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운동. 르네상스는 원래 '재생' 또는 '부활' 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문예 부흥(文藝復興)이라고도 한다. 이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5세기 후반에는 알프스 이북의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학문 · 예술 · 사상 등에서 고대의 그리스 · 로마 문화를 부활하여 이를 본받으려고 한 점이 특징이다. 그런데 고대 문화의 부활은 단순히 고대 세계로의 복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초월적 · 종교적 문화에 대한 거부감의 표시로 인간적 · 현세적 성격이 강한 고대 문화로 관심을 돌린 것이다. 이 점에서 고대 문화의 부활은 새로운 근대 문화의 형성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르네상스는 넓은 의미로는 역사적 시대 개념을 뜻한다. 14~16세기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로서 문화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 경제 사회 면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난 시대였다. 정치적으로는 지방 분권적 봉건 제도가 무너지고 중앙 집권적 국민 국가가 출현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장원 제도가해체되면서 자본주의가 발생하였다. 상업과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시민 계급이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신(神) 중심의 세계관은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이 시대는 중세적 요소가 기울어져 가고 근대적 요소가 대두되는 큰 전환기였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하나의 과도기 또는 전환기로 이해하게 되기까지에는 4세기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개념의 발생과 발전〕 르네상스 개념의 발생은 '중세'(medium aevum)라는 개념의 발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4~15세기에 살았던 이탈리아의 문인 학자와 예술가들은 고대를 문화의 황금 시대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빛나 는 고대 문화가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쇠퇴하였으나 그들의 시대에 와서 다시 소생하게 되었다고 믿었다. 이로부터 그들은 고대와 자신들 시대 사이에 있는 중간 시대를 중세라 부르고, 그 시대를 암흑과 야만, 무지몽매(無知蒙昧)의 시대로 평가하였다. '인문주의 아버지' 로 알려진 페트라르카(F.Petrarca, 1304~1374)와 그 뒤를 이은 보카치오(G. Boccaccio, 1313~1375), 빌라니(F. Villani, 1325~1405), 브루니(L. Bruni, 1370~1444)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고대 문화의 재생과 부활을 가장 분명하게 언급한 사람은 16세기의 바사리(G. Vasari, 1511~1574) 였다. 그는 《이탈리아 미술가 평전》(Vite de' Piu Eccelenti Pittori, Scultori, ed. Architetti Italiani, 1550)에서 고대 미술의 부활에 대해 처음으로 '리나시타' (rinacita)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르네상스' 라는 개념의 기원은 바로 이 말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와 같이 '르네상스' 는 본래 고대 문화의 재생 및 부활을 뜻하는 개념이었으며, 이 같은 개념은 14세기로부터 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19세기 : 르네상스가 하나의 역사적 시대 개념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이다. 프랑스의 문화사가인 미슐레(J. Michelet)는 《프랑스사》(Histoire de France, 1833~1862) 제7권에서 르네상스를 단순히 고대 문화의 부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정신과는 날카롭게 대조되는 새로운 근대 정신이 탄생한 시대라고 주장하였다. 중세는 자유가 상실되고 인간 정신이 타락한 시대였고, 르네상스는 세계와 인간을 새롭게 발견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미슐레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새로운 시대로서의 르네상스상((像)을 학문적으로 정립한 사람이 바로 스위스의 유명한 문화사가 부르크하르트(J.Burckhardt)였다. 그는 저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 1860)에서 르네상스의 특징을 '근대성' 과 '개인주의' 라는 두 개념으로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는 여러 면에서 '근대 유럽의 첫 아이' 였다. 이 시대를 특징짓는 '예술품으로서의 국가', '세계와 인간의 발견', '현세성과 부도덕성' 등은 르네상스의 근대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그가 볼 때, 이와 같은 근대적 특성들은 한마디로 '개인주의' 의 발로로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독특한 정치 풍토에서 비롯된 산물이었다.
현대의 해석 : 르네상스 연구사에서 '미슐레-부르크하르트 학설' 을 일반적으로 '전통적 르네상스관' (traditional conception ofthe Renaissance)이라고 부른다. 부르크하르트의 주장은 두 세대 동안 거의 도전을 받지 않은 채 널리 수용되었으며, 딜타이(W. Dilthey)와 카시러(E. Cassirer)에 의해 더욱 보강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전통적 르네상스관' 은 도전을 받게 되는데 이에 따르면, 전통적 견해는 두 가지 약점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제한적이고 피상적인 지식을 토대로 르네상스의 성격을 일반화 하려는 경향이 강한 점이고, 다른 하나는 중세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전통적 견해에 대한 비판과 공격이 우선 중세 전문 사가들(mediecalists)로부터 나오게 된 것은 당연하였다. 그들의 연구에 의하면 중세는 결코 암흑 시대가 아니었으며, 그 나름의 수준 높은 문화를 지닌 시대였다. 그들이 볼 때 르네상스 문화의 특징적 요소들은 대부분 중세 문화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고, 특히 고전 연구도 중세에서 결코 중단되지 않았다. 해스킨즈(C.H. Haskins)가 《12세기의 르네상스》(The Renaissance of the Twelfth Century)라는 책을 저술하여 주목을 끌게 되자 잇따라 8세기에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르네상스'(Carolingian Renaissance)와 10세기의 '오토 시대 르네상스'(Ottonian Renaissance)가 존재하였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과학사가인 사르톤(G. Sarton)과 토른다이크(L. Thorndike)는 근대 과학의 기원이 중세에 있다고 주장했고 마리탱(J. Maritain) 같은 철학자는 근대의 합리적 사고 방식은 르네상스 인문주의보다 중세 철학으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피력했다. 이에 따라 르네상스의 근대성은 과장되었으며, 르네상스는 중세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중세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문화사가 호이징가(J. Huizinga)의 표현을 빌리면 르네상스는 '근대의 여명' 이 아닌 '중세의 가을' (Der Herbst des Mitteralteres)이었다.
