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람 모한 Roy, Rām Mohan(1772~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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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는 힌두교의 본래 가르침이 아닌 신상 숭배 등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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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는 힌두교의 본래 가르침이 아닌 신상 숭배 등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19세기 초 인도의 종교 및 사회 개혁가. 브라흐모 사마지(Brāhmo Samāj) 운동의 창시자. 근대 인도 개혁의 주요 선구적 인물. 1772년 인도 벵골 주 서부 라다나가르(Radhanagar)의 정통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나, 9세 때부터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파트나(Pama)에서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당시 지식층 자녀들에게 있어서 이 언어들은 사회 및 정치적 진출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는데, 이 기간 동안 로이는 그의 전생애에 걸쳐서 그의 종교적인 사상에 가장 중대한 영향을 끼친 이슬람 사상, 특히 이슬람의 일신론(-神論)적 교의와 신비주의(suism), 그리고 힌두교의 성상 숭배(image worship) 등에 관해 깊이 있는 이해를 확립하였다. 정통 힌두 가문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때까지 자신이 믿어 왔던 종교를 새롭게 비판적인 시각으로 분석 · 검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인 경향은 그가 16세 때에 벵골어로 발표한 <힌두교에서의 우상 숭배>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이 일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미움을 받아 결국에는 집을 나와 여러 곳을 편력하는 생활을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이 무렵에 로이는 인도의 티베트에서 약 3년 동안 불교를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권유와 격려에 다시 힘을 얻어 바나라스(Banaras)에 가서 산스크리트어와 영어 및 우파니샤드(Upanishad) 철학을 중심으로 힌두 경전을 공부하였다. 그 후에 1803년부터는 고향으로 돌아와 영국인이 경영하는 동인도 회사의 관리직을 맡아보았다. 회사를 그만둔 42세 이후에는 줄곧 인도의 정치 · 문화 중심지 캘커타(Calcutta)에 머무르면서 종교 및 저작 활동에 정력을 쏟았다. 로이는 그곳에 있는 동안 유니테리언(Unitarian) 그리스도교 선교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또한 1824~1828년에는 그들의 정기적인 예배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물론 나중에 로이와 그의 추종자들은 유니테리언 교의를 배척하였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는 스스로를 유니테리언 힌두(Unitarian Hindu)라고 자부했었다. 이 무렵 로이가 그리스도교로부터 받은 영향은 이후 그의 종교적 · 사회적 개혁 사상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1828년부터 로이는 '브라흐모 사마지' 라고 하는 우파니샤드 철학에 기초한 힌두 종교 및 사회 개혁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서 당시의 힌두교가 지니고 있던 다신교적 신앙이나 신상 숭배, 그리고 여러 가지 악습 등이 한두교의 본래 가르침이 아니므로 당연히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힌두의 본질은 우파니샤드의 유일신적 사상이라고 역설하면서 카스트(caste) 제도에 따른 신분의 구별을 부인하고 과부의 재혼을 인정하였으며, 과부의 분사(焚死, sati)와 같은 악습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1833년 이 운동의 체제를 보다 튼튼하게 확립하고 인도의 상황을 호소할 목적으로 영국을 방문한 로이는, 그 목적을 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브리스톨(Bistol)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일생을 인도 사회와 종교의 개혁 및 그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로이가 죽은 뒤에 이 협회는 데벤드라나트 타고르(De-vendranath Tagore, 1817~1905, Rabindranath Tagore의 아버지)에 의해 계승되어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 운동을 주관하고 있던 당시에는 힌두 경전의 신적 계시의 기초로 여겨지던 베다(Veda)가 과연 최고의 진리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들은 베다라고 하더라도 무조건 인정해서는 안되며, 오직 이성적(理性的)인 것만이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의 인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파격적이고도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 밖에 이 협회의 또 다른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케샵 챤드라 센(Keshab Chandra Sen, 1838~1884)이다. 센은 철저히 그리스도교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로이의 사상을 계승한 타고르와 자주 의견이 충돌했다. 결국 1866년에 이 협회는 센을 회장으로 하는 새로운 협회(협회 이름은 '브라흐모 사마지' 를 그대로 사용)와 타고르를 회장으로 하는 협회인 '아디 브라흐모 사마지' (Adi-Brāhmo Samāj)로 각각 분리되었다. 그 후 '브라흐모 사마지' 는 그리스도교적인 경향을, '아디 브라흐모 사마지' 는 바라문교적인 경향을 더욱더 강하게 띠면서 각각 인도 사회의 종교와 사회 개혁을 주도해 나갔다.
