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용에서 1245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4세(1243~1254)가 소집한 제13차 세계 공의회와 1274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0세(1271~1276)가 소집한 제14차 세계 공의회.
〔제1차 리용 공의회〕 교황권과 황제권의 첨예한 대립이 매우 심각하게 되자 1240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에서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고자 하였지만,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무력으로 이를 저지하였다. 1241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사망한 후 약 2년 간의 공석 끝에 교황으로 선출된 인노천시오 4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1244년 12월 2일 황제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리용으로 갔다. 12월 27일 교황은 1245년 6월 24일에 리용에서 세계 공의회를 개최한다고 선포하였다. 1245년 1월 3일부터 초대장이 각 주교, 대수도원장, 주교좌 성당 참사회 회원, 왕들과 각 도시로 발송되었는데 이 초대장에는 공의회 개최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신자들의 복된 자문과 그들의 결실어린 도움을 통하여 교회는 고유한 위치의 위엄을 지니게 되었다. 때문에 불행한 위기를 맞고 있는 예루살렘 성지와 동방의 황제들에게 도움을 신속하게 주어야 한다. 또한 타타르족과 그 외의 신앙의 적들, 그리고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는 이들에 대한 정책이 세워져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교회와 황제 사이의 문제에 대해서도 정책이 세워져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는 세상의 왕들과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 그리고 세상의 다른 군주들도 참여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결국 처음부터 '세계' 공의회라고 불린 이 제1차 리용 공의회의 개최 목적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었다.
교황 인노천시오 4세는 공의회 개최 초대장에서 프리드리히 2세 황제도 공의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왕들처럼 참관자(parcipipant)가 아니라 공의회에서 교황과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무죄함을 입증하여 야 하는 피고(defendant)로서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참석자 : 공의회는 1245년 6월 26일에 개최되었는데, 에르푸르트(Erfurt)의 베드로에 따르면 250명이 참석했 다고 하고, 멘콘(Mencon)은 3명의 총대주교와 300명의 주교 그리고 다수의 고위 성직자들이 참석하였다고 전한다. 아울러 다수의 비성직자들도 참여하였는데, 이 중에는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인 발트윈 2세(Baldwin Ⅱ)와 툴 루즈(Toulouse)의 레이몬드 7세 백작, 프로방스의 레이몽 베렌가르(Raymond Berengar) 백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 황제는 수에사(Suessa)의 타대오(Thaadeus)를 단장으로 한 사절들을 파견하였다. 동방에서는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지에서는 사라센인들의 침입으로 인해, 그리고 프리드리히 황제의 위협으로 인해 많은 주교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공의회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프리드리히 황제의 권하에 있는 주교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거의 참석하지 못하고, 단지 프라하와 리지외의 주교와 부르군디 왕국의 주교들만이 참석하였다. 때문에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프랑스, 스페인,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의 주교들이 주를 이루었다.
내용 : 6월 26일부터 7월 17일까지 개최된 공의회는 3차례의 회기를 가졌다. 6월 28일 개최된 제1차 회기에서 '성신 송가' 와 성인 호칭 기도를 바친 후 교황 인노천시오 4세는 개막 연설을 통해서 교회가 안고 있는 5가지 상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① 성직자와 신자들의 악표양, ② 이슬람교도인 사라센인들의 침입으로 인한 예루살렘 성지의 손실, ③ 콘스탄티노플 라틴 제국에 대한 그리스의 위협, ④ 헝가리에서 자행한 타타르족의 잔혹성, ⑤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교회에 대한 박해, 이렇게 다섯 가지를 밝힌 후에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 황제가 이전에 호노리오 3세 교황(1216~1227)에게 부여한 특전에 대해 낭독하였다.
