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교황 - 敎皇 〔라〕Papae Renascentiae 〔영〕Renaissance Po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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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에 있는 니콜라오 5세 소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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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에 있는 니콜라오 5세 소성당 내부.

1440년대부터 1520년대에 이르는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한 10명의 교황을 말한다.
〔배 경〕 이 시기에 교회 안에서는 교회와 구성원 모두가 쇄신되어야 한다는 자각적인 반성의 목소리가 높았다.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는 오스만 투르크(0sman Turk) 제국의 침공 위험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도시 국가들이 정치적 분쟁 속에 휘말려 있으면서도 인문주의의 등장과 함께 르네상스 문화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고 서유럽 각국에서는 전제 군주 민족 국가들이 새롭게 등장하여, 세속 군주들은 국가주의에 근거하여 성직 서임권을 주창하는 국교회 사상을 내세웠다. 이들은 교황권을 위협하는 공의회 우위설을 지지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의 진출을 도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교황령의 실지(失地)와 교황권의 약화라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국가들은 동양 진출을 위한 항로를 개척하여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와 같은 신대륙을 탐험하면서 식민지를 건설하여 정착하고 있었다.
〔교황들의 활동〕 니콜라오 5세 : 교황 니콜라오 5세(1447~1455)는 탁월한 정치적 능력과 외교적 수완을 통하여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3세(1440~1493)와 1448년에 빈 조약을 체결하고, 공의회 우위설을 주창하던 바젤 공의회(1431~1449)에 대한 황제의 지지를 철회하도록 하였다. 또한 프랑스 국왕 샤를르 7세(1442~1461)를 설득하여 공의회가 선출한 대립 교황 펠릭스 5세(1439~1449)를 폐위시키고 공의회를 해산시킴으로써, 공의회 우위설을 타파하고 교황권을 고양시켰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을 때 교황은 십자군을 조직하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교황은 직접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분쟁 중재자로 나서 1455년에 로디(Lodi) 조약을 체결하여 40년 동안의 평화 시대를 이룩할 수 있었으며, 로마를 새롭게 재건하고, 고서(古書) 수집 및 고전 번역을 시작하여 바티칸 도서관을 건립하였다. 따라서 니콜라오 5세 시대에 르네상스가 비로소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교황사나 문화사에 있어서도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
갈리스도 3세 : 교황 갈리스도 3세(1455~1458)는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를 단합시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점령한 콘스탄티노플을 재탈환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그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교황청의 귀중품과 서적들을 팔아 전쟁 기금을 마련하였으며, 각 제후들에게는 특사들을 파견하여 십자군의 조직에 협조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1456년에는 로마 티베르 강에서 건조한 군함을 출정시켰는데, 십자군은 벨그라드 전쟁에서만 승리하였을 뿐 다른 전쟁에서는 더 이상 승리하지 못하였다. 또 같은 해 교황은 신대륙 탐험에 나선 포르투갈에 대해 '보호권' (Padroado)을 부여해 주었다. 그는 주로 자신의 친인척과 스페인 사람들을 교황청과 교황령의 중요한 직책에 등용함으로써 족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후에 자신의 조카 두 명을 추기경에 서임하였는데, 그중에 로드리고 보르지아(Rodrigo Borgia)는 훗날 교황 알렉산델 6세가 되었다.
