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오로가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 보낸 편지. 이 문서의 저자가 바오로라는 사실은 초기 교회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혀 의문시되지 않았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몇몇 극단적인 회의론자들이 이 사실을 부정했으나 그들의 논증은 설득력이 없었다. 바오로는 이 서간의 6장 11절에서 친필로 편지를 쓴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부분은 서기가 대필하였음이 전제된다. 이 서기가 바오로의 구술을 단순히 받아적거나 바오로의 초안을 정서하였는지 또는 그가 문체나 내용에 어느 정도로 영향력을 미쳤는지를 확정할 수 없다. 갈라디아서는 그 내용에 비바오로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는 점으로 판단하건대 서기의 역할이 어떠하였든지 상관없이 바오로의 저작임을 확인할 수 있다.
로마서, 고린토 전 · 후서, 필립비서, 데살로니카 전서가 어느 한 도시에 있는 하나의 교회에 보낸 편지인 것과는 달리,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라는 넓은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들을 수신인으로 하고 있다. 이 교회들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른바 "북갈라디아설과 "남갈라디아설"이 맞서고 있다. 기원전 278~277년에 켈트(Celt)족의 일부가 발칸 반도에서 소아시아 중앙 북부 지방에 이주하여 살기 시작했는데 이 지역을 갈라디아 지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기원전 27년에 갈라디아 지방은 로마 제국의 행정 구역의 하나로 편제되면서 갈라디아 속주(province)가 되었다. 갈라디아 속주는 원래의 갈라디아 지방에다가 소아시아의 남부 지역에 위치한 비시디아(Pisida)와 리카오니아(Lycaoia)와 밤필리아(Pamphylia) 지방도 편입하였다. 남갈라디아설은 갈라디아서의 수신자 교회가 로마 제국의 행정 구역으로서의 갈라디아주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 13-14장의 보도에 따르면 바오로가 이른바 그의 제1차 선교 여행 중에 비시디아, 리카오니아, 밤필리아 지방에 복음을 전했는데, 남갈라디아설의 제창자들은 갈라디아서의 수신자 교회들이 바로 여기에 소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기록된 이른바 바오로의 제1차 선교 여행은 바오로가 갈라디아서에서 스스로 진술한 것에 전혀 부합되지 않으므로 사도행전에 기록된 이 보도의 신빙성이 전제되지 않는 한 남갈라디아설은 설득력이 없다. 그 뿐만 아니라 비시디아와 리카오니아와 밤필리아의 주민들을 가리켜서 갈라디아 사람들이라고 부른 경우를 찾아 볼 수 없다. 바오로와 관련된 역사에 관한 사료로서 사도행전의 기록보다 갈라디아서의 기록에 우선권을 둘 때 북갈라디아설이 더 타당하다.
갈라디아서 1장 8절과 4장 13-15절, 19절에 의거하여 판단할 때 갈라디아의 교회들은 바오로가 선교하여 세운 교회임이 확실하다. 바오로가 갈라디아에 선교를 하게 된 것은 그가 병에 걸린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갈라 4, 13). 이것은 아마 바오로가 갈라디아 지방을 원래부터 선교할 목적으로 찾아갔다기보다 그 지역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병에 걸려 얼마 동안 머무르는 동안에 그 지역에 선교를 하게 된 사정을 반영해 준다. 사도행전 16장 6절과 18장 23절에는 바오로가 갈라디아 지역을 지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16장 6절은 바오로의 제2차 선교 활동의 초기에 일어난 일이고, 18장 23절은 제3차 선교 활동의 초기에 일어난 일이다. 16장 6절은 바오로와 그 일행이 프리기아(Phryga)와 갈라디아 지역을 지나가게 된 것은 성령이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오로와 그 일행이 성령의 지시를 따라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프리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으로 가야만 했던 사정과 병에 걸려 갈라디아 지방에 머물러야 했던 사정을 연관시켜 볼 수 있다. 바오로가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형제들을 격려했다는 18장 23절의 기록에 의거하여 판단하면 바오로가 지난번에 그곳을 지나갈 때에 거기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저작 시기 및 장소〕 갈라디아서를 쓴 시기와 장소를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대체로 바오로가 그의 제3차 선교 활동 기간 중에 에페소에 2~3년 간 머무르는 동안에 썼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고린토 전서와 갈라디아서의 선후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어렵다. 그 둘이 거의 같은 시기에 쓰였다고 볼 수 있다. 로마서를 쓰기 직전에 고린토에서 갈라디아서를 썼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고린토 후서를 쓰기 직전에 마케도니아에서 썼다는 주장도 있다. 바오로의 마케도니아 방문은 그의 제3차 선교 활동 기간 중에 일어난 일이다. 바오로의 에페소 체류 기간을 대략 54~57년으로 잡으면 갈라디아서는 약 55년경에 에페소에서 쓰여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근사하다.
