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멜 산의 은수자(隱修者)들로부터 시작된 관상(觀想) 수도회. 가르멜은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당신께로 부르시는 산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하이파 동남쪽에 있다. 이 수도회는 크게 봉쇄 수도회와 활동 수도회로 구분되며, 봉쇄 수도회 중에서도 1593년에 설립된 '맨발〔跣足〕의 가르멜회'(Ordo Carmelitarum Discalceatorum, The Discalced [Barefooted] Carmelites)가 O.C.D.라는 약칭을 사용하는 대신 여기에 속하지 않는 경우에는 OCam이라는 약칭을 사용한다. 여성들이 이 수도회 규칙에 따라 허원을 한 사례는 13세기부터 보이지만, 가르멜 수녀회(Camelitae, Carmelites Sisters)는 1452년 교황 니콜라오 5세(Nicolaus V)의 인준에 의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이때 최초로 인정된 것이 이탈리아 피렌체의 'Our Lady of the Angels' 수녀원이다. 현재 전세계에 퍼져 있는 가르멜 수도회 회원들은 남자가 3,700여 명, 여자가 10만 5천여 명이며, 이중 한국에 진출한 수도회는 맨발의 가르멜 여자 수도회, 맨발의 가르멜 남자 수도회, 가르멜 전교 수녀회 등이다. 그리고 재속회(在俗會)로 가르멜 제3회가 있다.
〔기원과 성장〕 가르멜 수도회의 뿌리는 구약의 예언자엘리야(Elijah)에게까지 소급된다. 그가 언제나 가르멜 산에서 기도를 드렸기 때문이다. 가르멜 산의 은수자들도 이렇게 믿고 있었고, 1281년의 회헌(會憲) 서두에서도 "엘리야와 엘리사(Elisha) 예언자가 가르멜 산에서 경건히 생활하던 때부터 구약과 신약의 성조들은 엘리야의 우물 곁에서 거룩한 계승을 부단히 지속하며 칭송받을 만한 삶을 살아왔다" (AnalOCarmc XV, 208)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수도회 창설의 기원은 가르멜 산에 은수자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한 것에 있으며, 피아첸자(Piacenza)의 한 순례자가 기록한 것에 따르면 이미 570년경에 가르멜 산의 은수자 골짜기에 수도원이 설립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수도회의 창설자가 누구라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 후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였던 성 알베르토(St. Albertus, 재위 : 1205~1210)는 성 브로카르도(St. Brocardus) 수사에게 수도회의 첫 규칙서를 제정해 주었는데, 이 규칙서에 따르면 13세기 초 수도자들이 엘리야의 우물 근처에 살면서 한 수도원장의 통솔 아래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수도회 설립에 대한 최초의 확실한 증거이다. 또 이 규칙서에서는 가르멜의 수도자들이 은수 생활을 통해 끊임없이 절제와 단식과 침묵을 지켰다고 하며, 그들에게는 한 경당이 있었고, 이곳에서 수도자들이 미사에 참례하는 동시에 '할 수 있는한' 미사 거행을 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중 글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은 '성조들의 제도와 교회의 인준 관습이 매시각에 할당한' 시편들을 낭송하였다. 한편 13세기에 팔레스티나 최북단 항구 아코(Akko)의 주교였던 드비트뤼(Jacques de Vitry)도 팔레스티나에 라틴 왕국이 설립된 뒤인 12세기에 순례자들과 수도자들이 가르멜 산에 정착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알베르토 규칙서는 1226년에 교황 호노리오 3세(Honorius Ⅲ)가 회칙으로 인준하였다. 가르멜 수도자들은 이로부터 얼마 안되어 팔레스티나의 라틴 왕국이 쇠잔해지면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러나 13세기 말에는 150여 개의 수도원이 12개 관구로 나뉘어져 키프로스, 시칠리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등지에 건립되었으며, 15세기까지 스칸디나비아 반도, 동유럽, 포르투갈등지로 수도회가 확산되었다. 한편 가르멜 산 속에 살던 수도자들은 1291년 아코의 멸망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으나 그 성지 구역만은 1570년 터키 점령 때까지 존속하였다. 수도회가 이처럼 번성해 가는 가운데 교황 인노천시오 4세(Innocentius Ⅳ)는 1247년에 회칙을 완화해 줌과 동시에 탁발(托鉢) 수도회로 인준함으로써 그 회원들은 이때부터 사도직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후 1274년에 개최된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는 탁발 수도회로서의 성격을 잠정적으로 인준한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1298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Bonifacius Ⅷ)가 아우구스티노회와 함께 동 수도회를 완전한 탁발 수도회로 인준하였고, 1326년 요한 22세(Johannes XXⅡ)가 이를 이어받아 프란치스코회나 도미니코회와 동일하게 탁발 수도회로서의 특전과 면제를 부여하였다. 가르멜 수도회에서는 이와 같이 탁발 수도회가 됨에 따라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1281년의 회헌에 규정한 대로 파리에 총학원 (studium generale)을 설립하였으며, 1294년까지는 런던, 쾰른, 툴루즈 등지에 철학원을 설립하였고, 1324년에는 볼로냐, 피렌체, 아비뇽에 총학원을 설립하였다. 