부르크하르트의 '전통적 학설' 은 많은 공격을 받았으나 완전히 거부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역사가들이 16세기의 유럽 세계는 14세기의 유럽 세계와 분명히 차이가 있으며, 이 기간에 근대적 요소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전통적 해석은 비록 과장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르네상스 개념의 유용성과 타당성을 재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개념과 성격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대폭 수정되어 중세와의 단절설은 많은 양보를 하게 되었다.
20세기 후반의 연구 경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첫 번째는 부르크하르트의 입장을 수정 · 보완하여
계승한 경우인데 대표적 학자로는 바론(H. Baron)과 가린(E. Garin)을 들 수 있다. 바론에 의하면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은 두 단계로 전개되었다. 제1 단계는 명상과 은둔을 이상으로 하는 문학 · 학문 운동이었고, 제2 단계는 행동과 사회 참여를 미덕으로 하는 시민적 · 정치적 운동이었다. 그는 인문주의 운동의 제2 단계인 15세기 초에 나타난 시민의 참여 의식과 책임 의식의 자각이야말로 중세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근대성이라고 강조하면서, 이 같은 근대성은 당시의 정치 · 사회적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가린 또한 대표적 인문주의자의 작품과 사상을 검토한 결과, 그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인정하게 되어 바론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두 번째 경향은 르네상스의 새로움을 인정하면서도 중세 전통의 영향을 중시하는 입장인데, 대표적인 학자는 크리스텔러(P.O. Kristeller)와 울만(B.L. Ullman)이다. 크리스텔러는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중세 수사학 전통을 계승한 지적 운동임을 역설하였고, 울만은 중세 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은 문학 운동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르네상스의 역사적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감소시킨 결과를 가져왔으며, 전통적 해석을 반대하는 입장에 상당한 지지를 보내 준 셈이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역사적 과도기로서의 르네상스 개념이다. 1950년대 초에 퍼거슨(W.K. Ferguson)에 의해 강력히 제시된 바 있는 이 주장은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퍼거슨에 의하면 14세기 초에서 16세기 말까지의 시대는 중세 문화가 근대 문화로 변화하는 이행기(移行期)였다. 이 시대는 중세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가 공존해 있으면서 그 자체의 특성을 지닌 역사적 시대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르네상스의 개념은 고대 문화의 부활' 로부터 시작하여 '근대의 시작' , '중세의 연장' ,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라는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르네상스가 역사적 과도기 또는 이행기라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정치 · 경제 · 사회 등 모든 면에서 그 시대에 독특한 '르네상스 정신과 관상(觀相)' 이 존재하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아직도 유보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배경〕 도시와 상업의 발달 : 십자군 전쟁으로 '상업의 부활' 이 일어나자 이탈리아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이탈리아는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일찍 봉건 제도가 무너지고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도시의 발달은 부유한 시민 계급을 출현시켰으며 이들은 도시의 세속적 생활에 부합되는 새로운 문화와 교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종교적인 중세 문화보다 현세적인 고대 문화가 그들에게 친밀감을 주게 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더욱이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의 위대성이 남아 있었기에 여기에 남아 있는 많은 유물과 유적은 바로 혈통을 같이하는 선조들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려는 심리와 새로운 문화를 맞이하려는 시대 정신이 결합되어 고대 문화의 부활이 촉진되었다.
