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 정경에 속하는 바오로의 14개 서간 중 가장 긴 서간. 이 서간은 바오로 사도의 생애 완숙기에 작성되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풍부한 체험과 성숙한 신학적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친저성] 극소수의 학자들을 제외하고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의 저자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한다. 아마도 로마서의 친저성(親著性)을 최초로 증언한 사람은 마르치온(Marcion)일 것이다. 139/140년경 로마에 도착한 마르치온은 분노하고 복수도 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구약성서와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예언자들에 의해서 증언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자신의 이단적 교리에 부합된다고 여겨지는 10개의 바오로 서간과 나름대로 수정하여 재편집한 루가 복음서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였다. 그는 로마서를 바오로의 서간들 중 주요 서간의 하나로 받아들였다.
가장 오래된 신약성서의 정경 목록으로 알려진 무라토리오 정경 목록에서는 바오로가 고린토서와 갈라디아서 다음에 로마서를 썼다고 설명하고 있다. 교부들 가운데 최초로 로마서에 대한 바오로의 친저성을 증언한 이는 리용의 주교 이레네오(Irenaeus, 130~200경)였다. 그는 로마서 5장 17절을 간접적으로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로마인들에게 이야기하면서 바오로는 '은총과 의로움의 은혜를 풍부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더욱더 생명 안에서 지배할 것' 이라고 선언한다"(《반이단론》 3, 16). 이후 4세기 초에 활약한 최초의 교회사가 에우세비오는 바오로의 14개 서간에 대해 언급하면서 로마서가 바오로의 친저임을 명백히 하였다. 에우세비오의 주장은 오리제네스(210-250경), 테르툴리아노(193~216경),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190~200경)의 증언과 완전히 일치한다.
바오로의 이름을 대지 않고서 그의 서간들을 자유롭게인용한 예는 이들보다 훨씬 이전인 사도 교부 시대까지 올라간다. 이 시대의 교부들은 자신들이 인용하는 하느님의 거룩한 분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습성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글에서 바오로 서간의 내용을 알아보기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포(+155)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자신의 서한(6, 2)에서 로마서 14장 10절과 12절, 고린토 후서 5장 10절의 내용을 반영시키고 있다. 바오로를 가장 존경하던 교부들 중의 하나인 로마의 주교 글레멘스(9092~101?)는 고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자신의 서한에서, 바오로 사도가 일찍이 고린토 교회의 분열 상태를 보고 질책한 내용(1고린 3, 1-9)을 상기시키고 있다. 같은 서한 25장 5-6절에서는 로마서 1장 29 -32절에 나오는 악덕의 목록 중 몇 개(불의, 악행, 탐욕 등)가 순서까지 일치하여 나타난다. 2세기 초에 로마에서 순교한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가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로마서가 많이 인용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은 바오로의 서간들이 초대 교회 초기부터 소중히 보존되고 폭 넓게 읽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특히 로마서는 바오로의 주요 서간들인 고린토전 · 후서, 갈라디아서와 더불어 초대 교부들 사이에서 가장 폭 넓게 인용되고 있는데, 이 서간의 바오로 친저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주요 서간들의 친저성도 부인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왜냐하면 문체와 사상 면에 있어서 이 4개의 서간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로마서의 첫머리(1, 1)에서 스스로 명확히 밝힌 친저성을 부인할 이유가 없다.
[집필 장소] 로마서의 주석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바오로가 이 편지를 고린토에서 썼다고 주장하였다. 그 첫 번째 근거로 16장 1절 이하의 내용을 들 수 있다. 거기에서 바오로는 겐크레아(Κεγχρεαί) 교회의 여성 봉사자 페베(Φοίβη)를 로마 교회의 신자들에게 추천하면서 주님안에서 따뜻이 영접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런데 이 여신도가 활동하던 겐크레아는 고린토 동쪽에 위치한 항구였다. 두 번째로 바오로는 16장 23절에서 그를 환대해 준 집주인 가이오(Γάϊος)의 안부를 전한다. 가이오는 고린토 교회에서 바오로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다(1고린 1, 14). 세 번째로 같은 곳에서 바오로는 가이오와 더불어 재무관 에라스도(Έραστος)의 문안도 전하고 있다. 이에라스도가 고린토의 시민이라는 사실은 디모테오 후서 4장 20절과 사도 행전 19장 22절에서 밝혀지고 있다. 더욱이 고린토에서 발견된 한 도로 포장 돌에는 "에라스도가 자비(自費)를 들여 이 돌을 깔았다" 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는데, 이는 에라스도를 고린토의 한 관리로 소개한 로마서의 기록과 부합한다.
