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 (1869~1948)

Gandhi Mohandas Karamch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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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민족 운동 지도자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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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민족 운동 지도자 간디.

인도의 민족 운동 지도자. 사상가.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인도 독립의 아버지.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 포르반다르에서 서민 계급(vaisya)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힌두교 일파인 비슈누파의 열성 신자인 어머니와 자이나교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3세에 결혼한 후 18세에 아들을 낳고 그 해 1887년, 영국 런던 템플 법학원에 등록하여 3년 간 유학했다. 간디는 새로운 문명과 환경에 접하는 이 유학 생활에서 인도인으로서의 깊은 정체성을 확인하였고 미래의 간디를 형성하는 기초들도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는데 신지론자(神智論者, theosophist), 그리스도교인, 무신론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영역본(英譯本)인 《바가바드기타》(Bhagavadgitā)를 접하고 신약성서를 읽게 되며 종종 그리스도 교회에 출석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간디는 1891년에 귀국하여 인도 라즈콧트와 봄베이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으나 실패하였고 3년 후 남아프리카에 있는 인도인 상사의 법률 고문으로 초빙받아 1년 계약으로 부인과 함께 남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으로 건너갔다. 이 남아프리카 여행은 간디의 생애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여행 도중 백인 차장으로부터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1등 칸에서 쫓겨났던 이 쓰라린 경험은 간디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뒤바꿔 놓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비로소 간디는 고통받고 신음하는 동족의 아픔에 새로이 눈뜨게 된 것이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약 7만 명 정도의 인도 사람이 이주해 있었는데, 한결같이 백인에게 박해를 받고 있었다. 이에 그는 그곳에 사는 인도 사람들의 지위와 권리를 보호하려고 결심하고, 남아프리카 연방 당국에 대하여 인종 차별 반대 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그 지도자가 되었다. 그 후 간디가 전개한 인종 차별, 압박에 대한 투쟁(사티아그라하, satyagraha) 및 자기 실현을 위한 인격의 도야와 수양의 노력(브라마차르야, brahmacarya)은 후일 간디가 인도에서 전개한 독립 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최초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은 1906년 아시아인 등록법(登錄法)을 제정한 트란스발 주(州)에서 일어났다. 이 투쟁은 그로부터 약 8년 동안 인두세를 비롯한 여러 가지 차별법에 반대하기 위하여 계속되었으며, 남아프리카의 여러 주로 퍼져 나갔다. 특히 1913년, 44세가 된 간디가 선두에 서서 행진한 나탈 주에서 트란스발 주까지의 '사티아그라하 행진' 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간디를 비롯한 행진 참가자 4,000여 명은 남아프리카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악법을 반대하는 주장은 세계적 여론의 동정을 모아 당국을 굴복시켰다. 결국 아시아인 구제법이 제정되어 인도인에 대한 차별법은 모두 폐기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투쟁으로 간디는 남아프리카의 간디에서 일약 세계의 간디가 되었다.
간디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인도에 귀국한 후 처음에는 인도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영국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만일 인도가 전쟁에 협력한다면 인도 자치를 허락하겠다던 약속을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않자 이를 계기로 인도에서는 반영 운동이 일어났고 간디는 이 민족 운동의 선두자가 되었다. 1919년 기관지 《젊은 인도》(Young India)를 창간하고 영국 제품 불매 운동, 물레의 장려, 비폭력 무저항주의 등 범국가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부터 1년 간 인도 국민 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인도인이 스스로 농촌 구제에 힘쓸 것을 역설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1929년의 연차 대회에서 인도 국민 회의파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완전 독립을 선언하였고, 61세의 간디는 1930년 3월에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사바르마티에서 인도 서해안의 던디를 향하여, 그 유명한 '소금의 대행진' 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구금되었지만 다시 석방된 1931년에 어원 총독과 절충한 결과, '간디-어원 협정'을 체결하여 반영 불복종 운동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이 협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탄압 정책을 쓰자 이에 항의하기 위한 불복종 운동을 재개하여 다시 투옥되었고, 그 후 풀려난 간디는 1932년부터 인도 카스트(Caste) 제도의 최하층인 불가촉 천민(不可觸賤民, Untouchables) 하리잔의 지위 향상에 전력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인도의 찬성을 얻지도 않고 인도를 전쟁에 투입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한 인도는 완전 독립의 약속을 얻어내려고 노력하였으나, 두 나라 간의 상반된 이해 관계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대규모 반영 불복종 운동에 돌입하였다. 73세의 노령인 간디는 다시 체포되어 1년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마침내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평화적으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그 독립은 이슬람교의 파키스탄과 분리 독립이었다(영국은 1909년 영구적인 인도 지배 통치를 위한 책략으로 이슬람교와 힌두교 간의 분리 선거제를 채택하여 인도를 사실상 둘로 분리시켰고, 1932년에는 불가촉 천민만의 분리 선거를 실시하여 인도 사회를 다시 카스트 대결 구조로 분리시키려 하였다). 간디는 오직 하나의 인도를 갈망했기 때문에 독립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민중들로부터 투석을 당하면서도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융합을 위한 화해의 호소를 계속하였다. 전인도에서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도 간의 격심한 원한과 분노의 불길이 타올라 각처에서 유혈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령의 간디는 양측의 반대자들로부터 온갖 모욕과 학대를 당하면서도 서로 화합할 것을 끝없이 호소하였다. 1948년 1월 30일 저녁 기도를 올리던 중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융합에 반대하는 과격파 힌두 청년의 흉탄을 맞고 쓰러져 그의 일생을 마쳤다. 그때 그의 나이 79세였다.