이후 동 수도회에서는 스콜라 시대에 들어와 독자적으로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유명한 스콜라 학자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가르멜 수도회가 유럽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가르멜의 마리아 신심은 이 수도회의 상징이 되었다. 이미 가르멜 산에 있던 옛 경당은 복되신 동정녀께 헌당되어 있었고, 이후에 건립된 경당들도 마찬가지로 헌당되었다. 가르멜 수도자들은 하느님과 동시에 성모님께 서원을 하였으며, 각처에 마리아 공주(共住)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더 나아가 1294년의 회헌에서는 이 수도회가 복되신 동정녀의 이름으로 다른 수도회들과 구분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14세기에 들어와 서방 교회의 분열이 있게 되면서 가르멜회도 지역에 따라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411년에 한 총장 아래 통합되었지만, 이후 수도적 실천이 현저히 쇠퇴하면서 그 반작용으로 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413년 이전에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개혁 운동이 있었고, 그 뒤에는 독일과 네덜란드, 벨기에 등에서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들은 소레트(BI. Joannes Soreth) 총장의 선출 과정에서 공식화 되었으며, 그는 1462년 새 회헌을 발표하여 수도 생활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이 규제 안에는 현세의 재물과 특권을 버리고 공동 생활을 지킬 것, 수도 외적 활동을 중단할 것, 수도원 안의 세속적 요소들을 없앨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독일과 네덜란드, 프랑스 북부 등지에서 특히 실효를 거두었다.
〔개혁과 발전〕 문예 부흥 시기에는 가르멜 수도회에서도 주목할 만한 인문주의자들을 낳게 되었다. 그러나 이어 종교 개혁 운동으로 덴마크,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관구들이 없어지게 되었고,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랑스의 관구들은 종교 전쟁으로 많은 고난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 어려운 시기에 수도회를 이끈 사람이 오데(Nicholas Audet, 재위 : 1524~1562) 총장인데, 그는 종교개혁의 반(反)개혁으로 교리와 규율을 엄격히 하는 한편 수도회의 개혁에 노력하고, 1524년에는 회헌을 수정하였다. 그리고 루베오(Rubeo)라고 잘 알려진 로씨(Giovanni Battista Rossi, 1507~1588)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정신으로 개혁에 앞장섰다. 그 결과 수도회는 강한 신비적 경향을 띤 수도회로 변모되었으며, 본래의 은수자적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아빌라의 데레사(Theresa de Avila, 1515~1582)가 세운 수도원들에서는 은둔과 관상 생활이 영위되었고, 십자가의 요한(Joannes a Cruce, 1542~1591)에 의해 탁발승들 사이에서도 개혁이 시작되었다. 이들 개혁 그룹은 한때 관할권이라는 문제에서 수도회의 다른 그룹들과 갈등을 일으키거나 1575년의 총 참사회에서 견책을 받기도 하였다. 결국 이 개혁 그룹들은 본래의 가르멜회에서 독립하여 또 하나의 수도회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맨발의 가르멜회' 이다. 현재 가르멜 산에서 수도자들이 생활하게 된 계기는 17세기에 이르러 이 '맨발의 가르멜회' 수도자들이 이곳에 돌아온 이후였으며, 1958년부터 이루어진 발굴로 엘리야의 수도원과 경당 터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16세기에 시작된 개혁 운동은 17세기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다. 프랑스에 있는 가르멜 수도회에서는 관상 생활의 이상을 강조하는 영적 쇄신 운동이 투랭 관구의 렌느 수도원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북부와 나폴리, 시칠리아, 폴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고 브라질 등지에서도 개혁 수도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자 1645년 총 참사회에서는 모든 수도원들을 엄격한 규율 아래 묶고, 1650년 새 회헌을 마련하여 수도 생활에서 관상의 성격을 다시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계속된 개혁과 쇄신 운동이 수도회에 활력을 주면서 옛 수도원들이 활발히 복구되었으며, 여러 봉쇄 수도원들이 신설되었다. 그리고 여러 저술가들에 의해 영성 서적들이 편찬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학 분야, 역사 분야에서도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특히 레자나의 세례자 요한(Juan Bautista de Lezana)은 수도회의 역사서인 《Annales》(4권, Roma, 1645~1656)를 저술하였으며, 동정녀 마리아의 다니엘(Daniel of the Virgin Mary)은 초기의 문헌들을 《Speculum Carmelitarum》4권, Antwerp, 1680)으로 편찬하였다. 가르멜의 마리아 신심에 관한 여러 저서들이 나타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 결과 수도회에서는 복되신 동정녀에 대한 신심을 확산시키게 되었고, 가르멜 산 성모의 갈색 스카풀라는 교회 안에서 가장 널리 퍼진 마리아 신심의 하나가 되었다.