7월 4일에 개최된 제2차 회기에서 칼비(Calvi)의 주교와 스페인 대주교는 황제의 생활 양식과 교회를 거스르는 그의 논쟁에 대해 공격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사절인 타대오는 이단으로 단죄되기 위해서는 황제의 말을 직접 들어 보아야만 한다며 황제가 참석할 때까지 이 문제를 유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7월 17일에 개최된 제3차 회기에서 교황은 황제에 대한 파면을 선포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인 발트원 2세와 툴루즈의 레이몽 7세 백작, 프로방스의 베렌가르 백작 그리고 아퀼레이아(Aquileia)의 총대주교인 베르톨드(Berthold)가 중재 역할을 하였지만 파면을 막지는 못했다. 교황은 도미니코회 회원들과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에게 황제에 대한 파면을 각 지역에서 선포하는 책임을 맡겼다. 150명의 주교들이 서명한 파면 칙서(Bulla deposi-
tionis Friderici II imperatoris)에는 위증, 평화 파괴, 고위 성직자를 투옥하는 등의 독성죄, 이단 혐의 등 4가지 이유가 적혀 있었다. 이로 인해 프리드리히 2세 황제는 로마 황제요 독일 국왕이며 시칠리아 왕의 직분에서 파면되었으며, 모든 영예와 권한을 상실하였다. 그의 신하들은 충성 서약에서부터 자유로워졌고 독일 제후들은 새 왕을 선출하여야만 하였다. 교황은 추기경들의 권고에 따라 시칠리아 왕국의 왕을 자신이 결정 짓기로 하였다.
공의회는 프리드리히 2세 황제에 대한 파면장 이외에도 예루살렘 성지와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황제에 대한 지원책 그리고 고리 대금업, 타타르족 등을 다루고 있는 22개의 법적 헌장을 선포하였다. 사라센인들로부터 예루살렘 성지를 구출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기도와 지원자를 요청하였고 "우리와 거룩한 로마 교회의 추기경들인 우리 형제들은 수입의 10분의 1을 낼 것이다"라고 하면서 성직자들에게 모든 수입의 5%를 매년 세금으로 낼 것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교황은 9월 8일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 성탄 축일을 전체 교회가 팔부(八部) 축제로 경축해야 한다고 선포하였으며, 대학의 교수들에게 공의회 헌장을 연구하고 가르치도록 하였다.
의의 : 제1차 리용 공의회는 전환점이었다. 물론 교황이 황제를 파면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도 제기되는데, 이 문제에 대해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분명히 할수 있다고 대답한다. 교황은 말하기를, 자신이 황제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황제에게서 직위와 위엄을 빼앗아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리스도는 세상 모든 황제들과 왕들의 '자연적 주인'(dominus naturalis)이기 때문에 그들을 세울 수도 파면할 수도 있는데, 그리스도는 이 권한을 지상 대리자인 교황에게 부여하였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교황은 법적으로 황제를 파면할 수 있다(papajure deponit imperatorem)고 하였다. 다른 공의회와는 달리 적은 인원이 참여하였고, 다루었던 사안 역시 정치적 색채가 강하였지만, 제1차 리용 공의회는 교황권과 황제권이라는 두 권력 중에서 교황이 주도권을 갖게 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제2차 리용 공의회〕 1268년 11월 29일 교황 글레멘스 4세가 사망한 후, 추기경들이 여러 분파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거의 3년 동안 교황좌가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비테르보(Viterbo) 시민들은 빨리 교황을 선출하도록 교황 선출권자들이 모여 있던 주교관의 지붕을 제거하기도 하였는데, 결국 1271년 9월 1일 새 교황으로 피아첸차(Piacenza)의 테오발도 비스콘티(Teobaldo Visconti)가 그레고리오 10세로 선출되었다. 새 교황으로 선출된 테오발도는 당시 아크르(Acre)에 있었기 때문에 교황직을 받기 위해 로마로 떠나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겠다" 라는 말을 남겼다.
