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수도회 창립자. 철학자. 신학자. 정치가. 1797년 이탈리아 로베르토(Roverto)에서 완고한 아버지 베드로 로스미니(Pieto Rosmini)와 지적이면서 정이 많은 어머니 조반나(Giovanna dei Conti)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약간 폐쇄적이지만 평온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6세 되던 1813년에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사제가 되기를 결심하였는데, 이 시기를 그는 은총의 시기였다고 자신의 일기에 쓰고 있다. 고향에서 오르시(Giulio Orsi) 신부에게 철학을 공부한 로스미니는, 칸트 철학에 심취하였으며 1816~1819년 파도바(Padova)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 · 역사학 · 형이상학 · 교육학 · 법학 · 정치학 · 언어학 등을 공부하였다. 이때 토마세오(M. Tomaseo)와 파라비아(P.A.Paravia)와 친교를 맺었다. 로베르토로 돌아와 몇 년 동안 공부에 전념한 후 사도직 · 철학 · 신학 · 가톨릭 영성학(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토마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보급을 위해 1819년에 친구들과 협회를 구성하였는데, 이 협회는 종교 · 문화 · 도덕을 혁신할 이탈리아 재부흥(Risorgimento) 운동의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프랑스 대백과 사전에 대응하는 이탈리아 고유의 가톨릭 백과 사전을 계획하게 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 주관주의와 감성주의의 철학 흐름에 대항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나 이 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1821년 4월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파도바 대학에서 <신성과 교회법>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목 및 저술 활동] 로스미니는 그의 인격을 그대로 반영한 영성적이고 금욕적이며 활기와 용기에 가득 찬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1823년에 처음으로 로마에 갔을 때, 그는 교황 비오 7세에게 교회 개혁과 수도회의 혁신을 위해서는 현 세계의 흐름에 문을 열어야 하고 이탈리아 부흥을 받아들여야 하며, 신학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철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같은 해 고향 로베르토에 있는 성 마르코(S. Marco) 성당에서 <비오 7세에 대한 찬양사>(Panegirico di Pio Ⅶ)를 발표하였다. 1831년에 이것이 인쇄되어 나오자 신학자들간에 약간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시기가 지난 후의 그의 생애는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 시기는 1828년에 도모도솔라(Domodosola)의 갈바리오(Calvario) 산에서 깊은 기도와 피정을 하기 위해 세속을 떠난 때이고, 두 번째 시기는 1839년에 그가 창설한 카리타(Carità) 수도원의 인가 요청 시기이며, 마지막은 1848~1849년의 정치적 · 외교적 선교 기간이다. 그 후 말년(1849~1855)에는 스트레사(Stresa)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첫 번째 시기 : 1826~ 1827년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도서관 근처에 있는 성 세폴크로(S. Sepolcro) 수도원에 기거하면서 방대한 저서를 저술한 로스미니는, 이때 밀라노의 귀족들과 사제 그리고 지성인들과 많은 접촉을 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미래의 삶을 제시해 주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27년부터 그는 젊은 혈기와 지적인 사고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고 정치 문제를 철학과 교회와의 관계에서 보게 되었다. 그는 이때 1825년부터 품고 있던 새로운 수도회 창설 계획을 완전히 굳히게 되었다. 1827~1828년에는 로스미니의 이론 철학을 가장 잘 나타낸 철학서 가운데 하나인 《철학 소책자》 (Opuscoli filosofici)가 출판되었으며, 1828년에는 도모도 솔라의 갈바리오 산에서 금욕적인 영성을 따르는 카리타 수도회가 발족되기에 이르렀으며, 동시에 인식론의 기본을 다른 《관념의 기원에 대한 새 논문》(Ⅱ nuovo saggio sull'origine dell'idea)이 저술되기 시작하여 1830년에 익명으로 로마에서 출판되었다. 그리스도교 철학의 부흥을 위한 첫걸음인 이 책은 후에 비오 8세 교황의 격려에 힘입어 수정 보완된 제2판이 1836년 밀라노에서 출판되었으며, 그 해 그는 스트레사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수도회를 좀더 굳건히 하기 위한 것으로 수도회의 모원은 피에몬테(Piemonte)에 두면서 트렌티노(Trentino)와 영국, 아일랜드 그리고 미국까지 그 터전을 닦기 위함이었다. 이 수도회는 1839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인가를 받게 되며, 이 수도회에서 여자 수도회인 '섭리회' 가 발족하게 된다. 한편 1836년에 처음으로 로스미니의 철학서를 둘러싸고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로스미니는 이 논쟁에 대하여 《이탈리아의 철학의 쇄신》(Ⅱ risorgimento della filosofia in Italia)으로써 답변을 대신하였다.
