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학자. 종교학자. '근대주의 아버지' 로 불린다. 1857년 2월 28일 프랑스 암브리에르(Ambrières)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중등 교육을 받고 1874년에 살롱 쉬르 마른(Châlons-sur-Marne)의 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정규 공부를 하면서 독학으로 히브리어를 습득한 르와지는, 1879년 6월 29일 사제 서품을 받고 시골 본당 신부로서 2년 동안 사목하였다. 그러나 학문으로 교회에 봉사하고 싶어서 주교의 허락을 받아 1881년에 파리 가톨릭 대학 신학부에 등록하였는데, 그의 히브리어 실력이 인정되어 학생이었지만 그 해 12월부터 히브리어 교수 조교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해부터는 히브리어를 계속 가르치면서 오트 제튀드(Ecole Pratique des Hautes Etudes)에 등록하여 아시리아학과 이집트학을 배운 다음 콜레즈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에 나가서 르낭(E. Renan)의 히브리어 강의를 들었다. 이 시기에 그는 구약성서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였으며, 1890년에는 <구약성서 경전사>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논문을 출판하였다.
1892년에 르와지는 격월간지 《성서 교육》을 창간하고 자신의 성서학 강의를 요약하여 게재하였으나 그의 왕성 한 창작력을 다른 사람들은 불신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10월 쉴피스회(St. Sulpice) 총장은 그 회가 맡아서 운영하는 파리 교구 신학생들에게 르와지의 강의를 청강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르와지는 같은 해 11월 10일 과학적 성서 해석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글을 《성서 교육》에 발표하였다. 사흘 후 가톨릭 대학 이사 주교들의 전체 회의에서는 르와지를 대학에 두는 것이 신학부를 위해서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해임안을 의결하였다. 가톨릭 대학에 지대한 애착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서 일해 온 르와지는 이 해임을 부당한 처사로 여기고 배신의 행위로 받아들였다. 이 사건으로 실의에 빠져있던 르와지에게 절망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은 프레쥐(Frejus)의 교구장 미뇨(Eudoxe-Irénée Mignot) 주교와 당시대의 저명한 가톨릭 사상가 폰 휘겔(Friedich von Hügel) 남작이었다.
르와지가 파리 가톨릭 대학을 떠날 무렵, 회칙 <프로비덴티시무스 데우스)(Providentissimus Deus)가 발표되었다. 그는 교황 레오 13세에게 이 회칙을 지지한다고 알렸고, 교황은 그의 태도에 만족을 표하면서도 지금까지 의 추세를 보아서 성서 연구를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보내 왔다. 르와지는 이 권고를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그 후 이 문제를 발설하지도 않았다. 그가 가톨릭 대학에서 해임된 지 10개월 후인 1894년 9월에 파리 대주교 리샤르(François Richard) 추기경은 그를 느이이(Neuilly)에 있는 도미니코회 여자 수도원의 지도 신부로 임명하였다. 그가 여기서 머물렀던 5년 동안 수녀들과 그들이 경영하는 학교의 학생들은 그를 존경하고 따랐으며, 그는 성서 연구를 계속하여 여러 학술지에 논문도 발표하였다. 건강이 악화된 르와지는 1899년 9월 수녀원 지도 신부를 사임하고, 자리를 옮겨 은수자와 같은 고독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학술 논문은 계속 발표되었고 그의 이름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프랑스 성직자들을 위한 월간지 1900년 10월 15일자에 <이스라엘의 종교>(La religion d'Israel)라는 논문을 기고하였으나 파리 대주교는 논문 연재를 금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학부 교수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권고를 받아 르와지를 검사성성(檢邪聖省, 현 신앙 교리성)에 고발하였다. 검사성성은 그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였다. 알비(Albi)의 교구장이 된 미뇨 대주교가 레오 13세 교황에게 편지를 보냈고 폰 휘겔 남작이 교황청에 교섭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1902년에는 모나코의 주교좌에 르와지가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그 해 말 그의 저서 《복음과교회》(L'Evangile et L'Eglise)가 출판됨으로써 후보 자격을 잃고 말았다.
