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멜 활동 수녀회 중의 하나. 정식 명칭은 '전교 가르멜 수녀회' . 1860년 스페인 '맨발의 가르멜회' 회원이던 복자 팔라우(Fracisco Palau) 신부에 의해 바르셀로나에서 창설되었다. 이에 앞서 그는 1835년의 내란 때 가르멜 수도원이 파괴되면서 혁명군에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프랑스로 건너가 은수 생활과 가르멜의 성소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공동체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반대로 1851년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바르셀로나에서 신학생들을 지도하게 되었다. 이때그는 절대주의와 자유주의가 남긴 도시의 문제점들에 접하고, 우선 종교적 쇄신을 위한 교리 교육에 힘쓰던 중 신학교가 폐쇄됨과 동시에 이비사 섬으로 추방되었다. 여기에서 팔라우 신부는 6년 간을 생활하면서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Elijah)를 수도원 밖의 생활에 대한 모범으로 삼고 관상과 사목 활동이라는 두 가지 뜻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그리고 가르멜회의 재건이 여의치 않자 자신을 따르는 젊은이들과 함께 교회와의 끊임없는 영적 교류 및 기도, 사목 활동을 생활 목표로 삼고 '전교 가르멜수녀회' 를 창설하였다. 이 회는 그 후 1907년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교황청 설립 수도회이자 단순 서원 수녀회로 인준을 받았다.
〔한국 진출〕 전교 가르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게 된 동기는, 1975년 가르멜회의 아데오다토(Micalllef Adeodato) 신부가 한국에 진출해 있던 '맨발의 가르멜 남자 수도회' 의 인천 수도원 축성식에 참석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 여자 수녀회를 한국에 진출시켜야겠다고 생각한 아데오다토 신부는 귀국 후 로마에 있던 동 수녀회의 총장 수녀를 통해 필리핀 관구장에게 한국 진출을 제의하여 승낙을 얻어냈다. 한편 인천 수도원에 있던 귀초(Joachim Guizzzo) 신부도 이 무렵 같은 의견을 필리핀 관구장에게 제시했었다. 이러한 의견이 한국 교회에 제시되자 1977년 6월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은 동 수녀회의 한국 진출을 허락하였으며, 그 결과 8월 21일에는 필리핀 관구에 있던 비달트(Isabel Vidart) 수녀와 하바사(Genevieve Jabaca) 수녀가 한국에 입국하였다.
처음 한국에 온 두 수녀는 서울 수유리의 가르멜 수녀회에서 임시로 머물다가 같은 해 9월 6일 서울 신문로에 있는 한 가정집으로 옮겨 독립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0월 18일 이탈리아 로마 본원에서 파견된 바케다노(Amparo Baquedano) 수녀를 맞이한 뒤 본격적으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수녀원은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하다가 1990년 현재의 본원이 있는 사직동에 정착하 게 되었다. 한편 수녀회에서는 1980년 11월 등촌동으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지원자 모집을 시작하였는데, 당시에는 수련소가 없었으므로 필리핀에 가서 수련을 받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다가 1979년 인천 계산동에 수련원 부지를 매입하고 1983년에 이를 완공함으로써 한국 땅 안에서 수련자를 양성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90년 1월 첫 종신 서원자를 배출한 이후 계속 회원이 증가하여 현재 종신 서원자 11명, 유기 서원자 17명 등이 활동하고 있다. (→ 가르멜 수도회)
※ 참고문헌 백인덕,〈전교 가르멜 수녀회>,《교회와 역사》 제218 호(1993. 7), 한국교회사연구소, pp. 16~19 ; 제219호(1993. 8), pp. 20~22. 〔車基眞〕
가르멜 전교 수녀회
傳敎修女會
〔영〕Carmelite Mission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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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인천 계산동 소재 전교 가르멜 수도회 수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