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1806년 4월 11일 프랑스 칼바도스(Calvados)의 리비에르 생 소버르(Rivière-Saint-Sauveur)에서 태어나 세관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5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나자 홀어머니 밑에서 독실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으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프랑스 혁명의 사상이 유일하게 침투하지 않았던 이 바닷가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르 플레는, 그 후 삼촌의 도움으로 파리로 가 1825년에 프랑스의 명문 대학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다양한 사회 · 정치 사상들의 탄생과 실험을 경험하게 된 르 플레는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다시 파리의 광산 학교(Écoledes Mines)에 입학하였다. 그곳 역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르 플레는 그의 동료 레이노(Raynaud)와 함께 독일북부 지방의 공장, 광산, 삼림 지역을 방문하면서 이곳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사회 문제와 연결시켜 연구하는 작업을 하였다. 여기에서 그가 수행한 사회학적 작업은 후에 학계와 광산 경영 업계에서 크게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이 작업의 성공적 결과로 광산 학교의 감독관으로 임명되어 광산 경영과 관련된 금속학의 연구를 자신의 사회학 연구와 병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르 플레의 기여는 광산 경영자들을 위한 자료 수집과 체계적 관찰뿐이 아니었다. 그는 이 당시에 아직 확립되지도 않은 사회학을 사회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창립하려고 하였다. 르 플레는 오랜 기간 동안 노동자 가족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자료들을 축적하였고, 그의 고유한 방법론을 개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모노그라피(monographie)이다. 모노그라피 방법론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분야의 모범적인 연구로 알려져있다. 이 조사 방법론의 핵심은 가족의 예산을 유형별로 표준화하고, 사회 기관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며, 수많은 여행을 통해서 그 자신의 비교 사회학적 관점을 확대하고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용어를 빌리면, 그는 진정한 현장 사회학자였다. 그의 연구 결과들의 출판은 사회 개혁과 관련된 그의 야심 때문에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회 개혁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크게 번창했던 사회주의 이론에 반대하였다. 학자이면서 동시에 경영자였던 그는 이러한 배경으로 정치 지도층 사이에서 점점 더 지지를 얻게 되었다. 우선 왕정 복고를 꿈꾸던 우익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를 격려하였으며, 1848년에 임시 정부는 그를 룩셈부르크 위원회에 임명하였다.
르 플레에게 과도기적 시기였던 1855년에 그의 첫 번째 사회학 저작인 《유럽 노동자들》(Les Ouvriers euro- péens)이 출간되었다. 이 해에 그는 파리 국제 박람회의 총책임자였는데, 같은 해 겨울 국무 위원으로 임명되어 광산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15년 동안 르 플레는 정부 . 고위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자신의 연구를 계속하였으며, 특히 자주 자문을 구하였던 나폴레옹 3세의 요청으로 1864년에 그 당시 프랑스 사회 상황에 대한 자신의 사회학적인 성찰을 종합한 《프랑스에서의 사회 개혁》(La Réforme Sociale en France)을 출간하였다. 1867년에 그는 다시 파리의 국제 박람회 집행 위원으로서 또 다른 중요한 사회학적 실험을 소개하였다. 그것은 기업이 상품 생산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사원들에 대한 다양한 복지 제도에도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회 경제학(économie sociale)에 대한 생각이었다. 박람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후에 르 플레는 상원 의원이 되었다.
그 후에 나타난 다른 프랑스 사회학자들과는 조금 다르게, 르 플레는 그의 사회학 연구와 실천을 국가 행정 기구 안에서 수행하였다. 그의 사회학 이론과 방법론이 체계를 잡아감에 따라 르 플레는 현장의 연구를 줄이고, 사회학의 발전과 그리스도교 도덕의 다양한 실천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다. 특히 이 작업에서, 그의 《유럽 노동자들》은 사회학 방법론의 기초를 다지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후 르 플레는 이러한 연구 방법론을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 1856년에 사회 경제학회를 창립하였다. 이 학회의 학문적 목표는 모노그라피의 방법론으로 노동자 계급의 상황을 연구하는 것이었는데, 연구 결과들은 40개 정도의 모노그라피를 소개한 《두 세계의 노동자들》(Les ouvriers des Deux Mondes)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르 플레의 이러한 생산적인 학문 활동은 제2제정의 몰락과 함께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권력으로부터 멀어진 그는 프랑스-프로이센(普佛) 전쟁에서의 패배와 파리 코민을 보면서 중요한 사회학적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더 이상 왕의 조언자로서가 아니라 시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당시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논의함으로써, 그들을 중심으로 사회 개혁을 수행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이 지도 계급을 다시 세우는 역할에 헌신적으로 노력하면서 결성한 '사회적 평화를 위한 사람들의 모임' 은, 후에 지방에까지 퍼져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이 모임의 목적은국민들의 물질적 · 도덕적 상태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현실적인 사회 문제를 구체적으로 관찰하는 것이었다. 1874년에 시작된 이 모임은 1884년에는 3천 명의 회원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현장에서의 실천적 삶은 르 플레의 학문 활동을 더 발전시키고 풍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취지에서 1881년부터 한 달에 두 번 발간되는 《사회 개혁》(La Réforme Sociale)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였는데, 이 잡지는 사회 평화를 위한 모임과 사회 경제학회의 기관지로서 사회 참여와 학술 발전이라는 두가지 목적을 동시에 지향하고 있었다.
