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신학자. 종교 개혁자. 루터는 어떤 이들에게는 '신앙의 영웅' 으로 찬탄의 대상이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이단의 괴수'로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렇게 서로 상반된 루터의 모습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교파적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경 향에서 나온 결과였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 교령>에 나타난 일치의 노력으로 증오와 불신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루터에 대한 부정적 견해에 대해 재고(再考)를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사가들은 반(反)가톨릭적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근거하여 비난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루터에 대한 관심을 두고 '가톨릭 루터' (1483~1520)와 프로테스탄트 루터' (1521~1546)로 구별하여 평가하고 있다.
〔가톨릭 루터〕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신성 로마 제국의 튀링겐(Thüringen) 지방의 작센(Sachsen) 공작령(公爵領)에 위치한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한스 루데르(Hans Luder, +1530)와 한나(Hanna)라고도 불리는 마르가레트 루더(Margarete Luder, +1531) 사이의 8남매 중에 맏아들로 태어나 다음날 성 베드로 성당에서 '투르의 마르티노' (Martinus Touren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 한스는 뫼라(Möhra)의 빈농 출신이었으나 1484년에 만스펠트(Mansfeld)로 옮겨 동광(銅鑛) 기업의 경영주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남성다운 성격을 물려 받았고 어머니는 아이제나흐(Eisenach)의 상류층 린데만 (Lindemann) 집안의 경건한 신앙인으로서 아들에게 종교심을 심어 주었다. 루터 집안은 중세 말기의 독일인 가정처럼 구원에 대한 깊은 관심 · 죄악에 대한 경각심 · 꼼꼼한 자기 성찰 죄 사함을 얻기 위한 노력 등과 같은 밝은면과, 미신과 혼합된 성인 공경 ·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어두운 면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1489년 만스펠트 시립 학교에서 라틴어 문법과 작문을 배운 루터는, 1495년에 '공동 생활 형제회' (Fratres Communis Vitae)가 운영하던 마그데부르크(Magdeburg) 대성당 부속 학교에 들어가 1년 동안 수사학과 윤리학을 공부하였다. 루터의 스승들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심을 실천하며 '새 신심 운동' (Devotio Moderna)이라는 신앙 부흥 운동을 일으킨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 후 어머니의 고향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그(St. Georg) 성당 부속 라틴어 학교에서 고급 문법과 수사학을 배웠으며, 1501년 여름 학기는 에르푸르트(Erfurt) 대학교에 입학하여 14세기부터 학문의 새로운 방법으로 등장한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us)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이 신사조(新思潮)는 나중에 그의 사상과 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루터는 1502년 9월에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3년 후인 1505년 1월에는 석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1505년 5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에르푸르트 대학교 법학부에 등록한 루터는 그 해 7월 초 집으로 가는 도중 스토테른하임(Stotternheim)이라는 마을 근처에서 뇌우 속에 번쩍이는 번갯불에 놀라 고해성사도 받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땅에 엎드린 채 다음과 같이 서원하였다고 한다. "성부(聖婦) 안나여, 저를 도와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수도자가 되겠습니다"(《탁상 담화》 IV, 3707). 이 서원은 그가 오래 전부터 마음에 지니고 있었던 '나의 구원' 에 대한 갈망을 구현하려는 표현이었다. 루터는 수도 생활이 구원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믿고 있었고 이러한 믿음이 수도원 입회 동기가 되었는데, 갑작스러운 죽음의 위험과 하느님의 심판 및 지옥 벌에 대한 두려운 감정이 그가 평소 품고 있었던 수도원 입회를 가속시켰던 것 같다. 루터는 7월 17일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에 입회하였다.