[집필 연대] 로마서의 집필 장소를 밝히는 것과는 달리 집필 연대를 측정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고린토를 집필 장소로 확정 지은 만큼, 집필 연대의 측정은 바오로의 고린토 방문과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사도 행전과 고린토 후서의 증언을 바탕으로 바오로가 최소한 세 번에 걸쳐 고린토를 방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기록상에 나타난 이 세 번의 방문 가운데 어느 경우에 바오로가 로마서를 작성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을까?
사도 행전에 의하면 바오로의 첫 번째 고린토 방문은 두 번째 선교 여행 때였다(15, 36-18, 22). 이 여행은 예루살렘 사도 회의가 끝난 직후에 시작되었다(15, 30. 36) . 일반적으로 이 회의가 열린 때를 50년경으로 잡는데 이 연대가 맞는다면 바오로의 두 번째 선교 여행은 50/51~53/54년경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로마서가 작성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바오로는 이 서간을 쓴 시기가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에 대한 선교를 거의 마칠 때였다고 밝히고 있는데, 마케도니아(그리스 북부)와 아카이아(그리스 남부)를 중심으로 한 두 번째 선교 여행에서는 이 지역에 대한 바오로의 전도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리리쿰에 이르기까지 두루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 전했습니다... 이제 나는 이 지방에서 할 일거리도 이미 없거니와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품어 왔습니다”(로마 15, 19. 23).
바오로의 두 번째 고린토 방문은 53/54~57/58년경에 이루어진 그의 세 번째 선교 여행(사도 18, 23-21, 16) 동안에 있었다. 이 방문은 고린토 후서 12장 14절과 13장 1절 이하에 암시되어 있는데, 바오로 개인에게는 몹시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사도의 열정적 전도 활동이 제대로 이해를 못 받고 고린토 공동체의 여러 가지 약점들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2고린 12, 14-21). 더욱이 바오로가 예루살렘 교우들을 위한 모금을 독려하기 위해 디도와 다른 협조자를 보낸 사실(1고린 16, 1-4)에 대해서 고린토 교우들은 자신들의 재물을 '등쳐먹으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2고린 12, 14-18). 그래서 바오로는 자신이 오랫동안 머물던 에페소(사도 19, 8. 10 ; 20, 31)를 떠나 급히 고린토를 방문하였으나 상황은 전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곳 신자 대부분이 바오로를 반대하는 자들의 선동에 동조하여 그에게 등을 돌렸고, 심지어 어떤 남자 교우는 바오로를 공개적으로 모욕하였다(2고린 2, 5-11 ; 7, 12). 다시 에페소로 돌아온 바오로는 이른바 '눈물의 편지' (2고린 2, 4)를 써서 고린토 신자들에게 보냈다. 고린토 후서에서 1-9장보다 먼저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10-13장이 바로 이 눈물의 편지 단편인데, 여기서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고린토 신자들의 회심을 촉구하고 있다. 이처럼 급하고 절박한 정황 때문에 바오로가 두 번째 고린토 방문시 로마서를 작성할 수는 없었으리라고 본다.
