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 帝國 [라]Imperium Romanum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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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7년부터 서기 476년까지 이탈리아 반도 및 지중해를 중심으로 약 500년 동안 지속된 제국.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285년까지의 공화제 전통이 남아 있는 원수정(元首政, principatus) 시대와 285~476년의 실질적인 전제 군주정(專制君主政, dominatus) 시대로 양분된다. 공화정 체제는 도시 국가로서는 적절한 제도였으나 지중해 세계를 포함하는 방대한 세계적 국가 운영을 위해서는 비효과적인 요소도 많았다. 로마가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대내외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였고, 공화정 말기에는 정치적 · 사회적 혼란이 수반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역량이 탁월하였던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기원전 64~서기 14)는 대내외의 난관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축하였는데, 로마 제국은 그의 통치로부터 시작되었다.
〔성립과 기반] 로마 공화정 기간(기원전 500경~31) 동안에 전쟁은 거의 끊이지 않았다. 집정관(執政官, consul)과 원로원의 통치하에서 로마는 중앙 및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하였고,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Catago)를 패퇴시켜 지중해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였다. 팽창과 정복은 계속되어 기원전 250~30년에는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티나 및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기원의 시작을 전후해서 갈리아(Gallia, 기원전 58~51)와 43년 이후에는 브리타니아(현재의 영국)까지 지배하게 되어 로마는 그야말로 세계 제국으로 확장되었으나, 이와 같은 영토 팽창 과정에서 공화정은 변질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100년경부터 독재 체제의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원로원의 파벌들이 서로 싸우고, 사회적으로는 부유 계층과 빈곤 계층, 귀족과 평민이 끊임없이 충돌하여 로마 사회는 내란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다.
내란을 수습한 군 지도자 폼페이우스(G. Pompeius, 기원전 106~48)와 체사르(G.J. Caesar, 기원전 100~44)는 크라수스(ML. Crassus, 기원전 115?~53)와 더불어 최초의 삼두정(三頭政, triumviratus)을 형성하였다. 이 과도적 정권은 체사르에 의해 장악되었다가 독재 체제를 구축한 체사르가 암살되면서 끝이 났다. 그 후 국가 질서 재건 3인 위원회가 설치되고 그것이 곧 제2차 삼두정으로 전환되었으나, 그들 사이에도 역시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 원로원 세력을 배경으로 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M.Antonius, 기원전 83?~30)의 직권을 박탈하고, 기원전 31년의 악티움(Acium) 해전에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한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격파하여 로마의 오랜 정치적 무질서 상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후 전 지중해 세계가 로마의 세력권으로 완전 통합되었으며, 공화제 전통을 고수하려는 국내 공화파의 세력 역시 완전히 후퇴하게 되었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국내외의 질서가 회복되었다는 이유를 내세워 자신에게 위임된 권력 일체를 원로원과 국민에게 반환하였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에게 국가 최고 통치권과 아우구스투스(Augustus, '신성한 자' 라는 뜻)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이로써 기원전 133년에 그라쿠스(Grachus) 호민관 형제가 개혁을 시도한 후 1세기 동안 지속되던 내란 · 부패 · 정치적 혼란은 종식되었고, 로마에는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었다.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 황제(기원전 27~서기 14)는 군사적 군주제와 전통적 공화제를 교묘히 절충하는 정치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제1 시민' (princeps)이라 호칭하고 공화제의 전통을 형식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군사적 · 정치적 · 재정적 최고권을 장악하였다. 즉 원로원과 일종의 동업을 통해 로마를 통치하게 된 셈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로마 공화정의 종말과 로마 제국의 시작 및 귀족 정치의 종식, 1인 정치의 대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내란의 재발을 방지하고 국경의 방비를 위해 군대를 개혁하였다. 군인이 제대할 때 상당한 보수와 토지를 주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도록 했으며, 장기 복무를 하는 지원병으로 조직된 상비군을 창설하여 국방을 확고히 다졌다. 로마시에 물 공급을 위한 수도를 건설하고, 방범을 위한 경찰을 편성하였다. 또한 빈곤 계층을 위한 무상 식량 배급 제도를 개선하였으며, 이탈리아 반도의 도로를 수리하고 공공 토목 공사를 추진하였다. 또한 속주(屬州)의 공납을 경감하고 징세(徵稅) 제도를 개선하는 한편, 속주 특유의 종교와 관습에 대한 로마 제국의 간섭을 배제하도록 하였다.