당시 유럽 정치적 상황은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교황들은 독일 황제들과 투쟁하면서 각 나라에 도움을 청하였고, 시칠리아에는 앙주(Anjou)의 샤를르(Charles)가 왕권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전통적인 통치 체계는 혼란에 빠져 결국 교황권과 황제권이 대치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3년이라는 공백 기간을 거쳐 새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 10세는 선출될 당시 십자군을 돕기 위해 아크르에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십자군과 동방 교회와의 재일치 그리고 개혁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교황이 동방 교회와의 재일치에 관심을 둔 것은 그리스도교 세계를 하나로 묶는다면 예루살렘 성지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로마 교회가 서방 세계에서 권위와 영향력을 지니고 성장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참석자 : 결국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은 1272년 3월 31일 교황직을 수행하는 동안 주된 관심을 보였던 '동방교회와의 재일치' , '십자군' , '교회 개혁' 이라는 세 가지 큰 주제를 다루기 위해 리용에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선포하였다. 1272년 4월 13일부터 대주교, 주교, 주교좌 성당 참사회 회원, 대수도원장은 물론, 서방 세계의 왕과 군주,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카엘 8세, 아르메니아 왕과 가톨릭 신자들 그리고 몽고의 칸(Khan)에게 초대장이 발송되었다. 오랫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치고 나서 공의회는 1274년 5월 7일 성 요한 성당에서 개최되었다. 약 300명의 주교들과 60명의 대수도원장들 그리고 다수의 성직자들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성 보나벤투라와 대 알베르토(Albertus Magnus)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나폴리에서 오던 중 로마 근교에 있는 포사누오바(Fosa-nuova) 수도원에서 1274년 5월 7일 사망하였다. 이외에도 아라곤(Aragon)의 국왕인 야고보가 직접 참여하였고 프랑스, 독일, 영국, 시칠리아의 국왕들은 사절들을 파견하였다. 동방 교회 역시 사절들을 파견하였고 몽고의 칸아바가(Khan Abaga)도 16명의 대표자들을 파견하였다. 결국 공의회의 참석자 숫자가 다른 공의회에 비해 특별히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전 그리스도교 세계가 직접 혹은 대표자들을 파견하였다는 점에서 이 공의회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기대했던 대로 보편적이요 세계적인 공의회가 되었다.
내용 : 1274년 5월 7일 공의회 개막식에서 교황은 인노천시오 3세(1198~1216) 교황이 제4차 라테란 공의회 개막 연설에서 인용하였던 성서 구절(루가 22, 15)에 기초해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교황은 공의회의 주제로서 이미 발표하였던 동방 교회와의 재일치, 십자군, 교회 개혁에 대해 참석자들에게 역설하였다. 보나벤투라를 포함한 주교 추기경들은 교황의 오른쪽에 앉았으며, 사제 추기경은 대주교, 주교들과 함께 교황의 왼편에 앉았으며 대수도원장들은 추기경들 양쪽에 앉았다. 콘스탄티노플과 안티오키아의 라틴 총대주교들은 성당 신랑(身廊, nave) 안의 특별한 자리에 앉았고 아라곤의 야고보왕과 프랑스, 독일, 영국, 시칠리아의 사절들과 기사 수도회의 대표자들에게도 특별한 자리가 배정되었다. 동방 교회의 대표자들은 이때 참석하지 못하였는데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도착이 지연되어 결국 6월 24일에서야 리용에 도착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전 총대주교인 제르마노(Gemamus)를 단장으로 하고 니체아의 대주교 등 그 외의 황제 특사 등으로 구성된 동방 교회의 대표자들은 50명의 대주교와 수백 명의 주교들의 서명이 담긴 황제의 편지를 공의회에 제출하였다. 동방 교회 대표자들은 자신들이 로마 교회에 대한 순명을 보이기 위해 그리고 로마 교회로부터 참된 신앙을 배우기 위해 왔다고 공포하면서 교황의 수위권, 연옥 교리 그리고 7성사에 대한 신앙 고백문을 받아들였다. 동방 교회 대표자들이 도착한 5일 후인 성 베드로와 바오로 축일에 교황이 집전한 미사에서 독서와 복음이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낭독되었고 신경 역시 그러하였다. 동방 교회 대표자들은 '필리오퀘' (Filioque, ··· 성자에게서)가 삽입된 신경을 미사 중에 고백하였다.
