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의 복음서 - 福音書

〔라〕Evangelium secundum Marcum · 〔영〕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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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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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사가.

70년 초 마르코에 의해 쓰여졌다고 여겨지는 복음서. 네 복음서 중 제일 먼저 쓰여졌다.
I . 저자 및 기록 연대와 장소
[저 자] 바오로의 서간들에는 저자의 이름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으나(로마 1, 1 ; 1고린 1, 1-2 ; 2고린 1, 1 등) 네 복음서는 익명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서의 저자가 원래부터 누구였는지 전혀 몰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마도 저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보다 복음서의 내용과 그 특성(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문학적인 창작물이 아니라 전승되어 온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보도한 기록물)을 더욱 중요시하였을 것이고, 또한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익명으로 복음서를 엮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는 당시 두루 알려진 인물로서 그 권위가 인정되어 구태여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2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복음서의 저자를 밝혀 내야만 했다. 그 이유는 여러 복음서들 가운데 진위를 가려내어 가짜 복음서들을 배격하고 진짜 복음서들을 옹호해야만 하였고, 또한 진짜 복음서들도 서로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저자를 마르코라 여기고서 이른바 마르코의 복음서(원문에 따르면, 마르코에 의한 복음서)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초대 교부들 가운데 소아시아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60/70-120/130)는 베드로의 통역을 맡았던 마르코가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베드로의 증언과 가르침을 기록하였다고 115년경에 처음으로 밝혔다. 평소에 요한 원로로부터 개인적으로 전해 들어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한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마르코는 예수의 제자나 목격 증인이 아니었고 베드로의 통역이었는
데, 베드로로부터 들은 예수의 말씀과 행적들을 순서대로는 아니지만 기억나는 대로 충실히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삭제하거나 삽입하지도 않았다' 는 것이다(에우세비오, 《교회사》 Ⅲ, 39, 7. 14-15. 17). 사실상 그의 증언 내용에는 마르코 복음서에 대한 사도 전승적인 권위를 옹호하거나 변호하려는 경향이 다분히 담겨져 있다. 그러나 이레네오, 테르툴리아노, 유스티노,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와 같은 교부들은 파피아스의 증언을 받아들였고, 그 증언 내용이 교회 전통이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교부들의 증언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르코 복음서가 사도 베드로의 증언을 기반으로 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인정한 점이다. 왜냐하면 마르코 복음서의 사도 전승적인 권위가 이미 초대 교회에서부터 인정되어 재천명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르코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레네오와 오리제네스는 베드로 자신이 '아들' 로 여기는 마르코(1베드 5, 13)와 동일 인물로 여겼다(《교회사) V,8, 1-3 ;Ⅵ, 25, 5). 또한 사도 행전에 언급된 마르르코라는 별명을 가진 요한' (12, 12. 25 ; 15, 37)이 바로 그 인물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사도 행전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때로는 요한(13, 5. 13), 때로는 마르코(15, 39)라고 별도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서로 다른 인물을 가리킨다고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요한은 이스라엘식 이름이고, 마르코는 로마-그리스식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도 바오로의 경우와도 같은데, 사울은 이스라엘식 이름이고, 바오로는 로마-그리스식 이름이다.
마르코라는 인물 : 마르코는 마리아라고 하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예루살렘에서 살았는데, 그의 집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서 집회를 가졌던 곳이고, 투옥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풀려 나온 베드로가 찾아간 곳이기도 하다(사도 12, 6-17). 이렇게 볼 때, 마르코는 일찍부터 사도들과 깊고 친밀한 접촉을 가졌던 자임에 틀림없다. 그는 또한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제1차 선교 여행(45~49)을 할 때,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를 거쳐 키프로스 섬까지 동행하기도 하였다(사도 12, 24-13, 12). 그는 바르나바와 사촌간이었는데(골로 4, 10), 바르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크게 존경받던 인물이요, 사도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자였다(사도 11, 22-26). 마르코는 선교 여행 중 힘이 들고 모험이 두려워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버렸다(사도 13, 13). 이처럼 복음 선포에 부진해 보이는 마르코의 태도는 지칠 줄 모르고 선교 여행을 하며 오로지 복음 선포에만 전념한 바오로에게 매우 언짢게 여겨졌다. 이 일은 제2차 선교 여행(50~52)을 준비하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의견 충돌을 일으켜 서로 헤어지는 빌미가 되었는데, 바르나바가 다시 마르코를 동반시키려 하였을 때, 바오로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르나바가 마르 코를 데리고 키프로스 섬으로 떠났고, 바오로는 실라를 데리고 소아시아로 떠났다(사도 15, 36-41). 이와 같은 사건이 있은 뒤 마르코는 사도직의 책임을 통감하고서 뒷날 다시 바오로의 측근이 되어 신임을 얻게 되었다.