〔로마의 평화]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영도력으로 로마는 절정기에 달하였다. 또 그의 통치가 전반적으로 현상 유지 및 방어 정비 체제를 취하면서,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시작되었다. 그의 통치가 시작된 기원전 27년부터 아우렐리우스(Marus Aurelius, 161~180) 황제가 죽은 180년에 이르는 약 200년 간 지중해 세계는 전에 없던 정치적 안정과 평화, 질서와 효율적 행정, 번영과 문화적 황금기를 맞았다. 로마의 평화는 첫째, 로마 영토의 극대화를 달성하였고, 둘째, 대내적으로 정치 및 경제를 안정시켰으며, 셋째, 학문과 예술이 크게 진흥된 시기였다. 제정 초기에 상업은 전례 없이 번영하였으며, 통상과 항해의 범위는 중국, 인도, 브리타니아에까지 이르렀다. 지중해의 항해는 자유롭고 안전하게 되었고, 해적이 사라져 화물과 선객이 신속하게 운송될 수 있었다. 로마는 수출물보다 수입물이 더 많았으며 그 종류는 다양하였다. 전 로마 제국을 연결하는 운송 수단을 통해 금, 은, 동, 주석, 과일, 소금, 양모, 유리 제품, 피혁, 포도주, 대리석, 목재, 섬유 직물, 보석, 향수, 상아 등 다양한 상품이 스페인, 그리스, 아라비아, 시리아, 아프리카 등에서 로마로 안전하게 수송되었다.
아우구스투스를 계승한 황제들 중에는 폭군도 있었지만 대체로 유능한 황제들이 통치하였으므로 평화가 유지되었다. 로마 제국은 지중해, 동방 및 헬레니즘 세계를 통합하였으며, 행정 관료 제도와 범민족적인 법제에 의해 다스려졌다. 로마 제국은 훌륭한 도로와 교통 제도를 도입하여 전 지중해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무역을 확장하였으며, 스토아적 세계주의와 보편주의, 특히 그리스도교를 널리 지중해 세계에 전파하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의 주요한 황제는 티베리우스(Tiberius, 14~37), 클라우디우스 1세(Claudius 1,41~54), 네로(Nero, 54~68) ,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us, 69~79),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81~96), 트라야누스(Trajanus, 98~117), 하드리아누스(Hadrianus, 117~138),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이었다. 네르바(Nerva, 96~98)가 96년에 황제로 등극한 이래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을 때까지 이른바 5현제(賢帝)의 통치가 지속되었고, 이 기간에 로마 제국은 세력과 번영이 절정에 달하였다. 특히 트라야누스 황제 때 로마 제국은 최대의 영토를 영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인 콤모두스(Com-modus, 180~192)가 등극함으로써 로마의 평화도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사 회] 광대한 로마 제국은 실상 도시들의 집합체라 할 수 있었다. 수많은 도시가 로마의 문화 및 생활의 중심지였으며 고전 문명을 변경(邊境)으로 확장하는 거점이 되었다. 따라서 북아프리카, 갈리아, 브리타니아, 남부 독일 지방 등과 같은 문명의 변경에까지 그리스 · 로마의 고전 문명이 침투하였다. 새로운 도시가 세워지고 낡은 도시는 확장되었으며 로마 도시는 비교적 광범한 지역 자치권을 향유하였다. 시민권은 점차 확대되어 마침내 21년의 칙령에 의해 실질적으로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이 부여되기에 이르렀다. 사회 문제에 있어서도 많은 개선이 행해졌는데, 공화정 시대에 사회 최하층 계급이었던 노예는 제국 시대에 해방되어 시민권을 얻었으며, 그 수도 급격히 감소하였다. 공화정 시대부터 점차 개선되고 있었던 여자의 지위는, 제국 시대에 와서는 재산 취득 및 상거래에 종사할 수 있는 권리도 부여되었다. 결혼에서는 당사자인 여자의 의사가 존중되었고, 여자는 남편의 동의 없이도 유언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여인들은 자유롭게 사회 활동을 할 수 있었고, 교육의 기회도 확대되었다.