이 책은 찬 · 반의 대단한 물의를 일으켰다. 이 책에서 르와지는 역사 비평의 결과를 받아들여 인류 역사 안의 그리스도교 현상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의 과거와 미래의 역할을 조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지적 · 심미적 · 윤리적 차원에서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다. 또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의 하느님과의 일치만 모색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인간 상호간의 일치를 도모하였다. 이스라엘 역사의 예언자들은 영적 개념들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예수는 이런 노력을 완성하였다. 그분의 고유한 메시지는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윤리적 회개 곧 내적 변화' 였다. 예수는 당신 스스로를 '하늘 나라를 위한 하느님의 유일한 대리자' 곧 메시아로 생각하고 당신의 죽음으로 이 나라를 성취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예수는 교회안에 또 교회를 통해서 산다. 스승과 마찬가지로 그의 제자들도 곧 나타날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렸다. 이 책에서 르와지는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설교하였는데 실제로 나타난 것은 교회이다. 예수의 활동이 수난으로 막을 내리자 교회는 복음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기가 어려워 복음의 폭을 확대하면서 나타난다" 고 하였다. 생활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설교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 기본 사상을 보존하면서 새로운 여건에 적응시키고 재편성한다. "이 세상의 어느 제도도 하느님 나라를 결정적으로 실현하지 못한다.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성취를 준비하는 것에 불과하다···예수와 교회는 같은 방향으로, 희망의 같은 상징을 향해, 시선을 올려 쳐다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교의와 성사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있어야 한다. 교회는 교의적 표현을 "절대적 진리의 적합한 표현으로"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시기에 인간이 할 수 있었던 가장 덜 불완전한 표현"을 택한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표현 양식들은 "종교적이고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사들도 "분명하게 정의되고 설정된 것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실재로서 예수와 복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르와지는 이 책에서 하르낙(Adolf Harnack)을 반박하여 복음서들 안에 교회의 존재 근거가 분명히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는 교회라는 개념이 없다는 그의 주장이다. 복음 사가들이 예 수의 메시지를 보완하고 해석하였다는 점이 용납되지 않았다. 1903년에 파리의 대주교는 이 책의 독서를 금지하였고 르와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자기 변호를 권하였다. 르와지는 1903년 10월에 《한 권의 작은 책을 둘러싸고》(Autour d'un petit livre)를 펴냈는데, 이 책은 앞의 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쓴 7통의 편지를 묶어서 출판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번째의 출판으로 인하여 교회안의 여론은 그에게 더욱 불리해졌다. 1903년 12월 16일 검사성성은 그의 저서 《이스라엘의 종교》, 《복음과 교회》, 《복음서 연구》(Études évangeliques), 《한 권의 작은 책을 둘러싸고》, 《제4 복음서》(Le quatrième évangile) 등 5권을 금서 목록에 올렸다. 순명이 명백하지 않다는 국무장관 메리 델 발(Merry del Val) 추기경의 지적을 전해 들은 르와지는, 1904년 2월 28일 교황 비오 10세에게 순명하겠다는 편지를 썼으나 교황은 그에게 이미 호의적이 아니었다. 교황은 파리의 대주교 리샤르 추기경에게 글을 보내어 르와지의 편지는 순명을 가장한 항명이었다고 비난하였다.
1904년 부활절부터 파리의 오트 제튀드에서 하던 강의를 중단한 그는 공관 복음서 주해에 열중하여 1906년 1월에 《공관 복음서》(Evangiles synoptiques) 상 · 하권을 출판하였다. 이때 그가 은거한 곳은 샤르트르(Chartres) 교구 관내의 어느 시골 집이었는데 1906년 10월 말까지로 된 소성당 사용 허가를 교구청이 갱신해 주지 않아 르와지는 이때부터 미사를 드리지 못하였다. 1907년 7월 17일 검사성성은 교령 <라멘타빌리>(Lamentabili)를 발표하여 65개의 명제를 단죄하였다. 르와지는 "단죄 재료의 3분의 2는 내가 제공한 것 같다"고 쓰고 있다. 또 1907년 9월 8일에는 회칙 <파센디>(Pascendi)를 통하여 근대주의를 금하였다. 1908년 1월에 르와지는 《공관 복음서》와 함께 또 한 권의 책을 출판하였는데 그 표제는 《교령 라멘타빌리와 회칙 파센디에 대한 단상들》이다. 이 단상(斷想)들은 교황청의 공식 문서들을 비판하는 것이었기에 출판과 더불어 저자는 자동적으로 파문에 처해지게 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2월 14일에 파리의 신임 교구장 아메트(Amette) 대주교가 르와지에게 정식 통고하였다. 그러나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교황청은 3월 7일 르와지를 지명 파문한다고 발표하고 그를 '교회가 기피해야 하는 인물' (vitandus)로 선언하였다. 이때부터 르와지는 신부복을 벗고 신사복으로 갈아입게 된다.
