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의 소도시 국가에서 대제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제정되어 변모되어 간 고대 로마의 법. 초기의 관습법 상태로부터 출발하여 문명 사회의 법의 발전 단계를 고루 거쳐 성문 법전이 제정되기까지를 총칭한다. 그러나 흔히 이러한 어의적인 의미가 아니라,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Jusiniaus, 483~565)가 제정한 이른바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의 법을 '로마법' 이라부르기도 한다. 전문적인 로마 법학에서는 아무 수식 없이 로마법이라 하는 경우 흔히 고전기의 로마법, 즉 로마의 법학이 가장 고도의 수준에 이르렀던 1~2세기의 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로마법은 로마가 멸망한 지 수백 년이 지난 후에도 현행법으로 적용되었으므로 중세의 로마법, 근세의 로마법이라고 표현되기도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현행법으로서의 지위는 거의 상실하였지만, 아직도 이탈리아의 소도시 국가인 산 마리노(San Marino) 공화국과 이른바 로마-네덜란드법(Roman-Dutch law)의 지역에서는 로마법이 현행법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배 경] 로마 문명은 '법의 문명' 이었다. 로마인들의 법 관념은 다른 민족과 비교할 때 일찍이 종교 및 도덕과 분리된 법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였고, 특히 강력한 권리 의식에 의해 뒷받침된 생존과 정의를 위한 투쟁은 초기부터 로마 문명의 기본적인 특성을 이루었다. 그 결과 로마 민족은 후대에 '법의 민족' 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고, 로마 멸망 후에도 로마법은 계속 영향을 미쳤다. 로마의 역사에서는 미래의 발전 방향을 시사하는 사건들을 몇 가지 찾아볼 수 있다.
첫째, 타락한 왕정을 몰아내고-오만왕(傲慢王) 타르 귀니우스(Tarquinius Superbus)의 축출-공화정을 수립한 사실. 둘째, 평민이 귀족의 압제에 대항하여 기원전 451~450년에 쟁취한 '12표법' (十二表法, lex duodecim tabularum)의 제정. 셋째, 기원전 4세기 말 신관단(神官團, pontifices)의 법률 지식 독점에 대항하여 감행된 법정의 공개. 넷째, 이로 인한 세속 법학의 발전.
특히 법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사회적 요인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 요인은 위에서 지적한 바 있는 투철한 권리 의식, 이른바 '명망가(名家) 법학' 으로 불리는 사회 지도층에 의한 법에의 헌신, 합리적인 논변을 통한 법학 자체의 발전 등을 들 수 있다. 국가 경영을 담당했던 명예직 정무관(政務官, magistratus)들이, 특히 로마 특유의 전통 의식에 자리잡은 로마 시민 고유의 시민법(市民法, jus civile)을 공권력에 이용하여 발전시킨 명예관법(名譽官法, jus honorarium), 그중 특히 법무관법(法務官法, jus praetorium)으로써 수정 · 보충 · 보완하여 사회 발전에 따른 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독특한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법무관은 지중해 유역의 문명 민족들간에 공통된 법의 원리와 원칙들을 추출해 냄으로써, 오늘날의 국제 사법(國際私法)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인류 보편의 실질적 법규범, 즉 만민법(萬民法, jus gentium)을 발전시켰고, 이것은 급기야 본질론적 · 가치론적 자연법론인 '자연의 이치' (naturalisratio)와 결합함으로써 후대에 법(특히 민법 및 국제법)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내 용] 로마 국제(國制)의 변천 : 로마 초기인 왕정기의 선거 왕제(選擧王制)에서 왕은 군사권과 사법권과 사제권을 모두 통할하는 지위를 가졌으며, 국민은 귀족(patronus)과 그 피보호인(clients) 및 평민(plebs)으로 나뉘어 있었다. 국민은 군대 조직으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이 기본 골격은 왕정을 타파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후에도 민회(民會, comitia)의 조직에 그대로 유지되었다. 