[로마법] 로마는 세계를 무력으로, 법으로, 종교로 세 번 정복하였다고 한다. 광대한 로마 제국의 약 7,000만명의 인구는 언어, 관습, 역사 및 문화적 배경에 있어서 서로 달랐으나 로마의 지배를 통해 하나의 커다란 세계 공동체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민족의 혼합체인 대제국의 안녕과 평화가 유지된 것은 로마법 때문이었다. 일찍이 로마법은 도시 국가 시대에 시민법(juscivile)으로 시작되어 공화정을 거치는 동안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마침내 전 세계를 적용 대상으로 한 만민법(萬民法, jus gentium)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므로 법적으로 모든 시민은 지역이나 출신을 가리지 않고 모두 로마 시민이 되었다. 합리적이며 정당하게 모든 인간을 공통의 원리로 지배하는 로마법은 자연법(jus naturale)에 관한 스토아적 개념을 인정한 것이었다. 세계 공동체를 건설하여 민족간의 장벽을 허물고 모든 인류에게 다 같이 적용한 합리적 법 체계를 발달시킴으로써, 로마는 이미 헬레니즘 시대에 대두했던 보편주의와 세계주의를 완성한 셈이었다. 그것은 종교와 법에서 극명하게 표현되었는데 그리스도교를 유럽 문명의 정신적 기초로 확립하였으며, 로마법을 통해 법과 권리의 개념을 체계화하였다.
〔문 학] 로마 문학은 3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는 기원전 3~2세기의 형성기로서 이때 주목할 만한 인물은 플라우투스(M. Plautus, 기원전 254~184), 테렌시우스(A. Terentius, 기원전 195~159) 등과 같은 희극 작가들이다. 둘째, 치체로 시대로서 라틴 문학의 전성기 전반부이다. 이 시기를 가장 대표하는 인물이 치체로(M.T. Cicero, 기원전 106~43)이다. 그는 웅변가였을 뿐만 아니라 라틴어 산문의 전형을 이룬 문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외에 서정 시인 카툴루스(C.V.Canllus, 기원전 84~54) 철학 시인 루크레시우스(Lucretus, 기원전 99~55), 산문 작가이며 역사가인 체사르(Julius Caesar, 기원전 100~44) 등이 이 시대의 두드러진 문인들이었다. 세 번째 시기인 아우구스투스 시대는 로마 문학의 황금기였다. 이 시대에 나온 여러 문인들 가운데 특히 베르질리우스(M.P. Vergilius, 기원전 70~서기 19), 호라시우스(F.Q. Horatius, 기원전 65~서기 8), 오비디우스(N.P. Ovidius, 기원전 43~서기 17) 같은 시인이 주목할 만하다. 베르질리우스의 <애네이스>(Ae-neis)는 로마 건국 신화에 관한 서사시이다. 호라시우스는 해방 노예의 아들로서 아테네에서 문학과 철학을 교육받았는데, 그리스적 이상이 담긴 그의 시는 자연의 단순미와 함께 일상 생활의 사치스러움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리비우스(T. Livius, 기원전 59~서기 17)는 로마의 대표적 역사가로서 방대한 저서인 《로마사》(Ab urbe conditalibr)에서 로마의 도덕성과 관습을 찬양하였다.
로마 문학은 대체로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지난 후에는 질적으로 저하되었지만 타치투스(C. Tacitus, 55~118)는 예외적인 위대한 역사가였다. 그는 공화정 전통을 존중하였으며 로마 제국 체제를 비판하였다. 그의 대표작 《게르마니아y(Gnmana)는 로마 제국의 미래에 회의를 갖고 게르만인들의 관습과 제도에 대한 기대를 표현한 역사서이다.