수도원 생활 : 수련기에 들어서면서 루터는 수도회 규칙에 따라 성서를 정독하고 묵상하며 지내다가 나틴(J. Nathin) 교수의 권고로 성서보다 유명론 신학에 관심을 갖고 탐구하였다. 1506년 9월 수도 서원을 하고 다음해 4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508년 10월에는 비텐베르크(Wittenbrerg) 대학교에서 윤리 철학을 강의했다. 이어 1509년에 성서와 베드로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110~1160)의 《신학 명제론 4집》(Sententiarum libri quattuor)을 강의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한 루터는, 로마 여행(1510~1511) 이후 1512년에 비텐베르크 수도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1513년 10월 19일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신학 대학장 슈타우피츠 (Johann von Staupitz, 1468/1469~1524)를 계승하여 성서학 교수가 되었다. 이즈음 루터는 하느님과 인간의 직접 대면과 신앙의 우위성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교계 제도와 성사를 거부하는 타울러(Johann Tauler, 1300?~1361)의 신비 사상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루터는 유명론의 펠라지우스적 구원관에 영향을 받아 수도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는 완벽한 수도자가 되기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육욕(肉慾)으로 불안해 하는 양심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죄인임을 절실하게 느꼈으며, 이러한 영신적 번뇌 중에 슈타우피츠 신부의 권유로 성서에서 시련을 해결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17절에 나오는 "이 (복음) 안에 하느님의 의로움이 신앙에서 신앙으로 계시됩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서 인간을 엄책하는 하느님의 능동적 정의를 발견하고 마침내 독성죄의 문턱에까지 이르는 신학적 고민을 겪게 되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탑실에서 "신앙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 것이다" (로마 1, 17)라는 성서 구절에서 하느님의 수동적 정의를 발견하였다. 그는 '탑실 경험' (Turmerlebnis)이라고 불리는 이 신앙 체험 속에서 '신앙에 의한 의화' 를 내세우며,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이루어진다는 결론에 이르러 스스로 양심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아울러 루터는 여러 가지 주요 공직(公職)을 맡았는데, 1511년에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의 설교가로 임명되었고 1512년에는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부원장과 신학 연수원장이 되었다. 1515년에는 비텐베르크 성채 성당에서도 설교를 담당하면서 사목 활동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5월에는 11개 수도원을 관장하는 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도 신학 대학 교수로서 스콜라 사상을 성서와 초대 교부로 돌아가자는 성서 인문주의로 대치시키는 교육 개혁을 착수하는 데 중심 인물이 되었다. 1517년 5월에 유명론 신학자들을 반대하는 '97개 항 신학 명제' 를 발표한 루터는 이를 독일의 대학들에 발송하여, 이러한 교육 개혁이 다른 대학에서도 실현되기를 희망하였지만 아우구스티노 신학을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으로 내세우는 데에만 성공하였다. <95개조 명제>와 파문 : 1517년에 이르러 성 베드로 대성전의 재건을 위해 교회 관습대로 대사의 시행이 반포되었는데, 신자들이 대사의 의미를 잊고 면죄(免罪)의 효과를 내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고 믿은 루터는, 강의와 논문 그리고 설교를 통하여 대사 시행을 비판하였다. 그 해 10월 31일 그는 대사 시행을 허용한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의 후작이며 마인츠(Mainz)의 대주교인 알브레히트(Albrecht, 1490~1545)에게 항의 편지와 함께 대사 명제와 대사 논문을 보내면서, 신자들이 대사를 오용하고 있어 새로운 대사 지침서를 발간하고 대사에 관한 학술 토론을 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편지는 루터의 교구장 주교와 다른 주교들에게도 발송되었다. 그러나 주교들이 부정적 반응을 보이자 루터는 동료들에게 신학 명제를 보냈다. 그리고 이것이 출판업자의 손에 들어가 95개 항목으로 정리되어 1518년 초에 <95개조 명제>로 인쇄되었다.
1518년 1월에 대사 설교가로 활동하던 도미니코회 수사 신부 테철(Johan Tetzel, 1465~1519)이 <95개조 명제>를 논박하자 루터는 대사 명제에 대한 해설서와 대사와 은총에 관한 글로 대응하였으며, 저명한 신학자인 에크(Johann Eck, 1486~1543)와도 논쟁을 벌였다. 그러자 교황 레오 10세(1513~1521)는 대사 논쟁을 수도회 사이의 논쟁으로 판단하고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의 총장에게 문제 해결을 지시하였다. 그 해 4월 독일의 관구장 스타우피츠는 하이델베르 (Heidelberg) 총회에서 '십자가의 신학'을 담고 있는 40개항의 명제를 발표한 루터에게 침묵을 지키도록 권유하였고, 루터는 5월에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여 대사 명제의 출판에 대해 해명하면서 교황에 대한 충성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의회 우위설을 강조하는 내용이 담긴 해설서를 동봉하면서 그의 주장을 절대로 취소할 수 없다고 알림으로써 그의 충성심은 의심받게 되었다.