〔집필 동기 및 목적〕 바오로가 갈라디아를 떠난 뒤에 갈라디아 교회에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다. 거짓된 전도자들이 나타나서 바오로가 전한 복음을 반대하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선동하였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들의 선동에 곧 넘어갔다. 바오로의 적대자들은 스스로 정통적인 복음을 전한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바오로가 판단하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자들이었다. 바오로가 전해 준 복음을 버리고 그의 적대자들의 선전에 넘어간 갈라디아 사람들은 하느님이 그들에게 베풀어 준 구원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급박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바오로는 그가 전한 복음을 수호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세우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쓰게 되었다.
〔바오로의 적대자들〕 갈라디아에 나타난 바오로의 적대자들의 성격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은 갈라디아서를 올바로 이해하는 관건이다. 그들은 바오로의 판단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과연 왜곡했는가? 그들은 무엇을 주장했는가? 그들의 실상은 무엇인가? 초기 교회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바오로의 적대자들을 "유대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이 보편적인 정설로 되어 있다. 유대주의자는 구약의 율법과 유대인의 관습을 이방 그리스도교인들에게도 적용시키려는 자들이다. 유대주의자는 율법주의자라 불리기도 한다. 교부들은 구약의 율법을 도덕적 율법과 의식적(儀式的) 율법으로 구분하였다. 교부들에게 있어서 율법주의자라는 것은 의식적 율법도 준수하기를 주장하는 자를 뜻하였다. 바오로의 적대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중세를 거쳐 종교 개혁 시대에 이르기까지 통용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바오로의 율법 논의에서 도덕적 율법과 의식적 율법으로 구분하는 것을 지양하고 바오로의 적대자들을 바리사이적 율법주의자로 규정하였다. 18세기에 바우르(F.C. Baur)는 헤겔(G.W.F. Hegel)의 역사 도식을 원시 그리스도교사에 적용시켜 원시 그리스도교 내에서 유대주의와 바오로주의를 정립과 반립의 대립 관계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도식에 의거하면 바오로의 적대자들은 예루살렘의 원사도들을 포함한 유대계 그리스도인 전반이다. 바우르의 학설은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더 이상 계승되지 않았다.
1919년 뤼트게르트(W. Liitgert)는 이른바 "두 전선설"(二戰線說)을 제시했다. 뤼트게르트는 바오로가 갈라디아서에서 대항하여 싸운 적대자는 한편으로는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방종적인 열광주의자들이라 하였다. 뤼트게르트의 주장은 그 다음의 연구자들에게 그대로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바오로의 적대자들을 규정하는 데 하나의 전환점을 이룩했다. 두 전선설을 계기로 하여 주석자들은 그때까지 바오로의 적대자들을 유대주의자라는 단색으로 채색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다채로운 종교 사상적 색채로 채색하기 시작했다. 슈미탈스(W. Schmithals)는 바오로의 적대자들을 그노시스 주의자로 규정했고 오늘날의 많은 주석자들은 바오로의 적대자들을 종교 혼합주의자로 채색한다.
지금까지 제시된 바오로의 적대자 상은 유대주의자에서 혼합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다양하다. 더욱이 혼합주의자 상은 주석자에 따라 달리 다양한 색채로 그려진다. 바오로의 적대자를 혼합주의자로 설정하면 바오로의 논쟁의 초점이 완전히 흐려져 버린다. 유대주의자라는 명칭은 너무나 일반적이므로 바오로의 논쟁의 핵심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바오로와 그의 적대자 사이의 논쟁의 출발점이며 귀착점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의 할례 문제이다(5, 2-3. 6. 11-12 ; 6, 12-13. 15). 바오로의 적대자들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고 유대인으로 귀화해야만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 입장은 보수적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유대인으로서의 특권을 고수하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오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논증했다.
〔구성 및 내용〕 갈라디아서를 바오로 서신의 일반적 형식을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분석하면 서두(1, 1-5), 본체(1, 6-6, 17), 결미(6, 18)로 구성되어 있다. 본체는 본론부와 훈계부로 나뉘어진다. 갈라디아서에서 훈계부가 어디에서 시작하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5장 1절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본론부는 사실 진술부(1, 6-2, 21)와 논증부(3, 1-4, 31)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진술부는 갈라디아 사태에 대한 개괄적 서술(1, 6-10) 다음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련해서 바오로 자신의 생애에서 일어난 주요한 사건들에 대한 진술이 뒤따른다. 그것은 곧 자기가 전하는 복음의 유래에 대한 진술(1, 11-12),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가 다마스커스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자로 전향한 일(1, 13-24), 이른바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거짓 형제들의 주장을 분쇄하고 자기가 이방인에게 전하는 복음의 정당성을 공인시킨 일(2, 1-10),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게파를 비롯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반복음적 처신을 공박한 일(2, 11-14)이다. 2장 15-21절의 이른바 의화론은 액면상으로는 안티오키아 사건의 현장에서 발언한 연설이므로 사실 진술부에 속한다고 하겠으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는 논증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의화론은 사실 진술부와 논증부를 이어 주는 교량의 역할을 한다.