바오로의 세 번째 고린토 방문은 그의 세 번째 선교 여행의 마지막에 시도되었다. '눈물의 편지' 를 디도의 손에 들려 보낸 바오로는 디도가 고린토에서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였다(2고린 2, 12-13 ; 7, 5). 마침내 바오로의 편지를 가지고 간 디도가 돌아와서 전해 준 소식은 뜻밖에도 고린토 신자들이 회개하여 바오로와 화해하기를 바라고 그에게 모욕을 준 남자 교우도 처벌하였다는 희소식이었다(2고린 2, 5-11 7, 6-16). 바오로는 용서와 기쁨으로 가득 찬 편지를 고린토 교회에 다시 써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고린토 후서 1-9장의 내용이다. 디도와 다른 두 형제(2고린 8, 6. 17-18. 22 ; 9, 3)는 바오로의 편지를 들고 다시 고린토 교회로 내려가 예루살렘 교우들을 위한 모금을 재개하고(2고린 8-9장 : 로마 15, 25-31) 바오로의 세 번째 고린토 방문을 준비하였다. 곧 이어 고린토에 도착한 바오로는 그곳에서 지내는 석 달 동안(사도 20, 3) 평화롭고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자신의 신앙과 선교 여행의 체험을 바탕으로 원숙한 사상과 신학을 총정리하여 신약성서 서간문 가운데 가장 깊고 방대한 로마서를 집필하였다.
로마서의 집필을 마친 바오로는 원래 그리스로부터 직접 해로로 팔레스티나까지 가려고 하였으나, 바오로와 적대 관계에 있는 유대인들과 한 배로 장기간 여행할 경우, 그들이 쉽게 공격할 수 있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우선 마케도니아까지 육로로 가기로 하였다(사도 20, 3). 더욱이 모금한 돈을 금으로 바꾸어 운반해야 했던 상황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에 있는 교우들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자선을 하고 싶어하였기에 그곳에 들러야 했다 (로마 15, 25-26). 그래서 바오로와 그의 일행은 마케도니아 지방을 두루 거쳐 그곳 필립비 항에서 배를 타고 트로아스까지 간 다음, 그곳에서 밀레도스와 로도스와 바다라를 거쳐 페니키아로 항해하였다(사도 20-21장). 이상의 고찰을 바탕으로 우리는 로마서의 집필 연대를 바오로의 세 번째 선교 여행 마지막 해인 57년이나 58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간의 수신자] 로마서의 수신인은 물론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이다. 하지만 서간의 수신자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음으로 가능하다. 우선 로마에 어떻게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을까? 로마 교회의 설립과 성장에 대한 정확하고 믿을 만한 역사적 기록을 전해 주는 문헌은 거의 찾을 수 없다. 다만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가 120년경에 집필한 《클라우디우스의 생애》의 한 대목이 로마에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클라우디우스(Claudius)는 크레스토스라는 한 인물의 선동을 둘러싸고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였다"(25, 2). 여기서 크레스토스는 크리스토스의 또 다른 표기로서 로마에 있는 유대 공동체에 커다란 위협과 불안으로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수에토니우스의 보고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칙령을 반포한 49년 이전에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들어왔고, 이로 인하여 옛 유대교 신앙을 고집하는 유대인들과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인 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심각한 갈등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로마 교회의 정체를 최초로 명확하게 밝힌 문헌은 암브로시아스켈로 알려진 4세기 라틴 교부의 《로마서 주석서》 서문이다. 그는 로마 교회가 사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유대적 형태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심은 몇몇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창립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이 교부의 증언은 사도 행전 15장 1절과 21장 17-24절에 언급된 예루살렘 교회와 지역 교회 사이의 협력 관계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사도 행전의 저자는 유대 선교사들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견되고, 그들이 다시 모(母) 교회로 돌아와서 보고하는 선교 관례를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들과 관련하여 사도 행전 2장에 묘사된 오순절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모여든 청중 가운데는 세계 여러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또는 유대교 개종자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를 창립한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물론 사도 행전의 모든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에 그것을 바탕으로 로마 교회의 창립 절차를 규명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위에 언급한 기록들을 통하여 바오로나 다른 사도들 이외에 예루살렘 교회와 관련을 맺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로마 제국 여러 곳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바오로의 서간을 보면 베드로가 로마 교회의 창립자라거나 바오로가 로마서를 쓰기 전에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런 사실을 부인할만한 근거가 바오로의 서간들 여기저기에서 드러난다(로마 15, 20 ; 2고린 10, 15 이하 : 갈라 2, 7). 