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코 Ludovicus (1214~1270)

〔프〕Lou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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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도비코(엘 그레코 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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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도비코(엘 그레코 작) .

성인. 프랑스 왕 루이 9세(1226~1270). 축일은 8월 25일. '루이 성왕(聖王)' 이라 부르기도 한다. 1214년 4월 25일 프와시(Poisy)에서 태어나, 1234년 5월 프로방스의 마르가리타와 혼인하여 열 명의 자녀를 두었다. 부왕(父王)이 죽었을 때 그의 나이 겨우 12세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1252년에 죽을 때까지 섭정을 맡았다. 그의 어머니는 남프랑스의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였으며, 루도비코가 첫 번째 십자군 원정에 나가 있는 동안에는 혼자서 국가를 통치하기도 하였다. 그 후 1254년부터 1270년까지 루도비코가 직접 통치한 기간 동안, 평화와 정의를 증진시킨 점에서 루도비코는 후계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십자군 원정 : 루도비코는 십자군 원정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1244년 병을 앓고 있던 중에 십자군 원정을 결심하였다. 십자군 원정을 돕기 위해서 교황 인노천시오 4세와 1245년에 파문당한 프리드리히 2세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인노첸시오 4세가 이를 거부하였다. 1248년 8월 원정을 떠난 루도비코는 키프로스(Cyprus)에서 그 해 겨울을 난 후 이듬해 6월 다미에타(Damietta)시를 기습 점령하고 그곳에서 지원병이 오기를 기다렸다. 다시 카이로로 진군하였으나 이질 때문에 쇠약해진 그의 군대는, 이집트 함대가 나일 강을 장악하자 다미에타로 통하는 길이 끊기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포위를 당했고, 1250년 4월 6일 만수라(Mansura)에서 붙잡혔다. 한편 궁중에서 혁명이 일어나 루도비코의 위치가 위태롭게 되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다미에타시를 포기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그의 군대를 모두 석방해 주는 협상이 이루어졌다. 아크레(Acre)로 간 루도비코는 협정이 완결되기를 기다리면서 시리아에서 4년을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정교한 요새들을 쌓고, 카이로와 다마스커스의 경쟁 관계를 이용하며, 몽고인들을 개종시키고, 서방으로부터 더 많은 돈과 인력을 끌어들이자고 그리스도교인들을 격려하였다. 이를 위해 그의 형제들이 1254년 7월에 프랑스로 돌아갔으나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260년대에 루도비코는 시리아로 밀려들어 오는 이슬람교도 때문에 점점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1267년에는 두 번째 십자군 원정을 일으키겠다는 의향을 밝혔다. 원정 준비를 마쳤을 무렵 루도비코의 아우인 앙주(Anjou)의 샤를르(Charles)가 이탈리아의 단독 군주가 되었으며 교황좌에는 공백 기간이 생겼다. 따라서 샤를르는 자신의 적인 튀니스(Tunis)의 왕을 정벌하도록 원정의 방향을 정했다. 그러나 1270년 군대가 튀니스에 상륙한 지 한 달 만에 루도비코가 병으로 쓰러져 사망하자 십자군은 루도비코의 시신을 가지고 서둘러 프랑스로 귀환하였다.
국내 정책 : 남부 프랑스에서는 이단들이 계속해서 사회적인 불안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루도비코는 첫 번째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정의를 세워 달라는 수많은 청원을 받았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여 그는 행정을 개선하고, 부패를 척결하며, 통치법을 개선하기 위해 관리들에게 새로운 규칙을 제정하도록 명하였다. 루도비코 집권 후반기는 법률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시기였는데, 그는 몇 가지 관습법들의 성문화를 시도하였으며, 1254년 이후에는 왕의 법정이나 의회 법정에 회부된 사건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하였다. 그는 결투에 의한 재판을 증인 심문에 의한 재판으로 대체함으로써 법률 절차도 바꾸었다. 이러한 변경으로 인해서 법정에서는 기록된 문서가 더욱 자주 이용되었다. 또한 정치적인 지혜에 관한 몇 권의 책을 저술하도록 하였으며, 후계자들을 위해서 (교훈)(Enseignements)이라는 자신의 금언집도 남겼다.
루도비코는 성직자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려고 노력하였으나, 주교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무조건적으로 주교들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는 특히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이 내린 프리드리히 2세의 폐위 선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루도비코는 늘 교황권을 존중하였으나, 주교가 공석 중일 때는 교황들에게 맞서 왕국의 이익을 옹호하였고 프랑스 교회의 정당한 이익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옹호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젊어서부터 돈독한 신심을 지닌 그는, 1238년에 볼드윈 2세로부터 받은 예수의 가시관을 보관하기 위해 파리에 생 샤펠(Sainte Chapelle) 성당을 세웠다. 그는 시토회와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의 수호자였으며, 그 회원들 중에서 고해 신부를 선택하였다. 또 병원들을 세우고 학문의 발전을 위해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언제나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던 그는, 겸손하였으며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였고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 생 드니(Saint Denis)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는 많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으며, 성덕(聖德)이 깊었던 그는 1297년에 보니파시오 8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통치자의 현명은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 세상의 모든 왕권은 주님의 손 안에 있는 것, 주님께서는 때를 따라 적당한 통치자를 세우신다. 인간의 성공은 주님 손에 달렸으니 통치자의 영예는 곧 주님의 영광이다"(집회 10, 3-5). (⇦ 루이 성왕 ; 루수 ; → 십자군 ; 프랑스)

※ 참고문헌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 상, 가톨릭출판사, 1987/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바오로출판사, 1994/ 최정오 편, 《가톨릭 성인 사전》, 계성출판사, 1987/ D.J.A. Matthew, 8, pp. 1010~1012. 〔宋炯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