〔쇠퇴와 부흥〕 가르멜 수도회의 발전이 위축되기 시작한 것은 트리엔트 공의회(Conclium Tridentinum) 이후 선교 활동이 축소된 때문이었다. 이때 스페인계 아메리카에서 이루고자 한 개별적인 선교 사업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포르투갈 관구에서는 브라질에서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투랭 관구에서는 1646년 서인도 제도에 선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이어 1760년대 이후 1세기 동안 이 수도회는 다른 수도회들과 마찬가지로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그 초기에 절대주의 정권에서 수도원들을 억압하고 내치에 간섭하면서 1766년에는 프랑스의 관구들이 하나의 국가 수도회로 개편되었고, 1804년에는 스페인에서도 이와 유산한 개편이 있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18세기 말의 프랑스혁명으로 프랑스와 벨기에의 관구들이 해체되었으며, 나폴레옹 1세(Napoléon I)의 집권으로 독일과 이탈리아, 스페인의 수도회들이 탄압을 받았다. 이어 1815년 이후에 등장한 절대주의 정부와 자유주의 정부 또한 수도회들에 대해 적대 행위를 계속하 였다. 가르멜 수도회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1788년의 총 참사회를 끝으로 반세기 동안 회를 소집하지 못하였으며, 19세기 동안에도 네 차례만 개최했을 뿐이었다.
이후 수도회가 부흥하게 된 것은 19세기 중기부터였다. 우선 아일랜드 관구에서는 1840년까지 수도원을 일곱 개로 확장하였으며, 1864년에는 지금의 시카고 관구가 창설되었다. 이어 1879년에는 독일과 네덜란드 관구가 설립되었고, 1889년에는 스페인 관구가 재흥되었으며, 이탈리아에서는 1909년까지 수도자들이 다시 모여투스카니, 로마, 나폴리 관구와 시칠리아 대리구를 형성 하게 되었다. 또 아일랜드에서 유래하여 오스트레일리아(1881)와 뉴욕 관구(1889)가 생겨났고, 스페인과 네덜란드 수도자들의 도움으로 브라질의 관구들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부흥의 움직임을 타고 마이어(Pius Mayer) 총장은 1904년 새 통일 회헌을 발표하여 모든 수도회를 한 규율 속에 통합하였다. 그리고 그의 후임자 마겐니스(Elias Magennis) 총장은 1930년에 지금의 회헌을 발표하였다.
〔영 성〕 이 수도회는 엄격한 계율을 중시하며, 엘리야 예언자를 수도 생활의 스승으로 삼고, 구약 시대부터 있어 온 은수자적 삶과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삶과 정신이란 바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되는 예언자적이며 관상적인 것을 말한다. 첫째, 그리스도께 순명하며 그분 안에 구원의 희망을 두는 신앙을 생활화한다. 둘째, 하느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정신을단련한다. 셋째, 공동 전례 생활을 근본으로 삼는다. 넷째, 믿음 · 희망 · 사랑을 실천하고 주어진 사도직에 충실하며 진실한 수덕에 정진한다. 다섯째, 형제적 인간 관계속에서 애덕을 기르며, 재화의 공동 소유와 영성의 상호 수련을 통해 친교를 이룬다. 그러므로 그 관상의 정신은 성서를 토대로 한 하느님의 말씀을 수도회 삶의 바탕으로 삼고, 수도 생활 자체를 하느님께 맡기면서 극기와 침묵을 실천하는 체험을 소명으로 삼는 데 특징이 있으며,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서 그 신비를 느끼는 '자유인' 이되는 삶을 으뜸의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가르멜 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수도회' 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초기부터 내려오는 영성의 전통은 성모 신심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다.
