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352~366) 로마 출신으로 출생 연월일은 미상. 350년 콘스탄스의 사망으로 동 · 서방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된 콘스탄시우스 2세(Constantius Ⅱ)는 니체아 신경에 적대적인 동방 주교들의 영향을 받아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아리우스주의(Arianism)라는 고정된 형식 아래 일치시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황제는 서방 교회의 모든 주교들이 성부와 성자의 동일 실체성(ὁμοούσιος, consubstantialitas)을 강조하는 니체아 신경을 포기하고, 그 신경의 강력한 옹호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Athanasius)를 파문하는 데 동의하기를 원하였다. 결국 아타나시오는 335년 티르(Tyre) 교회 회의에서 동방 주교들에 의하여 파문되어 이듬해에 트리어(Tier)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러나 서방 교회 주교들은 티르 교회 회의의 결정 사항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고, 동방 주교들은 교황 율리오 1세에게 아타나시오의 파문에 대해 다시 한번 고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교황 율리오 1세(337~352)는 아타나시오를 옹호했고, 소크라테스(Socra-tes)가 자신의 《교회사》에서 증언하였듯이, 343년의 사르디카(Sardica) 교회 회의 역시 그를 옹호하였다. 그래서 동방 주교들은 새 교황이 된 리베리오(352~366)에게 다시 한번 아타나시오 문제를 재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리베리오 교황은 그를 로마로 소환하였으나 아나타시오는 로마로 가지 않는 대신 80명의 이집트 주교들이 서명한 비망록(備忘錄, memorandum)만 보냈다.
비망록을 살펴본 리베리오는 당시 아르스(Arles)에 머물고 있던 콘스탄시우스 2세 황제에게 니체아 공의회 교 부로 참석하였던 카푸아(Capua)의 빈첸시오(Vincentius)와 캄파니아(Campania)의 마르첼로(Marcellus)를 교황 특사로 파견하면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에 대립되어 있는 아타나시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아퀼레이아(Aquileia)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황제에게 신학적 조언을 하고 친아리우스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던 신지두눔(Singidunun)의 우르사치우스(Ursacius)와 무르사(Mursa)의 발렌스(Valens) 같은 주교들은 콘스탄시우스 황제를 충동하여 아르스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게 하였다. 황제는 갈리아 지역 주교들에게압력을 가해 아르스 교회 회의에서 아타나시오 단죄를 재가하게 하였고, 교황 특사로 파견된 빈천시오와 마르철로 역시 황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이 단죄에 찬동하였다. 유일하게 찬동하지 않은 트레베(Treves)의 파울리노(Paulinus) 주교는 이로 인해 곧 유배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리베리오 교황은 카푸아의 빈천시오가 황제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사실에 매우 슬퍼하며, 자신도 이러한 불의와 이단에 물들지 않도록 그 전에 죽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코르도바(Cordova)의 호시오(Hosius)에게 보냈다. 아울러 교황은 베르첼리(Vercelli)의 주교인 에우세비오(Eusebius)에게 편지를 보내, 사르
디카 교회 회의에서 이루지 못한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주교들 사이의 일치를 위해 새 교회 회의 소집을 콘스탄시우스 황제에게 요청하였다고 언급하였다.
교황에 의해 요청된 교회 회의는 355년 10월 밀라노에서 개최되었으나 니체아 신경에 대해서는 논의도 되지 않았으며, 황제의 압력에 의해 밀라노의 디오니시오(Dionysius), 베르첼리의 에우세비오, 카글리아리의 루치페르 등 세 명의 주교들을 제외한 모든 참석 주교들이 아타나시오 단죄를 승인하는 서명을 하게 되었다. 결국 아타나시오 단죄에 반대 서명을 한 세 명의 주교들은 유배를 당하였고, 아리우스주의자인 아욱센시오(Auxentius)가 밀라노의 주교가 되었다.
교황 리베리오는 유배당한 주교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을 순교자라고 일컬으면서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그러한 고통을 첫 번째로 당하지 못한 것에 유감을 표시하였다. 또 자신도 그들과 함께 유배의 고통을 나눌 수 있도록 그들의 기도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은 콘스탄시우스 황제는, 교황이 아타나시오에 대한 단죄를 승인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하는 위협적인 편지를 자신의 시종인 내시 에우세비오를 통해 교황에게 보냈다. 이를 거부한 교황은 결국 한밤중에 라테란 궁에서 체포되어 밀라노로 압송되었으며, 이틀 후 트라체(Thrace)의 베뢰아(Beroea)로 추방당하였다.