도시와 상업이 발달함으로써 이탈리아는 알프스 북부의 유럽과는 다른 정치 풍토를 낳게 되었다. 알프스 북부 의 유럽에서는 중앙 집권적 국민 국가가 형성되어 갔으나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도시 국가들이 분립하여 발전하였다.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은 크게 서유럽형(型)과 자치 도시형(commune)으로 구분되었다. 나폴리 왕국 · 교황령 등이 전자의 대표적 예라면, 후자의 예로는 피렌체 · 베네치아 · 밀라노 등을 들 수 있다. 서유럽형의 국가들은 중앙 집권적인 군주정(君主政)의 형태를, 자치 도시형의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공화정(共和政)을 취하였으나 각 국가의 사정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하였다. 피렌체에서는 자유 공화정이 발전하였지만 베네치아에서는 귀족정의 형태가, 밀라노에서는 전제정(專制政)의 형태가 지배적이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도시 국가들의 출현과 난립은 두 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첫째, 서로 이해(利害)를 달리하는 국가들이 대립하고 견제하는 가운데 중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정치 제도와 원리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 근대적인 세력 균형의 원리가 작용하였고 국내적으로는 모든 정치가 이해 관계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제 국가는 봉건적 관습이나 교회의 권위에 의존하기보다는 의도된 목적과 합리적 계산에서 나온 정치술과 외교술에 더욱 의존하였다. 부르크하르트는 이 같은 국가를 '예술품으로서의 국가' 즉 '타산(打算)과 의식의 창조물' 로서의 국가라고 불러, 근대 국가의 원형(原型)을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찾았다. 둘째, 도시 국가들의 난립은 이탈리아의 통일을 지연시켰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르네상스 문화를 발전시켰다. 15세기 초에 전제적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통일과 평화' 라는 기치 아래 북부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위하여 노골적인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다. 피렌체는 '이탈리아의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는 명분하에 볼로냐 동맹을 결성하여 밀라노에 대항하였다. 피렌체는 한때 함락 직전의 위기 상태에까지 이르렀으나 극적으로 소생하여 승리를 쟁취하였다. 만일 이 당시 북부 이탈리아와 중부 이탈리아의 국가들이 단일 국가로 통일되어 밀라노의 강력한 지배를 받게 되었다면 르네상스 문화의 다양성은 상실되고 그 문화의 도시적 · 시민적 성격도 사라졌을 것이다.
정치적 정세 변화 : 15세기 후반에 와서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은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거의 모든 도시 국가에서 공화정은 몰락하고 참주정(僭主政)이 등장하였다. 참주정이 출현하게 된 원인은 한마디로 사회적 불안과 혼란 때문이었다. 이탈리아는 밖으로 독일 · 프랑스 · 스페인 같은 강대국들의 침입과 간섭에 의해서, 그리고 안으로는 당파 싸움 · 문벌 싸움 · 계급 투쟁 등으로 인하여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각 도시 국가들의 정치적 변화는 여러 계층 사이의 경제적 이해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도시 귀족 계급(grandi)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신흥 부유 계급(popolo grasso)과 시민 계급(popolo)은 귀족적 과두정(寡頭政)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곧 부유 계급과 시민 계급 사이에 반목과 불화가 일어나서 시민 계급은 노동자 계급(popolominuto)과 손을 잡고 부유 계급을 축출하였다. 시민 계급은 정권을 장악하였지만 능력과 경험 부족으로 사회는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정권이 다시 부유 계급으로 넘어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이와 같은 공화정의 만성적인 내란 상태는 시민들에게 강한 불안감을 심어 주었다. 그들은 이제 자유보다는 안정과 질서를 더욱 갈망하였고 분쟁을 해결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독재마저 용인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참주 정치의 출현은 이 같은 시대 상황의 산물이었다. 각 도시 국가들은 당파와 계급적 이익을 초월한 능력 있고 덕망 있는 외부 인사를 초빙하여 그에게 통치를 위임하였다. 이를 '포데스타' (podesta)라고 한다. 포데스타의 임기는 처음에는 1년 미만이었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차로 연장되어 끝내는 종신제로 바뀌었다. 종신제 포데스타는 사실상의 1인 독재자로서 이들이 곧 '참주'(signoria)였다. 참주의 출신과 권력 장악 방법은 다양하였다.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가문은 부유한 금융가 집안이었고 밀라노의 스포르차(Sforza) 가문은 용병 대장 출신의 집안이었다. 참주들은 그들의 권력이 전체 의사를 대변한 것이며 시민과의 무언의 합의에 의해 계속 위임받은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 합법적 근거와 정통성은 매우 미약하였다. 따라서 정권 인수의 비정통성을 문제 삼아 그들의 지위를 노리는 사람들로 인하여 그들의 신변에는 항상 불안과 위험이 따라다녔다. 심복 부하는 물론이고 심지어 처자식마저 믿을 수 없는 풍토에서 참주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능력과 계략뿐이었다. 자연히 그들은 윤리적 규범을 무시하고 필요에 따라 음모, 모략, 독살 등을 자행하였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마키아벨리(N. Machiavelli)의 《군주론》(IlPrincipe)은 이 같은 정치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참주 정치는 종교와 윤리를 무시하고 시민의 공익 정신을 파괴하는 폐단을 초래하였으나, 역사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긍정적 공헌을 하였다. 통치의 능률성을 제고하여 사회 질서와 안전을 확보하였으며, 막강한 정치력과 재부(財富)를 가진 참주들이 예술과 학문을 적극적으로 후원함으로써 르네상스 문화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참주들은 무자비하고 냉혹한 면도 있었지만, 개성적이고 자유 분방한 르네상스적 인간상을 잘 대변하였다. 정통성을 갖지 못한 지배자로서의 그들의 생활은 언제나 불안과 고독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가문과 혈통이 좋은 사람보다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위안과 허영을 만족시키고자 하였다. 후세에 기념비적 업적과 명성을 남기기를 원한 그들은 천재적인 시인, 학자,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하여 표현된 자신들의 공적을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군주로서의 명분을 찾을 수 있었다. 참주들이 문학과예술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보호 육성한 것은 이 같은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 참주뿐만 아니라 그들의 비호를 받고 있는 문인, 예술가들 또한 개성적이고 자아 의식이 강하였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영광이 결코 영구적이 아닌, 짧은 순간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의 천재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자 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자연을 그대로 화폭에 담으려 하였고 미켈란젤로(Michelangello, 1475~1564)는 대리석에 생명을 불어넣고자 하였는데, 르네상스 문화의 독창성은 바로 이 같은 천재 예술가들의 심혈과 투혼의 결실이었다.
