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렐라, 파올로 Marella, Paolo( 189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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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렐라 대주교.

마렐라 대주교.

이탈리아 추기경. 신학 · 교회법 박사. 1895년 1월 25일 로마에서 태어나 1918년 2월 23일 사제로 서품된 후, 잠시 동안 본당에서 사목 활동을 하다가 1921년에 교황청 포교성성의 편집인으로 임명되었으며, 1923년부터는 미국 교황 대사관의 심의관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7월 15일 도클레아(Doolea)의 명의 대주교로 임명되어 그 해 8월 29일 대주교로 서품받았고, 10월 30일에 일본의 교황 사절로 임명되었다. 그가 일본에 부임할 당시에는 나가사키(長崎) 교구에만 일본인 주교가 1명 있었으나, 얼마 뒤에는 도쿄(東京)와 오사카(大阪), 센다이(仙臺) 교
구장으로 일본인이 임명되었다.
그가 일본의 교황 사절로 부임한 1930년대는 전시 체제가 시작되고 일본 정부가 전시 총동원 체제의 일환으로 신사 참배(神社參拜)를 요구함으로써 갈등이 야기된 상태였다. 이에 마렐라 대주교는 신도(神道) 의식 문제로 인해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이 불안정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으며, 교회의 직무에도 중요한 장애가 생겼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정부 당국은 신사 참배가 단순히 애국적 · 시민적 의례라고 선언하였으나, 실제로 거행되는 의식은 종교적 성격이 강하기에 그러한 형식이 제거되지 않는 한 천주교 신자들은 신사 참배를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한국에서는 《천주교 요리》(天主教要理, 1925)와 《서울교구 지도서》(Directorium Missionis de Seoul, 1923), 《한국 교회 공동 지도서》(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 1931)를 통해 신사 참배는 제1 계명을 어기는 명백한 이단(異端)이라 가르치며 금지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천주교회에서는 신사 참배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고, 1932년 일본 문부 대신(文部大臣)의 신사 참배는 애국심과 충성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회답을 받고 신자들에게 이를 허락하였다. 일본 주교들의 이러한 결정으로 마렐라 대주교는 1935년 5월 8일 포교성성에 보낸 보고문에서 신도 의식을 용인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의견을 근거로 로마 교황청은 1936년 5월 18일 천주교 신자들이 신사에 참배해도 좋다는 훈령 <플루리에스 인스탄테르궤>(Pluniss Instanterque)를 내렸다. 이 훈령은 5월 25일 교황 비오 11세의 추인을 거쳐 주일 로마 사절이었던 마렐라 대주교에게 통보되었는데, 그는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소위 <국체 명징(國體明徵)에 관한 교황 사절의 감상(感想)>을 통해 교황청의 결정을 통고하였다. 나아가 교구장들은 신사 참배에 참여하라고 신자들을 가르치고, 신도 의식으로 행하여지는 장례식이나 결혼식도 허용한다는 교회의 결정을 전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신사에 참배하도록 권고하였다. 결국 마렐라 대주교의 친일적인 행위로 인해 한국 교회 역시 친일 행각을 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후 마렐라 대주교는 1948~1953년 오스트레일리아의 교황 대사를 역임하였으며, 1953년에 프랑스 주재 교황 대사였던 론칼리(Roncalli) 추기경이 베네치아의 총 대주교로 임명되어 이임하자, 교황 비오 12세(1939~ 1958)에 의해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그 해에 프랑스로 부임한 마렐라는 임기 동안 특히 노동자 담당 사제 문제 와 같은 해결하기에 매우 민감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노동자 담당사제들 가운데 일부는 현장 체험을 통해 활발한 정치 활동을 하고 있었고, 노동자들과 함께 주택 · 반인종주의 · 평화 문제에 관련된 시위에 참여하고 있었다. 교황 비오 12세가 노동자 담당 사제의 활동을 중단시키기로 결정하자 마렐라 대주교는 부임한 지 얼마 안된 1953년 9월 23일, 프랑스의 주교 26명과 수도회 장상들을 파리로 소환하여 교황의 결정을 통보하였다. 결국 이 문제는 프랑스 내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1965년에 가서야 일부 허용되었다.
1959년 12월 14일 교황 요한 23세(1958~1963)에 의해 산트 안드레아 델레 프라테(Sant' Andrea delle Fratte) 본당 명의 추기경으로 서임된 후 그는 교황청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즉 1961년에는 주교회의와 교황청의 사무총장(secretarius)으로 임명되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준비하였고, 바티칸 대성전의 대사제(Archipresbyter)와 성 베드로 재산 관리성성(Sacrée Con-grégation de la Révérende Fabrique de S.-Pieme)의 장관을 역임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 중인 1963년 11월 5일에는 주교와 교구청에 대한 초안을 발표하였다. 또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는 자신이 만든 비그리스도교인 사무국(Sacretariatus pro non Christianis)의 의장으로 마렐라 추기경을 임명하였고, 1964년 5월에는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 성당의 800주년을 위한 행사의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으며, 1965년 9월 15일에 발표된 바오로 6세 교황의 자의 교서 <아포스톨리카 솔리치투도>(Apos-tolica Sollicitudo)에 언급된 주교 대의원 회의(Synodus Episcoporum) 신설과 교황청 기구의 개편에 대해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에게 설명하기도 하였다. 1967년 10월 16일 개최된 주교 대의원 회의에서는 혼종혼(混宗婚,matrimonia mixta)에 관련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신앙 교리성과 교황청 교회법 개정위원회의 일원이 된 그는, 1972년 3월 14일 로마 근교에 있는 포르토 에 산타 루피나(Porto e Santa Rufina) 교구 명의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바티칸 대성전의 대사제 추기경인 동시에 교황청 대학인 크로아토 디 산타 지롤라모(Croata di S. Girolamo)의 학장을 역임하였다. (→ 신사 참배 ; 일본)
※ 참고문헌  G.H. Baudry, 《Cath》 8, p. 433/ 최석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1983 Ammuario Pontificiol P. Marella, <국체 명징에 관한 교황 사절의 감상>, 《경향잡지》 848호 (1937. 2. 25), pp. 97~101.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