총 6번의 회기(5월 7일과 18일, 6월 7일, 7월 6일과 16~17일) 중 제4차 회기에서 동방 교회와 라틴 교회와의 재일치가 공포되었고 결의되었다. 이 일치는 동방인들이 로마 교회가 요구하는 내용에 대한 동의를 기초로 하여 이루어졌는데 이 역사적인 날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미카엘 8세의 다음과 같은 신앙 고백문이 낭독되었다. "우리는 성령이 영원으로부터 성부와 성자에게서, 그러나 두 개의 원리가 아닌 하나의 원리에서 좇아 난다고 굳건히 고백하는 바이다. 이는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요 교사인 거룩한 로마 교회가 지금까지 고백해 왔고 설교하고 가르친 바이다. 이것은 정통 교부들과 박사들 그리고 라틴 교회와 동방 교회의 불변의 판단이 똑같이 견지해 온 바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불변의 진리에 대한 무지 때문에 갖가지 오류에 빠진 이들이 있어 왔기에,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오류에 대한 길을 끝내고자 하는 갈망에서 거룩한 공의회가 가르치듯 성령이 영원으로부터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 나신다는 것을 거부하는 모든 이들 또는 감히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 나시는 것이 한 원리가 아닌 두 원리로부터 좇아 나신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단죄하는 바이다." 아울러 황제의 신앙 고백문에는 연옥 교리와 성체성사 그리고 혼인, 로마좌의 수위권에 대한 고백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 회기에서는 성령의 유출(流出, processio)에 관한 교의 헌장(Fideli ac devota)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동방 교회와의 일치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미카엘 8세는 앙주의 샤를르가 자신의 영토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교황의 도움을 얻기 위해 로마 교회와의 재일치를 희망하였지만, 대다수의 동방 교회 성직자들은 일치를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동방 교회와의 일치가 견고하지 못하고 결국 깨어졌기 때문에 십자군 역시 불가능하게 되었다. 교황은 성직자 들에게 십자군을 위해 십일조를 세금으로 내도록 하였고, 유럽의 국가들로부터 십자군을 위해 6년 동안 국가 재정의 10분의 1이라는 과도한 세금을 걷기로 하였다. 프랑스, 영국, 아라곤 그리고 시칠리아 국왕들은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합의하였으며, 동로마 제국의 미카엘 8세 황제 역시 서방이 먼저 자신과 평화를 유지하고, 앙주의 샤를르가 동로마 제국을 침략하려는 계획을 막아 준다면 자신도 십자군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십자군은 동방 교회와의 연약한 일치와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갑작스런 사망(1276년 1월 10일)으로 인하여 무위로 끝났다.
교회 개혁에 있어 교황은 공의회 마지막 회기에서 공의회 기간 동안 논의된 바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불평을 터뜨렸다. 그러나 교황은 여러 개의 개혁에 관한 헌장을 공의회를 통하여 반포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교황 선거(conclave)에 관한 헌장 <우비 페리쿨룸>(Ubi periculum)이다. 이 헌장은 제5차 회기인 7월 16일에 승인된 것으로 그 후에 약간의 수정과 첨삭이 가해져 오늘날까지 시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 각 도시의 집정관 선출의 모델로도 작용하였다. 이 헌장에 따르면, 교황이 사망한 뒤 10일 후에 추기경들이 후임 교황 선출을 위해 모여 외부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된 채 선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선출이 3일 안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추기경들에게 점심과 저녁 식사에 한 가지 음식만 제공되고, 그 후에 5일이 지나도 선출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빵과 물 외에는 아무것도 제공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교황 선거 전 기간 동안 추기경들은 교회로부터 부여되는 교회록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만일 교황 선거에 참여하고 있는 추기경들에게 접근하는 이가 있다면, 그리고 비밀리에 말하거나 서신을 보내는 이가 있다면 그 사실로 인해 파문될 것이라고 정하였다. 그리고 교황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의 영혼을 위해 장엄 미사를 봉헌해야 한다고 정하였다.
또한 윤리와 교회의 개혁에 관한 특별한 문제들을 다룬 헌장도 반포하였다. 특별히 공의회는 주교들과 대수도원장들의 선출에 대한 법을 제정하였다. 주교들은 본당 사목 방문시 돈을 요구할 수 없으며, 만일 받았다면 한 달 안에 두 배로 갚지 않는다면 갚을 때까지 교회에 들어갈 수 없다고, 즉 성사를 집전할 수도 없고 미사를 봉헌할 수 없으며 미사에 참여할 수도 없다고 규정하였다. 이는 본당에서 자유로이 선물로 준 돈이라도 그러하다고 하였다.