논증부에서는 갈라디아 사람들의 경험에 호소함(3, 1-5), 아브라함의 의화 사건을 해석함(3, 6-14), 율법과 약속의 비교(3, 15-20), 율법의 시한부적 기능(3, 21-25)이 논술된다. 3장 26절부터 4장 7절까지는 지금까지의 논증 결론이다. 그것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수신인으로 하여 선언한 두 가지 복음적 선포이다. 첫째 선언(3, 26-29)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인종, 신분, 성별의 차별이 없이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이요, 둘째 선언(4, 1-7)은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자유를 누리는 성숙한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4장 8-31절은 결론을 방증하는 보충적 논증이다.
갈라디아서의 훈계부는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상황과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교훈만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과 갈라디아서의 논쟁의 주제와 관련시켜 윤리적 교훈을 제시한 것이 특징이다. 훈계부의 총주제인 자유인으로 살라는 부름(5, 1)은 논증부의 결론의 둘째 선언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할례 문제(5, 2-6), 갈라디아 교회의 사태(5, 7-10), 할례 문제(5, 11-12), 참된 자유(5, 13-15), 할례 문제(6, 11-16)에 대한 가르침에서 갈라디아서의 핵심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의의 및 영향〕 갈라디아서는 우선 역사적 기록 문서로서, 그리고 또한 신학적 증빙 자료로서 매우 귀중하다. 바오로의 생애에 관해서는 유대교 시절의 형태(1, 13-14), 다마스커스 사건과 그 직후의 활동(1, 15-17), 제1차 예루살렘 방문과 그 후의 선교 활동(1, 18-24), 갈라디아 지방에서의 선교 활동과 그 사정(4, 13-15), 그리고 원시 교회의 역사에 관해서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 및 예루살렘 교회의 역학 관계(2, 1-10), 안티오키아 사건(2, 11-14) 등등에 대한 기록은 귀중한 사료이다. 갈라디아서는 또한 신학적 문서로서 바오로가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이 무엇이며 그의 적대자들의 주장이 무엇이었는지를 증언한다. 흔히 바오로 신학의 핵심이라고 하는 의화론이 갈라디아서에서 처음 개진되었고(2, 15-21) 율법의 구원사적 기능에 대한 과감한 비판이 내려졌다(3, 1-25).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이다. 바오로가 일관되게 수호하려고 투쟁한 복음의 진리(2, 5. 14)는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2, 4 ; 4, 7-9. 22-31 ; 5, 1. 13)와 평등(3, 28)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장해 주는 담보이다(3, 1-5 5, 16-25 ; 6, 1. 8).
갈라디아서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어떠한 반응을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적 장벽을 넘어서 새로운 종교로서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 갈라디아서는 중요한 이론적 무기가 되었다. 2세기 초에 마르치온(Marcion)은 갈라디아서에서 그의 극단적인 반유대교 사상의 근거를 찾았다. 루터는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만"이라는 복음의 원리를 발견하였고, 그것이 그에게 종교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 참고문헌 H.D. Betz, Galatians. A Commentary on Paul's Letter to the Churches in Galatia, Hermeneia. A crit. and hist. Commentary on the Bible, Philadelphia, 1979/ E. de W. Burton,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alatians, 《ICC》/ H. Schlier, Der Brief an die Galater, Meyers Kommentar Ⅶ, Aufl.12, Göttingen, 1962/ Fr. Mußner, Der Galaterbrief, 《HThK》 91 D.B. Bronson, Paul, Galatians, and Jerusalem, 《JARR》/J. Eckert, Die urchritliche Verkündigung im Streit zwischen Paulus und seinen Gegnern nach dem Galaterbrief, Bibl. Unters. 6, Regensburg, 1971/ G. Howard, Paul : Crisis in Galatia, 《SNTSMS》 35/ R. Jewett, The Agitators and the Galatian Congregations, 《NTS》 17, pp. 198~212/ J.C. O'Neil, The Revovery of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London, 1972. 〔金昌洛〕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人 - 便紙
[라]Epistola ad Galatas · [영]Epistole to the Galat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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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의 제1차 선교 여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