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교 - 敎 〔라〕Lutherani 〔영〕Lutheran Church 〔독〕Lutherische Kir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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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번역한 《신약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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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번역한 《신약성서》.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 개혁에서 시작되어 그의 주요 신학 사상인 루터주의(Lutheranism)를 중심으로 형성 · 발전된 프로테스탄트의 대표적인 한 교파. 칼뱅주의 교회, 영국 성공회와 더불어 3대 프로테스탄트 교파 중의 하나이다.
〔어의 및 기원〕 루터교란 용어는 본래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루터와 논쟁을 벌였던 가톨릭 신학자 요한 에크(Johann Eck)에 의해서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교황 레오 10세가 내린 루터 파문 교서 <데쳇 로마눔 폰티피쳄>(Decet Romanum Pontificem, 1521)에서 루터 및 루터측의 입장을 비난하고 단죄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 후 이 용어는 독일의 종교 개혁이 점차 성공을 거둠에 따라 '루터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루터 자신은 '루터파'(Lutherische) 대신 복음파'(evangeliche)라는 용어를 선택하였는데, 사실 17세기까지 루터교라는 용어는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었다. 당시 루터교의 신앙 고백들은 '복음주의 교회들' 혹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의 교회들'이라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당시의 루터 신학자들은 스스로를 지칭하여 '사도적 보편 교회'(ecclesia apostolica catholica) 혹은 '보편적 복음 교회'(ecclesia catholica evangelica)라고 하였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서 최초로 루터교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이는 매우 논쟁적인 의미에서 쓰여진 것이다.
〔주요 주장 및 교의〕 루터교의 주요 주장 및 교의는 9개의 신앙 고백문으로 이루어진 《일치서》(Liber Concor-diae) 안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사도 신경, 니체아 신경, 아타나시오 신경과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Augsburger Bekenntnis, 1530), 동 신앙 고백에 대한 <변론서>(Apologie, 1531), 루터의 <대교리 문답> (Grosser Kathechismus, 1529)과 <소교리 문답>(Kleiner Kathechismus, 1529) , <슈말칼덴 조항)(Schmalkaldische Artikel, 1537), <협화 신조>(Konkordienfomel, 1577)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세 가지 초대 교회의 신경과 아우크스부르크의 신앙 고백은 모든 루터 교회가 채택하고 있고, 루터의 <소교리 문답>은 대부분의 교회가 사용하며, 그 밖의 4개는 그 권위성 인정이나 사용 여부에 대해 의견이 나누어져 있다.
성서 : 신구약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동시에 인간에게 나타난 진리의 궁극적인 규범이고,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기준으로 여긴다(sola scriptura). 모든 이는 교직자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각자의 책임과 권리를 의식하면서 성서에 준하여 생활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성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은혜이다. 성서는 전례(세례, 성만찬)와 더불어 하느님이 내려 주시는 은혜의 방편이다. 곧 전례와 성서에 의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한없이 인간에게 주어진다(sola gratia). 그리고 성서를 통하여 성령이 개개의 그리스도인을 부르고, 거룩하게 하며 보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느님의 역사는 역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행해진다.