결국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도시의 발달과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을 바탕으로 하여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국민 정신과 새로운 세속적 문화를 추구하려는 시대 정신, 그리고 다양한 도시 국가의 정치 풍토가 결합되어 제일 먼저 일어나게 되었다.
〔르네상스의 시대 정신〕 인문주의 : 르네상스의 시대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것은 인문주의(humanismus)
이다. 첫째,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하나의 철학 체계라기보다는 고전 연구에 입각한 교육 · 학문 운동으로,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강조하는 현대 인문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인문주의' 란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9세기 초였지만, '인문주의자' 라는 말은 15세기에 이미 사용되었다. 이탈리아어 '우마니스타' (umanista)는 '인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 교수나 중등 학교 교사를 뜻하였고, 인문학은 그 당시 문법 · 시 · 수사 · 역사 · 윤리를 포함하는 새로운 교과 과정으로서 이들에 대한 연구는 모두 고전을 토대로 하였다. 인문학은 논리 · 자연 철학 · 형이상학을 강조하는 중세의 전통적 학문과는 명백히 대조되었으며, 따라서 양자는 서로 대립 · 경쟁하였다. 인문주의자들이 볼 때, 중세의 학문과 교육은 전문적이고 직업적이었으며 또한 추상적이었다. 이에 비해 인문학은 인간의 자유와 교양, 덕성과 지혜를 중시하고 궁극적으로 심신이 조화된 전인(全人) 교육을 목표로 하였다.
둘째, 서양의 지적(知的) 전통을 철학적 전통과 수사학적 전통으로 구분한다면,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후자에 속하는 지적 운동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리스의 소피스트, 로마의 치체로, 중세의 문서 작성자들(dicta- tores)로 이어져 내려오는 수사학적 전통에 입각해 있다. 일반적으로 철학적 전통에서 추구한 것은 불변의 절대적 진리였으나, 수사학적 전통에서는 절대적 진리를 부인하고 상대적 진리와 개연적(蓋然的) 진리만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이성의 논리적 체계를 강조하는 과학은 철학 전통에 바탕을 두게 되었고, 언어의 효과적 설득을 중시하는 인문학은 수사학적 전통에 기초하였다. 인문주의자들이 볼 때, 인간의 현실 생활은 매우 복잡하고 변화 무쌍하여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현실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논리적 분석보다 직관적 판단이며, 진리에 대한 명확한 인식보다 진리라고 믿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인문주의자들이 논리학에 입각한 스콜라 철학을 배격하고 인문주의를 수사학의 토대 위에 확립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째, 스콜라 철학의 특징이 주지주의(主知主義)라면 인문주의의 특징은 주의주의(主意主義)에 있다. 인문주의자들은 지성보다 의지를, 지식보다 덕행을 더 높이 평가하였고 그들의 관심을 논리학에서 수사학으로, 형이상학에서 윤리학으로, 자연 철학에서 문학과 교육으로 돌리게 되었다.
넷째,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하였다. 14세기의 인문주의자들은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에 몰두한 문인들이었다. 그들은 금욕적인 스토아 철학의 윤리관에 입각하여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한 '고독한 생활과 명상 생활' 을 예찬하였다. 그러나 15세기에 들어와서 은둔 생활과 명상 생활에 대한 예찬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행동적 생활과 정치적 생활' 에 대한 예찬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것은 각 도시 국가에서 공화정이 발전하면서 시민들의 책임 의식과 자유 의식이 각성되었기 때문이다.