제3차 선교 여행(53~58) 중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투옥생활을 할 때 마르코는 바오로 곁에 있었다(필레 1, 24 ; 골로 4, 10). 그는 바오로를 많이 도와 준 자로서 바오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정도의 인물이었던 것 같다.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그대는 마르코를 데리고 함께 오시오. 그는 봉사하는 일에서 내게는 귀한 사람입니다" (2디모 4, 11)라고까지 부탁한 적이 있었다. 또한 베드로도 마르코를 자신의 '아들' 로 여겼다(1베드 5, 13). 아마 베드로는 친히 마르코에게 세례를 주고, 신앙적으로 가르치며 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코가 베드로의 통역을 맡았다고 전하는 교부들의 증언은 신빙성이 많은 편이다.
복음서 저작의 진위 : 이렇게 볼 때 마르코는 바오로와 베드로의 측근에서 상당히 신임을 받으며 복음 선포에 전념하였을 것이고, 두 사도들로부터 보고 들은 내용을 토대로 하여 복음서를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코의 복음서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놀랍게도 바오로가 즐겨 쓰던 낱말이나 용어, 바오로 특유의 소재나 사상등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서의 치유 이적 사화나 구마 이적 사화, 논쟁 사화나 대담(對談) 사화는 그리스 사화 양식에 따라 엮어진 것이고, 이는 오랜전승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마르코의 복음서에 수록된 예수의 말씀도 50~60년대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예수 어록》에 비해 상당히 변질되었고, 특히 빵의 기적 사화는 약간 내용을 달리 한 채두 번이나 보도된다(6, 35-44 ; 8, 1-10). 사실상 마르코 복음서는 다양한 계층의 전승 자료들로 엮어져 있다. 따라서 목격자 베드로가 전한 이야기로 엮어진 복음서라고 보기는 매우 어렵고, 또한 베드로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1, 36 ; 5, 37 ; 8, 29 ; 9, 2 ; 11, 21 : 13, 3 : 14, 33 ;16, 7)이나 부정적인 언급(8, 33 ; 9, 5 ; 14, 30-31. 66-68)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는 바오로나 베드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은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바오로의 협조자요 베드로의 통역을 맡았던 마르코가 이른바 마르코 복음서를 기록하였다고 말할 수가 없다. 서명에 따라 저자를 마르코로 볼 경우 동명 이인(同名異人) 즉 마르코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아무튼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도
히브리어와 아람어 및 유대인들의 풍습을 잘 알고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우선 유대계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팔레스티나 지리에는 약간 어둡고(5, 1 ; 7, 31 ; 10, 1), 이에 반해서 이방인의 풍습을 잘 알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로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해외에 거주한 자로 여길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인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온 인류의 구원에 대한 관심 (11, 7 ; 13, 10 : 14, 9) 및 유대인들보다는 오히려 이방인들이 받게 될 복음의 축복(12, 9), 그리고 시로페니키아 부인(7, 28)과 로마 백부장(15, 39)을 신앙인들의 귀감으로 내세우는 것도 그 맥락을 같이한다. 이렇게 볼 때,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는 교회 전통상 마르코라고 말할 뿐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이었고, 사도들의 증언 내용을 몸소 두루 익힌 자로서 복음 선포에 전념한 자였다는 사실이다.
