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주교. 축일은 4월 3일. 위치의 리처드(Richard of Wych)로도 불리는 그는 영국의 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산한 부모의 재산을 자신의 힘으로 원상 회복시킨 경험을 통하여 물질적 빈곤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것은 훗날 빈민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 후 재산 관리를 형제에게 일임하고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학문에 대한 천부적 재능을 지니고 있던 리처드는 파리와 볼로냐에서 학업에 충실히 전념하였으며, 1235년에는 옥스포드 대학의 사무국장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성 에드몬드(St. Edmond of Abingdon, 1170~1240)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고는 즉시 사무국장의 직책을 사임하고 에드몬드 대주교를 돕기 위해 갔다. 그 어려움이란 한편으로는 베네딕도 수도회 문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교들을 마치 자신의 병사처럼 명령하려 하였던 영국 왕 헨리 3세(1207~1272)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1240년 리처드는 성 에드몬드 대주교가 프랑스의 풍티니(Pontigy)로 망명하자 그를 수행하였는데, 에드몬드는 그 해 프랑스의 스와지(Soisy)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오를레앙(Orléans)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은거하던 리처드는, 그곳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영국으로 돌아왔다. 캔터베리 교구의 한 교회에서 사목 하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옥스포드 대학의 사무국장을 다시 맡아야만 하였다. 시체스터(Chichester) 교구의 대주교가 죽자, 헨리 3세는 그가 총애하는 사람들 중에서 후임자를 임명하려 하였으나 대부분의 주교들은 이 임명을 무효로 인정하고, 헨리 3세와 적대 관계에 있던 리처드를 후임자로 추대하였다. 이 문제는 많은 파란을 일으켰고, 결국 로마 교황청에까지 상정되었다. 교황은 헨리 3세에 반대하는 주교들을 지지하고, 1244년에 리처드를 시체스터 교구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가 주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헨리 3세는 시체스터 교구에 대한 물질적 원조를 중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교관의 사용을 금지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에게 복수하려 하였다. 하지만 결국 교황청의 파문 위협에 굴복한 헨리 3세는 2년 후 리처드가 그의 직무를 실행할 수 있도록 용인하였다.
리처드는 주교로서 훌륭한 모범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캔터베리의 성 에드몬드나 영국 링컨 교구의 주교이며 석학이었던 로버트 그로스테트(R. Grossetete, 1170~1253)처럼 개혁을 부르짖었던 고위 성직자였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해 대단히 엄격하였던 리처드는 당시 교회 내에 확산되어 있던 친족 등용과 성직 매매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빈민들에 대해서는 무한한 사랑을 갖고 있었다.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각종 사업을 시행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리처드의 행동에 반대하였으며, 그의 형제조차도 과도한 지출을 자제하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빈곤 속에 방치하는 것보다 말이나 은제 식기를 파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노력을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리처드는 여행 중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그의 장례식에 대한 교서를 직접 내리기도 하였다. 도버(Dover)에서 1253년 4월 3일 사망하였으며, 주교들과 영국 왕의 건의로 사망한 지 9년 후인 1262년 1월 28일 교황 우르바노 4세(1261~1264)에 의해 시성되었다.
※ 참고문헌 O. Englebert, La Fleur des Saints, Paris, Albin Michel, 1984/ M. Dubost et al., Théo, Paris, Droguet-a Ardent, Fayard, 1992/ M. Driot, Le Saint du jour, Paris, Mediaspaul, 1995. 〔편찬실〕
리처드, 치체스터의 Richard of Chichester(1197~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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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