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발, 조제프 Maraval, Joseph (1860~1916)

글자 크기
4
뮈텔 주교에게 수녀원 기초 공사가 진행 중임을 보고한 마라발 신부의 편지.

뮈텔 주교에게 수녀원 기초 공사가 진행 중임을 보고한 마라발 신부의 편지.

전(前)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요셉. 한국명 서약슬(徐若瑟). 장 밥티스트 마라발(J.B. Maraval) 신부의 형이다. 1860년 11월 21일 프랑스에서 태어나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으며, 1884년 11월 19일 사제 서품을 받고 곧바로 파리를 출발하여 이듬해 5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1885년 10월 28일 강원도 원주(原州) 부엉골(현 京畿道 驪州郡 康川面 釜萍里)에 예수성심신학교가 설립되자 그곳에 파견되어 신학교 및 부엉골 본당의 사목을 관할하였으며, 1887년 3월 신학교가 서울 용산(龍山)으로 이전된 뒤에도 교수로 활동하였다.
1890년 5월 원산(元山) 본당의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마라발 신부는 1891년 4월까지는 임시로 안변(安邊) 본당까지 담당하기도 하였는데, 재임 중 그의 동생 장 밥티스트 신부가 요양차 원산을 찾아왔으나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1890년 10월 24일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원산 · 안변뿐만 아니라 강원도 동북 지역의 간성(杆城), 양양(襄陽), 양구(楊口), 춘천(春川) 등과 경기도 가평(加平)의 여러 공소까지도 맡아 직접 방문하여 성사를 집행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전교 활동을 벌여 당시 그 지역의 교세가 크게 신장되었다. 한편 1890년 12월 말에는 안변 부사가 아전들을 보내 마라발 신부가 묵고 있던 집을 포위하고 난동을 부린 사건으로 곤란을 겪기도 하였는데, 이 사건은 천주교 신자이면서 안변의 이방(吏房)으로 있던 박 요한이 마라발 신부에게 비바람을 피하도록 빈방 하나를 내준 것이 빌미가 되었다. 마라발 신부는 즉시 사건의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여 서울에 보고하였고, 그 결과 교회측에서는 프랑스 공사를 통해 정식으로 정부에 안변 부사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어 마라발 신부는 사목 관할 지역의 신자들이 계속 증가하자 원산 시내에 성당을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뮈텔 주교의 허락을 받아 부지 매입을 준비하고 있던 중 그만 병에 걸려 1892년 홍콩 베타니아 요양소로 떠나야 했다. 병이 완쾌되어 1893년 3월 말 다시 한국에 입국한 마라발 신부는, 그 해 4월 22일 제물포(濟物浦, 현 답동) 본당의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나 그때 인천에서 발생한 장티푸스로 많은 노동자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죽어가자, 본당 내에 보호시설을 마련하여 환자들을 돌보았다. 이후 자신의 사목 활동을 도와 줄 수녀들의 필요성을 느낀 마라발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이를 보고하였고, 뮈텔 주교는 곧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본부에 도움을 요청하여 수녀회 총원장으로부터 수녀의 파견을 약속받았다. 이에 따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인천 분원 설립이 추진되어 7월 초에는 수녀원 건물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 수녀회 본부에서는 우선적으로 마리 클레망스(Marie Clémence Fontaine) 수녀와 엠마누엘(Emmanuel Lariviere) 수녀를 한국에 파견하였는데, 1894년 3월 29일 한국에 입국한 이들 수녀는 서울의 수녀회 본원에 약 5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분원 개설 준비와 한국어 공부에 전념하였다. 수녀원 설립 공사는 인부로 일하던 많은 중국인 및 일본인들이 청일(淸日) 전쟁의 발발로 본국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잠시 중단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1894년 8월에 3층으로 된 서양식 수녀원 건물이 완공되었고, 이어 8월 18일 두 명의 수녀가 서울을 출발하여 인천에 도착하였다.
마라발 신부는 제물포 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895년 1월 1일에는 일본인들로 부터 집단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이 확대되자 일본 영사로부터 난동 예방을 약속받고 경찰관 을 사제관 보초로 세우는 등 조치가 이루어졌고, 관련 일본인의 처벌이 이루어진 후 마무리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사목 담당 지역에 갑자기 콜레라가 발병하여 사망하는 신자가 생기자 그들에게 종부성사를 주었다. 한편 1894년에 시작되었던 성당 건축 공사는 청일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어 1895년 8월 11일 정초식을 거행하였으며, 이듬해 7월에는 종탑을, 10월에는 벽돌 공사를 각각 완공하고, 1897년 7월 4일에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제물포 본당에서 약 10년 동안 적극적인 사목 활동을 전개한 마라발 신부는, 그곳 수녀원에서 일어난 분규에 개입하여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이에 뮈텔 주교는 마라발 신부에게 지체없이 제물포를 떠나 당분간 홍콩 피정의 집에 머무를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주교의 지시를 무시하고 제물포 체류를 주장하자 결국 1904년 4월 29일, 뮈텔 주교는 그에게 성무(聖務) 집행 정지 처분을 통보하였다. 이 처분에 불복한 마라발 신부는 같은 해 5월 1일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정식으로 탈회하고, 이후 영종도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주장을 계속 고집하였다.
1911년 7월에는 대구 대목구장인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를 방문하여 몇 달 동안 그곳에 체류하면서 그와의 면담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어느 정도 시인하기도 하였으나, 결국에는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다시 인천으로 돌아갔다. '제물포 사건' 으로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던 마라발 신부는 심신이 매우 허약해져 1915년 7월에는 탈장(脫腸) 수술을 받았으며, 음낭수종(陰囊水腫)으로도 고통을 받았다. 결국 계속 건강이 악화되어 그 해 7월 26일 병자성사를 받았는데, 회복하지 못한 채 1916년 1월 13일 영종도의 주다리에서 사망하였다. (→ 답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舊韓國外交文書》 法案 1, 제345호 (高宗 27年 6月 28日條), 高麗大 亞細亞問題研究所/ 천주교 인천교구, 《인천교구의 전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천주교 인천교구 답동 교회, 《답동 대성당 100년사》, 1989/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편찬위원회, 편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100년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