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메로, 오스카 아르눌포(19197~1980)

Romero, Oscar Amul6(19197~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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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로 대주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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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로 대주교. :

산 살바도르 대주교. 1917년 8월 15일 엘살바도르 산 미구엘(San Miguel)의 치우다드 바리오스(Ciudad Barrios)에서 산토스 로메로(Santos Romero)와 과달루페 데 헤수스 갈다메스(Guadalu-pe de Jesus Galdamez)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1919년 5월 11일 유아 세례를 받고, 1930년 글라라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소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37년에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산 살바도르(San Salva-dor)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는데, 로마 유학 동안 파시즘과 나치즘에 반대하는 비오 11세 교황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42년 4월 4일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에서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산 미구엘 교구의 교구장 비서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23년 동안 교구 신문의 편집장, 주교좌 성당의 주임 신부, 소신학교 교장 등의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1967년 사제 서품 25주년을 맞아 주교로 서품되어 엘살바도르 주교 회의의 사무 총장으로 임명되었고, 1968년에는 중앙 아메리카 주교 회의 사무국의 상임 이사로 선출되었다. 또 1970년에는산 살바도르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고, 1974년에는 산티아고 데 마리아(Santiago de Maria) 교구의 교구장이 되었다. 1977년 2월 22일 산 살바도르 대교구장으로 착좌하면서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과 라틴 아메리카 주교 회의(CELAM)의 문헌은 물론 메데인 선언(1968)과 푸에블라 선언(1979), 교황 바오로 6세의 교황 권고인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등의 실천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로 인해 그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권리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였고, 사회적 폭력이 증가하자 주일 미사 때마다 그 주에 사망한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하였다. 또 인간 권리의 남용을 공적으로 비난하고 외국 군대의 도움과 영향력이 중지되기를 원하였던 그는, 이런 관점에서 당시의 미국 대통령 카더(J.Cater)에게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
엘살바도르의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이들의 대변자였던 로메로 대주교의 활동은 마침내 전세계에 알려졌고, 1979년에는 영국의 일부 국회 의원들의 추천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0년 3월 24일 산 살바도르 병원의 천주의 섭리 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중 4명의 무장 괴한들에게 저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산 살바도르의 주교좌 성당에 안치되었으며, 기도와 순례의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로메로 대주교는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신학자가 아니라, 사목자로서 시대의 징표를 읽고 그것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기 위하여 현실이 요구하는 증거적 삶을 살다 간 순교자였다. 그러나 로메로 대주교가 순교자적 기질을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보수적 경향을 띠고 있었으며, 이른바 현실 참여적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산 살바도르 대주교로 선정된 것도 바로 그의 타고난 온화한 성품과 그가 걸어온 보수적 노선, 그리고 집권층과의 유화적인 관계가 작용한 때문이었다. 교회도, 독재 권력도 그들의 이해에 부응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로메로를 꼽았다. 그러나 독재 권력은 물론이려니와 그의 임명에 대해 실망을 금치 못하였던 엘살바도르의 진보적 성직자들은, 로메로의 도덕적 순수성과 유연한 지적 겸손, 그리고 양순한 마음씨가 복음의 극단적인 요구까지도 수용할 수 있는 훌륭한 자질임을 간과하였던 것이다.
〔전향과 사상] 당시 엘살바도르는 정치적 탄압, 특히 노동자와 농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극심한 상황이었다. 독재 권력은 봉건적인 착취 구조를 존속시키기 위해 엘살바도르를 "폭력이 숨쉬기처럼 일반화되어 있는 나라" (1979년 5월 13일 강론)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외 계층의 짓밟힌 인권을 보호하려는 교회 내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자 무자비한 권력은 교회도 탄압 하기에 이르렀다. 로메로 대주교가 산 살바도르 교구장에 착좌한 직후인 1977년 3월 12일, 예수회 소속의 루틸리오 그란데(Rutlilo Grande) 신부와 농민 두 명이 피살되었는데, 이 사건은 로메로 대주교로 하여금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성서적 의미로 회개(悔改)하였던 것이다. '전향' (轉向)이라는 말에 대해 로메로 대주교 자신도 "재임 초기부터 하느님께서 저의 보수적 경향과 기질에 어긋나는 사목적 힘을 저에게 부여해 주셨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보낸 편지) 있었다고 하였다.
