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체사리오. 한국명은 노대유(盧大有). 1880년 4월 26일 프랑스의 서남쪽 지방인 고르스(Gorses)에서 태어나 생 니콜라스(Saint-Nicolas) 소신학교와 이씨(Issy)와 생 쉴피스(St. Sulpice) 신학교를 다니던 중 선교에 대한 소명을 느껴 1899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삭발례를 받고 로마로 가서 공부를 계속한 후 부제품을 받았다. 파리로 다시 돌아와 1903년 6월 21일 사제로 서품된 뒤 곧바로 한국 선교사로 파견되어 그 해 10월 8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임시로 서울의 주교관에 머무르면서 한국어와 풍습을 익혔다.
1904년 강원도 이천(伊川) 본당을 맡아 사목하던 뒤 테르트르(Dutertre, 姜良) 신부가 사망하자 그 후임 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성당과 사제관이 있고 신자들이 열심한 신앙 생활을 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루케트 신부는 다른 마을을 복음화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마을 전체가 외교인들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보내 주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1908년에는 마을 주민의 대부분이 외교인으로 구성된 망답(望沓)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 성당과 학교, 사제관을 건립하는 등 매우 적극적으로 사목하였지만, 외교인들의 개종은 미미하였다.
끊임없이 전교 활동을 펼치던 루케트 신부는, 1912년 가을 이질에 걸려 많은 고생을 하였다. 서울로 올라와 치료를 받았지만 폐에 이상이 생겨 회복하는 데 오래 걸렸다. 1913년 1월에 본당으로 돌아가 사목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으나, 1914년 서울에서 열린 연례 피정을 마친 뒤 폐병이 악화되어 치유되기 어렵다는 판정을 받고 서울에 남아 치료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회복할 가망이 없게 되었음을 안 루케트 신부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던 모든 사목 활동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유서를 쓴 후 현직에서 은퇴하였다. 그 후 계속해서 병으로 고생하다가, 1914년 12월 24일에 종부 성사를 받고 25일 밤에 사망하였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경 향잡지》 317호(1915. 1. 15)/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附錄, 가톨릭출판사, 1984. 〔李裕林〕
루케트, 세자르 프로스페르 Rouquette, Cesare Prosper(1880~1914)
글자 크기
4권

루케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