〔기록 연대와 장소〕 기록 연대는 일반적으로 마르코 복음 13장의 내용 해설에 따라 달리 말해지고 있다. 특히 13장 2절과 14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 도시가 커다란 재난을 겪게 되리라는 예수의 말씀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 말씀은 앞으로 닥칠 엄청난 비극을 미리 알리는 예언의 말씀이냐, 아니면 이미 이루어진 그 엄청난 재난을 예언 형식으로 서술한 보도(vaticinia ex eventu)냐에 따라서 기록 연대가 달라진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민족 독립 전쟁(66~70)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70년에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이 초토화되었다. 따라서 예언의 말씀으로 본다면 이 복음서는 70년 이전에 기록되었을 것이고, 다만 예언 형식으로 서술한 보도로 여긴다면 70년 이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 13장과 병행하는 마태오 복음 24장과 루가 복음 21장의 내용은 마르코 복음서와는 달리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기록되었음을 좀더 분명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서는 70년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에 반해서 70년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마르코 복음 13장의 내용은 묵시 문학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서려 있는데, 그것은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이 초토화된 이후에 유대교 내부에서 고조된 그 분위기를 오히려 잘 반영해 주고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마르코 복음서의 기록 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서로 맞서고 있다. 그러나 13장 2절과 14절의 말은 전승된 예수의 말씀으로서 마르코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 기억되어 비로소 확고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으로 볼 수
있다(마르 12, 9 ; 15, 38). 그렇다면 기록 연대는 오히려 70년 이후가 된다. 즉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이 파괴된 직후인 70년 초로 기록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겠다.
마르코 복음서의 기록 장소도 사실상 분명하지는 않지만, 파피아스(《교회사》 Ⅲ, 39, 17)나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가 언급한 내용(《교회사》 VI, 14, 6 ; 15, 1-2)에 따라서 전통상 로마로 추정되고 있다. 이 견해는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가 베드로나 바오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마르코라고 여기는 입장의 설명이다. 그러나 작자 미상이라고 내세우는 학자들은 기록 장소를 안티오키아 내지는 시리아, 데카폴리스, 갈릴래아, 소아시아 또는 그리스 등으로 제시하거나 자세한 기록 장소의 언급을 포기한다. 하지만 교회 전통에 따라 로마를 꼽는 학자들은 로마식 내지는 라틴어적인 표현(4, 21 ; 5, 9. 15 ; 6, 27. 37 ;7, 3. 4 ; 12, 42 ; 15, 15. 16. 39. 44-45)을 그 증거로 내세운다. 이 가설 역시 반박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우선 그런 표현들이 당시 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은 군사적 용어 또는 화폐 단위 명칭에 불과하고 로마 도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56년경에 기록된 로마서에서 시사된 로마 공동체의 문제점들이 마르코의 복음서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튼 마르코 복음서의 보도 내용에 따라서 분명히 밝힐 수 있는 것은 기록 장소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점뿐이다. 아람어나 히브리어의 표현들은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언급하고(3, 17 ; 5, 41 ; 7. 11. 34 ; 9, 43; 14, 36 ; 15, 22. 34), 유대인들의 관례 내지는 규정을 풀이하며(7, 3-4; 14, 12 ; 15, 42), 이방인들의 생활상을 참작하여 보도하기 때문이다(6, 48 ; 10, 12 ; 12, 42 ; 13, 35).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리 보도가 정확하지 않고(5, 1 ; 7, 31 ; 10, 1), 이스라엘보다는 이방인들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크며(7, 24-30 ; 12, 9 ; 15,39), 온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구원관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11, 7 ; 13, 10 ; 14, 9). 구태여 그럴듯한 장소 하나를 선정하여 기록 장소로 내세워 고집할 필요는 없겠지만, 로마에 대한 가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설을 지지할 근거는 매우 희박하고 반대할 근거 역시 충분하기에 명확한 것은 아니다. 어떤 불확실한 가설이나 편견적 · 인위적인 사변보다는 다만 전통을 더 신뢰하는 차원에 한해서 받아들일 따름이다.
