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그레즈와, 피에르 루이 Legrégeois, Pierre Louis(1801~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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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일명 마카오 경리부) 대표 및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를 역임하였다.
1801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마카오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1828년 초부터 활동하였는데, 당시 마카오에는 동양 각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성직자들에 대한 지원과 연락을 위해 1732년 설립된 극동 대표부가 있었다. 그는 이 대표부의 부대표를 거쳐 1830년부터 12년간 마카오 대표부의 대표를 역임했다.
1831년 교황청에서 조선 교회를 교황 대리 감목구 즉 대목구(代牧區)로 설정함과 동시에 삼(Siam, 현 태국) 교 구의 보좌 주교인 브뤼기에르(B. Bruguière, 蘇)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자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르그레즈와 신부와 조선 선교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11월 27일자로 그를 조선교 구 주교의 총대리로 임명하고,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부터의 모든 결정 및 지시 사항을 연락하도록 위임하였다. 이때부터 르그레즈와 신부는 마카오에서 조선교구를 지원하게 되었다. 특히 1837년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 등 3명의 조선 신학생이 마카오에 도착하자 그는 조선 신학교를 극동 대표부 내에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교장으로 칼르리(M. Callery) 신부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곧 자신이 교장 겸 교수를 맡아 강의를 하였으며, 부대표인 리브와(N.F. Libois) 신부를 비롯하여 조선 선교를 위해 마카오에서 대기 중이던 데플레슈(M. Desflèches), 베르뇌(S.F. Berneux), 메스트르(J.A.Maistre) 신부 등도 강의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조선 유학생에 대한 교육은 1842년까지 6년 동안 계속되었다.
한편, 마카오가 포르투갈의 보호권(Padroado) 아래 있었기에 포르투갈 선교사들로부터 적지 않은 괴로움을 겪 게 되자 르그레즈와 신부는 1841년에 대표부를 영국 점령지인 홍콩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사재를 털어 홍콩에 대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1841년 말에 그가 파리본부의 신학교 지도자 겸 교수로 임명되어 프랑스로 귀국함으로써, 결국 극동 대표부의 홍콩 이전은 1847년에 가서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귀국 후에도 르그레즈와 신부는 제자인 김대건 신부로부터 1843년까지 3통, 최양업 신부로부터 1860년까지 모두 15차례의 서신을 주고받음으로써 조선 교회의 상황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내용을 파리 외 방전교회 본부에 보고함으로써 파리 외방전교회의 조선 교구에 대한 지원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하였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달레 교회사》 이원순 · 허인, 《金大建의 書翰》, 정음사, 1975/ 임충신 · 최석우 역주, 《崔良業神父書翰集》,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배티 사적지 편, 《최양업 신부의 서한》, 천주교 청주교구, 1996.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