베드로의 선교활동을 묘사한 고린토 전서 9장 5절에서도 그가 어느 교회를 창립했다는 이야기는 빠져 있다. 로마서에서도 로마 교회에 복음을 전한 사람에 대한 보고가 나올 만한 대목에 어느 누구의 이름도 거명되지 않고 있다(1, 8 이하 ;15, 14 이하). 그러므로 로마 교회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온 것은 어떤 사도나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로마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유대 공동체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 사이의 자연스러운 교류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사이의 종교적 연결은 아마도 사도 행전 6장 9절에 언급된 '자유인들' 의 회당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자유인들' 이란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티나를 정복한 후 전쟁 노예로 잡아 로마로 끌고 갔다가 2년 후에 풀어 준 유대인들의 후손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로마의 디아스포라 공동체 안에서 강력한 그룹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예루살렘에서도 그들만의 회당을 지닐 만큼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정보와 물자를 교환하기 위해서는 여행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로마의 인구는 100~150만 정도였고, 이들을 위한 식량 공급이 해상 선박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화물선 이외에도 수많은 여객선이 3월 초부터 11월 중순까지 지중해 연안을 항해하였다. 해로와 더불어 육로를 통해서도 로마로 손쉽게 여행할 수 있었으며, 로마로 통하는 20개의 주요 도로와 수많은 간선 도로는 정확한 이정표에 따라 제국내의 여러 지역을 원활하게 연결시켜 주었다. 나아가 당시 지중해 연안 모든 지역에서는 '로마의 평화' (Pax Romana)로 불린 정치적 상황에 의해 안전하고 신속한 여행이 보장되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로마를 찾았다. 안정된 주거를 찾아서, 사업과 무역을 위해, 전문직에 종사하려고, 유학할 목적으로, 체포를 피하고자, 대도시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군 복무에 징집당해서, 친척과 친구들을 방문하기 위해 세계의 수도 로마로 모여들었다. 이런 목적들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배제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로마서의 수신자와 관련된 두 번째 질문은 로마 교회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두 가지 주장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 교회가 주로 유대인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요,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이 이 공동체의 주축이 되었을 것 이라는 주장이다.
첫 번째 주장의 근거로는 유대인인 바오로가 서간의 수신자들을 '우리' 라고 부른 로마서 3장의 율법 논쟁 대목을 들 수 있다. 곧 '우리' 는 그리스도인들과 대비된 유대인들을 말한다는 것이다. "우리(유대인들)라고 뛰어난 게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실상 헬라인들(Ἕλληνας)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모두 죄 아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앞서 논증한 바 있습니다"(로마 3, 9). 그러나 바오로가 여기서 말하는 '우리' 는 '나와 다른 모든 믿는 이들' 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다음 제시되는 구절은 율법에 대해 언급한 7장 1절이다. "형제 여러분, 실상 나는 율법을 잘 아는 분들에게 말합니다만, 율법이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만 그를 지배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그러나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구약성서나 율법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십계명이나 유대교의 관습 또는 규범만을 뜻하는 좁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법 전체를 가리키는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근거로 제시되는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을 주제로 하는 로마서 9-11장의 논담이다. 그러나 이 논담의 독자가 반드시 유대인들이라고 확증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바오로가 유대인들을 '그들이, 그들의, 그들을' 등의 3인칭으로 일컫는 것으로 보아서(9, 4 ; 10, 1: 11, 20. 24-36), 그가 염두에 둔 독자는 이방 세계로부터 유대교로 돌아선 개종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로마서의 수신인을 유대인들로 보는 견해를 지지하기 위한 마지막 근거로서 로마서 전체를 관통하는 논리적 토론 기법' 이 제시될 수 있겠다. 