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신부. 중국 선교사. 세례명은 니콜라오. 중국명은 용화민(龍華民). . 자는 정화(精華). 1559년 시칠리아 칼타지로네(Caltagirone)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582년 메시나(Messina)의 예수회 수련원에 입회하여 7년 동안 문학 · 철학 · 신학 과정을 뛰어난 성적으로 끝마쳤다. 이후 3년 간 교수로 재직하였고, 2년 동안은 수련장을 맡은 후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596년 리스본을 출발하여 이듬해 중국에 도착한 롱고바르디 신부는 이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58년 동안 중국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당시 중국과 일본의 선교를 책임지고 있던 발리냐노(A. Valignano) 신부에 의해 소주(韶州)로 파견된 롱고바르디 신부는, 몇 년 간 그 지방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교리를 가르치며 우상 숭배에 물듦이 없이 신자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1602년에는 일종의 신자용 기도서인 《성교일과》(聖敎日課)를 발행 · 보급하여 소주 지방을 중국에서 천주교가 가장 융성한 곳으로 만들었으며, 1603년 4월 20일에는 중국 최초의 성당을 건축하였다. 또 1606년에는 흉악범으로 무고를 당하자 자진해서 법정에 나가 자신을 변호하여 무죄를 밝히기도 하였다.
롱고바르디 신부는 1609년 중국 선교 책임자인 마테오 리치(M. Ricci) 신부 후임자로 임명되어 북경(北京)으로 가게 되었고, 다음해 리치 신부가 사망한 후부터 12년 간 중국 선교 책임자라는 중책을 신중하고 지혜롭게 수행하였다. 그는 1616년 남경(南京)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신종(神宗, 萬曆帝)과의 협상을 시도하였지만, 남경과 북경은 물론 중국 전체에서 사제들을 추방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후 신부들은 숨어 지내게 되었는데, 이 와중에서도 롱고바르디 신부는 1617년 12월 24일에 종신 서원을 하게 되었고, 1620년 신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희종(熹宗, 天啓帝)이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덕택에 디아스(E. Diaz, 陽瑪諾) 신부와 함께 1627년에 북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롱고바르디 신부는 대부분 북경에 머무르면서, 신자들을 돌보고 새로운 신자 공동체를 육성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또한 중국어로 된 교리서와 기도서 저술에 몰두하였으며, 79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도보로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신자 공동체를 돌보았다. 자신의 최후가 다가왔음을 깨달은 롱고바르디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사를 읽고 1654년 12월 11일, 95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당시의 황제였던 청(淸)의 세조(世祖, 順治帝)는 롱고바르디 신부의 초상을 미리 그리게 하고, 장례비로 300타엘을 하사하는 등 평소 존경하였던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였다.
그가 저술한 《성교일과》는 1784년 봄 이승훈(李承薰)에 의해 조선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내용의 일부가 번역되어 널리 유포되고 초대 신자들의 기도 생활에 많이 사용된 듯하다. 또한 신유박해 당시 한글본 《성모 념주 묵상》이 발간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염주 묵상 규정》(念珠默想規程) 역시 일찍 전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정조 15년(1791) 규장각의 서양 서적을 소각할 때 유실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영혼 도체설》(靈魂道體說) 외에도 《사설》(死說), 《성인 도문》(聖人禱文), 《성모덕서 도문》(聖母德敘禱文), 《급구사의》(急救事宜) 등이 있고, 당대의 석학이었던 서광계(徐光啓)와 공동 저술한 《치력연기》(治曆緣起)가 전한다.
※ 참고문헌 L. Pfister, Notices Biographiquees et Bibliograpliques Ⅰ, Chang-hai, 1932/ 裴賢淑, <17~18세기에 전래된 천주교 서적>, 《교회사 연구》 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pp. 3~46. 〔편찬실〕
롱고바르디, 니콜라스 Longobardi, Nicolas(159~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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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