공화정은 민회, 원로원(senatus), 정무관을 세 축으로 하여 성립되었다. 왕의 권력 중 사제권은 신관(神官)에게 이양되었으며, 군사권과 사법권은 새로운 정무관인 집정관(執政官, , consul)에게 넘어갔다. 공화정의 최대 원칙은 권력 집중을 방지하기 위한 정무관직의 동료제(동급 정무관의 복수 설치) 및 임기제(원칙적으로 1년)였다. 귀족과 평민의 투쟁 결과로 제정된 12표법 이후 다수의 법률을 통해서 계급간의 조정이 이루어졌으며, 기원전 287년에는 호르텐시우스법(Lex Hortensia)에 의해 평민회의 의결 (plebiscitum)이 법률과 같은 효력을 가짐으로써 오랜 계급간의 투쟁은 종료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관직 귀족이 발생하였고, 로마가 대제국화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혼란이 가중되었다. 공화정 말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성립된 아우구스투스(Augusts)의 제정(帝政)은 공화제의 외양을 지닌 원수정(元首政, pincipamus)이었으나, 디오클레 티아누스 황제(Diocletianus, 284~305) 이후로 황제권이 강화된 전주정(專主政, dominatus)으로 변모하였고, 동 · 서 로마의 분열로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법원(法源) : 시대에 따라서 변모하였던 로마법의 법원은 일반적으로 관습법과 성문법으로 구분된다. 부조(父祖)의 유풍(遺風)과 선조 전래의 관습은 로마의 국제(國制)와 정치 및 사회를 유지한 불문율이었다. 성문법은 다시 민회가 제정한 법률(leges) , 평민회 의결, 원로원 의결(senatus consultum) 황제의 칙법(勅法, constitutiones principum), 정무관의 고시법(告示法, edicta magistratuum) , 법률가의 해답(responsa prudentium)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앞의 셋은 공화정 시대에 큰 역할을 하였는데, 제정 시대에 와서는 칙법과 황제의 권위에 의거한 해답권(jusrespondendi)을 가진 법률가들의 해답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옛부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고시법은 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Hadrianus, 117~138)의 명에 의한 《영구고시록》(永久告示錄, Edictum Perpetuum)의 편찬으로 일단락되었다.
로마의 법원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은 기원전 451~450년의 '12표법' 을 비롯하여, 438년의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Ⅱ , 408~450)에 의한 《테오도시우스 칙법집》(Codex Theodosianus), 그리고 특히 529~533년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명에 의해 사법장관 트리보니아누스(Tribonianus)의 주도로 입법되었던 이른바 《로마법 대전》의 제정이다. 《로마법 대전》은 법학 교과서인 <법학 제요>(法學提要, Institutiones), 고전기 법률가들의 저술을 모아서 편찬한 <학설 휘찬>(學說彙纂, Digesta) ,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후의 칙법을 모은 <칙법 휘찬〉(勅法彙纂, Codex Constiutionum)과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칙법 모음인 <신칙법>(新勅法, Novellae Con-stitutiones Post Codicem)을 통칭하는 후대의 명칭이다. 이것은 서양에서 《교회법 대전》(Corpus Juris Canonici)과 더불어 법의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로마의 법학 : 로마법의 발전을 다른 지역의 법 발전과 구별 짓는 큰 요인 중의 하나는 사회적 명망가들로 구성된 법률 전문가들이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법의 학문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이다. 로마에서 법학 담당자들의 사회적 신분은 제정 시대가 경과하면서 원로원 신분에서 기사 신분까지 확대되기는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사회 지도층에 속하는 법 명망가들이었다. 