〔과학 사상] 로마의 과학 사상은 대체로 그리스에 비해 뒤떨어진다고 볼 수 있으나, 프톨레메우스(Polemasamus, 2세기)와 갈레누스(G.Calemus, 130~201)는 위대한 과학자였다. 프톨레메우스는 13권의 <알마게스트)(Almagese를 저술했는데, 이는 고대 천문학의 요약으로 중세기를 통해 천문학 체계의 권위적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 내용은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는 이른바 천동설을 주장한 것으로 당시의 관측과 일치하는 학설이었으며, 16세기 중기에 코페르니쿠스가 새로운 견해를 내놓을 때까지 그 권위는 유지되었다. 프톨레메우스와 같은 권위로서 오랜 동안 서양의 의학계를 지배한 것은 갈레누스의 의학이었다. 그는 동물 해부를 통해 인간 생리를 연구하였으며, 많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해부학 지식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스토아 철학] 로마의 평화 시대의 주요 철학은 스토아 철학이었는데, 그 주요 인물은 세네카(L.A. Seneca, 기원전 4서기 65), 에픽테투스(Epictetus, 50~125/130) 및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였다. 로마 스토아 학파는 우주를 이성의 지배로 보아 인간 이성을 존중하였으며, 그보다 더 우월한 힘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도덕적 가치관은 오직 이성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개인은 스스로 만족하는 존재이며 전적으로 이성의 힘에 의존하여 선(善)을 인식하며 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기 스토아 학파에서는 신이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는 필연성으로 간주되었고, 개인이 이성의 힘만으로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 최후의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성의 가장 고귀한 부분인 이성이 더 차원 높은 보편 이성, 즉 신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생각하였다.
스토아 학파는 내세의 삶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신을 개인의 구원자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를 대신하여 후기 로마 제국의 사상계를 지배한 신플라톤주의는 이성을 초월한 종교적 느낌을 철학 속으로 끌어들였다. 신플라톤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변자는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였는데 그는 영혼과 신과의 결합을 갈망하여 철학보다 신비주의가 더 우월하다고 확신하였다. 비록 플로티누스는 기본적으로는 합리주의를 유지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플라톤 철학의 또 다른 면, 즉 피안(彼岸)의 세계에 대해서도 매혹을 뿌리치지 못하였다. 그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 유일자(唯一者) 또는 신이며 그것은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믿었다. 즉 유일자는 모든 인식을 초월한 존재이며 유일자를 소유한다는 것은 신비주의적 비약을 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즉 영혼의 정화만이 그 참다운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삶의 주요 목표는 자연계를 이해하거나 인간의 잠재력을 실현하는데 있지 않고 오직 유일자를 인식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로마 문화의 특성과 의의] 특성 : 로마 문화는 후기 헬레니즘에 포함된 그리스 문화 및 기타의 선행(先行) 문화를 흡수 · 종합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로마 문화의 특성은 셋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첫째, 로마 문화의 절충적 성격이다. 로마 문화의 원천은 일차적으로 그리스에 있었으며, 그 밖에 헬레니즘, 에트루리 (Emmia) 이집트 등의 문화에 있었다. 로마 문화의 과학 사상, 철학, 의학, 지리, 역사, 문학, 연극 등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모방을 통해 선행된 문화들을 흡수하여 폭과 깊이를 부여하였으며, 한층 더 종합적이며 보편적인 문화로 체계화하였다.
둘째, 로마 문화는 실제적인 문화였다. 그들은 실용 가치를 존중하여 추상적인 이론보다는 조직적인 법제 또는 실용적인 과학 기술을 더 발달시켰다. 이와 같은 조직성과 실제성에 있어서 로마 문화는 그 이전의 모든 문화를 능가하는 독특한 것이었다. 토목 건축, 법제, 행정 조직, 화폐 제도, 도량형, 기하학, 의약, 천문학 등 실용적인면에서는 나름대로 천재성을 표출했으며 그리스 문화를 능가하였다. 신전 · 경기장 · 공중탕과 같은 공공 시설의 건축, 수도 · 도로 · 항만 등의 설치 및 개축, 산림 개발, 소택지(沼澤地) 개간, 사막의 관개 사업, 미개척 지역의 개발을 비롯한 많은 토목 건축 사업은 실로 세계 제국의 통치에 알맞는 중요한 것이었다.
셋째, 로마 문화가 행한 역사적인 교량 역할이 지적될 수 있다. 로마는 그리스 및 그 이전의 고전 문명을 서방으로 옮기고 오늘날의 유럽 중심부로 이식함으로써 이른 바 유럽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라틴어는 많은 유럽 언어의 모태가 되었고 철학은 그리스 철학을 보존하였으며, 특히 자연법 체계는 근대 유럽의 정치 사상에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었다.