루터교 신학자들은 그 기본 사상을 논하면서 형상적 원리와 실질적 원리를 말하고 있는데, 전자는 성서를, 후자는 신앙을 지적하여 왔다. 따라서 루터 교회에서 사용되는 신앙 고백문들은 권위 있는 신앙 문서로 인정되어 채택되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서 밑에 위치하며, 그 정당성 여부는 항상 성서에 준한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교부들의 문헌 및 사도적 전승에 기초한 성전(聖傳)을 진리 및 계시의 또 하나의 원천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올바른 성서 해석을 위해서는 유용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인간과 의인론(義認論) : "실상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업과는 상관없이 신앙으로 의롭게 된다고 판단합니다" (로마 3, 28)라는 구절은, 루터교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의인론의 근거이다. 루터에 의하면, 이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을 형성하는 근본이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믿음으로써만 하느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여기서 루터의 독특한 인간 이해와,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관한 그의 주장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또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앞에 전적으로 무력하다. 영원한 비극인 이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그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이해할 수도 없으며, 그가 무엇을 말하는가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Disputatio, No. 31)고 한다. 따라서 자유 의지 또한 죄의 길을 택하는 것 이상은 행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신앙, 즉 믿음뿐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렇게 이해된, 인간의 위치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문제는 루터교 사상 가운데 근본적인 교의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창조주 하느님을 중심으로 개인의 운명과 세계사의 의의를 해석하려는 예정론(豫定論)적 세계관이다. 인간이 그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그의 법이 지배하고 있다는 관점이다. 물론 이 같은 관계에서의 하느님은 엄격한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로 상정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신앙-의인'(信仰-義人) 사상의 핵심이다. 루터의 가르침은 '복음' 혹은 '의인' 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인간을 위해 대속자(代贖者)가 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은총 안에 들어가게 되었고 죄의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을 때, 그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무 대가 없이 의롭게 되었다(구원에 이르렀다)는 교리에 집중된다.
신앙 :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의롭게 되는 데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공적 그리고 그것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뿐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신앙' 이라는 것이다. 오로지 신앙에 의하여서만 의인될 수 있다는 '오직 신앙으로만' (sola fides)은 루터교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모든 선한 일은 신앙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며, 참다운 신앙의 열매가 곧 선행이다. 신앙의 표현은 신앙과 생활에 관련된 모든 일에 있어서 하느님 앞에서 갖는 그리스도인 각자의 책임이다. 그리고 각자의 양심은 교회의 어떤 제도나 주관자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신앙이란 자비로운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전적인 신뢰이며, 하느님의 명하심에 대한 조건 없는 복종이요 모험이며, 적극적인 행동이다. 인간은 단지 이와 같은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을 감사와 순종으로 수락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신앙이요, 하느님께 대한 가장 올바른 태도라는 것이다.
전례와 교회 : 세례와 성만찬을 교회의 전례로 채택하여 구원을 위한 필수 요건으로 여긴다. 그리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은혜가 이 전례를 통하여 주어진다고 믿는다. 장년 세례와 유아 세례를 모두 강조한다. 또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명한 것이고 인간의 죄 씻음을 위한 하느님의 약속이 담긴 것이기 때문에 빵과 포도주와 '함께' (with) '가운데' (in) '밑에' (under)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존한다고 믿는다. 예배 의식에 관해서는 자유로운 견해를 채택하는데, 어느 한 가지 형식이나 의식에 구애받을 필요 없이, 오로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의 질서와 엄숙성을 고려하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 오늘날 루터교에서 사용되는 공용 예배 의식문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의 질서와 통일을 위한 조치일 뿐이다. 교회 행정 체제에 있어서도 신축성이 보장되어 있다. 어떤 루터 교회는 감독(監督)을 임명하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의회 정치 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9개 루터 교회 중 현재세 교회가 감독 체제를 취하고 있다.