법학의 발전은, 로마인들 자신이 '모든 공법과 사법의 원천' 으로 인식하였고 로마의 전 역사를 통해 유일무이한 법전이었던 '12표법' 의 운용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법학의 가장 창조적인 형성 시기는 그리스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사상적 도약을 하였던 헬레니즘 때였고, 제정 시대와 더불어 시작된 이른바 '로마의 평화' (Pax Romana) 시기(1~2세기)에 고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리고 3세기 이래로 제국의 위기와 더불어 지식인들이 외면하게 된 법학도 쇠퇴 일로를 걷게 되었다. 중요한 라틴 교부의 한 사람인 테르툴리아(Tertullianus 법학에서 신학으로 전환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법학은 전문 실무 법학이었다. 그 결과 로마의 법률가들은 법의 역사라든가, 법의 철학적 기초, 법의 사회 학적 규명 등은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도제식 수업을 통해 배출되던 법률가들은 제정 시대에 학파를 형성하여 일정한 교육 장소를 갖추었으며, 비잔틴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 베리투스(Berytus, 지금의 베이루트), 로마에 법 학교가 있었다. 로마인들 자신이 법학의 시초로 규정하는 기원전 200년부터 시작된 발전은 그리스 사상과의 만남을 통해 법학이 학문으로 성립하고, 창조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이 시기의 법학은 두 가지 경향으로 규정되는데, 그 하나는 그리스의 사회 연대적 스토아 사상을 받아들여 선의(善意, bona fides)를 강조한 가치론적 · 원리론적 경향-대표자는 스채볼라(Quintus Mucius Scaevola, 기원전 140~82)-이고, 다른 하나는 아카데미의 회의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냉철한 규범 인식에 기초하는 실증주의적 · 개념 법학적 신경향-대표자는 루푸스(Servius Sulpicius Rufus, 기원전 105~43)-이다. 제정 시대에 들어서도 이런 사상 조류는 한편으로는 사비누스(Sabinus) 학파로,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쿨루스(Proculus) 학파로 이어져서 고전기의 풍성한 결실을 맺었다. 고전성기(古典盛期)에 철수스(Celsus)와 율리아누스(lulianus)에 의한 신경향 위주의 융합이 이루어진 결과, 고전 후기에는 학파 대립이 극복되면서 파울루스(Paulus)와 울피아누스(Ulpianus)에 의한 고전 법학의 집대성이 이루어졌다. 이 고전 법학의 두 경향은 이후 서양 법학과 이를 이어받은 다른 지역의 법학의 성격을 규정짓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법학은 규범학으로서의 자기 인식을 결코 벗어나지 않았으므로 사실 심리학, 증거법과 같은 분야의 발전을 가져오지 못하였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 분야의 발전은 후대의 교회법이 기여한 바가 크다.
로마의 민사 소송법 : 로마의 민사 소송은 원래 이분된 절차가 특징이었다. 법무관이 심리하는 법정(法廷) 절차 에서 당사자들은 초기에는 엄격한 구술의 격식에 의한 주장, 이른바 법률 소송(legis actiones)을 통하여 재판을 하였다.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그러한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주장을 통하여 소송의 성립 여부를 결정하였고, 소송이 성립한 다음에 구성되는 심판인 절차(apud Judicem) 에서는 자유 심증주의에 의거한 재판이 이루어졌다. 고전기를 통하여 통상의 절차였던 방식서(formula) 소송에서는 특히 포에니 전쟁 이후 청구 취지와 청구 원인, 심판 권한 등을 기재한 방식서가 작성되어 심판인에게 제출되었다. 통상 절차와 별도로 존재했던 비상(非常) 심리 절차(cognitio extra ordinem)는 정무관이 담당하였으며, 고전기가 지나면서 특히 발전하였다. 로마 후기에는 통상 절차도 관료 법관이 담당하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되었고, 심급(審級) 제도가 발달하였다. 집행법은 옛 법에서는 대인(對人) 집행만을 규정하였지만, 고전법에서는 전 재산을 매각하는 형태를 취하여 원칙적으로 파산에 상응하는 절차가 이루어졌으며, 후기의 황제법에서 비로소 개별 집행이 인정되었다. 그 밖에도 법무관법상의 특별 절차로서 신속한 점유 보호 제도인 명령(特示命令, interdicta)과 오늘날 각종 취소 제도에 상응하는 원상 회복 명령(restitutio in integ-rum) 절차가 있었다.
