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아나톨. 한국명은 유달영(柳達榮). 1855년 1월 7일에 프랑스 베르뒨(Verdun) 교구 콤메르시(Commercy) 부근의 비뇨(Vignot) 지방에서 태어나, 오트 마른(Haute-Marne)의 생 디지에(Saint-Dizier) 성당 부설 중학교에서 고전을 공부하였으며 1874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 다. 1878년 3월 16일 사제로 서품된 뒤,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를 출발하기 직전 리델(Ridel, 李福明) 신부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고, 다른 선교사들의 신변도 위험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곧바로 조선에 입국할 수 없게 된 리우빌 신부는 우선 요동 반도 차쿠에 있는 성모 설지전(聖母雪地殿, Notre-Dame
de Neiges) 성당으로 가, 옥살이를 한 후 조선에서 추방된 리델 주교를 만나 조선의 상황을 듣고, 그곳에서 한국어와 한문을 공부하면서 2년 동안 머물렀다. 1880년 리델 주교는 선교사를 한국에 파견하기로 하고 중국 배를 이용하여 리우빌 신부를 메린도(Merinto)로 보냈으나, 조선 배를 만나지 못해 실패하였다. 그러나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같은 해 11월 12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입국 후 황해도 산간 지방에 은둔하면서 거처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성사를 집전, 전교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였으나 도둑으로 오인받아 1881년 3월 18일 포졸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튿날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당당한 태도를 보인 리우빌 신부는, 3월 20일 석방되어 신자들과 함께 그곳을 떠나 은둔 생활을 하다가 서울로 올라갔다.
리우빌 신부는 약 6주 동안 서울에 머무르다가 충청도 지역으로 전임되었으며, 그 해 가을에는 블랑(Blanc, 白圭三) 신부가 사목하고 있던 전라도 지역에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약 6년 동안 적극적으로 전교하여 50개 마을에 흩어져 있는 3천여 명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고, 20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한편 1887년 3월 부엉골의 예수성심신학교가 용산으로 이전되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부임할 당시 신학교 건물은 순한국식으로 지어져서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리우빌 신부는 가장 먼저 새로운 교사(校舍)를 건축하기 위해 1891년 5월 6일 정초식을 가졌고, 이듬해 6월 25일, 신학교 주보인 예수 성심 대축일에 2층 양식의 연와조 교사를 준공하였다. 그는 자신에게는 엄격하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관대한 태도를 취하였으며, 특히 신학생들에게는 그들이 훌륭한 성직자로 양성될 수 있도록 항상 많은 관심과 사랑으로 대하였다. 그러나 1891년에 장티푸스에 걸려 앓다가 회복되었으나, 1893년 성 금요일에 허약해진 몸으로 고행과 단식을 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장염과 복막염에 걸렸고, 생명이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고 4월 13일에 종부성사를 받았다. 결국 회복하지 못한 리우빌 신부는, 1893년 4월 26일 3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 용산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위텔 주교 일기》 Ⅰ,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附錄, 가톨릭출판사, 1984/ 최석우, 《韓國天主教會史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李裕林〕
리우빌, 루시앙 니콜라 아나톨 Liouville, Lucien Nicolas Anatole(1855~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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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리우빌 신부가 준공한 2층 양식의 신학교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