두 번째 시기 : 1839년에 그는 《도덕에서의 인간학》(L'antropologia in servizio della scienza morale)과 《도덕적 양심 개론》(Ⅱ trattato della coscienza morale), 《정치 철학》(Filosofia della politica)을 저술하였다. 1840년에 《도덕적 양심 개론》이 엄격주의와 안센주의의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신학자간에 문제를 야기시켰다. 예수회 신부 조베르티(V. Gioberti)는1841~1844년에 저술한 《로스 미니 철학의 오류》(Degli erroi filosofici di A. Rosmin)에서 이를 지적하였고, 1846년에 로스미니는 《조베르티와 범신론》(Vicenzo Gioberti e il Panteismo)을 써서 조베르티 신부의 비판에 대응하였다. 결국 로스미니 사상은 가톨릭 학자들을 자극하였고 나중에는 격렬한 논쟁까지 불러일으켰다. 1843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격화된 논쟁자들에게 침묵을 명하였지만 논쟁은 계속되었다. 1844년에는 《철학 체계》(Sistema filosofico)가, 1845년에는 라이프니츠 영향을 받은 《변신론》(Teodicea)이 출판되었다.
세 번째 시기 : 로스미니가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이한 것은 1848년이었다. 역사적 현실과 정치 문제로 극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 그는, 이해 3~4월에 《거룩한 교회의 다섯 개의 깊은 상처》(Le cinque piaghe della S. Chiesa)와 《사회 정의에 의한 조약》(La costituzione sacondo la giustizia sociale)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이 책들은 그 당시 교회가 겪고 있던 위기에 대한 내용으로 신학과 교회의 삶을 긴밀히 연결시키려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정치적 문제도 개입되어, 로스미니는 1849년에 예수회 신부들의 공격에 휘말리게 되었다. 1848년에 피에몬테 정부가 교황 비오 9세를 설득시켜 이탈리아 연방 정부를 형성하라는 과제를 그에게 맡겼던 것이다. 로스미니는 가예타(Gaeta)와 나폴리까지 교황을 따라갔지만 이 자유주의 운동(이탈리아 연합)은 실패하고 로스미니는 보르보니카(Borbonica) 경찰에 의해 추방되고 말았다. 이탈리아 연합이 명시적으로 국회에서 거부됨으로써 로스미니의 임 무는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그는 10월 4일에 사표를 냈다. 로스미니를 반대하던 이들은 이 모든 것을 그의 책임으로 돌렸고, 이것이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1849년 6월 교황청을 떠나 11월 2일에 스트레사로 돌아온 로스미니는,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으며, 말년에는 《철학 체계》를 완성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1850년에는 《심리학》과 <철학 입문》이 출간되었으나 그의 저서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그치지 않았다. 1851년에 로스미니의 저서를 검토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한 교황 비오 9세는, 1855년 7월 그에게 유리한 결론을 내렸으나, 그것은 로스미니가 그 해 7월 1일 스트레사에서 사망한 뒤였다. 1854년에 《논리학》과 《신지론》(Teosofia)이 출간되었는데, 그 후 《신지론》은 단편으로 남아 있다가 1859~1874년에 5권의 유작으로 출판되었다. 그 밖에도 《검열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 esposto ed esaminanto, 1857), 《범주와 변증법에 대한 역사 비판서》(1862), 《요한 복음 입문》(1882), 《초자연 인간학》(1884)이 유작으로 출판되었으며, 이외에 많은 철학서와 정치 · 법 · 심리학서가 있다.
[사 상] 철학적 사상 : 로스미니의 철학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세계 가톨릭 교회의 부흥에 대한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에서 나온 요구의 응답이었다. 데카르트로부터 유래하는 당시의 철학적 흐름을 요약한 주관주의와 내재 철학에 반기를 들었고 감성주의와 회의주의에 비판을 가한 그는, '존재의 형이상학' 을 내놓아 인간의 지성을 존중하면서 진정한 형이상학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그리스 도교 철학을 정비하려 하였다. 또한 아우구스티노와 보나벤투라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인간의 인식이 물(物) 자체에 도달하지 못하고 의식에 국한된다는 칸트의 회의주의를 극복함으로써 대상의 객관적 가치에 확실성을 부여하였다. 즉 전통적 인식학을 비판하면서 모든 인식은 존재 개념에 기반한다는 새로운 인간 인식 이론을 내세웠던 것이다.
