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츨, 알브레히트 Ritschl, Albrecht(1822~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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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신학자. 1822년 3월 25일 베를린에서 프로이센의 연합 교회 감독의 아들로 태어나 1839년 본(Bonn)에서 니취(C. Nittsch)에게, 1841년 할레(Halle)에서는 톨룩(Tholuck)에게 사사(師事)하였다. 그 후 21세 되던 해인 1843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846년에는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아 곧 교수 자격 취득 논문 준비에 들어갔다.
그 사이 리츨은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에 머물면서 로테(R. Rothe)와 바우어(F. Chr. Baur)에 관심을 가졌다. 리츨은 1864년까지 본 대학에서 강사로 있은 후 괴팅겐(Götingen)으로 자리를 옮겨 1889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가르쳤다. 리츨은 보수적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성을 모든 유형의 경건주의를 대항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경건주의는 복면을 쓴 가톨리시즘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신앙 고백적인 보수주의자와 경건주의자들로부터 '신앙 고백으로부터의 타락' 이며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배반' -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리츨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3권으로 된 《의화와 화해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가르침》(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Rechtfertigung und Versöhnung, 1870~1874)이며, 리츨의 사유방식은 《그리스도교 종교 교육》(Unte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gion, 1875)에서 가장 쉽게 발견된다. 이 책은 고학년 학생을 가르치기 위한 90개의 짧은 단락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편람(便覽)으로서 그리스도교의 완전하고 총체적인 세계관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리츨의 제2의 주저는 3권으로 나온 《경건주의의 역사》(Geschichte des Pietismus, 1880~1886)이다.
〔사 상〕 리츨은 확실히 자유주의적이거나 더 나아가 혁명적인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보수적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세기 후반기의 서양 신학에 가장 강한 영향을 끼친 리출 학파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 학파는 철저히 자유주의적 사상을 대변한다.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신학자들, 즉 헤르만(W. Herrman), 하르낙(A. von Harnack), 카텐부쉬(F. Kattenbusch), 트뢸치(E. Troeltsch) 등은 예외 없이 거의 리츨의 추종자들이다.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 이후 리츨이 프로테스탄트 신학 사상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이론
(異論)의 여지가 없다. 이 영향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리츨 사상의 출발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교회적인 삶, 신앙 및 신학과 새롭게 대두된 세속적이고 자유로운 시민적 삶, 그리고 과학적 학문 사이의 간격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리츨은 인간이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전적인 현대인으로, 즉 현대화된 도시의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리츨의 동시대인이 그를 "신학과 교회의 비스마르크" 로 부른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리츨의 과제는 현대를 분명하게 긍정하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시민적 신학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그의 신학적 계획은 시민적 현대 사회의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새롭게 규정하는 일이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는 형이상학과 사변이라는 짐을 들어내야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형이상학과 사변으로부터 철저히 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비판적 환원 과정에서는 온갖 신비적 체험과 상징이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리츨은 종교의 본질을 단지 도덕성(Sittlichkeit)으로 정의하였다.
리츨은 칸트의 비판 철학으로부터 유래한 철저한 인간중심주의 신학의 대변자였다. 리츨 신학의 핵심은 도덕성의 본질로부터 신학을 갱신하는 일이다. 그에 따르면 신학은 전승된 온갖 교의주의를 비판하는 윤리이다. 리출에게 있어 새롭게 발견한 복음은 교의(doctrina)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도덕성이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본질은 신앙 고백이 아니라, 삶의 이상으로서의 살아 있는 도덕성이다. 리츨에게 지도적 이상은 일상의 생활(직업) 속에서 자신의 의무를이행하는 인간이다.
리츨 작품의 많은 부분은 교리사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데, 이 부분은 후에 교회사에서 하르낙, 제베르크(See- berg) , 루프스(Loofs), 홀(Holl), 히르쉬(Hisch) 등이 상당한 연구를 하였다. 현대의 교리사는 기본적으로 인간 중심적인 방향 설정에서 시작하였다. 교리사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발전 과정을 모사하는 일을 주 과제로 삼는다. 리츨은 이러한 노선을 가졌던 인물로서 헤겔이나 바우어처럼 주관적 가치 판단에 치중하지 않고 사실을 더 많이 설 명하려 했던 철저한 실증주의자이다. 이는 사변보다 경험을 중시하고 특수한 것으로부터 일반적인 것을 설명하려는 인식 방법이다. 리츨의 교리사적 연구는 다른 측면에서 신학 비판적 의도를 갖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교리가 표방하는 진리 내용이 방법론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철저히 상대화된다. 교리사는 모든 형태의 교리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 도구가 된다. 즉 그리스도교 교리가 역사적으로 제약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교 교리의 진리 요구가 깨어지며, 이 점에서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정당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리츨에게 있어서는 역사학이 교의학보다 우위에 있다. 그러므로 리츨의 신학을 환원주의 신학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다음의 글은 이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리스도교는 유일신론적 종교로서 완전히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종교이다. 이 종교는 예수의 구원적이며,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삶을 근거로 사랑으로 촉발된 행위를 포함하며, 인류의 도덕적 조직을 목표로 하는 하느님의 자녀 됨의 자유 안에 존재한다. 행복은 하느님의 자녀 됨과 하느님 나라에 있다"(《의화와 화해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가르침》 Ⅲ , p. 13).