1518년 6월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의 로마 소환을 명령하면서 교황청 검열관 프리에라스(Sylvester Prieras, 1456~1523)에게 <95개조 명제>를 반박하는 논문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8월 23일에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아누스 1세(Maximilianus I , 1459~1519)의 요구에 따라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제국 의회에 교황 특사로 파견한 가예타노(Cajetanus, 1468/1469~1534) 추기경에게 훈령을 보내 루터를 체포하여 그가 주장을 고집하면 이단으로 파문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독일에서 청문회를 열어 루터 문제를 해결하도록 명하고 그 심문관으로 가예타노를 임명하였다. 10월 12일에 시작된 아우크스부르크 청문회에서 가예타노는 루터에게 오류를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고 루터는 자기의 주장이 성서, 교부,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한다고 역설하였다.
로마로 압송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루터가 아우크스부르크를 탈출하자, 1518년 10월 25일 가예타노는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 1464~1525)에게 그를 추방하거나 교회에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루터는 그의 문제를 독일 교회 법정에서 취급하도록 요청함으로써 정치 쟁점화하려고 시도하였고 교황권을 문제 삼으면서 공의회 소집을 청원하였다. 11월 9일에는 대사에 관한 교황 교서가 반포되어 교회의 대사 교리를 확인하였다. 1519년 6월 작센 공작 게오르크(Georg, 1471~1539)의 주선으로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에크와 토론한 루터는 교황권의 신수설(神授說)과 공의회의 무류성(無謬性)을 거부하였다. 이 라이프치히 토론(6월 27일~7월 16일)이 에크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쾰른 대학교와 루뱅 대학교의 신학자들은 루터를 단죄하였다. 1520년 2월에 로마에서 심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6월 15일에는 교황 교서 <주님,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가 반포되어 루터가 제시한 41개 항의 명제를 단죄함과 동시에 60일 안에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다.
1520년 8월부터 루터는 개혁 선언문이라고 일컬어지는 <독일 국가의 귀족들에게 고함>, <교회의 바빌론 유배>,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독일인의 교황청에 대한 민족적 반감에 호소하면서 교회의 전통적 교리와 관습을 공격한 것이었다. 그는 독일 세속 군주가 주도하는 교회 개혁을 주창하였고, 7성사를 거부하면서 성사란 인간 의화의 수단인 신앙을 일으키는 외적 표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였다. 또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를 주장하고 실체 변화와 성제(聖祭)로서의 미사를 거부하였으며, 선행은 인간의 정화와 사회에 대한 임무로서 필요한 것이지 인간 구원에는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1520년 교황 교서에 따라 쾰른 대학교는 루뱅 대학교에 이어 루터의 저서들을 불태웠고, 같은 해 루터는 12월 10일 9시에 비텐베르크의 엘스터(Elster) 성문에서 학생들과 함께 교황 교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움으로써 대응하였다. 1521년 1월 3일 교황청은 루터를 파문하는 교서를 공포하였다.
〔프로테스탄트 루터〕 보름스 제국 의회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알 5세(1519~1556)는 1521년 1월 27일부터 보름스(Worms)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파문받은 루터의 국외 추방령을 선포하려고 시도하였으나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루터 문제를 의회에서 심사하도록 요청하였다. 의회 출두령을 받은 루터는 4월 16일 군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보름스에 입성하여, 다음날 황제 앞에서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생각할 시간을 요청하여 하루의 말미를 얻은 그는 4월 19일에 의회에서 그의 교설을 변론하고서 성서에 의거하여 그것이 오류라고 증명되지 않는 한 취소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다음날 황제는 루터의 오류에 대해서 국가가 아직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면서 그를 이단자로 공인할 것을 촉구하였다. 5월 8일 카알 5세는 루터의 법익(法益)을 박탈하고 추방령을 공포하는 칙서에 서명하여 5월 25일에 공포하였다. 그러나 제후들이 이미 귀향한 뒤여서 칙령의 시행은 결정되지 못하였다.