II . 대상과 목적
대상 및 공동체 : 마르코 복음서가 이방인계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집필된 것은 명백하다. 앞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아람어나 히브리어를 수록한 경우에는 거의 언제나 그리스어로 번역하였고, 이방인들에게는 생소한 유대인들의 관습이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방인들의 생활상이 참작 · 고려되었고 이방인 부인과 백부장을 신앙인들의 귀감으로 내세워 보도하기 때문이다. 특히 율법은 유대인들의 율법관을 벗어나 윤리적인 차원에서 언급되어 있다(10, 1-12. 17-27 ; 12, 28-34). 문맥상 이방인들을 상대로 펼친 예수의 복음 선포나 활동상도 돋보이고(5, 1-20 ; 7, 24-30. 31-37), 이중적으로 보도되는 빵의 기적 사화도 하나는 유대인들을 상대로(6, 30-44),다른 하나는 이방인들을 상대로(8, 1-10) 서술 묘사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구세사적인 구원의 특권 이 이방인들에게 넘겨지고(12, 9), 유대 민족주의적인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온 인류의 구원관이 제시되고 있다(13, 10 ; 14, 9).
물론 당시 마르코의 공동체는 이방인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7장). 이방인과 유대인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와 그 생활상이 소개되어 있는데(2, 15-16. 19-20. 23-28 ; 3, 1-6 ; 7, 18-23. 24-30), 이 공동체에는 첨예한 윤리적인 대립은 없었을 듯하다. 다만 윤리적인 가르침이 실생활에 있어서 훈시되었을 따름이다(10, 1-45 ; 12,
13-17). 당면 문제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워 속이거나 그리스도 재림의 때와 장소를 유포시키는 자들이었다(13, 6. 21). 복음사가는 이들을 거짓 그리스도인들, 거짓 예언자들로 부르며(13, 22), 그들에게 속아넘어가지 않도록 경고하고 당부한다(13, 5-6. 21. 23). 그리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관청으로부터 받게 될 박해에 관한 언급(13, 9. 13)은 당시 주변 세계와의 충돌을 암시한 내용이다. 환난과 박해에 관한 언급(4, 17 ; 10, 30 ; 13,19)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에 겪게 될 수난 자세에 관한 언급이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8, 34-38).
목적 및 의도 : 마르코 복음서에는 저자의 기록 목적 및 의도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사가는 복음서 첫머리에서 예수는 그리스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라고 언급한다. 즉 나자렛 출신 예수를 약속된 메시아, 곧 부활한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서 사
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가리켜 '복음' (εὐαγγέλιον)이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선포된 복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하며, 말하고 행동한다는 사실을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해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마르코 복음사가도 요한 복음사가와 동일한 기록 목적 및 의도(요한 20, 31)를 가졌으리라 여겨진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에 관한 역사적인 어떤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 예수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동시에 그 믿음을 강화시켜 더욱 올바르게 키워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서를 집필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믿음과 추종에 반해서, 배척과 거부에 관한 내용이 마치 어느 한 기자가 예수를 따라다니며 기록한 것처럼 아주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거나 거부하는 자에게는 메시아로서의 예수의 모습이 감추어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에서 추종하는 자에게는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는 신비를 깨닫도록 일관성 있게 이끌어 나가는 것이 마르코 복음서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Ⅲ . 전개 과정 및 전체적인 윤곽
마르코 복음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 1)란 말로 시작된다. 즉 예수가 누구라는 사실을 맨 먼저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아들' 과 그리스도' 라는 말은 예수의 정체와 사명을 설명해 주고 요약해 주는 신앙 고백적인 칭호들이다. 이 두 개의 칭호는 사실상 매우 중요한 사건 때마다 언급된다. 갈릴래아 지방 안팎에 서 두루 활동을 펼친 예수는 군중들의 반응이 어떠한지를 제자들을 통해서 알아본 다음에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하겠습니까?"라고 제자들에게 묻자, 베드로는 서슴없이 "그리스도" 라고 고백한다(8, 27-29).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세 번에 걸쳐 예고함으로써(8, 31 ; 9, 31 ; 10, 33-34) 제자들로 하여금 어떤 착각이나 오해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친다. 예수는 또한 세례(1, 11)와 영광스런 변모 사건(9, 7) 때에 하느님으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이란 말을 듣게 된다. 뿐만 아니라 악령들의 입을 통해서도 '하
느님의 아들' (3, 11 : 5, 7)이라는 칭호가 발설되며, 예수를 죽이려는 대제관도 이 두 개의 칭호를 확인해 본다(14, 61). 그리고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의식한 자로 소개되어 있다(12, 6 ; 13, 32). 아무튼 이 두 개의 칭호는 유대 최고 의회에서 예수 자신으로부터 결정적으로 인정된다(14, 62). 그리고 십자가 곁에서 예수의 죽음을 지켜본 백인대장은 그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예 수를 '하느님의 아들' 로 고백한다(15, 39). 또한 예수의 부활 사건은 예수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시켜 준다(16, 6).