로이가 주도한 브라흐모 사마지 운동은 비록 그 종교적인 권위는 상실되었지만 당시의 지식층과 일반 대중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고, 따라서 그들이 벌였던 사회 개혁 운동은 오늘날에도 매우 선구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주요 사상 및 논의〕 로이가 활약하던 무렵은 인도의 정치 · 사회적인 상황으로 볼 때 근대로의 진입과 함께 종교 및 사회 개혁이 요구되고 있던 시기였다. 1600년에 인도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한 영국은 18세기 후반부터 진출 노력을 매우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하여, 우선 인도 시크(Sikh)교도의 왕국을 병합하고 무갈(Mugal)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 결과 1876년부터 인도는 영국 식민 지로서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인도를 정치 · 경제적으로 무력화시켰다. 조직적으로 지역 주민들의 생업을 파괴하거나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경제적인 속박과 착취를 자행하였으며, 그리스도교 사상 및 서유럽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많은 선교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한편 인도 민중들은 그들의 나라가 국내외로부터 많은 도전을 받게 되자 그에 대한 저항 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선교사를 통한 서유럽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인도의 종교와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생각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그리스도교 단체들의 선교 활동에서 영향을 받은 새로운 종교 단체들이 많이 설립되었으며, 자기 자신의 수행은 물론 사회 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인도의 전통적인 종교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종교적인 각성은 캘커타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며, 서유럽 사회와의 접촉은 봄베이(Bombay), 마드라스(Ma-dras), 캘커타 등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봄베이와 마드라스는 상공업의 중심지로서, 캘커타는 한 나라의 수도이자 문화의 중심지로서 선교 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각 도시에 있는 대학에서는 영어 교육이 보편화되었으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이에 따라 이지주의적인 서유럽 사상을 접한 인도의 젊은 층에서는 옛날부터 전해진 인도 고유 종교에 대해 반성하는 한편, 힌두 경전의 신화 속에 나오는 크리쉬나(Kisha) 같은 여러 신들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교 편향의 힌두교 비판은 다시 새로운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대다수의 힌두교도들이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서 매우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힌두이즘에 바탕을 두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고 수용하여 종교 및 사회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로이 역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인도의 종교와 사회를 개혁해 나가고자 한 인물이었다.
로이가 주도한 '브라흐모 사마지' 협회의 규정 중에 나와 있는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자요, 영원하며 불변한 신을 예배하라. 이 신에 대해서는 어떤 특정한 호칭이나 상, 그림을 사용하지 말라. 어떤 공희(供犧)도 하지 말고, 어떤 것도 예배를 위해서 그 대상물로 삼지 말라. 그리고 이 협회에서는 모든 종교가 통일되고 선의를 추가할 수 있는 설교만을 하라"는 말에 그의 사상이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즉 로이가 중심이 되어 전개한 힌두교의 개혁 운동은 '힌두 우상 숭배' (Hindu idolatry)를 없애고, 우파니샤드의 힌두 유일신론을 확립하려는 시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캘커타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비난하였던 힌두이즘의 많은 폐습들에 대해서는, 로이 스스로도 그것은 당연히 비판되어야 하며, 또 본래 그것은 힌두이즘적인 가르침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하였다. 힌두이즘의 본질은 오히려 고귀하고 심원한 메시지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로이는 많은 힌두교인들에게 종교적인 자긍심을 되찾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교육을 주장하고 여성의 권리 향상을 위하여 사회 개혁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비평 및 평가〕 로이의 브라흐모 사마지 운동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인도의 근대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주요한 종교 운동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로이로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노벨상을 수상한 타고르와 센을 통해 더욱 완전한 형태로 성장해 나갔다. 로이는 정치 · 경제적으로 영국의 제국주의가, 종교 · 사상적으로 서유럽 사상과 그리스도교가 인도에 정면으로 도전해 올 때, 어떻게 해야 보다 성숙하게 대응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가 되고 있다. :
로이에 대해서는 평가자가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여러 가지로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아직까지도 인도에는 로이 자신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였던 힌두이즘의 악습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각 종교 사이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힌두이즘과의 대화를 심각하게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더욱이 모든 종교 및 사상적인 주장이나 교설로 무장된 힌두이즘과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포가 의미하고 있는 바를 비교해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도 필요할 것이다. 로이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자신의 시대에 알맞은 해답을 모색해 나갔으며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서 힌두이즘 특유의 전형적인 태도를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 참고문헌  Ajit Kumar Ray, The Religious Ideas of Rammohun Roy, New Delhi, 1976/ B.N. Dasgupta, The Life and Times of Rajha Rammohun Roy, New Delhi, 1980/ David Kopf, The Brahmo Samaj and the Shaping of the Modern Indian Mind, Princeton, 1979/ M.C. Kotnala, Raja Ram Mohun Roy and Indian Awakening, New Delhi, 1975/ Hans Küng & Heinrich von Stietencron, trans. by Peter Heinegg, Christianity and World Religions, London Double Day, New York, 1986, pp. 135~284/ Sivanath Sastri, History of Brahmo Samaj, 2nd ed., Calcutta. 1974. [吳將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