로마 사법 : 로마법의 특징은 후기인 전주정(專主政) 시대를 제외한다면 고전기가 끝날 때까지 사법(私法)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으며, 사회 · 경제적 기초는 자유주의 적인 화폐 경제였다. 따라서 그 기본 원리는 자유와 소유였다. 노예제는 자연법에서는 반대되지만 만민법에 의해 널리 인정되는 제도로 인식되었으며, 해방을 통해 자유를 회복하는 길이 열려 있었다. 가장인 가부(家父, paterfamilias)의 가솔(家率)에 대한 가장권(家長權, patria potes-tas)은 확고하였으며, 가부가 없는 미성숙자(남자 14세, 여자 12세 미만)와 미성년자(25세 미만)를 위한 보좌(cura)와 후견(tutela) 제도가 있었다. 여자의 법적 지위는 취약하였지만, 사회적 지위는 그에 상응하지 않고 높았다. 사적(私的) 소유에 대한 근본적인 존중은 재산법상의 여러 제도와 일찍부터 법정 상속보다 우선시되었던 유언의 자유로 나타났다. 유언의 자유에 대한 제한으로서 유류분(遺留分) 제도와 유사한 의무분(義務分) 제도가 나타난 것은 기원전 40년이었다. 로마의 물권법(物權法)과 채권법은 물권 공시(公示) 제도의 미흡, 관련 당사자에 한정된 채권 관계-그 결과 직접 대리와 제3자를 위한 계약이 인정되지 않았고, 채권 양도도 발달이 느렸지만- 등과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현대의 법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것이었다. 물건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인 점유(占有, possessio)를 소유와 구별하였고, 다양한 형태의 제한 물권들(각종 역권과 기타 담보 물권)을 알고 있었으며, 다양한 형태의 계약(문답 계약, 낙성 계약, 요물 계약, 무방식의 약정 등), 기타의 채권 발생 원인(불법 행위, 부당 이득, 사무 관리 등)이 풍부한 사례를 통하여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때그때 사례를 일관성 없이 해결하는 단순한 결의론적(決疑論的) 법학이 아니라, 구체적 타당성에 비추어 나름내로 독특한 정론(定論, dogma)과 이론적 배경을 가진 법학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로마 형법 및 형사 소송법 : 현실주의자였던 로마인들은 공법 분야가 순수한 법률 논리만의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법률가들 역시 그에 비례하여 공법 문제들을 덜 다루었고, 그 결과 공법은 사법에 비하여 덜 발전하였다. 형법의 영역에 있어서 일찍이 결과에 대한 책임을 극복하여 과실주의 원칙을 확립하였으나, 미수범(未遂犯)과 공범의 처벌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기수범과 정범(正犯)의 경우와 별다른 구별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공동체의 범죄자에 대한 자구(自救) 행위는 공동체 자체에 대한 범죄(perduellio)에 국한하고, 개인에 대한 범죄는 사인(私人)의 피의 복수에 맡겼으나, 이미 12표법에서 혈수(血讐)를 제한하고 국가가 개입하게 되었다. 민회와 여러 정무관에 의해 행사되었던 형사 사법(司法)은 법정 절차와 심판 절차의 분리가 없었다. 기원전 149년에 설치된 배심 재판 제도인 상설 사문소(常設査問所, quaestiones perpetuae)는 종전의 심리원(審理員, recuperatores) 법원을 대체하여 이후 제정 시대 200년 동안 일반 형사 법원으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사인(私人) 소추가 특징이었다. 그러나 제정 시대에는 황제의 재판이 발달하면서 상소가 정규화되고, 3세기에는 상설 사문소가 비상 심리 절차로 대체되었다. 죄형 법정주의(罪刑 法定主義)와 같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사상은 아직 완전하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변 모] 로마법의 쇠퇴 : 로마법은 고전기를 지나 3~4세기를 거치면서 화폐 경제의 퇴조, 외래 요소에 의한 로마 문화의 침윤(浸潤), 정치적 · 사회적 동요 등으로 말미암아 개인주의적 · 자유주의적 색채를 잃고 점점 더 국가 규제적인 행정 법규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테오도시우스 칙법집》). 또 법학의 수준도 크게 낮아져서- 이른바 '비속법' (卑俗法, Vulgarrecht) 안정을 추구하는 단순화 경향이 나타났고, 법학 교육을 위한 법 학교의 등장도 이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법 학교는 고전기의 법률가들의 저작을 교육 · 연구함으로써 고전 법학의 전통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입법 작업에 기초를 제공할 수 있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로마법의 발전은 《로마법 대전》의 제정과 더불어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의 발전은 비잔틴법사의 영역에 속한다.