〔교회 밖에서의 활동〕 르와지는 이런 시련 중에서도 연구 생활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 후 30여 년 동안 정기적으로 연구 결과를 출판하였으며, 자서전적인 저작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 연구 활동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1909년 3월 2일 프랑스 교육부는 그를 콜레즈 드 프랑스의 종교사 교수로 임명하였으나 파리 교구청은 파문당한 신부의 강의는 신자들에게 청강이 허락되지 않음을 발표하였다. 르와지는 여기서 '여러 종교들의 제물 봉헌사' , 그리스도교 기원과 그리스-로마 문화권' 에 대한 연구와 강의를 하였다. 그 결과가 《이교 신비들과 그리스도교 신비》, 《사도 행전》, 《제4 복음서》, 《요한 묵시록》 등의 저서로 출판되었다. 르와지는 이 저서들 안에서 그 시대의 전통적 성서 이해를 많이 넘어섰다.
1907년에 르와지는 자기의 임종을 준비하면서 자기의 신앙 발전 과정을 스스로 집필할 필요성을 느끼고 1913년에 《과거사》(過去事, Choses passées)를 발간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자기가 25년 동안 불신앙에 시달렸다고 토로하였는데, 이 책으로 가톨릭 교회 안의 여론은 그에게 대단히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르와지는 1917년에 펴낸 《종교)(LaReigion)를 1924년에 증보하여 재판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르와지의 사상적 발전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책으로 이에 따르면, 종교는 인류를 정상적으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종교들이 말하듯이 종교가 인류를 인도한 것이 아니라 인류가 살고 발전하고 지속되기 위한 노력, 곧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 찾고 성장하고 놀래고 흥분하고 찢어지고 죽으면서" 비극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 언어를 빌리지 않고 종교의 역할과 현상을 설명하려 하였다. 그에 의하면, 종교의 사명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 인류가 당면하는 위기들을 극복하게 하는 데 있다. 종교는 사람들을 신으로 만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공통된 생각과 공통된 경신 행위를 하게 할 수 있는" 종교를 찾아야 한다. 이 책에서 르와지는 페넬롱(Fénelon)과 브르몽(Henri Bremond)의 저서에서 영향을 받았고 신비주의적 경향이 자기 안에 있음을 밝혔다. 그에 의하면, 이 신비주의의 본질은 자기 희생에 있다. 그것은 "가장 우수한 종교 행위이며, 그것이 의식적인 의지로써 동의하는 경우이면 더 종교적이다." 이 희생 안에 모든 신비가들이 말하는 사심 없는 사랑, 순수한 사랑이 나타난다. 신비가들이야말로 '본질적 그리스도교'를 말하는 사람들이며 '미래의 종교'를 예고하는 사람들이다. 미뇨 주교는 저자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 책은 당신의 심리적 섬세함과 예리한 분석 능력을 가장 잘 보여 주었다" 고 말하였다. 1931년에 브르몽은 르블랑(Sylvain Leblanc)이라는 가명으로 출판한 책에서 "《종교》는 가장 깊고 순수한 신앙 서적의 하나이다. 이 책은 내일과 미래의 신앙교육서가 될 것이다"라고 썼다.
르와지는 1925년 폰 휘겔 남작이 사망한 후 자기가 그 동안 남작에게 보낸 편지를 되돌려 받은 것과 회고록을 쓰라는 브르몽의 권고가 계기가 되어 1930~1931년에 걸쳐 《현재의 종교사를 위한 회고록》(Médmoires pour servir à I'histoire religieuse du temps présent)을 발간하였다. 브르몽은 가명으로 소책자 《배신하지 않은 성직자, 자기의 회고록에서 보는 알프레드 르와지》(Un clerc qui n'a pas trahi, Alfired Loisy d'après ses Mérmoires)를 출판하여 그의 회고록을 호평하였다. 그러나 1932년 7월 1일 검사성성은 《현재의 종교사를 위한 회고록》을 비롯한 그의 모든 저서들을 금서로 지정하였다.
1909년부터 1910년에 걸쳐서 종교사의 문제로 르와지는 고고학자 라이나흐(Salomon Reinach)와 논쟁한 일이 있었는데, 라이나흐가 《신화론자들》(Mythologues)을 출판하자 1938년에 르와지는 그를 비판하였다. 르와지는 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역사와 신화》(Histoire et Mythe à propos de Jésus-Christ)라는 저서에서 예수의 역사성을 강조하였고, 《종교에 관한 다른 신화들》(Autress mythes à propos de la religion)에서는 그리스도교 기원을 신화로 보려는 다른 저자들을 극단적으로 비판하였다.