아울러 공의회는 새로운 수도회의 설립에 관한 헌장 <렐리지오눔 디베르시타툼>(Religionum diversitatum)도 반포하였는데, 이 헌장은 새로운 수도회의 설립을 금지한 1215년의 규정을 재확인하고 1215년 이후로 교황청의 승인 없이 설립된 수도회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 헌장은 이미 서원을 한 이들은 계속 함께 살 수 있지만, 새로운 회원을 받을 수 없고 새로운 재산을 가지거나 이미 지닌 재산을 팔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교황청에 유보된 것으로, 그 재산은 가난한 이를 위해서 또는 다른 경건한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도회의 회원들은 신자들에게 강론, 고해성사, 장례 예식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오래된 탁발 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만 예외로 두었으며, 가르멜회와 아우구스티노회는 차후의 지침을 기다리도록 하였다. 또한 모든 기사 수도회를 하나로 묶으려고 시도하였지만, 이 노력은 스페인에서부터 일어난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이 헌장은 후에 재속 성직자들과 수도회 성직자들의 관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으로 공의회는 고리 대금업을 금지하는 헌장도 반포하였다. 이미 고리 대금업을 하고 있는 이들은 추방되어야 하고, 고리 대금업자에 대한 형벌을 늘렸다. 만일 고리 대금업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교회 묘지에 묻힐 수 없다고 하였다. 또 법률가들은 자신에게 소송을 의뢰한 이들에게 규정된 것 이상으로 받지 못한다고 공의회는 정하였다. 공의회는 주교와 같이 영신적 아버지를 위협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이는 파문에 처하며, 파문된 이가 그것에 대한 보복으로 자신에게 파문 선고를 한 재판관을 사로잡거나 죽이려고 자신의 종에게 명령한다면, 교사자는 그 자체로 재파문된다고 결의하였다. 아울러 공의회는 리지외의 주교인 앙리, 성 바오로회 대수도원장인 프리드리히, 로데스의 주교와 밖르츠부르크의 주교를 파면하였다.
공의회 폐막 연설에서 교황은 본당 신부들이 자신의 본당 신자들의 영혼을 책임진 자로서 충실하도록 각 주교들에게 책임을 부여하였다. 아울러 주교들 스스로도 쇄신하여 신중하게 교회 정책을 제정하도록 요청하였다.
의의 : 공의회가 폐막된 후 교황은 1274년 11월 1일 공의회가 정한 헌장을 <쿰 누페르>(Cum nuper)라는 칙서와 함께 각 대학에 보냈고, 신자들에게는 <인프라스크립타>(Infrascripta)라는 회칙을 통해 반포하였다. 반포된 31개의 헌장 중에서 3개의 헌장은 공의회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교황과 교부들이 공의회 마지막 회기에서 이를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또 십자군을 위해 세금을 걷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헌장 <젤루스 피데이>(Zelus Fidei)는 빠져 있었는데, 이는 이 헌장이 보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황이 반포한 공의 회 헌장에 약간의 변경이 있은 것은 교황이 공의회보다 우위권을 갖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리용 공의회는 구성 인원이나 전체적 특성상 제 4차 라테란 공의회와 매우 유사하다. 이 유사성은 공의회 개최 의도 중 정치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왜냐하면 공의회는 독일 제국의 왕을 선출하는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몽고의 칸도 대이집트 동맹을 결성하고자 자신의 사절들을 파견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몽고의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끝났지만, 극동에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칸의 사절 중 한 명이 세례를 받았고, 프란치스코회 회원인 조반니 데 몬테코르비노(Giovanni de Montecorvino)가 이로 인해 선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와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었기에 선교 활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 교회 일치 운동 ; 공의회 ; 교황 선거)
※ 참고문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해설 총서》 6, 성바오로출판사, 1993/Norman P. Tanner ed., Decrees ofthe Ecumenical Coumcls, vol. 1, London, Washington : Georgetown Univ. Press and Sheed & Ward, 1990/ H. Jedin, trans. by Ernst Graf, Ecumenical Councils of the Catholic Church, New York : Herder and Herder, 3rd ed., 1960/ Philip Hugh, The Church in Crisis A History ofthe General Councils 325~1870, New York : Hanover House, 1961/ -, A History ofthe Church, vol. 3, New York : Sheed & Ward, 1947/O. McKenna, 《NCE》 8, pp. 1116~1118/ R. Bäumer, 《LThK》 6, pp. 1250~1252/ J.L. Murphy, 6, pp. 521~526. 〔邊宗燦〕
리용 공의회 - 公議會
〔라〕Concilium Lugdunense · 〔〔영〕Council of L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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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2세 황제가 제1차 리용 공의회에 파견한 사절들을 맞이하는 인노첸시오 4세 교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