독일에서의 활동 : 1521년 4월 26일에 보름스를 떠난 루터는 프리드리히의 주선으로 5월 4일에 납치당한 것으로 꾸며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가서 숨어 지내게 되었다. 은신 생활 중에도 그는 성밖의 세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개혁 저서들을 내놓았다. 루터는 사람이 만든 규율에 의해 강요된 고해는 신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오류라고 주장하였고, 《미사의 오용》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수도자들에게 사제직과 주교직이 비성서적 요소를 담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미사 성제를 거부하도록 하였다. 또한 성직자의 독신 생활이 자발적 선택에서 교회법에 의해 강요된 의무로 바뀌었다고 비판하였으며, 《수도 서원》에서 수도자의 서원은 하느님의 계명인 사랑, 특히 자녀의 부모 사랑에 위배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에도 착수하였는데 독일어 성서들은 독일 민족의 언어, 생활, 종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루터의 저서에 실린 개혁 원칙들을 받아들인 추종자들의 과격한 설교는 비텐베르크에서 사회 혼란을 일으켰다. 1521년 10월 비텐베르크 성채 성당의 대부제(大副祭)인 카알슈타트(Karlstadt, 1480~1541)는 성직을 포기하고 양형 영성체를 도입하면서 성화상 공경을 공격하였고, 츠빌링(Gabinel Zwilling, 1487~1558)도 미사는 제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비텐베르크의 학생들과 주민들은 성화상을 파괴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를 폭행하는 반성직자 소요를 일으켰다. 루터의 《수도 서원》으로 비텐베르크의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 수도자들은 수도원을 떠났고, 에르푸르트와 몇몇 다른 곳에서는 아우구스티노회 회원들의 성직 포기와 환속(還俗)이 뒤따랐다. 1522년 초에는 츠비카우(Zwickau)에 급진파들이 도착하여 계시를 받았다면서 세상 종말이 다가왔다고 주창함으로써 비텐베르크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1522년 3월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설교를 통해 보수적 개혁에 착수함으로써 혼란을 가라앉혔다.
1525년 6월 13일 수요일 저녁, 42세의 루터는 5명의 동료를 증인으로 초청하여 부겐하겐(Johann Bugenhagen)의 주례로 2년 전에 시토 수녀원에서 탈출하여 비텐베르크에서 살고 있던 16세 연하의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와 결혼하였다. 작센의 선제후는 결혼 선물로 100길드를 보내면서 매년 200길드씩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들은 3남 3녀의 자녀들을 두었는데, 이 결혼은 루터의 측근인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에게 마음의 고통과 혼란을 안겨주었다. 아울러 인문주의의 대가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가 《자유 의지론》(1524)에서 루터의 교설을 노예 상태의 의지라고 논박하자, 루터는 이에 대응하여 《노예 의지론》(1525)을 통해 그의 논증을 경멸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은 그 동안 루터의 개혁에 동조하던 인문주의자들이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1524년 여름 독일 남서부 지방에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이듬해 3월 농민 지도자들은 루터의 개혁 원리에 근거하여 <농민들의 12조항>을 작성하여 그들의 요구를 제시하였고, 4월에 루터는 <슈바벤 농민들의 12조항에 대하여 평화를 권고함>이라는 글을 통해 제후와 지주들에게 농민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요청하면서 농민들에게는 평화와 인내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급진주의 성향의 재세례파 지도자 뮌처(Thomas Müntzer, 1493~1525)의 주도로 튀링겐에서 일어난 농민 운동이 살인과 방화 같은 과격한 행동으로 전횡되자, 루터는 잔인하고 독설적 내용이 담긴 <강도이며 살인마 농민 도당을 반박함>이라는 글을 통해 사회 질서 회복을 위해 제후들이 무력 진압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이로써 민중 중심의 종교 개혁이 세속 군주 주도의 종교 개혁으로 변질하였고, 농민의 패배로 끝난 농민 전쟁은 루터가 보름스 제국 의회 이후 누렸던 대중적 지지를 상실하게 하였다.
