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추기경. 루이 13세 때의 총리(1624~1642). 프랑스 절대 왕정을 확립하고 유럽에서 프랑스가 주도권을 잡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리슐리외는 1585년 9월 9일, 프와투(Poitou) 지방 귀족의 셋째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아버지가 황폐해진 영지만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나자, 어린 시절부터 가난의 위협을 느끼면서 자라야 했다. 앙리 3세가 그의 가문에 하사한 뤼송 주교령에서 나오는 교회록을 상속하기로 하였던 둘째 아들이 카르투지오 수도회에 입회함에 따라 리슐리외가 가문을 위하여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607년 4월 17일 교황의 특별 허가를 받아 22세의 나이로 주교 서품을 받고 '프랑스에서 가장 초라한' 뤼송(Luçon) 교구의 주교로 부임한 그는, 항상 빈틈이 없었으며,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개혁 주교로서 전혀 손색이 없었다. 또 뛰어난 신학자로서 가톨릭 교회의 옹호에 철두철미하였으며, 프랑스어로 글을 쓰고 일상 언어로 신학 논문을 쓰는 관습을 확립한 최초의 신학자이기도 하였다. 1623년에 출간된 《정치적 유언》(Testament Politique)은 그의 철저한 신앙을 보여 주는 좋은 증거이다.
1614년에 열린 삼부 회의에 성직자 대표로 참석한 리슐리외는 루이 13세의 섭정이 된 황태후 마리 드 메디치(Marie de Médicis)의 눈에 들게 되었다. 그는 왕권에 저항하는 파벌과 능숙하게 협상을 벌인 끝에 1616년 국무 장관에 임명되었고, 여기서 탁월한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1617년 4월 왕의 측근들이 일으킨 궁정 반란으로 마리 드 메디치의 섭정 정부가 무너지자, 리슐리외도 공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는 교황령인 아비뇽에 망명해 있는 동안 루이 13세와 마리 드 메디치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하였다. 위그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왕의 총애를 받던 륀느가 죽자, 마리 드 메디치는 왕실로 돌아왔다. 1622년 9월 5일 교황 그레고리오 15세(1621~1623)에 의하여 추기경으로 임명된 리슐리외는, 1624년 4월 29일 왕의 대신으로 복귀하였다.
〔프랑스 총리 시절〕 1624년 이탈리아 북부의 발텔리아를 둘러싸고 또 한 차례 위기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결국 내각 개편으로 이어졌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상업 · 해양을 관장하는 왕실 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으며 4년 뒤 이 자리는 총리(principal ministre)라는 칭호로 바뀌었다. 리슐리외 총리는 이때 스스로 세운 목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나의 모든 임무는 위그노파를 분쇄하고, 거물급 인사들의 자만심을 꺾으며, 모든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만들며 국왕의 이름을 가능한 한 외국에까지 드높이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국가 이성(raison d'État), 즉 국가의 존립과 팽창에 필요한 욕구에 종속시켰다. 그의 재능은 무엇보다도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지성에 있었으며, 그의 능력은 무한했다.
그의 첫 번째 관심사는 절대 왕권을 왕국 전체에 확립하는 것으로서, 《가제트》(La Gazette)라는 잡지를 이용하 여 여론을 감시하고 조작하며, 각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왕권에 도전하는 모든 이들을 가차없이 제거하는 데 있었다. 1626년 이후 귀족들의 결투를 금지하고, 그들의 피난처가 될 수 있는 수많은 성곽의 요새를 허물어 귀족들을 국왕에게 복속시키려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또한 전쟁으로 세금 압박이 가중됨으로써 일어난 수많은 민중 반란도 모두 진압하였는데, 리슐리외가 해결해야 할 심각한 국내 문제는 위그노파였다. 그는 위그노들이 국가 속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주요 도시의 민간 행정이 그들에게 장악되어 있었을 뿐 만 아니라 상당한 군사력도 그들의 뜻대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로앙(Rohan) 공작의 조종을 받은 라 로셀(La Rochelle)의 위그노파들은 영국를 부추겨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켰다. 리슐리외는 13개월(1627~1628)에 걸친 공략 끝에 라 로셀에 자리잡은 위그노의 대본부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대서양 연안의 항구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1628년 10월 28일 라 로셀의 위그노들은 항복하였다. 이어 리슐리외는 1629년 알레 칙령(Edid'Ales)을 내려 과거 낭트 칙령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이 누릴 수 있었던 사법상의 지위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한편 그들의 모든 정치적 · 군사적 특권을 빼앗아 가톨릭 신자 대부분의 불만을 해소해 주었다.