비오 2세 : 교황 비오 2세(1458~1464)가 최우선적으로 생각한 목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서유럽 침공을 저지하는 십자군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그는 1458년 10월에 십자군 칙서를 발표하였으며, 이듬해 6월 1일에는 만 투아에서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십자군 조직 요청과 전쟁 비용 모금에 대한 호소는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다. 교황의 영향력이 약화된 이유가 공의회 우위설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1460년 1월 18일에 이를 단죄하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교황은 십자군의 파병이 어렵게 되자 메메트 2세(1451~1481)에게 이슬람교를 버리고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를 받은 뒤에 동로마 제국의 제관을 받도록 권고하는 편지를 작성하였으나 발송하지는 않았다. 그 후 보헤미아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세운 십자군의 원정 계획에 힘입어 직접 십자군을 이끌기 위해 연합군의 집결지인 안코나(Ancona)에 갔다가 1464년에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바오로 2세 : 교황 바오로 2세(1464~147)는 옛 기념물들을 보수하고 고미술품들을 수집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1466년에는 성 마르코 궁전(지금의 베네치아 궁)을 축조하였으며, 독일의 인쇄공들을 로마 로 불러들여 인쇄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교적인 르네상스와 이교도적인 르네상스를 구분하기 위해, 고대 로마의 이교적 사상과 관습을 따른다는 의심을 받았던 로마 학술원을 폐쇄하였다. 특히 그는 여러 명의 추기경을 임명하였는데, 그중에는 조카 두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황권을 보다 더 강화하기 위해 프랑스와 독일을 설득하였으며, 보헤미아의 후스파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러시아의 모스크바 대공인 이반 3세(1462~1505)와는 가톨릭 교회와 러시아 정교회의 일치를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또 1470년 4월에는, 1475년부터 시작하여 25년마다 성년(聖年)을 규정하는 교령을 반포하였다. 그 후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이란과 군사 동맹을 결성하는 문제를 협상하던 중 1471년에 급서하였다.
식스토 4세 : 교황 식스토 4세(1471~1484)는 집권 초기부터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십자군의 조직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프랑스 교회의 자주권 문제로 루이 11세(1461~1483)와 자주 의견 충돌을 벌였으나, 러시아의 이반 3세와는 가톨릭 교회와 러시아 정교회의 일치를 이루기 위한 방안 및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대항하기 위한 군원(軍援)에 대해 비교적 잘 협상해 나갔다. 그는 교황청의 업무보다는 가문의 이권과 특혜에 보다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자신의 조카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Giuliano della Rovere)를 추기경에 서임하였는데 훗날 교황 율리오 2세가 되었다. 로마의 옛 도로를 확장하고 새 도로를 건설하였으며, 티베르 강에 식스토 다리를 세웠다. 그 밖에 1475년 성년을 맞아서 로마를 방문하는 가난한 순례자들에 대비하여 성령 병원을 재정비하였으며, 시스티나 성당과 평화의 마리아 성당 그리고 만인의 마리아 성당 등을 건립하였고, 바티칸 도서관을 확장하여 바티칸 문서고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에 대한 개혁 정책은 많은 추기경들의 반대 때문에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인노첸시오 8세 : 교황 인노첸시오 8세(1484~1492)는 즉위하면서부터 전임 교황이 진 막대한 빚을 부담하여야 했고, 나폴리 왕국과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교황청의 재정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교황은 이러한 재정적인 어 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교회 안에 불필요한 직책들을 신설하여 매관매직하기도 하였다. 1486년에는 십자군을 조직할 것을 강조하면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침공에 대응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 바야지트 2세(1481~1512)로부터 조건부 평화안을 제의 받았다. 교황은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공격 위험에서 구원할 수 있으며, 술탄이 가지고 있던 성인들의 유해를 돌려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탁발 수도회에 여러 가지 특전을 베풀어 주었고, 발도파와 후스파와 같은 이단들에 대응하여 신앙 교리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통치 능력이 부족하였던 인노첸시오 8세는 교황청 관료들의 반대로 교회 안의 폐단을 개혁하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죽기 얼마 전, 교황령을 무질서 상태로 남겨둔 상태에서 추기경들에게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교황으로 선출하도록 간청하였다.