이 논리적 토론 기법은 주로 질문과 응답으로 되어 있는데 랍비들이 즐겨쓰던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질의 응답식 토론 기법은 그리스인들(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고 바오로가 이 기법을 채택하게 된 것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반대자들의 반론을 미리 의식하고 예상되는 그들의 질문을 스스로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주장인 로마 교회가 이방인들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다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되는 구절들은 아래와 같다. "이분을 통해서 우리는 은총과 사도직을 받았으니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민족들 가운데에 신앙의 복종을 (설파하기) 위함입니다. 그중에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로마 1, 5-6). "그것은 다른 이방 민족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서도 약간의 열매를 거두기 위함이었습니다" (1, 13b). "그러나 나는 이방 민족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방 민족들의 사도인 만큼 내 직무를 소중하게 여깁니다"(11, 13).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내게 주어진 은총에 힘입어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해드리려고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썼습니다만··(이 은총은) 내가 이방 민족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공복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에 제관으로서 종사케 하려는 것이고, 그리하여 이방 민족들의 봉헌이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15, 15-16). 또한, 15장 9-18절에는 '이방 민족들' (ἔθνος)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반복해서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바오로는 문안을 부탁하는 자리에서 자기 친척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는데(16, 7. 11. 21), 이 사실도 로마 교회가 이방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공동체였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위의 구절들은 반박할 여지없이 로마 교회의 구성원들이 대부분 이방인들로 구성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방인 출신 교우들과 유대 출신 교우들이 어떤 비율로 이 공동체 안에 자리잡고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로마서 수신자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부언할 수 있다. 첫째, 초대 교회의 공동체들은 가옥이 비교적 넓은 집 안에서 집회와 예배를 가졌다(사도 12, 12 ; 16, 15. 40 : 로마 16, 5 ; 1고린 16, 19 ; 골로 4, 15). 로마 공동체에 이런 사가(私家) 교회들이 몇 개나 있었는지는 모르나, 여러 그룹에 대한 바오로의 문안(로마 15, 5. 14-15)은 이 큰 도시에 다수의 사가 교회들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 사가 교회들 가운데 유대인들이 대다수를 이루는 모임이 존재할 수 있고, 바오로가 이들에게 서신을 보낼 경우 그 서신은 유대적 색채를 띠었을 것이다. 둘째, 로마서에서 중요하게 부각된 신학적 구도와 전망은 서간의 독자가 유대인들이냐 이방인들이냐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들 전체, 나아가 인류 전체의 의화(義化) 문제 또는 구원 문제였다(특히 로마 3, 23 ;10, 12-13).
[집필 동기와 주제, 목적] 로마서의 집필 동기와 목적을 밝히기 위해 최근까지 수많은 논문과 의견들이 발표 되었다. 편의상 집필 동기는 바오로가 로마서를 써 보내게 된 직접적인 계기와 정황을 뜻하고, 집필 목적은 이 서간을 작성하면서 바오로가 로마 교회의 신자들에게 전해 주려고 했던 메시지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로마서의 집필 동기는 바오로의 로마 방문 계획과 연결되어 있다. 바오로는 제국의 동부 지역에 대한 선교를 거의 완결 짓는 시점에서 한 가지 남은 일인 예루살렘에 모금된 돈을 전달하는 일을 마치고 로마 교회를 방문할 작정이었다(15, 23). 그가 로마를 방문하려는 이유는 주석가들이 흔히 생각하듯 율법 폐기론자들의 잘못을 고쳐 주기 위해서거나, 스페인의 복음화에 앞서 로마를 선교 근거지로 삼기 위해서라는 등의 순전히 신학적 또는 선교적 동기에서만이 아니다. 바오로는 로마를 방문하고자 하는 이유가 매우 소박하고 인간적인 동기에 의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목자로서 바오로는 자신의 친척과 친구들이 많이 모여 있는 로마 교회를 방문하여 그들을 만나 자신이 받은 영적 은사를 나누어 주고 그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정상 당장에는 그들에게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안타까운 사정과 자신의 의향을 미리 편지로 알리고자 하였다(1, 10-12 ; 15, 32) 동시에 바오로는 로마 교회 신자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간절히 청한다. 바오로가 염려하고 있었던 일은 두 가지였는데, 유대인들이 그를 죽일까 하는 염려와 예루살렘 성도들이 이방인들로부터 모금된 돈을 기꺼이 받아 줄 것인가 하는 염려였다(5, 30-31). 이처럼 로마의 교우들을 만나 보고 축복을 나누고 싶은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고 기도를 요청하기 위해 바오로는 로마서를 집필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일일이 친척과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안부를 전하는 대목에서(16, 1-21) 바오로의 따뜻하고 자상한 인품을 대하게 된다. 이처럼 로마서의 집필 동기는 단순하고 소박하다.
