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 독일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도회 회원. 세례명 에우세비오. 한국명 노안락(盧安樂). 1879년 2월 12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교구의 메링에서 태어나, 1920년 4월 5일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종신서원을 한 후 1924년 3월 20일, 필리핀 디날루피한의 상 베니토로 파견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같은 해 9월 3일 한국에 입국하여 서울 백동(柏洞, 현 惠化洞)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에 도착하였다. 건축가였던 로마이어 수사는 동료 수사들과 함께 덕원의 수도원과 신학교 건축 공사에 직접 참여하여 목공 일과 철공 일을 비롯하여 철근 콘크리트 일 등을 맡아 하였다. 그 후 1938년 9월 23일에 발생한 화재로 덕원 신학교 건물이 불타자 신축 교사의 공사 감독을 맡기도 하였다.
8 · 15 광복 후 북한 지역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자 베네딕도 수도회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49년 5월 9일 교구장 사우어(B. Sauer, 辛上院) 주교와 다른 독일인 신부들이 체포되었으며, 이틀 뒤인 11일에는 독일 신부와 수사들이 체포되면서 로마이어 수사 역시 체포되었다. 한편 한국인 수사들은 수도원을 떠나야 했으며 신학생들도 신학교를 떠나도록 강요당하였다.
로마이어 수사는 1949년 6월 초에 평양 인민 교화소의 지시로 약 60명 정도의 서양인이 살 수 있는 집을 설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계획이 변경되어 6월 24일 로마이어 수사를 비롯한 서양인 수사들이 먼저 옥사독 수용소로 끌려가 수용소로 이용될 집 수리를 하였다. 86일 동안의 평양 감옥소 생활을 끝낸 신부들과 수녀들이 그 해 8월 6일 옥사독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평양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5명의 독일인 신부들과 3명의 수사들 및 한국인 신부들은 평양 감옥에 남겨져 모두 옥사 또는 피살되었다. 그 후 로마이어 수사는 강제 노동과 극심한 궁핍 등으로 많은 고생을 겪다가 대장염이 심해져 1951년 9월 1일 옥사독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왜관 성 마오로 플라치도 수도원, 《死亡者名簿 1910~1989년》, 분도출판사, 1990/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수녀원사》, 1988/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편찬실]
로마이어, 에우세비오(1897~1951)
Lohmeier, Euebhus(1897~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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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로마이어 수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