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일본 선교사. 1847년 9월 1일 프랑스 샤르트르 교구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생 셰롱(St. Chéron) 소신학교와 샤토 대신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871년 1월 22일 사제로 서품된 후 곧바로 그곳의 소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8년 동안 신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고, 매일 아침 묵상 지도를 담당하던 리뇔 신부는, 1879년 9월 10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이듬해 일본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북일본 대목구에서 몇 달 동안 열심히 일본어를 익힌 뒤, 1872년 6월에 처음으로 일본에 진출하였던 생 모르 수녀회(Damesde Saint-Maur)의 지도 신부 및 부설 신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881년 무렵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의 전체 학생수는 8명에 불과하였으나 리뇔 신부는 그들에게 프랑스어의 기초를 가르치고, 마지막 신학 논문을 지도하는 등 보다 올바른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신학생들이 새로 개종한 가정의 자제들이거나 그들 자신이 개종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대로 된 그리스도 신앙을 체득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또 학생수가 적고, 연령이나 교육 정도가 각각 다른 학생들이 모여서 한 학급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교사들 또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신학교가 오주프(Osouf) 주교에 의해 나가사키(長崎)로 이전되자, 그 후 리뇔 신부는생 모르 수녀회에서 맡고 있던 원아 250명 가량의 고아원과 기숙사 운영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우수한 여성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여학교 설립을 수녀회에 제의하여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결과 그를 비롯하여 생 모르 수녀회는 우수한 교육을 실시한다는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리뇔 신부는 교육을 통해 전교하는 방법이 일본에 있어서는 가장 유일하면서도 성공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었다.
한편 1893년에 동경제국대학의 이노우에(井上哲次郞) 교수가 그리스도교를 통렬하게 배격하는 소책자를 간행하였다. 그런데 이 책자에는 그리스도교는 일본의 단체와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며, 일본에 있어서 진정한 종교는 충효를 바탕으로 한 애국심뿐이라고 강조하면서 일본인과 그리스도교 신자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에 리뇔 신부는 이를 반박하기 위해 책을 저술하였는데, 일본 당국의 발간(發刊) 금지 조치로 출간하지 못하다가 5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간행할 수 있었고, 결국 이로 인해 그는 주위로부터 높은 명성과 찬사를 받게 되었다. 또 1894년 교토(京都)에서 오리엔티스(P. Aurientis)의 주관으로 출판되고 있던 가톨릭 잡지 《고에》(聲)를 동경대교구에서 인수하자 리뇔 신부는 새 편집장으로 임명되었고, 15여 년 동안 독자의 대부분인 천주교 신자들을 위해 논문 및 시사 문제에 관한글들을 계속 기고하였다. 그의 글 중에 일부는 지식층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으며, 기타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1906년 생 모르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요쯔야(四谷)로 이전하게 되고, 젊은 선교사들이 출판 사업을 인수하게 되자, 그는 저술가로서의 자신의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선교사 및 수녀들의 묵상 지도를 위한 설교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이후 1912년에 그는 거처를 홍콩에 있는 나자렛 피정의 집으로 옮긴 뒤에도 계속 한국을 위시해서 선교사와 수녀들의 묵상 지도를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전교 사업은 중국 남부와 인도 차이나 등지에서도 이루어졌다. 끊임없이 전교 활동을 펼치다가 1922년 7월 25일 사망한 리뇔 신부의 유해는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운영하는 홍콩의 베타니아 요양소(Sanatorium de Béthanie)에 안치되었다.
※ 참고문헌 上智大學, 《カトリック大辭典》 V, 東京, 富山房, 1960, p. 368. 〔편찬실〕
리뇔, 프랑수아 알프레드 데지레 Ligneul, François Alfred Désiré(1847~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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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리놀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