독일의 교회 문제는 정치 쟁점화되어 제국 의회에서 토의되기 시작하였다. 1526년에 열린 제1차 슈파이어(Speyer) 제국 의회에서 황제는 프랑스와의 전쟁과 투르크의 침입 위협에 직면하였기 때문에 공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보름스 칙령의 시행을 유보하고 종교 문제의 결정권을 루터를 후원하는 제후들에게 위임하기로 잠정적으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작센과 헤센(Hessen)에서는 새 교회령이 반포되어 루터가 교계 체제의 가톨릭 교회를 반대하여 내세웠던 영적 교회와는 달리 국교회(國敎會) 형태의 연방 교회를 형성하게 되었고 가톨릭 성직자들이 추방되었다. 이렇게 신교화(新敎化)된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루터는 《대교리 문답서》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1529년의 제2차 슈파이어 제국 의회가 황제의 명령에 따라 루터파의 교회 개혁을 중지하고 보름스 칙령을 시행할 것을 결의하자 신교파 제후들이 이에 항의(Protest)하였다. 이때부터 그들을 '프로테스탄트' 라고 부르게 되었다.
1525년 5월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사망한 뒤 종교 개혁의 정치적 주도권은 작센의 제후에게서 헤센의 백작 필리프(Philipp, 1504~1567)에게로 옮겨졌다. 1529년 10월 1일 필리프 공은 작센과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단합을 위해 루터와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 양측의 신학자들을 마르부르크(Marburg)에 초대하여 신학 대화를 나누었다. 3일 동안 계속된 이 모임에서 <마르부르크 조항>의 15개 항 중에 14개 항은 의견 일치를 보았으나 성체에 관해서는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다. 루터는 '이는 내 몸이다'라는 성구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성체 현존을 주장하였고, 츠빙글리는 '이는 내 몸을 의미한다' 라고 이해하여 영적 현존을 내세웠다. <마르부르크 조항>을 바탕으로 루터가 슈바바흐(Schwabach)에서 17개 조항으로 작성한 <슈바바흐 조항>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의 기초가 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 : 1530년에 황제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화해를 위해 협상하도록 촉구하였다. 루터는 제국의 법익을 박탈당하였기 때문에 의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코부르크(Coburg) 성에서 프로테스탄트들과의 연락을 통해 협상을 조종하였다. 프로테스탄트측에서는 멜란히톤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제출하였고, 가톨릭 대표들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 대한 반론>으로 대응하였다. 멜란히톤은 다시 <신앙 고백 변론>을 내놓았으나 황제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1531년에 프로테스탄트파는 황제의 종교 개혁 공격에 대항하여 슈말칼덴(Schmalkalden)에서 비밀 동맹을 결성하였다. 1536년에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는 다음해 5월 23일에 만투아(Mantua)에서 공의회를 개최하겠다고 공고하였다. 이 때 루터는 슈말칼덴 동맹의 신교 제후들의 회의에 참석하여 가톨릭과의 협상의 기초가 될 토의 내용으로 <슈말 칼덴 조항>을 작성하였는데 가톨릭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비타협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1539년 3월 헤센의 필리프 공은 부인이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다. 필리프 공이 교회 생활을 못하고 있음을 안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은 그에게 동거녀와의 결혼에 대한 관면을 권하였고, 루터는 주저하다가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 아래에 이혼보다는 중혼(重婚)이 낫다는 명분으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비밀이 공개되어 루터는 나쁜 평판을 받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 해에 루터는 교회와 공의회에 대한 견해를 정리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1543년에는 유대인을 팔레스티나(Palestina)로 쫓아내고 이러한 추방이 어려우면 고리 대금을 금지하고 회당을 불살라 버려야 한다는 글을 썼다. 또 1545년에는 자제력을 잃고 독설로 로마 교황청을 악마가 세운 제도라고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1537년 슈말칼덴에서 지내던 루터는 담석 증세로 허약해졌고 시력과 청력도 쇠퇴하였으며 1542년 9월에는 둘째 딸 막달레나의 사망으로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1545년 11월 17일 창세기 강의를 마지막으로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 생활을 끝낸 루터는, 1546년 초에 만스펠트 백작 가문의 영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 아이스레벤으로 가서 중재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과로로 인하여 그 해 2월 8일 새벽 그의 두 아들들과 동료 그리고 의사와 목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은 2월 22일에 멜란히톤의 주례로 거행되었고 그의 유해는 비텐베르크 성채 성당 설교단 아래에 안치되었다.