인문주의의 시민적 정치적 특성은 15세기 후반, 참주 정치의 대두와 신플라톤주의의 발전으로 쇠퇴하였다. 따라서 15세기 초에 왕성하였던 '행동적 참여 생활' 의 이상은 다시 '명상 생활' 의 이상으로 대체되었다. 참주들의 궁정에 기생(寄生)할 수밖에 없는 인문주의자들은 시민의 자유와 의무를 강조하는 공화주의적 덕성보다는 안정과 평화를 중시하는 군주정의 덕성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상적 시민상보다는 이상적 군주상의 제시에 더욱 열중하였다. 이들이 제시한 이상적 군주상은 모든 면에 능통한 만능인이며, 학식과 교양을 겸비한 우아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어야 했다. 이 같은 인간상은 비단 16세기 상류 계급의 이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 '진정한 유럽 신사(神士)' 의 이상이 되었지만, 시민적 인문주의의 이상적 인간상과는 거리가 있다.
비판적 인문주의 : 알프스 북부의 '북방 인문주의' 는 이탈리아 인문주의에 비해 사회 비판적 · 종교 개혁적 경향이 강하였으므로 이를 그리스도교 인문주의' (Christian humanism), 또는 '성서적 인문주의' (Biblical humanism)라고 한다. 흔히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예술과 학문을 낳았고 알프스 북부의 르네상스는 종교와 사회 개혁을 낳았다" 고 주장한다. 이것은 알프스 북부의 유럽에서는 아직도 봉건 제도와 교회의 힘이 강력하게 남아 있어 갈등의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차이는 고전 연구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의 고전 연구는 세속적인 그리스 · 로마의 정신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었음에 반해, 북방 인문주의자들의 고전 연구는 성서와 초기 교회의 정신으로 복귀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북방 인문주의자들은 자연히 성서와 초기 교부들의 원전을 연구하기 위해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배우게 되었고, 그 결과 초기 교회 시대의 생활과 정신에 비추어 세속화된 현실 사회와 교회를 신랄히 비판하게 되었다. '인문주의 왕자' 로 불리는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D. Erasmus, 1469~1536)는 《우신 예찬》(愚神禮讚,Encomium Moriae)을 저술하여 당시의 교회와 성직자의 타락을 풍자하였고, 그리스어판 《신약성서》를 번역하여 《불가타 성서》의 오류를 폭로하였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목표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평화와 통일이었지 분열과 전복이 아니었다. 영국의 콜레트(J. Colet, 1467~1519)는 고위 성직자로 있으면서 교회의 개혁을 지지하였고, 모어(T. More, 1478~1536)는 《유토피아》(Utopia)를 통하여 영국 사회의 부조리와 부패를 고발하였다.
〔르네상스와 교회〕 르네상스 시대가 반(反)종교적 성격을 지닌다고 말할 수는 없다. 15세기에 이탈리아에서는 참회를 권장하는 설교가들(Bernardinus de Siena, G. Savona-rola)이 등장하였는데, 그들은 국민들에게 커다란 공명(共鳴)을 일으켰다. 또한 예술에서도 종교적인 동기가 널리 작용하였다. 니콜라오 5세 교황 이래로 레오 10세 까지의 르네상스 교황들에게는 교회가 세계에 지도적인 문화 창조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기초 이념이 있었다. 로마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이면서 동시에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가 되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로마 교황들의 커다란 오류는 바로 그들이 내적인 개혁을 빠뜨린 데에 있었다. 교황청은 특별히 유럽의 영토와 도시 국가들의 분리뿐만 아니라 신학적 기초와 교회법으로부터 국가의 세력을 광범위하게 벗어나게 함으로써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교황령은 인노첸시오 8세와 알렉산델 6세 교황 때 이탈리아 국정으로 넘어가 르네상스 교황들은 유럽 정치에 강력히 휘말려 들어갔다. 르네상스 교황은 그들의 시대적 사명인 교회 쇄신과 이슬람교도에 대항한 서유럽의 단합을 완수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부가 족벌주의와 친족주의 정책을 감행했던 점 등으로 종교 개혁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르네상스는 전체적으로 바오로 4세와 비오 5세 교황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에 미친 영향은, 특히 교회 예술 면에 있어서, 간과될 수 없을 것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종교 개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거나 또는 개혁에 직접적 동기가 되지는 않았으나 종교 개혁의 지적 배경이 된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 고전을 통하여 초기 교회의 순수한 정신을 이해하게 되었고 동시에 현실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적 위기 의식은 내면적인 것이었지 외면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초대 교회의 제도와 규율을 다시 일으킬 것을 주창하며, 산상 수훈(山上垂訓)에 입각한 종교적 내면성을 강조하고 허례 허식에 가까운 교회의 폐단들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작게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나타난 성직자의 타락에 대한 조롱으로부터 크게는 에라스무스와 콜레트의 그리스도교 정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활동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의 개혁 운동이었을 뿐 그리스도교 사회 자체를 붕괴시키려는 운동은 아니었다.