80세가 넘은 르와지는 1939년에 《호교론적 하나의 신화》(Un mythe apologétique)를 발간하여 대단히 편안한 어조로 기통(Jean Guitton)의 르와지관을 비판하였다. 기통은 저서 <현대 사상과 가톨릭 교회》(La pensée moderne et le Catholicisme)에서 르와지의 사상을 전통적 시각으로 요약하였다. 1969년에 기통은 그때의 르와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르와지의 빈틈없는 텍스트 취급 방식에 나는 대단한 감명을 받았다." 이 책은 르와지의 신앙 발전 과정에 대한 마지막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신학과 교회가 겪는 위기를 한 몸에 체험하였던 르와지는 1940년 6월 1일 83세의 나이로 세풍(Ceffonds)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출생지 암브리에르에 있는 그의 묘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진 묘비가 서 있다. "알프레드 르와지/ 교회 직무와 교육에서 해임당한 신부/ 콜레즈 드 프랑스의 교수/ 1857~1940/ '당신의 뜻에 충실하기를 원했습니다. " 르와지가 남긴 것인지 그의 친척이 쓴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그의 심정을 잘 표현한 비문이라는 것이 가까웠던 사람들의 지적이다.
〔사 상〕 르와지의 주해는 실제로 건전한 신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 시대 호교론자들과 성서학자들은 과학과 역사학이 제시하는 자료 앞에, 성서 안에는 과학과 역사의 오류가 없다고 말하기에 급급하였다. 그들은 성서 내용이 과학과 역사에 상반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거나 아니면 성서의 영감은 신앙과 윤리 문제에 국한하여 작용하였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르와지는 성서의 모든 부분에 영감이 작용하였다는 회칙 <프로비덴티시무스 데우스>의 정신을 따랐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는 성서에 오류가 없다고만 말하는 것은 부족한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성서는 올바르게 해석할 때만 그 안에 오류가 없는 것이다. 르와지는 이 문제에 대해 1896년 미뇨 주교에게 두 통의 편지를 썼다. "성서는 다른 모든 고대 문서와 똑같이 역사 비평을 받아야 합니다. 신앙의 책으로서 성서는, 한 권의 문헌 특히 고대 문헌이기에, 스승으로서의 권위가 아니라 원천으로서의 권위를 가졌습니다. 성서의 진리는 옛날 그 시기의 개념이 지닌 테두리 안에 갇혀 있고 제한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진리는 성서를 해석하는 교회의 무류성이 항상 새롭게 조건 짓고 규정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뇨 주교는 성서의 무류성을 건지기 위해서는 모세 오경이 분명히 오류를 범하고 있는 연대에 대해서 그것이 가필된 것으로 볼 수 없는지 물었다. 르와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모세 오경의 연대는 제관계 문헌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그것이 실제 역사적 연대가 아니라고 해서 가필로 보면 일이 괴상하게 됩니다. 이 인위적 연대는, 여호수아가 지역을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나, 장막에 대해 인위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나, 모두 비슷한 현상입니다. 이런 모든 일의 근저에 들어 있는 전통은 여러 개의 사상을 부각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정돈되었습니다···숫자를 적당히 맞추어 연대를 작성하는 저자는 실제 연대를 작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 연대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 자신에게도 이 연대는 계시의 중요한 순간들을 연계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이렇게 이해하면 이 연대는 오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르와지가 제시하는 원리들을 보면 그는 회칙 <디비노 아플란테 스피리투>(Divino Afflante Spiritu)보다 50년을 앞서 있다. 그 시기의 신학자들은 성서학자들이 성서의 문학 유형에 대해 고찰하는 것과 성서의 진리가 이 문학 유형과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허용하지 않았다. 스콜라 신학자들의 눈에 르와지의 원리들은 신앙을 위태롭게 하는 새로움이었다. 르와지는 자기가 내는 결론들을 결정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는 신학자들이 자기 사상을 수용할 것을 믿고 있었다. 오늘날 성서 문학 비평은 교회 안에 당연한 것이 되었다.
르와지는 일찍이 신학 즉 토마스주의의 신학 체계에서 벗어났다. 그에게 이 스콜라 신학은 모래 위의 누각 같은 정신적 구조물이었다. 그는 또한 공의회가 만든 교의 정식(敎義定式)도 살아 있는 신앙 진리를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형이상학이 없는 신앙, 우리가 포착할 수 없는 초월에 대한 명백한 교리가 없는 신앙"을 원하였다. 그 시대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신앙 앞에 그는 스스로 신앙이 없는 사람 혹은 범신론자로 자처하였는데, 1898년 11월 미뇨 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계시는 사람들의 정신 안에 주어졌고 히브리 사람들의 문화 수준과 영감을 받은 사람들의 능력에 알맞은 관념들을 통해서 표현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복음도 유대적인 조건이 붙은 것이고 복음의 빛도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닌 관념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계시의 객관적 진리는 표현들보다는 관념들 안에, 또 관념들보다는 정신 안에 있습니다. 이 관념들은 우리에게 합당한 상징들이고 이 상징들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드는 정신은 그것들을 존속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완성시킵니다. 교의도 교회도 실제 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교회는 스스로 불변하는 것이 되면서 격하되고, 교의는 경직되면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계시의 원리를 생각하나 교회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나, 끊임없이 변해 가는 인류의 조건들에 신앙 진리들을 적응시키는 작업을 항구하게 해야 합니다."