알렉산델 6세 : 교황 알렉산델 6세(1492~ 1503)는 도덕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있었던 추기경이었음에도 불구 하고 성직 매매를 통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법의 엄격한 집행을 통한 로마의 질서 회복, 교회의 개혁,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대항한 서유럽의 단합 등을 약속하였으나 지키지 못하였고, 오히려 그의 가문인 보르지아(Borgia) 가에 이권과 특혜를 주는 일에 개입하였는데 결국 이러한 것들이 원인이 되어 교황과 세속 군주들 사이에 정쟁(政爭)이 발생하게 되었다. 교황은 1463년에 스페인이 신대륙 탐험을 시작하자 그때까지 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었던 '보호권' 을 새로 부여해 주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일어날 수 있는 분쟁을 막기 위해 두 국가 사이의 탐험 지역을 명확히 구분해 지정해 주었다. 또한 '천사의 성' 을 증축하여 새로 단장하였고, 교황 숙소인 '보르지아 궁'을 건립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 도로'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1498년에는 알렉산델 6세의 족벌 정책 및 세속적 생활 자세, 교황청 안의 폐단을 지적하며 개혁 공의회의 소집과 교황의 폐위를 주창하던 사보나롤나(Hieronymus Savonarola, 1452~1498)를 처형하였다.
비오 3세 : 교황 비오 3세(1503)는 나이가 많고 건강이 좋지 못하였지만 청렴 결백하고 신앙심이 매우 깊었다. 알렉산델 6세가 사망하자 교황 선거를 앞둔 추기경단은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교황 선거에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과 프랑스, 스페인은 각각 자국에 보다 더 유리한 후보를 내세우려고 하였고, 이 때문에 무력 충돌과 성직 매매의 위험은 더 커지게 되었다. 새로 뽑힌 교황은 2년 이내에 교회 개혁을 위한 공의회를 소집할 것과, 3년마다 공의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규정을 담은 새 선거법을 제정한 추기경단은, 중도적 인물로 과도기 교황을 선출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선출된 교황 비오 3세는 추기경단 회의에서 교회의 개혁과 그리스도교 세계의 평화 회복이 자신의 주요 목표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교회 안의 개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교황 자신은 물론 추기경, 교황청, 교황청 직원 모두가 그 대상이 되어야 하며, 빠른 시일 내에 공의회가 소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비오 3세는 즉위한 지 26일 만에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그가 주장한 교회 안의 개혁 정책이 실천되지 못한 데에 대해 많은 아쉬움을 주었다.
율리오 2세 :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는 외세의 지배에서 이탈리아를 구하고 교황령을 확장하였으며, 교 황권의 강화를 위해 외교적인 수단과 무력을 동시에 사용하였기에 정치 교황 또는 장군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성직 매매를 통해 교황으로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직 매매를 통한 교황 선출은 무효라는 교령을 1505년에 반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성 베드로 대성전' 의 재건을 위해 대사를 반포함으로써 루터의 종교 개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508년에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도록 요청하여 1512년에 완성하였다. 또한 그가 1509년에 영국 헨리 8세(1509~1547)에게 허용해 준 관면 혼인은 영국 종교 개혁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교황은 오늘날 교황청의 근위병에 해당하는 군대를 조직하였으며, 그 군복을 미켈란젤로에게 디자인하게 하였다. 율리오 2세는 비록 교회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서 지나치게 강경한 자세를 취하여 폭군(Il Terribles)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지만, 이탈리아의 해방자이면서 교회의 구원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레오 10세 : 교황 레오 10세(1513~1521)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귀족 가문인 메디치(Medici) 출신으로서, 보편 교회의 수장이라기보다는 안이한 세속적 생활에 적응한 군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와 피렌체를 외세의 지배에서 보호하고, 자신의 친인척들을 주요 직책에 등용하여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에 몰두한 정치 교황이었으며 족벌주의자였다. 교황은 제5차 라테란 공의회를 속개하여 영혼의 불멸성에 관한 교리를 정의하였으며, 광범위한 교회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으나 실행시키지는 못하였다. 1511년에는 '볼로냐(Bologna) 종교 협약'을 체결하여 프랑스 국왕으로 하여금 국교회 사상을 포기하도록 만들었고, 1514년에 성 베드로 대성전 대사를 다시 반포하였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브란덴부르크 제후이자 마인츠와 막드부르크의 대주교인 알브레히트(Albrecht)와 대사 협상을 하였다. 이 일은 후에 루터의 대사 논쟁의 원인이 되었으나 레오 10세는 루터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그리스도교 세계를 분열로 이끌었다.
