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수도회 회원. 덕원(德源) 면속구 선교사. 세례명 안셀모. 한국명은 노병조(盧炳朝). 1885년 12월 7일 독일에서 태어나 1911년 5월 3일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서품 후 곧바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같은 해 12월 11일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언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당시에는 독한(獨韓) 문법책과 사전이 없어 한국어를 배우는 데 어려움이 컸다. 그래서, 불한(佛韓) 문법책을 토대로 등사판으로 문법책을 만드는데 참여하였다.
한국 파견 초기부터 학교 설립과 교육 활동에 특히 많은 힘을 기울여 온 베네딕도 수도회에서는, 건전한 직공 양성을 통해 선교 사업을 전개한다는 목적으로 1910년 서울의 백동(柏洞, 현 혜화동)에 직업 학교인 숭공학교 (崇工學校)를 설립하였는데, 로머 신부는 초대 교장인 에카르트(A. Eckhardt) 신부의 뒤를 이어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1920년에 베네딕도 수도회가 새로 원산 교구를 맡게 되고, 이듬해 사우어(B. Sauer, 辛上院) 대원장이 원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자, 로머 신부는 사우어 주교에 의해 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일 서울의 옛 직업 학교 기숙사에서 원산교구 신학교가 개교하자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소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다.
1923년 서울 수도원 원장이었던 슈미트(C. Schimid, 金時練) 신부가 원산 본당으로 전임됨에 따라 당시 부주교이면서 신학교 교장을 맡고 있던 로머 신부가 그 뒤를 이었다. 수도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1926년 3월에는 간도(間島) 지역을 여행하면서 포교 상황을 연구하였고, 훈춘(琿春)과 육도포(六道泡)에서는 견진성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1927년 봄에 시작된 덕원 수도원과 신학교 건축이 11월 중엽에 끝나자 서울의 수도자들과 신학생들이 덕원으로 옮겨 갔는데, 이때부터 로머 신부는 신학교만을 전담하게 되었고, 부주교와 원장 직책은 슈미트 신부가 맡았다. 1929년 8월 중순 로머 신부는 6주일 동안 일본을 방문하여 피정을 한 후 당시 일본 가톨릭의 중등학교 상황을 연구하고 한국인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1933년에는 조선 주교 회의의 결정에 따라 라틴어로 된 교리서를 번역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원산교구 대표로 참석하였다. 한편, 인쇄소와 제본 시설을 갖추어 전례서 및 교리서, 각종 호교서 등을 인쇄 · 출판하였다. 수도회에서 전개한 이러한 활동들은 결국 원산교구의 전례 · 교육 · 문화 · 출판 사업 등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덕원 신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1935년에 신학교가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받도록 힘써 마침내 5월 14일 성대한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사제 서품 25주년을 맞은 로머 신부는 그 동안 쉬지 않고 활동한 탓에 쇠약해진 몸을 요양하기 위해 여름 방학 동안 마닐라로 휴가를 다녀왔다.
그러나 8 · 15 광복 후 북한 지역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기 시작하였다. 1949년 5월 9일에 교구장 사우어 주교, 수도원장 로트(Roth, 洪泰華) 신부, 부원장 슐라이허(Schleicher, 安世明) 신부, 신학교 철학 교수 클링사이즈(Klingseis, 吉世東) 신부 등이 체포되자 임시로 수도원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로머 신부 역시 5월 11일에 체포되어 평양의 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평안북도 위원군(渭原郡, 현 慈江道 城干郡 雙芳里)에 위치한 옥사독 수용소에 투옥되었다. 1950년 10월 만포 수용소로 잠시 이송된 후 1951년 1월 다시 옥사독 수용소로 돌아왔는데, 수용소의 노동과 굶주림 등으로 날로 쇠약해진 로머 신부는 결국 1951년 11월 9일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옥사독 수용소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묻혔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李裕林]
로머, 안셀모(1885 ~ 1951)
Romer, Anselm(1885 ~ 1951)
글자 크기
4권

로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