로마서의 집필이 단순한 동기에서 출발하였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다루는 주제는 바오로의 가장 원숙한 신학과 신앙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신학적 사고와 신앙은 부활한 그리스도께 대한 자신의 신앙 체험과 다년간에 걸친 선교와 사목 생활의 기초 위에 있다. 바오로는 여러 지역에서 전도하면서 수많은 적들을 만났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집요하고 맹렬한 공격을 한 적들은 동족 유대인들이었다. 바오로는 로마 교회도 이런 적들에 둘러싸여 끊임없는 도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서 반대자들의 가상적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밝힌다. "그러니 우리는 무어라고 말해야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되풀이함으로써(4, 1 ; 6, 1 ; 7, 7 ; 8, 31 ; 9, 14. 30), 로마 교회의 신자들을 합당한 이론으로 무장시킨다.
그런데 로마서는 결코 그리스도교 교리를 총체적으로 요약한 것이라는 견해(P. Melanchton)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로마서에는 바오로 신학의 중요한 교리인 종말론과 그리스도론이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고, 주의 만찬과 교회의 제도와 직무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매우 실용적인 사목자로서 로마 교회가 꼭 필요한 것을 취급하고자 하였고, 동시에 앞으로 로마를 거점으로 전개되고 확장될 제국의 서부 지역에 대한 선교를 감안하여 로마의 그리스도인들과 튼튼한 유대를 맺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그가 사도로서 이방인들에게 선포하는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규명하려고 하였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든 이가 죄인으로 하느님 앞에서 판정을 받을 운명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되고, 따라서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의화 사상' 또는 '구원 사상' 이 로마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1, 16-8, 39).
그러나 로마서의 집필 목적은 이 의화 사상을 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로마 교회는 여러모로 매우 신뢰 할 만한 공동체이지만(1, 8 ; 15, 14 : 16, 19), 윤리적이고 영성적인 면에 있어서 보완해야 할 점이 많았다. 복음에 대한 유대인의 비판과 잘못에 대한 광범위한 논쟁(2,17 : 3, 1-31 : 4, 1 ; 7, 13 ; 9, 31 이하 ; 11, 11), 그리스도인들의 율법에 대한 자유로움으로부터 잘못 도출해 낸 율법 폐기론이나 비윤리적인 방종의 삶(3, 8. 31 ; 6, 1. 15 : 7, 7 이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잘못된 우월감 (11, 13 이하), 믿음이 약한 이들에 대한 믿음이 강한 이들의 비판과 몰이해(14, 1-15, 7) 등에 대해서 바오로는 자상하고 정확한 지침을 내리고 있다. 동시에 로마서의 저자는 일치와 겸손과 같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덕목 (12장)뿐만 아니라 시민된 도리(13장)에 대해서도 충고와 권면을 아끼지 않는다.