〔평 가〕 8세기 무렵 교황령이 탄생하자 교황들은 보편 교회의 영적 지도자와 교황령의 세속 군주라는 두 가지 위상을 함께 지니게 되었다. 교황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들의 영신적 임무보다는 세속적인 임무에 더 몰두하여 군주, 장군, 폭군 등으로 처신하였다. 더욱이 교황들은 세속 군주들과 정치 협상을 진행하면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처신하였다. 따라서 귀족들에게 교황직은 영신적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세속적인 군주라는 직책으로 간주되어 탐욕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도덕적 결함을 지닌 인물이 교황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있었으며, 성직 매매를 통해 교황이 될 수도 있게 되었다. 한편 교황들은 교회 쇄신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이룩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하였는데, 그것은 단지 공의회의 우위설을 단죄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교황들이 동방 교회와 일치를 이루고 이슬람 세력의 그리스도교 세계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도한 십자군의 원정도, 그리스도교 세계의 보편적 이익보다는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속 군주들의 무관심과 비협조 때문에 결국 성공하지 못하였다. 세속 군주의 도전으로 불리한 정치적 상황에 처해 있었던 교황들은, 거기에 대처할 방안으로 족벌주의의 중앙 집권 체제를 도입하였다. 그들은 보다 강력한 교황권을 갖기 위해 불행하게도 자신의 친인척들을 교회와 교황령의 주요 직책에 등용하였던 것이다.
르네상스 교황들은 대부분 영신 지도자라는 이상적인 교황상을 갖추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윤리 및 종교적 위신은 정치 활동과 군사 행동으로 손상되었다. 교황들은 외세의 위협에서 교황령을 지키며 교황권을 강화하는 데에만 몰두하면서 교황청의 세속적인 권위를 고양시키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정치 협상을 통해 교황권을 위협하는 공의회 우위설을 종식시켜 나갔으며, 공격이 아닌 방어의 목적으로 무력을 사용하였다. 그러한 태도는 교황령의 재건 및 안보, 교황청의 자주권에 대한 보장, 교황권의 강화 등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또한 교황들의 윤리적인 과오는 더 이상 교리적인 것으로 확대되지 않았다. 한편 교회 안에서 교황들은, 그들의 깊은 예술적 조예를 통해 르네상스 시대의 지적 욕구와 예술적 감각을 구현하였다. 그들은 문인, 예술가, 학자들의 적극적인 후원자로서 많은 문학 작품과 예술품, 건축물들이 탄생될 수 있게 하는 등 문예 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밖에 로마가 중세 도시에서 르네상스 도시로 새롭게 재건되어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신대륙 탐험에 나선 국가들에게 적극적인 선교를 명하였다. 그 결과 신대륙에 많은 신생 교회들이 설립될 수 있게 되었다.
(⇦ 문예 부흥기 교황 ; → 교회사)
※ 참고문헌  Ludwig Freiherr von Pastor, The History ofthe Popes, From the Middle Ages, vol. 2~7, St. Louis : B. Herder Book Co., 1893~1912/ Mandell Creighton, A History ofthe Papacyfrom the Great Schism to the Sack ofRome, London · New York : Longman, Green, and Co., 1897/ Fernand Hayward, A History ofthe Popes, New York : Sheed & Ward, 1950/ James A. Corbett, The Papacy. Its Origins and Historical Evolution, Westerminster : The Newman Press, 1958/ Eric John ed., The Popes. A Concise Biographical History, New York : Hawthorn Books, 1964/ Geoffrey Barraclough, The Medieval Papacy, London : Thomas and Hudson, 1979/ Brian Tierny, The Crisis of Church & State 1050~1300, Englewood Cliffs, New Jersey : Prentice-Hall, Inc., 1980/ Michael Walsh, An Illustrated History ofthe Popes. Saint Peter to John Paul II, New York : Bonanaza Book, 1980/ Karl August Fink, History ofthe Church IV : From the High Middle Ages to the Refomation, London : Burns & Oates, 1980, pp. 528~566/ 김성태, 《종교 개혁의 역사적 원인>, 《歷史 안의 敎會》, 분도출판사, 1985, pp. 43~67. 〔金聖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