이론적 저작들 못지않은 훌륭한 유산을 남기고 1882년 4월 5일 파리에서 사망한 르 플레는, 가톨릭 평신도 사회학자로서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이론적으로 구성하고 몸소 실천한 보기 드문 학자였다. 게다가 그의 이러한 귀한 뜻은 그의 학문적 방법론과 신앙을 따르는 제자들에 의해서 계승되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사회 보장 제도가 확립되고, 또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작업 조건이 개선되었으며, 그리스도교적인 노사관과 사회 정책을 확립하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르 플레의 저서로는 《유럽 노동자들》, 《프랑스에서의 사회 개혁》 외에 《노동의 구조)(L'Organisation du Travail, 1869), 《재난 후의 사회적 평화》(La Paix Sociale après le Désastre) , 《가족의 구성》(L'Organisation de la Famille, 1871), 《인류의 근본적인 구성》(La Constitution essentielle de l'humanité, 1881) 등이 있다.
〔사회 사상〕 르 플레의 사회 사상은 가톨릭 교회가 자유주의적 문제 의식으로부터 가톨릭 사회 사상으로 전환할 시점에 나타난 대표적 사회 이론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르 플레의 중심 사상은 크게 네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사유 재산의 문제이다. 그는 사유 재산의 집단화를 주장한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대안으로, 노동자들에게는 다양한 사회 보장 제도를 통해서 사유 재산 제도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제도적으로 열어 주고, 유산 계급들에게는 그 재산권의 행사와 관련한 사회적 책임 의식을 심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크게 강조하였다. 이것이 가톨릭 자유주의에서 가톨릭 사회 사상으로의 커다란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둘째는 루소(J.J. Rousseau, 1712~1778)의 계몽 철학식 개인주의에 대한 반발이다. 루소의 개인주의 철학이 프랑스 혁명의 기반이 되었다고 본 르 플레는, 루소의 철학이 그리스도교의 교리와는 어긋나게 인간의 완벽성을 믿고 인간의 완벽한 자유와 평등을 주장함으로써 기존의 사회 체제를 혁명적으로 폐기할 이론적 명분을 제공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회악(社會惡)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가 아니라, 잘못된 사회 제도로부터 생겨났다는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 정착하게 되었다.
셋째는 지도 계급(classes dirigeantes)의 문제이다. 르 플레는 프랑스 혁명으로 표현된 프랑스 사회의 도덕적 위기는, 부유한 계급의 사람들이 가난한 계급의 사람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구체제 말기에 성직자와 정치 지도층은 귀족 계급의 가정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에 개혁의 사명을 완수할 수 없었고, 새로운 지도층이라고 볼 수 있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도 하층 계급들에 대한 고용주로서의 책임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개혁의 방향으로 사회를 지도하는 역할을 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넷째는, 노사 관계의 문제이다. 노사 관계를 다루는 르 플레의 기본 원칙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도덕의 원칙들 을 재발견함으로써 그것을 중심으로 자본가와 노동자들 사이의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때 르 플레가 발견한 노사간의 갈등을 푸는 열쇠는 고용주의 노동자에 대한 사회 보장의 책임, 노동자의 책임 의식, 장인 정신, 그리고 상호 신뢰에 바탕을 둔 도덕 관습의 정착이다. 이 원칙을 현대 사회 학자들은 쉽게 가부장적 온정주의(paternalisme)라고 비판하는데, 르 플레는 이 원칙이 여전히 현대 사회의 산업 관계를 지배하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곧,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해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과 그들 가족의 장래를 위해서 불행한 사태에 대비한 사회 보장 제도를 발전시키고, 노동자들은 그러한 도움에 대한 답례로 그들의 고용주에게 신뢰와 애정을 가지고 복종할 수 있도록, 산업 사회의 노사관계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르 플레는 이러한 노동자 계급을 위한 사회 복지와 거기에 어울리는 시민 계급의 도덕 관습의 정착을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의 사랑 정신으로부터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사회학 방법론〕 르 플레의 사회 이론은 그의 가족 이론과 사회학 방법론이 함께 논의되어야 좀더 총제적으로 현실감 있게 이해될 수 있다. 그의 사회학 연구의 핵심은 사회적 사실을 직접적으로 관찰하는 것이었다. 르 플레는 콩트(A. Comte, 1798~1857)의 철학적 전통에서 나온 추상적 사회학에 반대하면서 새로운 과학적 방법을 내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현장에서의 사회적 사실의 관찰이었다. 그는 이 모노그라피 방법론으로부터 유용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 관찰을 가능한 한 많이 하고, 비교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르 플레가 그의 연구 대상으로 노동자 가족을 선택한 것은 그 당시의 산업 사회 전체를 파악하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그에게 있어서 노동자 가족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사회의 상태를 폭로하는 성격을 가졌다는 데에 있다. 오늘날 현대 사회학이 제도적 접근 방식(institutional approach)이라고 부르는 방법론을 르 플레는 이미 한 세기 전에 발전시켰던 것이다. 현대 사회의 중심이 되는 가족이 핵가족이 아니라, 부모와 그들이 선택한 자식 부부, 그리고 그 자녀들로 구성된 대가족(famile souche)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현대 가족 사회학자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이러한 노동자 가족에 관한 연구 과정에서 처음으로 개발되고 축적된 모노그라피 방법론의 확립은 섬세한 사회 조사의 기술을 보여 주었다. 그 기술이란 가족의 물리적 · 사회적 환경을 기술하고, 그 물질적 기반을 목록화 하고 열거하여 가족 노동을 기술하고 가족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또 가족과 다른 사회 조직과의 관계를 분석하고, 가족의 세부적 수입 · 지출의 내용과 관련된 정보를 확인하며, 가족과 함께 중요한 다른 사회적 요인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이 모노그라피 방법론은 오늘날 경험적 사회학 · 민속학 · 사회 심리학 · 역사학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기술들의 모태라고 볼 수 있다.