〔기원 및 역사적 전개〕 형태상으로 루터교는 루터의 종교 개혁을 기원으로 하여 1520~1570년 사이에 유럽 대륙에 출현하였지만, 그 형태와 내용을 정확하게 서술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출현 초기부터 논쟁과 분열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는 하나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루터교라는 외형적 실체는, 루터와 그를 따르던 제자들 그리고 자유주의적 경향의 멜란히톤 (P. Melanchthon, 1497~1560)과 그의 제자들 간의 논쟁과 대립에서, 그리고 로마 가톨릭측과 칼뱅주의로부터 자신들을 방어 · 변호해 오면서 변화하고 발전 · 형성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 운동의 형성기(1517~1580년) : 루터의 95개조 명제 공개(1517)로부터 1580년 《일치서》가 출간되기까지 변론과 논쟁, 분열과 타협, 저항과 반발, 그리고 많은 양의 책이 출간되었다. 종교 개혁의 영향권 아래 처해 있던 사람들은 개혁 진영에 동의하느냐 가톨릭에 머무르느냐를 결정하여야 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사실, 루터교가 독일에서 번성하게 된 것은 수많은 정치 · 종교적 분쟁 후에 체결된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강화 조약에 의해 보장되었다. 많은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내에서 루터교와 가톨릭 중 오직 하나의 신앙만을 선택하게 되었다. 루터교 영주들이 국가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재빨리 교회 조직을 확립하여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루터의 종교 개혁 운동은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루터교는 스칸디나비아 제국(1527년 스웨덴, 1536년 덴마크와 노르웨이, 1539년 아이슬란드)과 프로이센(1525)과 발틱의 여러 지방(1523~1539) 등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되지만,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또한 스웨덴의 루터교는 종교 개혁 이전의 교회와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독특한 형태(즉 성직자의 복장, 주교·대주교의 명칭, 미사에서의 영성체 등)를 지니게 되었다.
루터가 죽기 직전, 그의 제자들은 '오시안더(Osiander) 논쟁' 과 '마요르(Mayor) 논쟁' 을 비롯한 여러 가지 교리 논쟁으로 분열되었다. 그 중요한 논쟁들 가운데 하나가 '율법과 복음의 관계' 에 관한 것이었다. 아그리콜라(J. Agricola)는 십계명이 그리스도교인에게 무가치한 것이라 하여 거부하면서, 믿음은 그리스도교인을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교회 안에는 거듭난 신자와 거듭나지 못한 신자가 섞여 있으므로 십계명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대교리 문답>에 십계명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달았다. 1546년 루터가 사망한 후에 루터교는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을 중심으로 멜란히톤의 인문주의를 대표하는 필립파(Philippist)와, 예나(Jena) 대학을 중심으로 암스도르프(N. v. Amsdorf)와 일리리쿠스(M.F. Illyricus)가 이끄는 정통 루터주의자-이들은 스스로를 지칭하여 순수 루터파(Gnesio-lutherans) 라고 이름하였다-로 갈라졌다.
정통 교리의 확립기(1580~1689년) :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이후에 <슈말칼덴 조항>, 멜란히톤의 교황권에 대한 논문, 그리고 루터의 <대교리 문답>과 <소교리 문답>이 루터교의 교리에 첨가되었다. 두 파로 갈라진 루터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문서들을 통합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으며, 안드레아(J. Andrea), 켐니츠(M.Chemnitz) 등 순수 루터파 신학자들이 이 문서 작성에 참여하였는데, 그 결과가 바로 1577년의 <협화 신조>이다. 158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50주년 기념으로 출판된 이 《협화 신조》에 대한 합의를 통하여 두 파는 통합을 이루게 되었고, 또한 정확한 교리의 확립을 가져왔다. 이리하여 루터교의 전통은 제1 세대의 교리 논쟁으로 시작하여 제2 세대에 와서 확립되었다. 이러한 교리 확립으로 가톨릭 교회와 다른 프로테스탄트파에 대한 논쟁은 지속되었으며 한층 더 심화되고, 동시에 성서의 권위에 버금가는 루터의 권위가 확립되었다. 1580~1689년에 가장 우세했던 세력은 정통파였는데, 그 특징은 신학적 체계화의 정밀성과 거대한 체계를 갖춘 교의 신학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루터교의 정통 교의는 1622년에 9권으로 완간된 게르하르트(J. Gerhard)의 《신학적 증거 원천》 (Loci Theologici)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루터의 명예와 신학을 방어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나타난 정통 신학자들의 경직성은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라는 형태의 저항을 낳게 되었다.