의의 : 로마 문화를 단순히 그리스 문화의 모방 및 전파의 형태라며 낮추어 평가하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물론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통합한 정치적 기반 위에 그리스에서 발생한 수준 높은 독창적 문화를 중개하고 전파하였으며, 헬레니즘을 세계 문화의 차원으로 높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지적 독창성이 조직과 체계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하나의 문명으로서 확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로마 문화가 일반적으로 창조성이 결핍되고 있다고 하지만, 그리스 문화를 유럽 문명의 기반이 되도록 체계를 부여한 점에서 문화사적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더욱이 로마는 서방 문명 세계에 대해 두 가지 큰 공헌을 하였는데, 그리스도교를 유럽 문명의 정신적 기초로 확립하였고, 로마법 사상을 통해 법과 권리의 개념을 체계화한 점이다. 종교와 법은 어떠한 독창적인 문명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로마 문명의 창조적인 양상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위 기] 로마는 오랫동안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 로마의 평화와 같은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절정기에서조차 로마는 이미 쇠퇴의 조짐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는 통합 세계 제국으로서의 로마가 구조적인 결함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로마의 평화 말기에 먼저 갈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유대인들은 두 번씩이나 로마로부터의 해방 전쟁을 시도하였고, 갈리아에 서는 분리 운동이 있었고, 강제 노동과 중과세 등으로 수탈의 대상이었던 이집트 농민들은 빈번히 저항 운동을 시도하였다.
로마 경제와 사회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였다. 광대한 제국 영토 내의 교통은 느릴 수밖에 없어 원거리 통상의 장애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로마 도로는 주로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되었으므로 상거래나 교역에는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富)는 축적되었지만 상공업에 대한 재투자는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특히 실업 인구의 증가, 구매력의 저하로 인한 산업의 정체, 무상 식량 배급에 익숙한 도시민들의 노동력 저하, 저가 곡물 정책으로 인한 농업 생산 감소, 도시민의 식량을 위한 농민 희생 정책 등은 경제적인 문제일 뿐 만 아니라 심각한 사회적 위기 요인으로 등장하였다. 농민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유입되고 그 결과 도시 무산 대중이 증가하였으며, 식량 무상 배급의 증가와 농산물의 저가 유지라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농촌은 결국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직면하게 되었고, 제국 내의 일부 상층 계급만이 부유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경제적 이득을 보게 된 상층 계급에서는 사치와 향락이 만연되는 반면 도시 빈곤 계급은 정치적 ·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도시 빈민의 불만은 빈번히 폭동으로 이어졌고, 도시민에게 값싼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농민을 희생시킴으로써 도농간(都農間)의 문화적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경제적 난국 및 사회적 위기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로마는 또한 사상적 위기를 겪게 되었다. 로마인들 사이에는 점차 고전적 휴머니즘의 합리적 가치관을 포기하고 그 대신 동방 종교에서 정신적 위안을 찾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 · 로마 고전 문명이 지닌 독창적 기운은 상실되어 갔고, 로마 문화를 지탱하던 고전 휴머니즘의 가치관은 신비주의적 종교 운동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미 헬레니즘 시대부터 진행 중이던 시민적 자유 및 소속감의 이완, 과학 정신의 쇠퇴, 합리주의에 대한 회의, 신비주의적 경향의 대두는 로마의 평화 시대를 거치면서, 특히 도시 문화의 변질과 농촌의 황폐화를 계기로 더욱더 분명하게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표출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전적 가치관의 전환을 가리키는 분명한 표현이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각종 계층의 사람들은 동방의 신비주의에 접할 기회를 가졌다. 후기 로마 제국에 이르러 신비주의 종교들은 대중을 사로잡고, 신비 철학은 교육받은 엘리트 계층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세속적 가치관은 종교적 경험보다 열등하게 느껴졌고 로마 세계의 문화는 신에 대한 탐구가 모든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문명사적 배경 아래 그리스도교는 모든 다른 종교를 이겨내고 로마 제국의 공식적 종교가 되었으며, 후기 로마 제국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와 함께 서양 문명은 새로운 방향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로마 멸망의 폐허 위에 성립된 새로운 유럽 문명의 주요 형성 요소가 되었다.
[쇠 퇴] 200년경부터 잦은 내란과 빈번한 이민족의 침입 등으로 겪게 된 여러 차례의 위기로부터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면서 3세기에 로마의 평화 시대는 끝났다. 로마 제국은 군사적으로 무정부 상태에 들어섰으며, 마침내 5세기에 이르러 게르만 민족이 로마 제국의 서반부를 침략하였다. 3세기에 로마 제국이 위기를 맞은 원인은 군의 해체에 있었다. 한때 명성을 날리던 로마 군대의 전투력, 기강, 조직 및 군대의 질은 저하되었다. 군이 정치적 권력에 개입하는 일이 빈번해졌고 반란 행위와 내란이 자주 일어났으며 그 후 반세기 동안(235~285) 황제들은 암살되거나 군대 막사(幕舍) 안에서 결정되고 또 축출되기도 하였다. 이때를 '막사 황제 시대' 라고 한다.