르와지는 인간 안에서 종교적 의미가 항상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교가 신학자들의 지배와 옹졸함을 벗어나 정화되고 개방되면 인류의 종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서, 그리스도교는 반죽 안의 누룩이며 세상의 소금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종교가 그리스도교 안에서 일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평 가〕 르와지는 파문당한 기피 인물로 교회 밖에 있었고 교회로 돌아올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르와지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말년에 욥기를 많이 생각하였다. 1938년 5월에 "나는 나의 선조 욥과 같이 새 날이 올 것을 기다린다"라고 쓰고 있다. 하느님에 대해서 멋지게 말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모든 것을 잃고 침묵 가운데 비극적으로 신앙을 산욥의 모습이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기 친척 한 사람에게 욥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으며, "나는 주님과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때도 있었다.
르와지는 교회를 사랑하였고 교회에 봉사하기를 원하였다. 특히 지적이고 교리적인 분야의 중대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싶었다. "가톨릭 교회는 유럽 백성들의 어머니이다. 퇴위당한 여왕이지만 아직 영향력을 간직하고 교회가 사람들에게 말할 줄을 알면 어떤 반대 세력도 교회를 대항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눈에 그는 하나의 배신자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르와지는 불신당 하였고 중죄인으로 선언되었으며, 그의 저서들은 모두 금서 목록에 오르고 그는 파문당하였다. 사람이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것은 윤리적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근대주의 문제에 있어서 나는 교회를 거슬러서 어떤 주장을 한 일은 없다. 교회는 나의 결론들이 거짓이라고 선언하였지만 교회가 오류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진리가 그 안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무엇보다 먼저 또 본질적으로 학문 연구와 인간 양심의 절대적 권리에 대한 진리가 거기 있었다···교회는 나를 단죄하면서 학문 연구의 자유와 학자의 진실성을 단죄하였다. 나는 교회를 거슬러 정신 활동을 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였다."
르와지는 파리와 로마 두 곳에서 박해를 받았다. 파리 가톨릭 대학 이사 주교들은 르와지로부터 교수직을 박탈할 때 그에게 한마디의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았고 그의 죄목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로마의 신학자들은 갈릴레이 사건에 그들 전임 성직자들이 어떤 실수를 범하였는지를 잊고 있었다. 르와지는 파문당하였지만 그의 친구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르와지는 그의 《회고록》에서 그들의 이름을 쓰지 않았으나 알려진 사람들은 미뇨 주교, 폰 휘겔 남작, 브르몽 신부, 뒤센(Duchesne) 몬시놀, 드브와예 드 생트 수잔느(R. de Boyer de Sainte Suzanne) 등을 들 수 있다. 이 마지막 사람은 "내 생각에 르와지는 그 마음속 깊이에서는 절망하지 않았고 교회에 대해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고 말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종교 자유를 선언하였고 인간 존엄성을 강조하였다. 금서 목록은 폐기되었으며, 성서학자들은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곧 르와지가 원하던 세상이다. → 근대주의 ; 성서 연구 방법론)
※ 참고문헌 M. Bécamel, 《Cat》 7,pp. 1044~1053/ E. Guitton, 《EU》 10, pp. 94~95/ Fr. Heiler, Alfred Loisy, der Vater des katholishcen Modermismus, Miinchen, 1947/ J. Bonsirven, 5, PP. 530~544/ E. Poulat, Histoire, dogma et critique dans la crise moderniste, Paris, 1962/ E. Lacoste, Les dernières semaines de Loisy, Lille, 1963/ J. Guitton, Critique religieuse, Paris, 1968/ R. de Boyer de Sainte Suzanne, Alfred Loisy : entre la foi et I'incroyance, Paris, 1968/ E. Poulat, Une oeuvre clandestine d'Henri Bremond : Sylvain Leblanc, Un clerc qui n'a pas trahi, Alfred Loisy d'après
ses Mémoires, Rome, 1972/ L.F. Barmman, Baron Fr. von Hügel and the Moderniste Crisis in England, Cambridge, 1972. 〔徐公錫〕
르와지, 알프레드 Loisy, Alfred(1857~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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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