경건주의(1670~1760년) : 생명력을 잃은 정통주의신학과 형식적인 교회 생활에 대한 반발과 함께 실제적인 윤리 생활 면에 중점을 두면서 정통주의에 대한 반동이 경건주의자들에게서 일어났다. 인문주의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이 운동은 30년 전쟁(1618~1648) 이후 황무지가 되어 버린 신앙 생활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주려는 진지한 염원에서 출발하였다. 스페너(P.J. Spener)가 주창한 이 운동은 할레, 비텐베르크, 친천도르프를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스페너는 성서를 영적인 계몽과 삶의 경험을 위한 직접적인 원천으로 보았는데, 169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할레 대학으로 이동하여 이 대학을 경건주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러한 경건주의 운동은 조직적인 운동이 아닌 그 구성원에 따라 여러 형태와 내용을 갖게 되었다. 예컨대, 할레에서 경건주의자들은 엄격하고 교회론적으로 분리주의자였던 반면에, 비텐베르크에서 이들은 루터 교회에 더욱 집착하였고 신학적 사색을 강조하였다. 경건주의자들은 올바른 교리의 확립과 살아 있는 신앙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선교와 자선 사업도 장려하였다. 이들의 신학은 루터주의에 기초하였지만, 예수의 위격에 대한 강조가 다르며 예수의 성체와 성혈을 중시하는 전례를 하는 등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인간성에 대한 루터의 비관론이 약화되었고, 사색보다는 경험을 중시하고, 엄격한 성서적 원리보다는 각 개인이 종교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개인의 독립성을 강조하였다. 반면 이들이 체계적 교리를 경시한 결과 또다시 그 반동으로 계몽주의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계몽주의 시대(1750~1817년) : 18세기 비판적 합리주의와 이신론(理神論)이 독일에 침투하였고, 독일 계몽주의는 급속히 확장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 루터교는 합리주의에 의해 강력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계몽주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주지주의(主知主義) 새로운 지식에의 갈망, 그리고 권위주의의 배격은 그대로 루터교 교의에 근본적 변화를 초래하였다. 신앙의 목표 같은 것은 그 중요성을 상실하였고 종교 의식(儀式)이 종교성의 기준이 되었다.
계몽주의적 루터주의자들은 루터를 여전히 그들의 선구자로, 특히 종교 문제에 있어서는 개인의 절대적인 독립을 주장한 스승으로서 숭배하였다. 이들은 성서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일에 주력하였는데, 제믈러(J.S. Semler)는 성서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레싱(G.E. Lessing)은 루터의 표양을 따라 각 개인의 절대적인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신루터주의(Neuluthertum, 19세기) : 종교 개혁 300주년을 맞은 1817년에 하름스(K. Harms)는 계몽주의에 반대하는 95개조 논제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독일, 스칸디나비아, 미국 등에서는 다시 '루터로 돌아가자' 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믿음에 의한 의인(義人)' 교리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동시에 낭만주의 사상이 팽배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종교 개혁의 기본 자세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주창한 운동이었다. 이로부터 루터교 내의 복음주의적 경향(루터의 종교적 경험의 강조)과 일리리쿠스의 합리주의(교리의 체계화)적 경향이 대립하면서, 특히 독일 교회 안에서 오늘날까지 대조적인 신학 사조로서 변화 · 발전되어 왔다. 예컨대 경건주의와 낭만주의적 경향은 지나친 합리화에 대한 저항으로, 합리주의적 경향은 경험에 대한 지나친 강조에 대한 저항으로 루터교 사상사에서 나타나곤 했다. 사르토리우스(E.W.C.Sartorius), 필리피(F.A. Philippi, 하르낙(T. Harnack), 발터(W.M.Walther) 등이 이때 등장한 신학자들이다.
자유주의 사상(19세기) : 합리주의 혁명의 결과 계몽주의 정신은 트뢸취(E. Troeltsch)와 하르낙(A. v. Harnack)으로 대표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불트만(R. Bul-tmann)이 이끄는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반영되었으며, 동시에 보수 신학은 슐링크(E. Schlink) 등에 의해 더욱 신학적으로 심화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보수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은 양립하여 존속하고 있다.