《관념의 기원에 대한 새 논문》에서 그는 존재 개념은 인간 지성의 원천적인 것으로, 실체의 실재성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며 선험적이라는 그 당시의 철학적 흐름에 반대하여 인간은 존재의 실재성(물 자체)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은 의식에 나타나는 감성적 경험에 의한 존재뿐 아니라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로스미니는 지성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하나는 인간 존재의 선천적(생득적) 직관에 기인하며 다른 하나는 감성의 작용에서 오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에 의하면, 이생득적(生得的)인 직관은 인간 주체와 순수 대상과 갖는 관계의 근원이다. 순수 대상 즉 신(神)은 인간을 초월하면서도 인간을 감싸 안고, 그 자체로는 변하지 않는 존재이다. 로스미니의 존재 개념은 생득적이기 때문에 경험에 기반하지 않는 것이며 신의 실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결국 존재 개념이란 인간의 지성 안에 신이 깊이 새겨 넣은 것이다. 인간 지성의 바탕인 직관은 감성적인 원리와 함께 주체인 인간을 형성하며 판단할 수 있는 통합작용을 하게 된다. 이때 판단은 직관된 대상과 경험된 대상과의 일치 관계를 말한다. 이처럼 로스미니에게 있어서 인간은 잠재적으로 무한한 존재이다. 그것은 존재를 포착하는 지성의 덕분이며, 인간의 직관에 의해 신(순수 대상)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직관은 실제적으로 본질 면에서 제한되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불완전함에서 기인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순수 대상을 완전히 직관할 수 있을 것이다. 로스미니는 이처럼 존재의 실재성에 순수 대상을 연결시킴으로써 그리스도교 철학을 구축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지성 안에 나타나는 생득적인 직관은 구체적인 존재를 필연적으로 알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신이다. 신에 대한 개념은 최고 진리의 원리이며 도덕을 형성한다. 여기서 그의 인식론이 도덕에 적용된다. 신은 최상의 선(善)이며 최상의 가치이다. 다른 가치들은 이 신을 인식하는 범주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신에게 해야 하는 의무는 인간을 향한 의무로 나타나며, 도덕적 의무는 바로 신을 향하는 것으로 성스러운 것이다. 종교는 이때 도덕의 최종점으로 나타나게 된다. 로스미니의 이러한 도덕적 개념은 아우구스티노와 프랑스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로스미니의 존재 개념은 신에 의해 각인된 인간의 지성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고 최종점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발전되어, 인간의 권리가 가장 존중되고 인간의 권위가 최대한 보장되는 최상의 사회는 바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가톨릭 교회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에서 사회를 위한 순수 모형이며 규범이 된다.
신학적 사상 : 로스미니의 철학은 신학과도 연결된다. 그는 철학의 복구가 필요함을 느꼈으며 동시에 신학과 철학, 신앙과 이성 간의 건전한 관계를 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1819~1821년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을 번역하기 시작하였고, 완전히 완성되어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많은 신학적 저술을 남겼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지성은 바로 하느님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두 가지 큰 선물은 바로 '논리학' 과 '복음' 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하느님의 초자연적 계시는 내적으로는 은총으로 외적으로는 언어로 나타난다. 요한 복음을 해석하는 데 있어 그는 새로운 방법을 채택하였는데, 요한 복음은 진리의 유일한 근거인 '말씀' (Verbo)을 강조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신적인 말씀(Verbo Divino)은 모든 인간의 지성을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 안에서 논리와 은총으로 나타나지만, 로스미니의 신학적 주제는 항상 그리스도 중심 사상이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불완전한 지성에 항상 승고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인간의 이상형이며 인간의 모든 의구심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스승으로서 우주의 아름다움을 창조한 분이며 인간성을 완전히 실현시킨 인간성의 원형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초자연성 역시 인간에게 작용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동일시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표현되는 초자연성은 바로 삼위 일체의 신적 행위이다. 로스미니는 하느님에 대한 주제는 인간에게 계속 언급되는 부분이며, 인간 언어 능력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을 언급하지 않고는 하느님에 대해 논의할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기 자신을 먼저 인간에게 계시해 주는데, 바로 하느님, 신적인 말씀의 육화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최종적인 창조와 구원을 나타내고 초자연적 지혜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모든 인간과 사물의 종말론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평 가] 로스미니의 진보된 사상은 가톨릭 교회의 자유주의 학자들에게는 호응을 얻었으나 그의 철학서에 대한 비판은 그가 사망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1888년에 교황청은 40개 명제(命題)를 발표하여 아무런 신학적 ''주' (註)를 첨가하지 않은 상태에서 로스미니의 저서를 출판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현대 가톨릭 사상가들 사이에는 로스미니 사상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일고 있고, 그의 철학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가톨릭 교회 내에서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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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미니-세르바티, 안토니오 Rosmini-Serbati, Antonio(1797-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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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로스미니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