〔르네상스의 문화와 그 의의〕 고전 연구 : 문화 운동으로서의 르네상스는 서양 근대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선 그것은 오늘의 서양 문명에 토대가 된 고전 문화를 부활시켜 전승시켰다. 그러므로 르네상스가 없었다면 서양 문화에서 고전주의 전통은 대부분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중세인들도 고전을 연구하였으나, 중세의 고전 연구와 르네상스의 고전 연구는 본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다. 중세인들은 그리스도교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전을 연구하였을 뿐이며 고전에 대한 자각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고대 예찬은 영원히 사라져 버린 세계에 대한 회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르네상스인의 고전 연구는 그 자체가 삶의 목표였으므로 그들의 고대 예찬에는 고대의 영광과 위대성을 부활시키고 고대인의 덕성과 교훈을 본받으려는 의지가 깃들여 있었다.
르네상스의 고전 연구는 라틴 연구와 그리스 연구로 나눌 수 있다. 라틴어는 중세에서 공용어이자 학술어였다. 그러나 문체가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였으므로 인문주의자들은 치체로를 비롯한 유명한 라틴 작가들의 훌륭한 문체를 연구하여 이를 본받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렇다고 라틴 연구는 문체의 모방으로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고대인의 사상과 세계관에 접근하게 되면서부터 라틴 연구는 더욱 왕성해지게 되었다. 이에 비해 그리스어는 중세 유럽에서 거의 통용되지 않았으므로 이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그리스 연구는 14세기 말, 동로마 제국의 학자인 크리솔로라스(M.Chrysoloras, 1350~1415)의 이탈리아 방문으로 자극을 받게 되었고, 1453년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많은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피난오면서 활기를 띠게 되었다. 1462년 피렌체에 '플라톤 학원'(Academia Platonica)이 창설되고 피치노(M. Ficino, 1433~1499)와 피코(Pico della Mirandola, 1463~1494) 같은 당대의 일급 학자들이 여기에 모임으로써 그리스 연구는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문학 : 인문주의는 유럽 각국의 자국어(自國語) 문학 또는 국민 문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자국어 문학의 발생은 민족 의식의 성장과 중앙 집권 국가의 출현이라는 정치적 배경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 단테(Dante,
1265~1321)는 이탈리아어로 《신곡》(神曲)을 써서 불후의 명성을 남겼고, 페트라르카는 서정시집 《칸초니에레》 (Canzoniere)에서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근대 단편 소설의 효시였으며, 영국의 초서(G. Chaucer, 1340~1400)는 《데카메론》의 영향을 받아 《켄터베리 이야기》를 저술하였고 세익스피어(Shakespear, 1564~1616)는 《햄릿》, 《오델로》, 《맥베드》 등 많은 희곡 작품을 써서 영국의 국민 문학에 기초를 놓았다. 프랑스의 라블레(F. Rabelais, 1494~1563)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 자유 분방한 인간 정신을 고취하였고 몽테뉴(M. de Montaigne, 1533~1592)는 《수상록》에서 인간성을 깊이 있게 성찰함으로써 근대 수필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스페인의 세르반테스(M. de Cervantes)는 《돈 키호테》에서 중세의 기사도를 풍자하면서도 '햄릿' 과는 대조되는 낙천적이고 행동적인 인간형을 묘사하였다.
역사 의식 :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비판 정신과 새로운 역사 의식을 초래하였다. 인문주의자들은 문헌을 수집하여 고증하고 유물을 판정하는 가운데 문헌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비판 정신을 기르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6~1457)이다. 그는 언어 분석과 사실 고증을 통하여 교황의 세속 지배권의 근거가 되었던 <콘스탄틴의 증여 문서>(Donatio Constantini)가 중세에 만들어진 위조임을 폭로하였다. 이와 같은 비판 정신은 현실 사회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교회와 성직자들의 타락에 대한 인문주의자들의 신랄한 비판은 종교 개혁의 정신적 풍토를 조성하였다. 또 비판 정신과 현실주의는 새로운 역사 의식과 역사관에 영향을 주었다. 중세의 역사관은 한마디로 신의 섭리 사관이었으므로 모든 역사적 현상은 초자연적 인과관계에 의해 설명되었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들은 역사를 인간의 동기에 의해 일어나는 인간 행위의 기록으로 보았다. 브루니는 《피렌체사》의 서술에서 기적과 전설을 배제하였고 마키아벨리는 역사 발전에서 인과적 요인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현세적 인간 중심적인 역사관은 시대 구분 문제에서도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사관과 현저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중세의 교부들은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을 암흑과 죄악의 시대로, 그 이후를 광명과 진리의 시대로 2분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를 기술하였다. 이에 반해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 · 로마의 고전 문화를 높이 평가하고 고전 문화가 부활한 자신들의 시대를 '새로운 시대' 로 인식함으로써 고대 · 중세 · 근대라는 3분법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새로운 인간관 : 르네상스인들은 강한 자아 의식과 개성을 지녔는데, 이는 그들의 명예 추구욕에서 잘 드러난다. 르네상스의 문인, 학자, 예술가, 참주들은 한결같이 불후의 명성을 얻으려는 열망에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였고 또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명성을 얻고자 하는 심리에서 자서전, 전기, 역사서가 많이 저술되었다. 철리니(B. Cellini, 1500~1571)의 《자서전》과 보카치오의 《단테전》, 바사리의 《이탈리아 미술가 평전》, 빌라니의 《피렌체 명인전》 등이 대표적인 예인데 이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적 심리 상태를 객관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도시 국가의 명성을 위해 저술된 역사서로는 브루니, 마키아벨리, 귀챠르디니(F. Guicciardini, 1483~1540)가 각각 쓴 《피렌체사》가 유명하다.