로마법과 교회 : 로마는 처음에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고 처형하였지만, 그것은 정치적이기보다는 로마 제국의 이데올로기 및 황제 숭배와 관련된 종교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로(Nero, 54~68) , 도미티아누스 (Domitianus, 81~96), 데치우스(Decius, 249~251),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253~260),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와 같이 반그리스도교적인 법 정책을 강하게 폈던 황제들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교에 대체로 관용적이었으며, 244년에는 최초의 그리스도교도 황제 아랍스(Philippus Arabs, 244~249)가 등장하였다. 그리스도교가 4세기 초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us I , 306~337)에 의하여 공인된 후 법의 영역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특히 약자 보호를 위한 후견의 법 정책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그러나 형사 피의자나 피고인에 대한 처우는 그리스도교화한 후에 오히려 가혹해진 면도 발견된다. 교회는 교회법을 발전시키면서 법 생활 면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주교 중재 청문 절차(episcopalis audientia)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칙법 휘찬>이 "지고한 삼위 일체와 가톨릭 신앙에 관하여, 그리고 아무도 감히 가톨릭 신앙을 공개적으로 다루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라는 장(Cod. 1. 1tit.)으로 시작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국가법이 교회의 문제를 적극 규율하기에 이르렀다.
흔히 로마법과 교회의 관계를 논할 때 거론되는 "교회는 로마법에 따라 생활한다" (Ecclesia vivit lege Romana)는 말은 원래 게르만족의 대이동기에 법규 적용의 원칙이었던 속인주의(屬人主義)를 표현하는 것으로, 교회가 이미 '로마인' 의 관념을 지니게 되었음을 잘 보여 주는 것이지만, 나아가서 로마법이 교회 속에 계속 살아 있음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였다. 교회는 고대 후기에 로마의 국가 교회로 생성되었으며, 교회는 '제국의 모방' (imitatioimperii)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교회의 실체법과 절차법의 법규범들도 로마법을 수용한 것이 적지 않은데, 혼인 성립과 관련된 합의주의(consensus facit nuptias)가 하나의 예이다. 로마법은 《테오도시우스 칙법집》, 《알라릭 초전(抄典)》(Breviarium Alaricianum, 506), 기타 로마법 사료로부터 다양한 교회의 법규집들, 가령 《아벨라 교회 법규집록》(Collectio Avellana, 553경), 《가(假) 이시도로 법령집》(Decretales Pseudo-Isidorianae, 9세기), 《랭스의 힝크마르》(Hincmarus Remensis, 882), 《보름스의 부르크하르트 법령집》(Decretum Burchardus Wormatiensis, 1012경), 《그라시아노 법령집》(Decretum Gratiani, 1140경)의 교회 법규집에 받아들여졌다. 중세 교회의 로마법은 비록 일부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역사적인 연속성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로마법의 부흥에 의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로마법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교회법은 로마법적인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법과 신학적 유산의 조화로서 제3의 교회 법학적인 것이었지만, 로마법은 교회의 조직과 각종 제
도에 두루 영향을 미침으로써 서양에서 최초의 근대 국가로 평가받는 이른바 법적 교회' (Rechtskirche)의 성립 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교회법 대전》이 로마법의 인용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러나 교회의 로마법에 대한 태도에는 변화가 있었다. 더 이상 변화에 노출되지 않은 고정된 권위로서의 로마법에 대하여 생동하는 교회의 살아 있는 법인 교회법이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화적 · 정치적 로마 이념을 바탕으로 독일의 황제법으로 인식된 로마법에 대하여 교황권을 옹호하기 위한 교회의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더욱 촉진되었다. 성직자들이 로마법을 공부하는 것을 금지한 조치들은 이러한 상황들이 반영된 조처였다.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로마법 강의를 금지한 교황 호노리오 3세의 교령 〈수페르 스페쿨람〉(Super specu-lam, 1219)이 대표적인 예이다. 교회법과는 별도로 가톨릭 윤리 신학도, 특히 17~18세기 스페인의 제2 스콜라학 전성기의 윤리 신학은 로마법의 배경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다.