로메로 대주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자신의 활동과 대교구의 상황을 보고하는 편지에서 재임 기간 동안에 벌어진 일들을 "나라 안의 제도적 불의, 교회와 민중의 박해, 사제들의 살해와 추방,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해산, 고문과 실종" 으로 요약하고, "교회를 옹호하고, 억압받고 학대당하는 민중의 편에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임을 믿는다고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그의 이러한 신념과 이를 바탕으로 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은 교회 안팎에서 숱한 비난과 공격을 받았지만, 그는 "인간 속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수호하는 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느낀다고 단언하면서 "교회는 민중과 더불어, 민중은 교회와 더불어" 있음을 거듭 천명하였다(1979년 1월 21일, 오르티즈 신부의 장례 미사 강론).
로메로 대주교는 교회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엘살바도르의 특수한 상황에 어떻게 적응시킬 것인가를 숙고하는 중에 역사적 상황 안에서 진리가 요구하는 바를 생생하게 체험하였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데 있어서 객관적인 진리만이 유일한 기준일 수 없으며, 실제 상황안에서의 적응과 연관성이 그 기준이 된다고 여겼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절대 빈곤과 인권 침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있는 민중들의 비참한 현실을 직접 목격하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존으로서의 사명에 충실하려면 근본적인 변화와 개조가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꼈다. 그는 복음의 가르침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 그리고 "구원을 추구함에 있어 우리는 현세적 임무를 성덕 및 성화에서 분리시키는 이원론을 피해야 한다"(<(메데인 문헌>, 정의 5항)는 메데인 주교 회의의 방향에 따른 교회의 새로운 변화에 사목 활동의 초점을 맞추고, "죽음 저편뿐만 아니라 여기 땅 위에서도"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의 교회를 부르짖었다 (1977년 5월 12일, 나바로 신부의 장례 미사 강론).
로메로 대주교는 암울하고 절망적이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교회가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사회적 · 경제적 · 정치적인 모든 면에서 나라 전체를 복음화"하는 일로 연결시켜야 함을 꿰뚫어 보았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보낸 편지). 그는 복음화를 현세적 측면과 초월적 측면,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전례적 측면과 교육적 측면 등 모든 면에서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이 교회의 전체적 삶을 통해 표현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특히 중요성을 부여하였던 것은 말씀의 선포와 함께 그 말씀을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즉 기쁜 소식을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기쁜 소식을 곧 기쁜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말씀을 현실화하는 것이야말로 복음화의 본질적인 부분임을 믿고 있었다. 또한 설교의 방식에, 즉 설교자 자신의 거룩함으로 나타나는 삶의 증거에 최상의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신념에서 그가 강조하였던 것은 예언자적 고발이었다. 악을 부정하고 반대함으로써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 방식을 중시하면서, 악에 대한 탄핵을 일종의 기쁜 소식으로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법에 어긋나는 명령은 내리지도 말 것이며 따르지도 말 것을 촉구하는 그의 예언자로서의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졌고 당연히 살해의 위협이 잇따랐다. 타협하면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독재 정권의 회유에 "목자는 자기 양 떼가 안전하지 않는 한 자기의 안전을 원치 않는다" 라고 거부한 로메로 대주교는, 결국 미사 집전 중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평 가] 로메로 대주교는 풍부한 신학 지식을 가졌지만 전문적인 신학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사색적이라기보다는 성서적이고 사목적인 신학을 발전시켰다. 엘 살바도르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출발하여 복음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고 메데인과 푸에블라의 신학적 영감을 발전시키고 구체화시켰던 것이다. 그의 생애는 남아메리카 교회의 역사적 전환이 인상 깊게 반영되어 있다. 지난 500여 년 동안 교회는 대개 지배와 착취, 억압과 폭력, 부와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종교적으로 합리화시키는 역할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로메로 대주교의 전향으로, 교회는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가난한 이들을 우선 선택하는 방향으로 그 모습을 바꾸게 되었다. 참된 목자요 예언자였으며, 순교자요 위대한 신앙인이었던 그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들이 나를 죽여도 나는 엘살바도르 민중 안에서 부활할 것이다....한 주교는 죽지만 하느님의 교회, 즉 민중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신학자 소브리노(J. Sobrino)는 로메로 대주교를 "살아서는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요, 죽어서는 이름 없는 이들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 <메데인 문헌> ; <푸에블라 문헌> ; 해방 신학)
※ 참고문헌  O.A. Romero, Blutzeuge fiir das Volk Gottes, Walter Verlag, 1986/ L. Boff, Aus dem Tal der Tränen ins Gelobte Land, Patmos Verlag, 1982, pp. 139~144/ R. Schermann, Die Guerilla Gottes, Econ Verlag, 1983, pp. 109~114. 〔張容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