루터교 교회 일치 운동 시대(19세기~현재) : 1850년 이후 유럽에서 특히 정치적 격변과 루터교 교회 일치 운동은 루터 교회를 지속적으로 변화시켰다. 루터교가 더 이상 국교가 아닌 독일에서 정치는 루터교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는 독일 교회에 중대한 위기를 가져왔다. 루터교인의 소수만 나치즘에 반대하였고, 대다수의 루터교인은 침묵을 지키거나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1934년 제1차 독일 그리스도교 고백 총회 이후 형성된 고백 교회' 와 나치 정권이 교회를 장악하기 위해 결성한 '독일 그리스도교인' 사이의 투쟁은 격렬하였고, 장기간 계속되었다. 독일 그리스도교 안전법' 의 통과로 고백 교회 자체의 분열이 초래되었고, 1939년까지 약 7천 명의 목사들이 고발 혹은 체포되었다. 그러나 독일 제3 제국의 흥망은 루터 교인들 사이에 교회 일치 운동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독일은 전후 교회 일치 운동인 '우나 상타'(Una Sancta)의 중심지가 되었고, 디베리우스(O. Dibe-lius) , 니묄러(M. Niemöller) 등의 루터교인들이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의 발족에 중대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루터교 교회 일치 운동의 또 하나의 결과는 1947년 스웨덴의 룬트에서 결성된 루터 교회의 국제 협력 기구인 루터교 세계 연맹(Lutheran World Federation)이다.
〔분포 및 현황〕 루터교는 프로테스탄트 교파 중 단일 교단으로서는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도교 계파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크다. 오늘날 루터교는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지만 특히 지리적으로 북유럽과 서유럽에 많으며, 독일인과 스칸디나비아인이 이주해서 세운 미국 등의 신생국에도 많다. 특히 덴마크 · 스웨덴 · 노르웨이 · 핀란드 등은 루터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있으며, 스위스 · 베넬룩스 3국 · 스코틀랜드처럼 루터교 외의 프로테스탄트 교파가 우세한 곳에서는 루터교가 약하고,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과 같이 성공회가 우세한 곳에서는 성공회 다음으로 영향력이 강하다. 한국에는 1958년에 미국으로부터 루터교가 들어왔다. 루터교단의 끊임없는 선교 활동으로 루터교는 선교지와 신생 교회 형성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루터교는 세계 본부를 인정하지 않으나 대부분의 루터교인들은 제네바에 본부를 둔 루터교 세계 연맹에 협력하고 있다.
1984년도 통계에 의하면 전세계적으로 루터교에 속한 교인들은 68,483,174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세계 인구의 1.5%, 전체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32%에 달한다. 이를 지역별로 구분해 보면 유럽 50,468,783명, 북아메리카 8,819,807명, 남아메리카 1,201,716명, 아프리카 3,873,916명, 아시아 3,431,271명,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698,677명 등이다.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와의 대화〕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대화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와의 대화는 루터교 세계 연맹이 '복음과 교회'라는 주제로 1967년에 개최한 회의를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회의의 결과로 5년 후 <말타 보고서>(Malta Report, 1972)가 발표되었는데 여기서는 '의화론'과 '성서와 교회 전승', '교회 일치'와 같은 문제들이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이러한 진전은 더 나아가 1973년에 '루터교-가톨릭 교회 합동위원회' (Lutheran-Catholic International Commission)를 구성하게 하였고, 이 합동위원회를 통하여 <공동 증거>(1978), , <공동 업무>(1978) <교회 직무 : 주교직>(1981), <공동체로 향한 길>(1984), <교회 일치를 향하여 : 루터교와 가톨릭 교회의 일치의 유형 · 방식 · 시기>(1984)라는 괄목할 만 한 성과의 문헌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희망적인 결과들은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사이의 오랜 역사적 반목에서 벗어나, 밝은 전망의 미래를 보여 주는 예증이라고 하겠다.