이와 같은 군사적 혼란은 이민족의 침입을 자초하였고, 게르만 민족은 제국의 북방 국경인 라인 강과 다뉴브강을 건너 로마 제국 내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먼저 유럽 동쪽에서는 고트(Goth)족이 소아시아 및 그리스의 연안 도시들을 침공하고 아테네를 불태웠다. 한편 서쪽에서도 다른 게르만 민족이 갈리아, 스페인, 이탈리아를 침입하였다. 이러한 게르만 민족의 침입으로 로마 경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도시는 약탈 · 파괴되었고 농경지는 황폐화되고 무역은 중단되었다. 군사 자금을 동원하기 위한 징세는 강화되고 강제 노역이 실행 되었다. 이런 이유로 로마 도시들은 경제적 난국에 봉착하였다. 한때 로마 문명의 중심지였던 도시들은 기아· 침체 · 퇴행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도시 인구는 생활 중심을 지방으로 바꾸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지방의 대영지(大領地)는 도시 빈민층과 농촌 인구의 피난처가 되었다.
그러나 3~4세기에 걸쳐 로마 제국의 붕괴를 막고 사라져 가는 영광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이 부흥 운동의 주역이 디오클레티이누스(Dicletimus, 284~305)와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us I , 306~337)였다. 이들은 도시 빈민과 군대의 문제를 개혁하고 국경의 방비를 튼튼히 하여 이민족의 침입을 막으려 하였다. 결과적으로 정부 권한이 집중되고 과세 제도가 강화되어, 관료제와 강력한 군사력에 의존하는 국가가 대두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절대 군주권을 동방식으로 집중하고 황제 권한을 일층 강화하였다. 그는 모든 궁중 의식 · 복장 · 의전 형식을 화려하고 웅장한 규모로 하였고, 도시는 전통적인 자치권을 상실하였으며, 식량 증산 · 상품 생산 · 중과세를 위한 수단을 강화하였다. 또 군사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제국의 서반부를 통치하기 위한 공동 통치자를 임명하였는데, 결국 이는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리되는 계기가 되었다. 즉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의 통치를 보조해 주는 서방의 정제(正帝, Augustus)를 두었으며 동시에 부제(副帝, Caesar)를 각 한 사람씩 두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은퇴한 후(305) 그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다시 내란이 일어났고, 이어 콘스탄틴 대제가 즉위하였다. 그는 수도를 발칸 반도의 비잔티움(Byzantum)으로 옮겨 '새로운 로마 (Nova Roma)라 이름 붙였고 그 후 다시 콘스탄티노플(Cowwaciminpis)이s이라 명명하였다. 이 천도(遷都)는 결과적으로 동 · 서로마 제국의 양분 경향을 가속화시켰다. 그 밖에 콘스탄틴 대제가 행한 정책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313년 밀라노 관 용령에 의한 그리스도교의 공인이었다.
테오도시우스(Thaodosius, 379~395)는 통일 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였는데, 395년 두 아들에게 로마 제국을 양분 통치하게 함으로써 결정적으로 동 · 서로마 제국이 분립하였으며, 이후 다시 로마 제국은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였다. 그는 380년에 그리스도교를 국교(國敎)로 인정하였다.