1630년 리슐리외는 경제 쇠퇴와 국민의 생활 저하를 감수하면서까지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 정책을 택하였다. 이때 그의 정치적 위상이 가장 위태로운 순간이었으나 루이 13세는 그의 결정을 지지하였다. 이리하여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망명한 마리 드 메디치와 왕의 동생 가스통은 그곳에서 반정부 활동의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그의 외교 정책의 핵심 목표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약화시키고 유럽에서 프랑스가 주도권을 잡는 것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적들을 외교적으로 후원하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1635년 스페인이 프랑스의 보호를 받고 있던 트리어 대주교를 사로잡자, 프랑스는 프로테스탄트 국가들과 손잡고 30년 전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리슐리외는 여러 사건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고, 프랑스는 참전이 초래한 사회적 혼란과 경제 침체로인해 농민 반란이 더 자주 일어나는 등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그의 탁월한 외교 협상은 훗날 마자랭에 의해 베스트팔렌 조약과 피레네 조약을 통해 결실을 보았다.
리슐리외는 대외 정책에 치중한 탓에 국내의 경제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였다. 세금 징수의 어려움을 외면한 채 전쟁 비용을 지출하였으며 즉흥적인 경제 계획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생산과 산업을 장려하여 공산품을 수출하고 사치품 수입을 억제하여 이익을 얻었다. 또한 캐나다, 아프리카, 서인도 제도 등지에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아프리카와 중동 및 아메리카에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산시켰고, 그의 정치적 · 경제적 계획을 뒷받침하는 거대한 정보망을 형성하였다. 네덜란드에서 배를 사들여 프랑스 해군을 창설한 리슐리외는,
1642년에 이를 63척의 전함과 23척의 갤리선을 거느린 해군으로 발전시켰다.
〔교회에서의 말년〕 말년에 리슐리외는 교황과의 대립에서 비롯된 종교적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교회에 세금을 할당하는 문제를 놓고 프랑스 교회와도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전통적인 신정주의(神政主義)적 국가관을 갖고 있었으며, 교황 지상주의와 갈리아주의 사이에서 중도적인 노선을 취하였다. 그의 재산은 대부분 공익 사업과 예술 및 파리 대학을 후원하는 일에 쓰여졌으며, 그중에서 프랑스 학술원을 설립한 일은 가장 기념할 만한 업적으로 남아 있다. 1642년에 사망한 리슐리외는 자신의 재정 지원으로 설립된 소르본 대학 성당에 안장되었다. 저서로 《정치적 유언》, 《그리스도교 교육》(L'instruction du chrétien, 1609), 《그리스도교 완덕론》(Traité de la perfection chrétienne, 1636) 등이 있다.
※ 참고문헌 G. Hanotaux et duc de la Force, Histoire du Cardinal de Richelieu, vol. 6, Paris, Firmin-Didot et Plon, 1893~1948/ H. Hauser, La Pensée et I'action économique du cardinal de Richelieu, Paris, P.U.F., 1944/ V.L. Tapie, La France de Louis ⅩⅢ et de Richelieu, Paris, Flammarion, 1980/ R. Mousnier, L'homme rouge ou la vie du Cardinal de Richelieu, Paris, Robert Laffont, 1992/ M. Carmona, Richelieu, I'ambition et le pouvoir, Paris, Fayard, 1983. 〔白仁鎬〕
리슐리외, 아르망 장 뒤 플레시스 Richelieu, Armand Jean du Plessis(1585~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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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슐리외 추기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