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바르드족 - 族 〔라〕Langobardi 〔영〕Lomba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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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에 앉아 있는 아길룰프 왕이 양각된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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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에 앉아 있는 아길룰프 왕이 양각된 투구.

568년 북부 이탈리아에 롬바르드 왕국을 세운 게르만족의 일파. 롬바르드족은 게르만 민족인 수에비족에 속하여 있었으며, 1세기경에는 주로 북서 독일에서 살았다. 본래 살고 있던 곳은 엘베 강 어귀였으나 2세기 중엽에 다뉴브 강 방면으로, 5세기 후반에는 오스트리아 지역으로, 또 6세기 중엽에는 노리룸(Noricum) · 판노니아(Pannonia)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546년에 아우도인이 왕이 되어 새로운 롬바르드 왕조를 열었고, 그의 계승자인 알보인(Alboin, 560~572)이 568년에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하기 시작하여 572년에 파비아(Pavia)를 함락시켜 수도로 삼고 왕국을 세웠다. 이때 롬바르드족의 다른 우두머리들은 이 지역 인근의 다른 곳에 독자적으로 공작령 또는 백작령을 세웠는데, 이로 인해 비잔틴 제국령 이탈리아는 그 남쪽 부분인 라벤나 태수령(太守領)으로 축소되었다. 라벤나 태수령은 로마와 라벤나 사이를 연결하면서 반도를 비스듬히 횡단하였다.
알보인의 계승자 클레프가 죽은 뒤 롬바르드족은 왕위 계승자를 뽑지 않고 공작들이 그 뒤 10년 동안 특정 영지에서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584년에 프랑크족의 침입으로 위협을 느낀 공작들은 클레프의 아들 아우타리(Authari, 584~590)를 왕으로 삼고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으나 공작들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였다. 아우타리가 왕이 되었을 때, 공작들은 왕실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영지의 반을 바쳤고 왕국이 있던 파비아는 모든 행정 조직의 중심이 되었다.
아리우스파인 롬바르드족은 계속하여 가톨릭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589년에 아우타리는 가톨릭과 처음으로 접촉하였고, 그의 후계자인 아길룰프(Agilulf, 590~616)는 바이에른 공작의 딸인 테오데린데(Theodelinde)와 결혼하였다. 592~593년경에 롬바르드족은 로마까지 침공하여 포위하였는데, 이때에 로마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는 롬바르드족에 대항하여 포위를 풀게 하고 그들을 로마에서 퇴거시켰으며, 테오데린데의 도움으로 아리우스파인 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그 후 아길룰프의 몰락으로 가톨릭 왕 아리페르트(Ainpet, 653~661)가 왕권을 계승하였다.
아리페르트 2세(700~712) 이후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는데, 새 왕조의 두 번째 왕인 리우트프란드(Liupprand, 712~744)는 롬바르드 왕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왕이었다. 비록 롬바르드족이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토착민들과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국가의 부재라는 취약한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가톨릭 신자로 자신의 왕국에 로마의 영향을 받아들였던 리우트프란드는 726년까지는 내정에만 관심을 기울인 듯하나, 그 뒤로는 이탈리아 반도의 비잔틴 영토를 정복해 나갔다. 8세기 초에 스폴레토(Spoleto)와 베네벤토(Benevento) 양 공국(公國)을 점령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이탈리아 전 지역을 정복하려고 하였다. 이때 동로마 제국은 대내외적으로 큰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도움을 호소하는 교황 그레고리오 3세(731~741)의 청을 들어 줄 수 없었다. 교황은 739~740년에 처음으로 프랑크 왕국의 궁재(宮宰) 카를 마르텔(Karl Martel, ,714~741)에게 도움을 청하였 으나, 그때 그는 남부 프랑스에서 아라비아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롬바르드족의 지지가 필요했으므로 그들과 동맹 관계에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 카를 마르텔이 거절하자, 그의 후임 교황 자카리아(741~752)는 리우트프란드 왕과 20년 간의 강화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다음 계승자인 라키스 왕(744~749) 때 잠시 평온하였으나 그가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 들어가자, 아이스툴프 (Aistulf, 749~756) 왕은 다시 정복 계획을 세워 752년에 라벤나를 점령하였다. 이러한 팽창은 반도 내부의 비잔틴 사람들의 세력 약화를 의식하고 있던 교황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교황 스테파노 2세(752~757)는 프랑크의 피핀(Pippin, 741~768) 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754년 4월 퀴에르지(Quierzy)에서 프랑크 의회는 롬바르드족에 대항하여 교황을 보호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때 피핀은 이들로부터 빼앗은 모든 이탈리아 영토를 증여할 것을 교황에게 증여 증서(贈與證書)로 약속하였다. 투스치아, 라벤나, 베네치아, 이스트리아, 스폴레토, 베네벤토 등의 공작령(公爵領)들을 교황에게 기증함으로써 피핀은 이후 '교황령' (敎皇領)이 탄생할 기초를 놓았다. 아이스툴프는 분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담판을 거절함으로써 754년 여름에 프랑크족에게 정복당하였고, 2년 후 재기하여 로마까지 진격하였으나 프랑크인의 제2차 출정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렇지만 피핀이 증여를 약속했던 모든 지역이 교황에게 인도되지는 않았다.
화해 정책의 일환으로 롬바르드 왕 데시데리우스(De-siderius, 756~774)의 딸 데시데리아와 결혼했던 프랑크왕 카를 대제가 그녀를 내쫓자, 데시데리우스는 로마로 쳐들어갔다. 긴박해진 교황 하드리아노 1세(772~795)는 카를 대제에게 도움을 구하였고, 프랑크족은 773년 이탈리아로 와서 파비아를 함락시키고 롬바르드 왕국을 정복하였다. 데시데리우스는 포로가 되었고, 카를 대제는 프랑크와 롬바르드의 왕을 겸하게 됨으로써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통치는 끝이 났다. 그러나 그들은 예술 · 언어 · 법률 분야에서 많은 전통과 업적을 남겼다. (⇦ 랑고바르드족 ; → 교황령 ; 교회사 ; 이탈리아)
※ 참고문헌  R.P. McBrien ed., The HaperCollins Encyclopedia of Catholicism, San Francisco, Haper Co., 1989, p. 7921 K.F. Drew, 8, p. 9751 13, pp. 1018~1019/ Petit Robert Dictiormaire Universel des Noms Propres 2, p. 1083/ Knur Schäferdiek, Germanenmission ariamische, 《TRE》 12, pp. 506~510/ A. 프란츤, 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pp. 167~174/ 《동아 원색 대백과 사전》 10, 동아출판사, p. 335/민석홍, 《서양사 개론》, 삼영사, 1995, p. 179/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 까치, 1995, pp. 114~120.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