가톨릭 루터관 : 1930년대 이전에 가톨릭 루터관은 부정적 모습뿐이었다. 이러한 부정적 이해의 바탕은 루터와 같은 시대의 인물인 코클래우스(Johannes Cochlaeus, 1479~1552)의 저서인 《마르틴 루터의 활동과 저서에 대한 주해》(1549)에 있었다. 코클래우스는 루터는 악마 정신을 지니고 있고 자만심과 질투심을 지닌 교활한 인물로서, 그의 교서는 교회가 배척하였던 이단적 학설을 혼합한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부정적 이해는 투쟁적 정신에 근거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코클래우스 정신은 남아 있어 데니플레(Heinrich Seuse Denifle, 1846~1905)는 《루터와 초기 루터교의 발전》 (1904)에서 루터를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물로 묘사하였고, 그리사르(Hartmamann Grisar, 1845~1932)는 3권으로 된 <루터전>(1911~1912)에서 그를 심리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수도자로 다루었다. 그러나 이처럼 투쟁적 정신에 근거한 묘사는 루터에 대한 객관적 모습을 밝힐 수가 없다.
로르츠(Joseph Lortz, 1887~1975)는 《독일 종교 개혁》(1939)에서 가톨릭 시대의 루터를 분석하면서, 이 독일의 종교 개혁가는 경건한 가톨릭 신앙인이며 수사 신부로서 그의 깊은 종교심은 기도, 훈화, 설교에 나타나 있는데, 이것이 종교 개혁 운동의 근저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루터의 개인적 신앙 체험과 격정적 성격은 체계적인 신학 사상을 정립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주관적 태도 특히 주관적 성서주의가 교리의 편협성과 가톨릭 교회에 대한 공박을 일으켰다고 문제를 삼았다. 로르츠는 루터의 개성과 종교심을 강조하여 종교 개혁가의 손상된 명예를 회복시켰으나 가톨릭 교회에 반대되는 교설에 대한 해명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아 완전한 명예 회복을 이루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인물에 대한 학문적 비판 연구에 역사적 덕목을 겸비한 《독일 종교 개혁》의 출간은 가톨릭 교회의 루터 연구에 전환점이 되었다. (→ 루터교 ; 에크, 요한 ; 종교 개혁 )
※ 참고문헌 J. Pelikan · H. Lehman eds., Luther's Works, Saint Louis, Concordia, 1960~1967 ;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7/ H. Grisar, Luther, 1911~1912(trans. and adapted by F.J. Elbe, Martin Luter-His Life and Work, Westminster Newman, 1950)/ R. Stauffer, Luther as Seen by Catholics, London, Luter Worth Press, 1967/ E. Iserloh, Luther zwischen Refom und Reformation, 1966(trans. by the auther, The Theses were not Posted. Luther between Refom and Refomation, Boston, Beacon Press, 1968)/ J. Lortz, Die Reformation in Deutschland, 1939(trans. by R. Walls, The Reformation in Germany Ⅰ, London, Darton Longman & Todd ; New York , Herder and Herder, 1968)/ J. Wicks ed., Catholic Scholars Dialogue with Luther, Chicago, Loyola Univ. Press, 1970/ J.M. Todd, Martin Luther. A Life, London , Hamish Hamilton, 1982/ H. Bornkamm, Martin Luther in derMittess seines Leben, 1979(edited and with a foreword by K. Bornkamm, trans. by E.T. Bachmann, Luther in Mid-Carer 1521~1530, London, Darton Longman & Todd, 1983)/ M.U. Edwards, Luther's Last Battles. Politics and Polemics 1531~1546, Ithaca and London, Cornell Univ. Press, 1983/ M.J. Harran, Luther on Conversion. The Early Years, Ithaca and London, Cornell Univ. Press, 1983/ 김성태, <가톨릭 청년 마르틴 루터>, 《역사 안의 교회》, 분도출판사, 1984, pp. 69~111/ 一,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一大赦命題를 中心으로>, 《논문집》 11집, 가톨릭대학, 1985, PP. 5~641 一, <마르틴 루터, 1518-大赦論爭〉, 《논문집》 13집, 가톨릭대학, 1987, pp. 67~101/ 一, <교회사가의 연구 자세>, <교회사와 역사 신학>, 《세계 교회사》 Ⅰ, 성바오로출판사, 1995, pp. 34~37, 39~40. 〔金聖泰〕
루터, 마르틴 Luther, Martin( 148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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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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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