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에밀리오. 한국명은 신삼덕(申三德). 1863년 1월 25일 프랑스 에서 태어나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888년 12월 12일 사제 서품을 받고, 곧바로 한국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한국에 입국하기 위해 그 해 12월 16일 프랑스를 출발한 르 비엘 신부는 상해(上海)에 도착, 임시로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본래 허약한 체질이었던 그는 오랜 여행으로 결국 병이 들어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야만 하였다. 그 후 건강이 회복되어 1889년 5월 24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해서도 낯선 이역 땅의 풍속과 음식 등에 잘 적응하지 못해 오랫동안 고생하였다. 블랑(Blanc) 주교에 의해 강원도로 파견되어 작은 구역을 맡아 사목하였으나 침식 등 여러 가지 불편한 사정 때문에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그러자 당시 부주교였던 코스트(Coste, 高宜善) 신부는 건강을 위해 르 비엘 신부를 용산 예수 성심신학교로 전임시켰지만, 그곳에 머무르면서도 건강은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스스로 더 이상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해 나갈 수 없음을 깨달은 르 비엘 신부는, 맡고 있던 직무에서 물러나기를 청원하였고, 이 청원이 받아들여져 제물포(현 답동) 본당으로 가게 되었다.
1890년 11월 용산 신학교로 전임된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의 후임으로 답동(沓洞) 본당 2대 주임으로 부임할 당시에는 이미 성당 건축 공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르 비엘 신부는 때때로 대목 일과 석수 일을 하면서 교구 연락 사무소를 겸한 사제관을 1890년에 완공하여 그 절반을 경당(經堂)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신자수가 계속적으로 증가하자 새로운 성당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기부금을 모으면서 교구에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교구 재정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였다.
한편 르 비엘 신부는 주위에 돌봐줄 사람이 없는 병원의 환자들을 매일 방문하여 그들을 치료하고 위로하였다. 그러는 동안 1891년에 발병한 누관(瘻管)은 더욱 악화되었고, 기침도 심해져서 행동이 불편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1892년 10월에는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지시에 따라 홍콩으로 요양을 떠났으나 그곳에서 몇 번의 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한 채 계속 투병 생활을 하였다. 수술 후 홍콩의 베타니아 요양소(Sanatoium de Béthanie)에 머무르고 있던 그는 건강에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자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으나, 출국하기로 한 1893년 4월 5일에 각혈을 하고 자리에 누웠다.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종부성사를 받은 후, 한국을 위해 기도하다가 1893년 4월 20일에 사망하였다.
※ 참고문헌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附錄, 가톨릭출판사, 1984/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인천교구의 전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인천교구 25년》, 1987/ 천주교 인천교구 답동 교회, 《沓洞本堂八十五年史》, 1974. 〔李裕林〕
르 비엘, 에밀 콘스탕 Le Viel, Emile Constant(1863~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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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르 비엘 신부가 1890년에 완공한 답동 성당 사제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