〔연구 동향] 역사적으로 로마법에 대한 연구는 11~12세기에 로마법의 텍스트, 특히 <학설 휘찬>이 알려지면서 이탈리아 중부의 볼로냐(Bologna)를 중심으로 주석 학파가 발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현실의 법률 문제 해결에 로마법을 원용하고자 하는 법률학적 연구 방향, 즉 14~15세기 이탈리아의 주해학파, 16세기 이후의 실무 법학인 '로마법의 현대적 적용' (usus modernus), 18~19세기의 판덱텐(pandekten) 법학 등과 로마법의 역사적 원형을 학문적으로 밝히고자 하는 역사학적 연구 방향, 즉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중심이 된 인문주의 법학, 전아 법학(典雅法學, Elegante Jurisprudenz) 등이 교착(交錯)하였다. 또 근세의 자연법론과 같이 새로운 방법론을 동원 하되 법규범의 실질적 내용은 로마법에서 많이 차용해서 쓴 법 이론도 발견된다. 특히 유럽 대륙의 경우에는 15세기 이후 본격화된 '로마법의 계수(繼受)' 과정을 통하여 로마법은 유럽의 보통법(jus commune)이 되었고, 20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적어도 보충적 현행법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18~19세기 역사 법학파의 등장은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체계적인 실정 법학으로서의 판덱텐 법학으로 이어졌지만, 또한 로마법에 대한 순수한 역사적 연구를 촉발하여 중요한 법 사료의 편집과 고전 텍스트의 복원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고전성(古典性)의 숭상은 급기야 방법론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과도한 원문 수정(interpolationes) 비판을 초래하여 1950년대까지도 학계를 지배하였으나, 1970년대 이후로는 대체로 극복된 상태이다.
현재 세계의 학계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현실 법학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로마법에 대하여 국경을 초월한 학문적 연구를 하고 있다. 로마법과 불가분하게 결합된 법과 역사의 두 측면은 연구자에 따라서, 또 로마법이 각국의 법학 교육상 차지하는 위상에 따라서 비중이 다르게 취급되지만, 적어도 현행법, 특히 민법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입문 학문 및 보조 학문으로서의 중요성은 확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통합의 기운에 힘입어, 공통의 법 전통을 형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던 로마법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
극동 문화권에서는 일본이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로마법을 공부하기 시작해서 한 세대 후에는 연구자를 배출하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세대에 의한 재출발이 있었다. 우리 나라는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로마법을 접하게 된 이래로 대학 강단에서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비로소 본격적인 연구가 가능하게 된 1980년대 중반 이후에도 연구 인력이 거의 전무하고, 연구 여건이 열악한 상태에 처해 있다. 중국은 개방 정책 이후 서양의 학계와 직접 손을 잡고 로마법 연구에 힘을 쏟고 있지만, 대만의 경우에는 연구가 미미한 실정이다.