이 정의는 슐라이어마허의 신앙론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리츨은 슐라이어마허를 넘어 '하느님의 나라' 사상이라는 새로운 강조점을 추가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도덕적 이상으로서 공동체 안에서 도덕성이 완전히 실현된 곳이다. 이 점에서 리츨의 종말론은 희박하다고 볼 수있고 하느님 나라는 지상에서 실현될 유토피아의 특징을 지닌다.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특징은 후에 리츨의 사위인 바이스(Johannes Weiß)에 의하여 새롭게 발견된다. 도덕화의 목적은 교회를 초월하여 궁극적으로 전인류를 보편적으로 정신화하는 데 있다. 하느님이 규정한 의지는 행동적 사랑으로서 지상의 하느님 나라에서 전세계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리츨의 하느님 나라 사상은 칸트의 윤리를 신학화하였으며 신약성서의 하느님 나라 개념을 재발견하는 데 기여하였다.
위의 인용문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점은 리츨이 그리스도론적으로 나자렛 예수의 인격에 철저히 정향되어 있다는 것이다. 리츨에게 예수는 그리스도교 종교의 창시자이다. 리츨은 모든 자연 신학을 거부하고 그 대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특수하고 실증적인 계시를 주장한다. 이 계시의 특수성은 그리스도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로이 올바르게 하였으며 하느님의 자녀 됨의 자유를 가능케 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적인 기능과 '직무' 는 한편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서 인식케하는 능력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나라를 인간의 도덕적 공동체로 정초하는 능력이다. 리츨은 예수의 인격과 역사(役事)를 이렇게 이해함으로써 신약성서에 나타난 모든 그리스도 존칭을 받아들이고 긍정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아버지로 고백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모든 삶의 정황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화와 화해가 리츨 신학의 내적인 두 축이 된다. 즉 리츨 신학은 죄의 왕국을 극복하여 사랑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지상적 실현을 목표로 한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신약성서의 묵시 문학적 측면은 사라지고 그 대신 전체 인류의 도덕적 조직이 중심에 들어선다.
〔평 가〕 리츨의 신학은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당신의 의무를 이행하시오" 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직업에 대한 의무는···충분한 사랑에 대한 의무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은 모든 교의학적 짐을 벗어 던지고 근대 시민 세계에 적합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러므로 사실상 한 그리스도인은 동시에 현대인일 뿐만 아니라, 현대인은 동시에 한 그리스도인이다. 리츨은 프로테스탄트 신학과 현대성 사이의 간격을 중재하는 데 성공하였다. 리츨은 칸트의 구분을 따라 자연 과학을 존재 판단의 영역에, 신학을 가치 판단의 영역에 배분하였다. 리츨은 루터의 종교 개혁을 세속화된 19세기의 맥락안에서 철저하게 해석하였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그의 이해는 제1차 세계대전까지 자유주의 신학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리츨의 신학 안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신조는 이미 빈약하고 무력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것은 간과한 채 신앙의 현대성만을 강조하였다. 19세기 후반기에 리츨이 이루어 놓은 위대한 의미는 20세기 초반기에 일어난 교회사적이며 신학사적 사건 뒤에서 빨리 잊혀지고 말았다. 리츨은 인간중심적인 도덕성의 신학의 대변자로서 제한된 기간 동안 영향을 끼쳤을 뿐이다.
※ 참고문헌  F.W. Kantzenbach, Programme der Theologie ; Denker, Schulen, Wirkungen von Schleiermacher bis Moltmann, Miinchen : Claudius, 1984, pp. 104~111/ Karl H. Neufeld, Klassiker der Theologie Ⅱ, Miinchen, C.H. Beck, 1983, pp. 208~220/ E. Schott, 《RGG》 5, pp. 1114~1117/ Wolfgang Trillhaas, Theologen des Protestantisemus im 19. und 20. Jahnhundert I, Stuttgart · Berlin · Köln · Mainz , W. Kohlhammer, 1978, pp. 113~129. 〔沈光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