리베리오 교황이 로마를 떠날 때, 로마의 모든 성직자들은 다른 주교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였으나 곧 대부제인 펠릭스(Felx)를 대립 교황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아리우스파 주교인 체사레아의 아카치오(Acacius)에 의해 주교 서품을 받았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펠릭스 2세 교황(355~388)을 좋아하지 않 았으며, 황제도 357년 4월 1일 로마를 방문했을 때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리베리오 교황은 357년 말경 베뢰아를 떠나 황제가 머물고 있던 시르미움(Sirmium, 현재의 유고슬라비아 미트로비카)으로 갔고, 358 년 로마로 돌아왔다.
그러나 교황이 로마로 돌아온 배경에 대해서는 의견이 양분되어 있다. 첫 번째 의견은 교황이 황제에게 굴복하 였기 때문에 로마에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황제가 감행한 아타나시오 단죄에 찬성하고, 니체아 신경에서 가장 특징적인 표현들, 특히 '동일 실체' (ὁμοούσιος)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시르미움의 첫 번째 신앙 정식' 을 수락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아리우스주의자인 필로스토르지우스(Philostorgius)도 리베리오 교황이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357년 여름에 제르미니움(Germinium), 우르사치우스, 발렌스 등에 의하여 작성되었고 '동일 실체' 라는 표현을 거부하고 있으며 '호시오의 정식' (formula of Hosius)이라고 하는 '시르미움의 두번째 신앙 정식' 에 서명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교황이 황제의 뜻에 굴복하였음을 시사하는 내용은 이른바 힐라리오의 《역사적 단편》(Fragmenta Historica)에 교황이 쓴 것으로 여겨지는 3통의 편지에서도 나타난다. 예로니모도 그것을 믿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는 자신의 저서 《연대기》에서 교황이 유배의 어려움에 굴복하여 이단의 사악함을 승인하고 나서 로마로 돌아왔다고 전하고 있다. 아타나시오도 357년 말경에 저술한 책에서 교황이 유배간 지 2년 후에 굴복하였고 죽음의 공포 속에서 자신의 단죄에 서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소조메노(Sozomenus)는 그것이 안티오키아의 대주교좌를 강탈한 아리우스주의자인 에우독시 우스(Eudoxius)에 의해 유포된 낭설이라고 하였다. 소조메노는 콘스탄시우스 황제가 교황을 시르미움으로 불렀고, 그곳에서 교황은 거의 아리우스주의에 가까운 안키라의 바실리오, 에우스타티오(Eustatius), 엘레우시오(Eleusius) 등에 의해 강제로 '동일 실체' 란 말을 거부하게 되었고 세 가지 정식들을 조합한 문서에 서명하였다고 한다. 이 세 가지 정식들은 사모사타의 바오로를 반대하고 있는 안티오키아 가톨릭 교회 회의(267), 포티누스(Photinus)를 단죄한 시르미움 집회(351), 안티오키아 교회 회의(341)의 신경이다. 물론 이 정식들은 완전히 이단적인 것은 아니지만, 교황은 우르사치우스와 발렌스에 의하여 성자가 성부와 모든 면에 있어서 유사하다고 고백하게 되었다.