[영향 및 의의]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로마법의 영향은 문명사적인 것이다. 그것은 서양의 모든 문물의 뿌리를 그리스 · 로마의 고대 문명, 게르만의 역동적 요소, 그리스도교라고 하는 세 가지 요소로 설명할 때, 로마의 기여가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분야가 바로 로마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고대 지중해의 문명을 꽃피웠던 그리스 · 로마의 요소 중에서 예술과 철학, 문학과 사상을 전수해 준 그리스의 역할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법과 행정의 공적 부문에 있어서 로마인들이 발전시킨 법적 사고와 규범적 내용은 중세에 로마법이 재발견된 이래로 서양의 법 문화의 핵심 요소가 되었으며, 근세 이래의 법전 편찬 과정에 거의 그대로 수용되었고, 우리 나라를 포함하여 서양의 법과 법학을 받아들인 모든 나라에서 그 영향이 계속되고 있다. 로마법은 인류의 위대한 문화 유산 중의 하나이다. (→ 《교회법전》 ; 로마 제국)
※ 참고문헌 李太載, 《로마法》, 도서출판 眞率, 1990/ 崔秉祚, <法學의 源流를 찾아서>, 《로마法研究》 I,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5/ 玄勝鍾, 《로마法》, 一潮閣, 1987/ 池東植 편역, 《로마 帝國과 基督教》, 한국신학연구소, 1986/ 프레데릭 헨리 로슨, 梁彰洙 · 全元烈 역, 《陸法入門》, 博英社, 1994/ 船田亨二, < 口 一一法》, 1~5, 東京 : 岩波書店, 1971/ 柴田光藏, 《古代 1-7 物語》 I~II, 東京 : 日 本評論社, 1991~1992/ J.A. Crook, Law and Life of Rome, London, Thames and Hudson, 1967/ A. Arthur Schiller, Roman Law. Mechanisms of Development, New York, Mouton Publishers, 1978/ H.F. Jolowicz, Historical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Roman Law, Cambridge Univ. Press, 1954, 1967/ Franz Wieacker, Römissche Rechtsgeschichte, ErsterAbschnitt : Einleitung, Quellenkude. Friihzeit und Republik, Miinchen, C.H. Beck, 1988/ Gerhard Dulckeit . Fritz Schwarz . Wolfgang Waldstein, Romische Rechtsgeschichte, Miinchen, C.H. Beck, 7. Auflage, 1981/ Franz Wieacker,Vom romischen Recht, Stuttgart : K.F. Koehler, zweite, neubearbeitete underweiterte Auflage, 1961/ Michel Villey, Le Droit Romain,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huitième édition, 1987/ Marta Sordi, The Christians and the Roman Empire,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4/ Jean Gaudemet, Études de Droit Romain, I~Ⅲ, Napol, Jovene Editore, 1979/ Hamilcar S. Alivisatos, Die kirchliche Gesetzgebung des Kaisers Justinian I, Berlin, Trowitzsch & Sohn, 1913/ Alexander Beck, Romisches Recht bei Tertuliian und Cyprian, Halle (Saale), Max Niemeyer Verlag, 1930/ Jacques Foviaux, De I'Empire Romain a la Féodalité I, Paris, Droit et Institutions, Economica, 1986/ Harold J. Berman, Law and Revolution. The Fomation ofthe Western Legal Tradition, Cambridge, Massachusetts and London, England, Harvard Univ. Press, 1983/ Hans Erich Feine, Kirchliche Rechtsgeschichte. Die katholische Kirche, Köln· Wien : Böhlau Verlag, fùinfte, durchgesehene Auflage, 19721 Myron Piper Gilmore, Argument from Roman Law in Political Thought 1200~1600, New York, Russell & Russell, 1941, 1967/ Paul Koschaker, Europa und dasromische Recht, München . Berlin, C.H. Beck, vierte, unveränderte Auflage, 1966/ Franz Wieacker, Privatrechtsgeschichte der Neuzeit, Göt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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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법
法
[라]Jus Romanum · [영]Roman 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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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기원전 186년의 로마 원로원 법령을 새겨 놓은 청동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