의화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복음의 메시지를 논하고, 신생 교회의 미성숙함과 약점을 적절한 지침으로 보완해 주며, 필요한 충고와 권면을 통하여 공동체를 격려하는 로마서의 이 모든 귀중한 내용들은 저자 자신이 서간의 첫 장에서 밝힌 집필 동기 중 '영적 은사의 나눔' 에 연결된다. 바오로는 단순히 스페인에 복음을 전할 선교 기지를 구축할 목적으로 로마를 방문하고자 했거나,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로마서를 집필한 것이 아니다. 15장 24절의 "내가 스페인으로 가게만 되면, 나는 지나는 길에 여러분도 보고, 그리고 우선 여러분과 얼마 동안 흐뭇하게 지내다가 그곳으로 가는 여행에 여러분의 도움도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라는 내용은 "로마에 계신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려던 내 나름의 소원에는···"이라는 1장 15절의 내용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원문 비평] 바오로의 친필 로마서와 우리가 지니고 있는 그리스 원문 로마서는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 이런 문제가 제기되는 이유는 필사본들 사이에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현재의 본문 마지막(16, 25-27)에 실린 '찬송' 이 일부 사본들(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는 14장과 16장 마지막에, 현존하는 로마서 사본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명된 200년경의 체스터 베티(Chester Beatty, P46) 파피루스에는 15장 말미에만 한 번 등장한다. 서방 교회의 사본들에 영향을 준 마르치온의 본문에는 15장과 16장이 없다. 불가타와 일치하는 옛 라틴 번역본들은 마르치온의 본문에 이 '찬송' 만을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일부 시리아 번역본에서는 여기에 15장과 16장도 계속해서 이어 놓는다.
우선 문제의 '찬송' 은 바오로의 문체와 어법에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바오로의 친필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이 찬송은 초대 교회 안에서 전례의 맺음말로 사용되던 것이거나, 아니면 "오랜 세월 비밀에 부쳐 왔던 신비를 계시함으로써··예언자들의 글을 통하여 모든 이방 민족들에게 드러나게 되었다"(16, 25-26)는 내용으로 보아, 구약을 부정하고 신약만을 주장한 마르치온의 추종자들이 14장으로 끝나는 자기네 스승의 로마서 본문에 덧붙인 것일 수도 있다. 마르치온의 본문에 대해서는 오리제네스가 정확하게 증언해 주고 있다. "복음서와 서간을 손상시킨 마르치온은 본 서간에서 16장 25절 이하의 본문을 완전히 제거시켰고, 이것만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죄입니다' (14, 23)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에서부터 끝 부분까지도 모든 것을 삭제하였다"(《로마서 주석》 7, 453). 마르치온은 구약성서와 그곳에 묘사된 하느님을 거부하였는데, 로마서 15장 이후에 이 성서에 대한 증언들이 나오기 때문에 14장에서 이 서간을 끝낸 것 같다. 그러나 2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한 파피루스 사본이 이 찬송문을 왜 15장 끝에 위치시켜 놓았는지는 불가사의하다.
상이한 사본들의 유래에 대해서는 보통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 원래의 바오로 서간은 16장 23절까지로 되어 있었다. 둘째, 마르치온은 15장과 16장을 삭제시켜 로마서 본문을 축소시켰다. 셋째, 이 마르치온의 본문에 누군가가 전례적 맺음말인 '찬송' 을 덧붙였다. 넷째, '찬송' 이 곁들여진 이 마르치온 본문이 다른 곳에서 원래의 모습대로 보존된 로마서 본문과 비교되면서 위와 같은 상이한 형태의 본문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몇몇 필사본들의 다른 원문(原文)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본문은 신약성서의 훌륭하고 오래된 주요 사본들의증언에 의해 그 신빙성이 인정되고 있다. (→ 바오로 ; 의화론)
※ 참고문헌 G.C. van Engelen, De Briefvan Paulus an de Romeinen, Brugge, Desclée de Brouwer, 1969/ W.G. Kiimmel, 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Heidelberg, Quelle & Meyer, 17th ed., 1973/ E. Osty, La Bible : Traduction française sur les Textes originaux et Introductions et Notes, Paris, Seuil, 1973/ U. Wilckens, Der Brief an die Römer I, Rom 1~5, Ziirich: Benziger, Neukirchen : Neukirchener Verlag, 1978/ H. Schlier, Der Römerbrief, Freiburg · Basel . Wien, Herder, 2nd ed., 1979/ W. Hendriksen, Romans I~II,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0~1981/ Dictiomaire Encyclopedique de la Bible, Maredsous : Brepols, 1987/ 박상래 역, 정양모 주, 《고린토 후서》, 분도출판사, 1991. 〔丁太鉉〕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人 - 便紙
[라]Epistola ad Romanos · [영]Epistle tothe Rom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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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