)을 1871년 5월 13일에 선포하였다.
새 이탈리아 왕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발표된 '보장법' 9조와 12조는 교황의 영적(靈的) 독립을, 11조는 교황청 대사 파견의 자유뿐만 아니라 교황청 주재 외교관들이 국제법으로 공인된 외교관 면책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였다. 또 교황은 교황청 청사들과 바티칸, 라테란,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 별장과 그 부속 건물들만을 소유할 수 있을 뿐이었고(5조), 교황령 박탈에 대한 보상으로 매년 322만 5천 리라를 면세로 제공받도록 하였으며(4조),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임의로 확정하였다.
이에 교황 비오 9세는 같은 해 5월 15일 교황의 완전 독립적인 권리를 영구적으로 보장하는 내용이 없는 일방적으로 선포된 '보장법' 을 수용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교황은 스스로 '바티칸의 포로' 가 되어 바티칸 울타리 안에서만 머무르며, 교황령 강탈에 대한 동의로 해석될 수 있는 어떠한 접촉도 거부하였다. 비오 9세의 모습은 세속 군주와 교황이라는 이중적인 면을 지녔는데, 세속적인 측면을 견지한 기본적인 동기는 교회를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영토 보유가 필수 불가결한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황은 이미 1861년 4월 26일 프랑스 대사에게 과거 한때 소유하였던 영토를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황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한 구석진 땅' 만을 원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자 비오 9세는 1874년 교령 〈논 엑스페딧>(Non expedit)을 발표하여 이탈리아의 가톨릭 신자들이 정치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교황 레오 13세(1878~1903)와 그 후임 교황들도 비타협적인 노선을 그대로 견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교회로 하여금 스스로 교회에 협력할 수 있는 선의의 사람들마저 잃게 만듦으로써 의회에서 풀어야 할 로마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얽히게 하였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어떠한 선거에도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 금지 조치는 정치를 과격파에게 넘겨주고 이탈리아 정부가 극좌파로 흐르도록 방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교황청으로 하여금 타협에 응하도록 할 목적으로 이탈리아의 몇몇 각료들에 의해 자행된 반가톨릭적인 공격은 대외적으로 비난받는 결과를 가져왔고, 영국과 오스트리아 수상들의 항의를 야기시켰다. 그러나 세속 권력의 상실은 오히려 로마 교회가 중앙 집권화를 더욱 공고히 하고 국제적으로 그 위상을 높여, 국제적인 세력으로 성장 · 발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교황 레오 13세는 1878년부터 1889년까지 교황의 세속 군주권 박탈에 대하여 62회나 공식적으로 항의하였지만, 사실은 화해를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의도를 반영하듯 1878년 5월 30일에 주(州)와 도시의 단체장 선거에 대한 참여 금지를 철회하였고, 1887년 5월 23일의 추기경 회의에서는 모든 이탈리아 사람들이 안전과 평온을 얻기 위하여, 그리고 마침내 교황과의 불행한 대립을 피하기 바란다는 의향을 발표하였지만, 항상 정의의 원칙과 성좌의 권위는 고수하였다. 그 이후 1887년부터 1894년까지 몬테 카시노(Monte Casino) 수도원장인 토스티(L.Tosti), 호헨로흐(G.A. Hohenloche) 추기경, 베네치아의 대주교로 임명된 사르토(G. Sarto) 등의 중재로 화해를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었지만 큰 진전은 없었다.