〔한국 진출〕 가르멜 수도회의 한국 진출은 1939년 7월, '맨발의 가르멜 여자 수도회' 소속인 프랑스의 멕틸드(Marie Mechthild)와 마들렌(Marie Madeleine) 수녀가 내한하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이듬해 4월부터 서울 혜화동의 작은 집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해 5월에 다시 3명의 수녀들이 입국함으로써 식구가 모두 5명으로 늘게 되었다. 그러자 수녀들은 처음의 계획대로 수녀원을 짓고자 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고국에서의 원조가 끊어지면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그들은 서울교구로부터 지금의 가톨릭대학 부지 일부를 할애받아 수녀원 건축을 시작하였고, 1941년 7월 16일에는 낙성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가 일제 말기였으므로 수녀들은 끊임없이 일본 경찰의 감시와 조사를 받아야 했고, 해방 때까지는 생활난으로 인해 처음의 입회자들을 귀가시켜야 하는 등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946년에 들어 수녀회에서는 오랫동안 입회를 기다려오던 지원자 10여 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1950년 3월 5일, 한국 수녀회 창립 10주년을 맞이하고 확장 계획을 세우는 꿈에 부풀게 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 발발한 6 · 25 동란은 수녀회의 꿈을 앗아가는 동시에 많은 시련을 안겨 주었다. 이때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간 뒤 3년 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마들렌 수녀의 《귀양의 애가》를 보면, 당시 수녀들이 겪은 시련과 애환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수녀들은 이후 1953년 10월 다시 혜화동 수녀원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1월에는 북한의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본국에서 쉬고 있던 앙리에트 수녀와 마들렌 수녀가 한국에서의 봉사 활동을 위해 재입국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가르멜 수녀회는 성장을 계속하여 1963년 서울 수유리에 수녀원을 신축하고 이전하였으며, 부산 · 대구 · 대전 · 고성 · 안동 등지와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에도 수녀원을 창립하게 되었다.
한국 '맨발의 가르멜 남자 수도회' 의 설립은 1974년 9월 8일, 서울 삼선동에서 창립 미사를 갖고 수도자들이공동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앞서 가르멜회의 휘니안(Monahan Finian O.C.D.) 총원장은 3월 25일자로 한국에서의 수도회 창립을 허락하였다. 특히 동 수도회는 외국인에 의해 창설된 것이 아니라 몇 명의 한국인이 프랑스에 가서 수련과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스스로 수도회를 창설하였다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처음의 창설 회원들은 한국인 박병해(朴炳海, 스테파노) · 정대식(鄭大植, 플로리아노) 신부, 이탈리아 베니스 관구 소속의 귀초(Joachim Guizzo) 신부, 그리고 2명의 지원자였다. 이로부터 2년 후인 1976년 2월 수도자들은 인천시 북구 계산동에 대지 7,200평을 매입하여 수도원 신축 공사에 착공, 같은 해 12월 23일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다음해인 5월 1일 루이지 도세나(Luigi Dossena) 교황 대사의 주례로 축성식을 거행한 뒤, 한국 가르멜 남자 수도회는 정식 수도원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수련 수도원이 되었다.
이전 당시 수도자 수는 신부 3명, 종신 서원 수사 1명, 청원자 2명이었다. 이들은 축성식 직후인 7월에 수도원 대성당 및 피정의 집을 착공, 1978년에 완공하였는데, 피정의 집은 많은 신자들이 개인 피정을 통해 기도 생활을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건립되었다. 이후 1978년 1월 8일 동 수도회에서는 최초로 4명의 청원자가 착복식을 갖고 수련을 시작하여 이듬해 1월 첫 유기 서원자를 배출하였으며, 1980년에는 두번째로 유기 서원자를 배출하였다. 이처럼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입회자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수도회에서는 1989년 마산 수련소(창원군 진동면 소재)를 개원하였으며, 이해 9월 21일자로 로마 본부 직속의 지부로 승격되었다. 아울러 회원수도 꾸준히 증가하여 현재 종신 서원자 16명(사제 11명, 수사 5명), 유기 서원자 12명, 수련자 5명에 이르게 되었고, 가르멜 재속회도 전국 9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 가르멜 전교 수녀회 ; 가르멜 제3회)
※ 참고문헌 서울여자갈멜수도원(마들렌 수녀),《귀양의 애가-
깔멜 수녀들의 북한 피납기》,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4/한국남 녀수도자장상협의회 양성위원회 편, 《오늘의 수도자들-한국 천주 교 남녀 수도회 소개》, 분도출판사, 1983/ 《NCE》/ 《가톨릭 사전》. 〔鄭漢敎〕
가르멜 수도회
修道會
〔라〕Ordo Carmelitarum · 〔영〕Order of Our Lady of Cam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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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멜 산 위의 엘리야 수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