한편 리베리오 교황이 이단설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교황 아나스타시오 1세(399~402)에 의해 401년에 쓰여진 편지에는 리베리오 교황과 디오니시오(Dionysius), 할라리오(Hilarius), 에우세비오 등이 아리우스주의자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당한 이들이라고 적고 있다. 암브로시오는
리베리오가 매우 성덕이 뛰어난 인물이라고 하였다. 또 역사가 소크라테스는 리베리오 교황이 로마로 귀환한 것은 대립 교황인 펠릭스 2세를 반대하는 로마인들의 저항 때문이라고 하였고, 테오도레트(Theodoret)는 리베리오 교황이 영광스러운 신앙의 선수(先手)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리베리오 교황이 이단설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은 연역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유배 중에 황제에게 굴복하였다면 황제는 자신의 승리를 공포하였을 것이고, 아리우스주의자들 역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여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리미니 교회 회의(359) 이후에 나온 교령에는 배교한 주교는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한 반대를 명백하게 표명하지 않는 한 복권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 따라서 교황이 배교하였는지 아닌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지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358년 교황이 귀환할 때 시르미움에 모인 주교들은 로마 성직자들과 대립 교황인 펠릭스 2세에게 "두 명의 주교가 사도좌를 점유하고 서로서로 주교 직분을 수행하라"는 편지를 보냈다는 것과, 로마 시민들과 성직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것이다. 시민들과 성직자들은 "한 분이신 하느님, 한 분이신 그리스도, 한 명의 주교"라고 외쳤으며, 결국 펠릭스 2세는 로마를 떠나 365년 트라스테베레의 율리오 대성전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359년에 리미니 교회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에 참석한 주교들은 대부분 정통파였지만, 황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아리우스파 신경을 승인하였다. 리베리오 교황은 이 교회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사절도 파견하지 않았다. 361년 11월 3일 황제 콘스탄시우스가 사망하자, 교황은 이 교회 회의의 결정 사항이 무효라고 공식 선언하였고, 362년 이 교회 회의에서 오류에 빠지게 된 주교들이 아리우스의 오류를 거부하고 니체아 신경을 지지한다면 복권된다고 선포하였다. 366년에 교황은 세바스테(Sebaste)의 에우스타티오, 다르소(Tarsus)의 실바노(Syl-banus), 카스타발라(Castabala)의 테오필로(Theophilus) 등을 포함한 동방 교회 주교들의 사절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서방 교회의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교황은 그들에게 니체아 신경을 받아들이고 리미니 교회 회의의 결정들을 포기하겠다는 조건하에 로마 교회와의 친교를 승인하였다. 얼마 뒤에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보낸 서한에
서 교황은 니체아 신경이 완전한 진리로서 그리고 모든 이단들을 물리치는 척도로서 유지되어야 한다고 했으며, '동일 실체' 란 단어가 '아리우스주의에 대한 쐐기'라고 하였다. 말년에 교황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의 일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후 로마에서 일어난 혼란을 볼 때, 그가 로마 교회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교황은 로마의 에스퀼리노 언덕에 리베리오 대성전(Liberii basilica)을 세웠는데, 이 성당은 교황 식스토 3세(432~440)에 의해 성 마리아 대성전(Santa Maria Maggiore)으로 바뀌었다. 353년 성탄절에 교황은 베드로 대성전에서 성 암브로시오의 누이인 마르첼리나(Marcellina)에게 동정녀의 베일을 주었으며, 이때 행한 강론이 암브로시오의 《동정론》(De virginitate, 3, 1-3)에 언급되어 있다.
5세기에 작성된 예로니모의 《순교록》(MartyrologiumHieronymianum)에는 교황의 축일을 9월 23일로 적고 있지만, 후대 전례력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울러 《로마 순교록》에도 그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으며, 6세기경에는 교황에 관한 적대적인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였다.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는 리베리오가 로마로 귀환하여 훗날 순교자요 성인이 된 펠릭스의 추종자들을 박해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순교자 성 에우세비오는 자 신의 행전(Acts)에서 아리우스주의에 젖은 리베리오에 의해 죽음에 처해진 한 로마 사제로서 펠릭스를 기록하고 있다. 교황의 무류성에 관한 교의를 발표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리베리오는 교황 비질리오(537~555)와 호노리오 1세(625~638)와 함께 교황의 무류성에 반대하는 이들이 제시한 예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 참고문헌 J.N.D. Kelly, The Oxford Dictionary ofPopes, Oxford, Oxford Univ. Press, reprinted, 1986/ J. Stevenson, Creeds, Councils and Controversies, revised by W.H.C. Frend, Cambridge, SPCK, New Edition, 1989/ J. Chapman, Liberius,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9, New York, The Encyclopedia Press Inc., 1913/ G. Schwaiger, (LThK) 6, p. 1015/ P.T. Camelot, 《NCE》 8, pp. 714~716. 〔邊宗宗燦〕
리베리오 Liberius(?~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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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리오 교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