개성의 발달로 다재 다능한 만능인이 출현하였다.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5~1472)는 인문학 · 자연·과학 · 예술 분야에 모두 정통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걷기 · 말타기 · 구두 고치기 · 동전 높이 던지기에서도 자신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호언하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회화 · 건축 시 · 음악 등에 두루 통달한 만능의 천재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점에서 르네상스는 다재 다능한 천재의 세기이며 개성이 최고도로 발휘되는 개인의 완성 시대였다.
개인에 대한 자각은 마침내 인간 전반의 문제로 관심을 확대시키게 되었고 그 결과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의 관념이 대두되었다. 이 같은 관념은 주로 마네티(G. Ma-netti, 1396~1459), 피치노, 피코 같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옹호되었다. 피코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하여》(De hominis dignitate)에서 "오직 인간에게만 스스로의 자유 의사에 따라 성장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고 강조함으로써 신의 피조물 가운데 인간만이 자유 의지에 따라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도, 동물의 상태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알베르티의 신념과, 인간은 의지로 자신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다는 피코의 믿음은 중세의 부정적 인간관을 자신에 찬 긍정적 인간관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과 고귀성은 혈통과 가문이 아니라 개인의 덕성과 능력에 달려 있다고 믿게 되었다.
과학 : 르네상스는 '인간의 발견'과 더불어 '세계의 발견'을 가져왔다. 인문주의는 수사와 도덕을 중시하는 인문학에 역점을 두었으므로 자연 과학의 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인문주의에 내포된 현세주의는 세계와 자연으로 눈을 돌리게 하였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심에 이끌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게 되었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지리상의 발견을 가져왔다. 자연에 대한 관심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문학 활동과 예술 활동을 자극하였고, 자연을 관찰하고 탐구하려는 정신은 근대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밑바탕이 되었다. 코페르니쿠스(Copermicus, 1473~1543)의 지동설(地動說)과 이를 지지한 케플러(J. Kepler, 1,571~1630)와 갈릴레이(G.Galilei, 1564~1642)의 학설에 의해 우주의 신비가 하나씩 밝혀지면서 마침내 중세의 우주관을 뒤엎는 과학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구텐베르크(J. Gutenberg, 1400~1468)가 발명한 활판 인쇄술은 새로운 지식과 사상의 전파에 획기적으로 공헌하여 17세기의 지적 혁명을 가능하게 하였다. 중국에서 발명되어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에 들어온 화약은 전술(戰術)의 대변화와 봉건 귀족의 몰락을 촉진하였다.
미술과 조각 : '인간과 세계의 발견' 즉, 개인주의와 사실주의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은 르네상스의 미술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은 중세의 종교적 주제에서 벗어나서 인간과 자연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점에 있다. 르네상스 미술 가운데 최고의 업적을 자랑하는 회화는 원근법과 명암법이 발견되어 사물을 입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게 됨으로써 크게 발전하였다. 회화에서의 새로운 화풍은 14세기 피렌체의 지오토(Giotto, 1266~1337)로부터 시작하여 마사치오(Masaccio, 1401~1428), 안젤리코(Angelico, 1387~1455) , 보티첼리(Botticelli, 1444~1510)를 거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Raffaello, 1483~1520) , 미켈란젤로에 이르러 그 절정을 맞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원근법과 명암법을 사용하여 형체와 색채를 조화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최후의 만찬>은 원근법에 의한 구도의 완벽한 균형감과 탁월한 심리 묘사로 유명하며 <모나리자>는 명암과 색채를 통하여 여성미의 이상을 표현하였다. 성모상으로 유명한 라파엘로는 조화의 미를 창조하였는데 <아테네 학당>은 구도와 색채 면에서 고전적 완전성을 잘 구현하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천지 창조>와 벽화 <최후의 심판>은 성서의 내용을 생동감 있는 필치로 묘사한 걸작품으로 여기에는 다양한 신의 이미지와 인간의 모습이 대담하게 그려져 있다. 이 세 사람은 각자의 독특한 방식으로 르네상스의 미술을 완성하였지만 한 가지 공통된 것은 15세기 미술의 단순한 사실주의를 넘어서 고전적 완전성에 입각한 이상주의를 지향하였다는 점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인간의 이상상에서 승고함과 신비함을 찾고자 하였고, 미켈란젤로는 용솟음치는 힘과 장대함을 구현하고자 하였으며 라파엘로는 완벽한 조화의 미를 추구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이 자연미와 인간의 힘을 이상화하였다는 것은 르네상스 미술에서도 인간주의와 현세주의가 승리하였음을 뜻한다.