[정치적 몰락] 로마 제정의 절대 군주화 운동에도 불구하고 한때 광대한 영토와 강력한 지배를 자랑하던 로마 제국의 정치 조직은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로마 제국의 쇠망 과정은 계속되었으며 이미 로마 제국 내에 들어와 평화적으로 정착했던 게르만 민족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로마 제국 내로 침투해 들어왔다. 이러한 게르만 민족의 이동은 로마 제국의 쇠망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게 되었다. 4세기 후반에 들어서 이민족의 로마 영토 내 침입은 그 강도와 빈도가 한층 거세졌다. 중앙 아시아에서 온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남동 유럽에 자리잡고 있던 서고트족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로 인해 376년 이후 서고트족은 로마 제국 내로 피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로마 황제 발렌스(Valens, 364~378)는 그들이 다뉴브 강을 건너오도록 허락하였다. 2년 후 로마군은 고트족과 아드리아노플(Adnanople) 전투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서고트족의 침입이 격화되었고 마침내 410년 수도 로마는 약탈당하게 되었다. 5세기 초 로마 국경은 마침내 무너졌으며 그 밖의 게르만 민족이 연이어 침입하였다. 반달족(Vandals) · 알란족(Alans) · 수에비족(Suebi)이 서쪽에서 로마 제국 내로 침입하였으며, 드디어 455년 반달족은 로마를 약탈하였다. 게르만인 용병 대장 오도아체르(0doacer)에 의해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축출되고 그 대신 게르만인이 황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476년에 로마 제국은 멸망하여 로마 제국의 정치적 전통은 적어도 서방에서는 소멸되었다.
〔멸망의 원인] 로마 제국의 멸망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2세기 이래 수세기에 걸쳐 진행된 점진적인 과정의 결과였다. 로마 쇠망의 원인은 많은 요인들이 상호간에 작용하여 궁극적으로 쇠망에까지 이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사회 경제적으로 볼 때 로마 문명의 쇠퇴는 로마 상층 계급과 하층 계급 간의 사회적 충돌에 그 원인이 있었다. 군의 중추를 이룬 농촌 지역의 대중과 도시의 유산 계층 사이에는 장기화된 갈등이 있었다. 고도로 발달된 문화는 대중화되지 못하고 도시의 상층 계급에 국한되었으며, 따라서 국가적 위기에 대중의 협력을 얻을 수 없었다. 중과세, 화폐 가치 하락, 강제 징발과 강제 노동은 로마의 경제력을 저하시킨 요인들이었다. 경제적 지방 분권도 또 다른 쇠망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는데, 지역에 따른 독자적 기술이 촉진되고 육상 및 해상 교통망은 비교적 발달되었으나, 운송 수단은 빈약하여 물품의 상호 교류가 어려워졌으며 정치적 혼란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토지의 집중 소유 현상은 현저해졌으며 대농장은 노예 또는 소작인 (colonus)들이 경작하였다. 한때 로마의 장점인 자유농은 예농(隷農)의 지위로 떨어지고, 이른바 봉건화 경향이 두드러지게 진행되었다.
정치적으로 로마 제국의 약점은 군을 통제할 만한 권력 체계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효과적인 지배를 가능하게 할 범위를 훨씬 벗어난 광대한 영토 팽창으로 많은 정치적 약점이 노출되었다. 그중에는 복종하지 않는 군대, 상층부가 비대해진 관료 제도, 정치적 부패, 자치 도시의 기반 상실, 사회 계층간의 갈등 등 부정적 요인들이 파생하였다. 로마 황제 계승의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제위 계승에 대한 명백한 법적 규정이 없어 정치적 무정부 상태를 유발하였고 마침내 군부가 권력을 찬탈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군은 제위 계승 분쟁에 깊이 개입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군 조직은 약화되어 외세 침입을 방지할 국방력은 상실되었다.
게르만 민족의 침입은 이와 같은 로마의 통치권의 해이와 문란을 계기로 더욱더 격화되었다. 4세기 전반까지는 게르만 민족의 제국 내 침입은 평화적이며 매우 타협적으로 진행되었다. 비록 게르만 민족이 5세기 중기까지 로마 제국의 서부를 유린하긴 하였지만, 그것은 침입 세력이 강했다기보다는 로마 내부의 국력 약화로 인한 것이었다. 결국 로마 제국의 쇠망 과정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어느 하나의 단수적 요인의 결과라기보다는 복합적인 많은 요인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동로마 제국 ; 라틴 문학 ; 로마 ; 로마법)
※ 참고문헌  P.A. Brunt, Social Conflicts in the Roman Republic, 1971/ J.G. Davies, The Early Christian Church, 1967/ Michael Grant, A History ofRome, 1978/ A.H.M. Jones, Augustus, 1970/ Solomon Katz, The Decline ofRome, 1955/ Michael Rostovtzeff, Rome, 1960/ H.T. Rowell, Rome in the Augustam Age, 1962/ H.H. Scullard, From the Gracchi to Nero, 1963/ C.G. Starr, Civilization and the Caesars, 1965/ Lynn White ed., TheTransformation ofthe Roman World, 1973. 〔車河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