〔해결을 위한 노력〕 1904년 7월 29일에 프랑스 공화국과 외교가 단절되었고, 같은 해 12월 9일에는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법이 선포되었으며 1801년에 맺은 정교 조약이 폐기되었다. 또 사회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사회주의가 영향력을 넓히는 상황이 비오 10세(1903~1914) 교황으로 하여금 이탈리아 정부에 접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극좌파 의원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염려한 교황은 1905년 6월 11일 교서 <일 페르모 프로포시토〉(Ⅱ fermo proposito, 확고한 제안)를 발표하여, 신자들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도록 권고하면서 영혼들의선익(善益)과 각 교구의 최상 이익을 위한 필요성이 인정되는 경우에 한하여 이탈리아 가톨릭 신자들도 투표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정당을 형성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선거인 연합회의 젠틸리오니(Gentilomi) 회장은 1913년에 소위 '젠틸리오니 협약' (Patto Gentilion)을 발표하여 학교에서의 종교 교육의 자유와 이혼 반대 등 교회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후보자들에게 투표하겠다는약속을 하였는데, 이 선거의 승리는 교회에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1913년 11월 30일부터 12월 6일까지 밀라노에서 개최된 '사회 주간' 에서 개회사를 한 우디네(Udine)의 롯시(A. Rossi) 대주교는, 하느님이 섭리를 통해 교회의 자유 보장을 위해 마련하신 교황의 세속 권력을 무신론적이고 이교적인 이탈리아 사회의 현실 조건이 아직도 허용할 수 있는지 물으면서, 교황의 자유는 일시적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침범할 수 없는 요소라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보장법이 법률적인 차원에서 불완전하다는 결과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5월 24일 이탈리아가 유럽 동맹군에 참가하였을 때 명백히 드러났다. 즉 보장법의적용으로 세계의 주요 나라들로부터 파견된 대사들의 로마 거주가 불편하여 루가노(Lugao)로 옮겨야 했다. 이로 인해 교황 베네딕도 15세(1914~192)가 전세계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지속하는 데 있어서도 어려운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편 1915년 4월 26일 유럽의 동맹국들이 런던에서 서명한 비밀 조약에서 이탈리아의 요청으로 평화를 위한 앞으로의 교섭에 교황을 제외한다고 규정(15조)함으로써 교황을 고립시켰다. 이즈음 독일, 오스트리아, 바비에라(Baviera)에 교황청과는 사전 협의도 없이 교황의 세속 권력의 원상 회복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은 편협적인 인쇄물들이 뿌려졌다. 이에 대하여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1915년 6월 28일 국무성 장관 가스파리(P. Gasparri) 추기경을 통해 로마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은 외국의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탈리아 백성들의 마음에 심어져 있는 정의로운 정신의 승리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였다( 28 Ⅵ, 1915).
제1차 세계대전은 가톨릭 신자들의 교황에 대한 충성심과 전쟁 당사국들 사이에서 바티칸이 견지한 중립성으로 교황의 화해 계획을 더욱 유리한 조건에서 추진할 수 있게 하였다. 파리에서 강대국 대표자들과 접촉한 체레티(Cerreti) 몬시놀은 그들과의 우호적인 대화를 통하여 바티칸에 호의적인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였는데, 1919년 5월에는 오를란도(V.E. Orlando, 1860~1952) 수상과 접촉하였고, 로마 문제 해결을 위해 가스파리 추기경의 후속적인 여러 계획이 추진되었다. 이 계획들은 국제적으로 독립을 인정하는 주권 국가의 성격을 바티칸시에 부여하였고, 국가와 교회법 관계를 규정짓는 정교 협약을 추진하는 틀이 되었다. 1919년 6월 오를란도 내각의 하야로 추진 중이던 공적 협상 계획이 무산되었으나, 다행히 가톨릭 인사인 나바(Nava)와 로디노(Rodino)가 후속 각료로 입각(入閣)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가톨릭 교회의 평신도들은 스투르조(Luigi Sturzo, 1871~1959) 신부의 지도로 '그리스도교 민주당' (Democrazia Cristiara)의 전신인 '국민당' (Partito Popolare)을 1919년에 창당하여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1921년 봄 이탈리아 정부의 외무성 장관은 교황청과의 화해에 대한 입장을 이탈리아 신문을 통해 여러 차례 언급하였다. 같은 해 5월 16일 프랑스가 교황청과의 외교 관계를 다시 맺으면서 많은 바티칸 주재 외교관들이 세계적인 관심사로 떠오른 영적인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이탈리아가 고립되게 되었다. 1921년 6월 21일 로코(Alfredo Rocco) 장관은 의회에서 이탈리아 국가의 국내적이고 국제적인 필요에 부응하여 완전한 독립을 위한 교황청의 요구를 조정하는 합의점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였다.
1922년 1월 22일 교황 베네딕도 15세의 서거를 계기로 이탈리아 정부가 발표한 공적인 애도와 교황 비오 11세(1922~1939)의 즉위 직후 첫 강복 때의 말씀은 양측의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결국, 1929년 2월 11일 로마의 라테란 궁전에서 교황청 국무성 장관인 가스파리 추기경과 이탈리아의 수상인 무솔리니가 서명한 이른바 '라테란 조약' 에 의해 바티칸 시국이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는 독립 국가임이 선포되면서 로마 문제가 해결되었다. (→ 가스파리, 베드로 ; 라테란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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