16세기에는 미술의 중심이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옮겨 가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세속적 주제, 화려한 색채, 관능적 미가 두드러진 화풍이 발전하였는데 대표적인 화가로는 지오르지오네(Giorgione, 1478~1510), 티치아노(Tiziano, 1476~1576) , 베로네제(Veronese, 1528~1588) 등이 있다.
북방의 미술은 이탈리아처럼 활발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나름의 독특성을 갖고 있다. 네덜란드의 반 아이크(van Eyck, Hubert, 1366~1462 ; Jan, 1390~1441?) 형제는 유화의 기법을 개발하여 정확하고 힘찬 그림을 그렸으며 뷔르겔(P. Bürgel, 1528~1569)은 농민과 민중의 생활을 잘 묘사하였다. 베네치아 화풍의 영향을 받은 독일의 뒤러(A.Diirer, 1471~1528)는 냉철한 지성미를 작품에 담고 있고, 초상화를 많이 그린 홀바인(H. Holbein, 1465~1524)의 작품들은 고요한 품격의 미를 지니고 있다. 또 스페인의 벨라스케스(Velasques, 1599~1660)와 엘 그레코(El Greco,1541~1614)는 르네상스 양식에서 바로크 양식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조각에서는 기베르티(Ghiberti, 1378~1455)와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가 유명하며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은 남성적 육체미를 완벽하게 표현한 최고의 걸작품이다. 건축에서는 중세의 고딕 양식을 대신하여 르네상스 양식이 발달했다. 르네상스 양식은 그리스의 열주식(列柱式)과 로마의 돔과 아치 형식을 절충한 것으로서 브라만테(Bramante, 1444~1514)가 설계하여 착수한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이 대표적 예이다.
〔평가 및 의의〕 르네상스가 근대 세계에 공헌한 가장 큰 업적은 '인간의 발견' 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사람들은 자아 의식이 각성되어 인간을 '정신적 개체' 로 인식하였으며 인간의 덕성과 능력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이 같은 '인간의 발견' 으로 말미암아 다채롭고 개성적인 르네상스 문화가 꽃피게 되었고 근대 개인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근대도 중세도 아닌 중도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중세 사회에 대한 반발이었고 중세의 우주관에 대한 대반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세의 우주관을 대체할 만한 자체의 명백한 우주관을 갖지 못하였다. 따라서 중세적 이념과 정신을 거부하면서도 프로테스탄트주의나 기계적 우주관을 수용할 수 없었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윤리관과 고대의 가치관을 조화시키고 이성과 경건을 결합시키고자 시도하였을 뿐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특성과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 문예 부흥 ; → 그리스도교 인문주의 ; 르네상스 교황 ; 르네상스 예술)
※ 참고문헌 H. Baron, The Crisis ofthe Early Italian Renaissance, N.J. Rev. ed., Princeton, 1966/ W.J. Bouwsma, The Interpretation of Renaissance Humanism, New York, 1959/ J. Burckhardt, 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 Stuttgart · Kröner, 1966/P. Burke, The Renaisance, Atlantic Highlands, New York, 1990/ A. Chastel et al., The Reneissance : Essays in Interpretation, London, 1982/ W.K. Ferguson, The Renaissance in Historical Thought : Five Centuries of Interpretation, Boston, 1948/ E. Garin, L 'umanesimo italiano Filosofia e vita civile nel Rinascimento, Bari, 1952(Renaissance Characters ed., trans. by L.G. Cochrane, Chicago and London, 1988)/A. Goodman . A. MacKay eds., The Impact of Humanism on Western Europe, London, 1990/ C.H. Haskins, The Reneissance of the Twelfth Century, New York, 1962/ D. Hay, The Italiaan Renaissance in its Historical Background, Cambridge, 1961/ J. Huizinga, The Waning fthe
Middle Ages, London, 1955/P.O. Kristeller, Studies in Renaissance Thought and Letters, Rome, 1956/ W. Kerrigan · G. Braden, The Idea of Renaissance, Boltimore and London, 1989/ A. Rabil, Jr. ed., Renaissance Humanism, vols. 3, Philadelphia, 1991/ A. Renaudet, Humanisme et Renaissance, Geneva, 1958/ C. Trinkaus, The Scope of Renaissance Humanism, Ann Arbor, 1983/ B.L. Ullman, Studies in the Italian Renaissance, Rome, 1955/ 金榮漢, 《르네상스의 유토피아 思想》, 탐구당, 1988/ -, 《르네상스 휴머니즘과 유토피아니즘》, 탐구당, 1989/ 車河淳, 《르네상스의 社會와 思想》, 탐구당, 1973. 〔金榮漢〕
르네상스 〔프 · 영〕Renaissance
글자 크기
4권

1 / 8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던 1490년경의 피렌체 옛 지도(바사리 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