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노, 티란니우스 Rufinus Tyrannius(345~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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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노.

루피노.

그리스도교 번역가 겸 저술가. 아퀼레이아(Aquileia)의 루피노라고도 한다. 345년 아퀼레이아 근교 콘코르디아(Concordia)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공부한 후 로마로 건너간 루피노는, 여기에서 자신과 동향(同鄕)인 성 예로니모(347?~419)와 친분 관계를 맺게 되었다. 공부가 끝난 후 아퀼레이아 근처의 한 수도원으로 들어갔는데 얼마 후 예로니모도 합류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예로니모는 갈리아 지방 선교를 위해 떠나게 되었고, 루피노는 이집트 수도승들의 사상에 매료되어 명망 있는 수도승들을 찾아 동방으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인 371년에, 훗날 아퀼레이아의 주교가 된 크로마티오(Chromatius)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과거 로마의 귀족이었던 멜라니아(Melania)를 동반한 루피노의 여행은 별다른 사고 없이 이루어졌다. 루피노와 멜라니아는 유명한 고행자들이 살고 있는 니트리(Nitrie)와 세테(Scété) 사막을 방문한 후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하였고, 루피노는 그곳에서 유명한 맹인 신학자 디디모(Didymus Caecus, 313?~395/399?)의 청강생 겸 제자가 되었다. 디디모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그는 그리스 교부들, 특히 오리제네스(Origenes)의 저작을 공부했다. 373년 5월 2일의 성 아타나시오 사망과 아리우스파의 루치우스(Lucius) 주교의 착좌는 루피노에게는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다. 루피노는 이집트에서 생활한 지 6년이 되던 377년에 그곳을 떠나 멜라니아가 이미 374년부터 예루살렘에 정착하면서 올리브(Olives) 산 위에 설립한 수도원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이곳에서 경건한 마음의 실행, 사랑의 실천, 저술과 연구를 위해 일생을 헌신하였으며, 390년경에는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으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392년 어느 날 조용한 삶을 살고 있던 루피노와 몇 년 전부터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성 예로니모에게 아테르비우스(Aterbius)라는 사람이 와서 오리제네스의 가르침에 관한 설명을 요구하였다. 성 예로니모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인 반면 루피노는 신중하게 거부하였다. 그런데 2년 후인 394년에 팔레스티나에 와 있던 키프로스(Chyprus) 섬 살라미스(Salamis)의 주교 성 에피파니오(Epipanius)와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 사이에 오리제네스를 주제로 격렬한 논쟁이 붙었다. 수도자들 역시 양편으로 나뉘어졌는데, 예로니모가 에피파니오를 지지한 반면 루피노는 요한 주교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화해하였으나 논쟁에서의 나쁜 인상은 그대로 남게 되었는데, 토론을 격렬하게 이끈 것은 루피노의 경솔함 때문이었다.
397년 말경 이탈리아로 돌아온 루피노는, 한 친구의 요청으로 오리제네스의 주요 저작들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마침 오리제네스의 신학적 권위를 다시금 토론하기 시작한 당시 시점에서 이것은 매우 경솔한 행동이었다. 이를 깨달은 루피노는 라틴 민족에게 엄청난 분량의 오리제네스 저작을 공부하도록 요구하였던 성 예로니모의 실례를 그 서문에 원용함으로써, 그의 번역이 성 예로니모의 후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성 예로니모는 자신의 과거 기억을 새삼 상기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인 오체아노(Oceanus)와 팜마키오(Pammachius)에게 자신을 옹호하는 편지를 써보냈다. 예로니모는 이 편지에서 자신은 오리제네스의 주석학 저술만을 라틴어로 번역하였을 따름이고, 그 교의에 동의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기 때문에, 오리제네스의 아주 위험한 저술을 일반 대중에게 유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루피노와는 아주 다르다고 하였다.
이렇게 오리제네스의 저작을 둘러싼 성 예로니모와 루피노 사이의 공방은 고향 친구였던 두 사람을 더욱 적대적인 관계로 만들었다. 결국 루피노는 400년에 아나스타시오(399~402) 교황 법정에 고소당하여 출두하라는 소환을 받았다. 그는 자기 신앙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증명하여야만 했다. 이 사건 이후 아퀼레이아로 되돌아온 루피노는 그때부터 기도와 연구 생활에만 전념하였으나 고트족(Goths)의 침입으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되자 407년경 그곳을 떠나 옛 친구 멜라니아가 살았던 피네툼(Pinetum)의 한 수도원으로 은둔하였다. 그 후 번역과 저작에 몰두하다가 시칠리아의 메시나(Messina)에서 410년에 사망하였다.
〔저 술〕 루피노의 대부분의 저작들은 번역 작품이며, 얼마 안되는 그의 개인적 저술은 오리제네스의 저작 번역과 관련된 그의 행위에 대한 변론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루피노는 저술가라기보다는 번역가이다. 사실상 그의 노력 덕분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 교부들의 저작, 즉 그가 번역하기 이전까지 겨우 원전의 형태로 출판되었던 오리제네스와 같은 교부들의 저작뿐만 아니라 당시의 가장 최근 저작들까지 접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번역 중에서 양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많은 노력이 투입된 것은 오리제네스의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으로 《원론》 두 권이 398년에 번역되었으며, 16권의 《창세기 강화》, 13권의 《출애굽기 강화》, 16권의 《레위기 강화》, 28권의 《민수기 강화》, 26권의 《여호수아기 강화》, 9권의 《판관기 강화》, 9권의 《시편 36장 · 37장 · 38장 강화》가 있다. 410년에 번역된 《민수기 강화》를 제외한 나머지는 404년 이전에 번역된 것들이다. 이외에도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주석》이 404년에, 《아가 주석》이 410년에 번역되었는데 사실상 이 두 번역은 완전한 것은 아니고 일종의 각색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영향과 역할〕 루피노는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어떤 것을 추구하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예로니모가 그를 공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비록 이러한 예로니모의 공격이 루피노의 공적을 평가하는 데 방해 요인이 되었지만 그의 침묵 자체는 이미 그의 훌륭한 인격과 진정한 영혼의 깊이를 가능하게 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상 루피노는 번역가 외의 다른 역할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역할은 라틴 민족에게 그리스어로 된 그리스도교 작가들의 저작을 알리는 데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번역에 대하여 많은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는 오리제네스의 저작을 번역하면서 어떤 경우에는 몇몇 원전의 문장을 삭제 · 수정하기도 하였으며, 또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각색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설명에 의하면, 오리제네스의 저작 중 정통 교의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삭제 · 수정하였으며,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같이 그 내용이 지나치게 길 경우에는 부득이 각색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신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뚜렷하지 않다. 이는 그가 신학 이론가나 저술가이기보다는 번역가였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훌륭한 번역가임에 틀림이 없다.(→ 교회사학 ; 멜라니아)
※ 참고문헌  G. Bardy, Rufin d'Aquile, 《DThC》, Librairie Letouzey 14, Paris, 1928/ F. Thelamon, 《DSp》 13/ M. Simonetti, 《NCE》 12, pp. 702~704. 〔邊琪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