르 플레는 그 당시의 노동자 계급의 가족에 관한 모노그라피적인 연구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도덕을 기반으로 현대 산업 사회에 어울리는 사회 질서를 이루려 하였다. 그의 사회 이론은 사회가 혼란을 겪게 되는 이유와 안정된 체제로 돌아가기 위한 조건을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도덕과 지도층을 중심으로 찾아보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단순한 보수 반동적인 이론은 아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사회주의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던 것은 구체제의 마지막 기간, 특히 프랑스 혁명 기간에 있었던 정부의 정책 때문이라고 보았다.
《유럽 노동자들》에서 르 플레는 산업 사회에서 이러한 혁명적 혼란의 악순환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회의 번영을 보장하는 기본적 구성 요소들을 몇 가지로 나누어 밝히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의 가톨릭 신자로서의 열심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 첫째 그리스도교의 십계명과 부모의 권위 존중, 둘째 종교와 국가의 권위 존중, 셋째 다양한 토지 소유 형태(공동체적 토지 소유, 개인적 토지 소유, 가부장적 토지 소유)의 인정 등이다. 르 플레는 또, 《프랑스에서의 사회 개혁》에서 이러한 사회 개혁의 원칙들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종교, 재산, 노동, 사회 조직, 개인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정부를 검토하면서 사회의 번영을 가져오기 위해서 이러한 분야에 어떠한 사회 정책들을 적용해야 할 것인가를 제안하고 있다.
그가 제안한 개혁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 생각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하나는 사회 입법이고 또 하나는 개인들에게 모든 영역(종교, 노동, 교육, 사상)에 있어서 자발적인 결단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곧 국가는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책적 처방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발성을 유도함으로써 이들 시민들을 중심으로 사회 개혁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전통적 대가족을 보호함으로써 가족의 위계질서를 세우고, 사회 제도로서의 가족을 강화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기업에서 사용자와 노동자가 서로 돕고 존중하는 현대적인 가부장 제도를 새로 확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 입법은 기존의 사회 제도에 크게 영향을 주는 것으로서 새로운 국가 개념을 전제로 한다. 이새로운 국가 속에서 정부의 권한은 축소되고, 개인들의 조직과 가족 그리고 지방 정부는 중앙 집권적인 국가로부터 상당한 권력을 위임받게 된다.
〔영 향〕 프랑스 사회는 산업화의 여파로 핵가족화되고, 노동 조합 운동이 활발해졌으며, 자연스럽게 사회학에 대한 일반 시민과 정부의 요구가 많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르 플레의 제자들은 다양한 사회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존중을 받으면서 그들에게 사회학을 가르쳤다. 특히 다른 사회학파들과는 달리 그의 제자들은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사용자들, 교회, 그리고 다양한 사회 조직(교회의 청년 운동, 가톨릭 사회 운동, 노동 운동)에도 침투하여 자신들의 연구 결과와 사회학을 전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새로운 교육 운동과 사회 정책의 개발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 참고문헌 M.Z. Brook, Le Play : Engineer and Social Scientist, London, Longman, 1970/ P. Lazasfeld, Philosphie des Sciences Sociales, Paris, Gallimard, 1970/ P. Bureau, La Science des Moeurs : Introduction a la Méthode Sociologique, Bloud and Gay, 1923/ A. Savoye, Les Continua- teurs de Le Play au Tournant du Siecle, Revue Frangaise de Sociologie, XXII, 3, 1981/ 《EU》 12, pp. 1129~1131/Catherine Bodard Silver, Frédéric Le Play : On Family, Work, and Social Change, 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1982, pp. 3~134/ 민문홍, <르 플레와 뒤르켐>, 《사회학과 도덕과학》, 민영사, 1994, pp. 218~243. 〔閔文泓〕
르 플레, 프레데릭 Le Play, Frédéric(1806~1882)
글자 크기
4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