〔비평 및 평가〕 루터로부터 본격적으로 발단된 종교 개혁-오늘날까지도 서양사에서는 이 용어를 Reforma-tion 혹 Revolution으로 표현하여 그 평가에 있어서 상반된 논란의 여지가 있음을 보여 준다-및 교회의 분열은 분명, "교회사상 교회가 직면했던 유례없이 커다란 재난"(J.Lortz)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양 근세사의 전개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왔다. '종교 개혁'에 관한 종합적인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이 재난으로 인하여 신앙의 일치가 파괴되고, 신앙의 공동 기반이 근본적으로 동요되고, 수많은 종파적 사고가 탄생되었다는 불행한 결과는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루터 및 그로 인하여 발생한 종교 개혁에 관하여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쌍방이 함께 인정할 수 있는 정확한 평가 및 성숙한 반성은 발견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일방적으로 상대의 과오만을 부각시켜 아전인수격의 결론만을 유도해 내는 경향이 농후하다. 이는 명백히 교회 분열을 계속 연장하고 있는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루터는 과연 이러한 분열을 처음부터 예측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루터가 과연 이러한 분열을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의도했던가 하는 문제, 그리고 루터가 갈망하였던 진정한 염원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문제는 그 대답이 아직도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당시 교회가 보여준 태도는 과연 바람직하였던가, 당시의 상황에서 최선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등은 논의될 여지가 있다고 판단된다. 더구나 역사가 보여 준 서로간의 상처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태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책임을 갖고 진지한 자세로 대답하여야 할 것이다.
종교 개혁을 중세 가톨릭이라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도출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이었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놓쳐서는 안될 귀중한 역사적 교훈을 배울 수가 있다. 그것은 상보적(相補的, complementary)인 관계를 찾아내지 못한 편협성의 결과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교회사에서 "지난날의 잘못들이 한심하게도 어김없이 다시 되풀이되는" (S. Kohler) 과오가 재발되지 않도록 깨어 경계할 일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진지하고 엄숙하게 교회 일치를 모색하고 있다. 서로의 온전한 구원을 위하여 서로가 절실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 경건주의 ; 고백 교회 ; 루터 ; 의화론 ; 종교 개혁 ; 프로테스탄티즘)
※ 참고문헌  아우구스트 프란츤, 최석우 역, 《교회사》, 신학 총서 22, 분도출판사, 1982/ 지원용, 《루터의 사상-신학과 교육》, 컨콜디아사, 1971/ 지원용 역, 《신앙 고백서》, 컨콜디아사, 1988/ 전경연, 《루터 신학의 제문제》, 한국신학대학 출판부, 1974/ 김성태, <종교 개혁가 루터>, 《논문집》 10집, 가톨릭대학, 1984/ 一, 《역사 안의 교회-교회사 논문 선집》, 신학 총서 26, 분도출판사, 1985/ Eric W. Gritsch, Lutheranism, 《ER》, pp. 61~64/ M.B. Schepers, Lutheranism, 《ERE》, Pp. 1091~1098/ Theodore G. Tappert ed. & trans., The Book of Concord, Philadelphia, 1959/ E. Clifford Nelson's, The Rise of World Lutheranism : An American Perspective, Philadelphia, 1982/ 一. Lutheranism in North America 1914~1970, Minneapolis, 1972/ Conrad Bergendoff, The Church ofthe Lutheran Refommation, Saint Louise, 1967/ Eric W. Gritsch · Robert W. Jenson, Lutheranism : The Theological Movement and its Confessional Writings, Philadelphia, 1976/ Arthur C. Piepkorn, Profiles of Belief, vol. 2, San Francisco, 1978/ Julius Bodensieck ed., The Encyclopedia ofthe Lutheran Church, vols. 3, Minneapolis, 1956. 〔吳將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