〔사상과 의의〕 간디의 종교는 그 자신이 스스로 밝혔 듯이 힌두교였다. 죽는 날까지 정통 힌두로 살았고 사상의 많은 부분을 힌두 전통에서 받아들였으며 그의 혁명 사상 또한 고대 힌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간디에게 힌두교는 인류의 종교(Religion of humanity)이며, 그것은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종교의 가장 좋은 점을 포함한 것이었다. 간디는 '인류는 하나 라는 믿음에 기초를 두었고 종종 종교를 진리의 종교로서 이해하였으며 이 목표에 이르기 위해 실천한 수단은 진리(眞理, satya)와 비폭력(非暴力, ahimsa)의 길이었다. 간디는 내재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믿었는데 이 신은 곧 진리이다. 그러나 간디는 후에 이와는 전혀 반대로 '진리가 신' 이라고 주장하였다. 설령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또 인간 중에서 가장 무지한 사람일지라도 무엇인가의 진리를 모색하기 때문에 진리만큼 완전한 신의 이름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는 관습에 따라 사용하는 진리나 진실(眞實)과는 정확히 일치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식(認識, cit), 존재(存在, sat)와 기쁨(歡喜, ananada]이 일체가 된 신(sat-ci-ananda)이다.
간디의 사상을 나타내는 중요한 또 하나의 개념은 '진리의 파지' (satyagraha)이다. 간디는 진리의 파지를 진리의 힘(the compulsive power of truth) 또는 영력(靈力, soul-force)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것은 결코 비진리의 세력으로 인해 강하(降下)됨이 없는 절대 진리의 힘을 말한다. 이는 우주에 평화를 가져오는 유일한 무기이자 아힘사(ahimsa, 보편적인 사랑)의 실천이다. 즉 사랑이야말로 가장 확실하며 직접적인 진리의 실현 방법이다. 결국, 아힘사와 진리는 궁극적으로 하나이고 구별되지 않는다. 그리고 간디의 사티아그라하는 도덕적 가치를 핵심으로 하는 개인적인 종교적, 철학적 명제일 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 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전통적인 인도 사상으로부터 나온 웅대한 시도였다. 간디는 인간에게 있어서 해탈을 실현 불가능한 이상으로 생각하고 인간이 해야 할 일, 또 할 수 있는 일은 인류에 대한 부단한 봉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에게 수단은 목적과 똑같이 중요하며, 수단의 실천은 목적의 실현과 같다. 그러므로 윤리적인 덕목들인 사랑, 무소유, 진리어(眞理語) 등의 실천은 그 자체로 바로 해탈이다. 이것은 간디에게 해탈은 봉사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디가 정신적인 자기 수련의 지침으로 "행위로부터 자유는 있을 수 없다. 오직 행위 안에 자유가 있을 뿐"이라는 '카르마 요가' (Karma-yoga, 行爲의 길)를 생활 속에 실현하고자 한 깊은 뜻도 여기서 더욱 분명해진다.
간디는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 타고르(R.Tagore)의 방문을 받아 마하트마(Mahatma ; 위대한 영혼, 大聖)라고 칭송한 시를 받고, 그 후로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그의 위대한 영혼은 인도 민족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폭력이 큰 역할을 하였으나, 인도에서는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사상에 입각하여 평화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이 그 특징이다. 간디의 주요 저서인 《인도의 자치》에서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반서구 사상은 그의 단편적인 편모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평화 사상과 평화에 바친 업적은 실천 면에서 볼 때 민주적 민족주의자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며 특히 비폭력 무저항주의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 참고문헌  M.K. Gandhi, An Authobiography of My Experience with Truth, Navajivan Pub, 1979/ 一, Hindu Dharma, Navajivan Pub, Amedabad-14, 1958/ D.S. Sharma, Basic Teachings of Mahatma Gandhi, New York, 1948. 〔吳將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