예수의 정체와 사명을 설명해 주는 이 두 개의 칭호 외에도 예수는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아주 '놀라운 인물' (1, 22. 27 ; 4, 41 ; 6, 2)로서, '예언자' (6, 15 ; 8,28)로서 소개된다. 특히 '사람의 아들' 이란 칭호는 예수가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 언급되는데, 지상에서 활동하는 자로서(2, 10. 28), 수난하고 부활할 자로서(8, 31 ; 9, 9. 12. 31 ; 10, 33. 45 ; 14, 21. 41) 그리고 재림할 자로서(8, 38 ; 13, 26 ; 14, 62) 예수의 정체가 시사된다.
이와 같이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는 도대체 누구인가? (4, 41 ; 11, 28)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하면서 복음서를 엮어 나간다. 그 전개 과정에서 특징적인 것은 예수의 정체가 드러날 때마다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예수의 함구령이 내려지는 점이다(1, 24-25. 34. 44 ; 3, 12 ; 5, 43 ; 7, 36 : 8, 30 : 9, 9). 즉 예수가 수난을 거쳐 십자가에 죽기 전까지는 그리스도로서의, 그리고 하 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정체가 비밀로 되어 있는 것이다(9, 9). 한마디로 하느님의 아들과 그리스도에 관한 인간적인 생각을 예수에게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신학적인 의미를 시사해 준다(8, 30-33). 달리 말하자면 역사상 예수의 인품과 업적을 올바로 알아듣기 위해서 예수의 십자가 상 죽음으로 시선을 쏟도록 해준다. 이런 맥락 속에서 예수의 지상적인 삶 내지는 예수의 역사적인 사건 의 윤곽(공생활-수난과 죽음-부활)이 일관성 있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 내지는 증언과 복음의 의미와 내용이 그 기조를 이루고 있다.
Ⅳ . 복음서의 구조
세례자 요한의 활동부터 예수의 부활까지 보도한 마르코 복음서의 구조를 일목 요연하게 명시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 이유는 우선 마르코 복음사가 자신이 오늘날의 작가들처럼 의도적으로 어떤 규정된 틀에 맞추어서 복음서를 집필하였는지가 의문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에 대해서 확증할 수는 없다. 그리고 복음서의 구조를 가름할 수 있는 하나의 정확하고 분명하고 확신할 만한 척도 기준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사가의 기록 내지는 편집 의도(집필 목적과 신학 사상 반영)를 전제로 하고서, 복음서의 본문이 여러 가지 관점(장소 내지는 지리적인 보도, 사건 연대순 보도, 주요 내용 및 신학 사상적인 맥락, 유형 내지는 예표론적인 보도, 전례력에 따른 보도, 구절의 양적인 배분, 고대 드라마적인 모델 내지는 수사학적인 표현 등) 아래 분석 종합되었던것이다. 그 결과 마르코 복음서는 크게 두 부분에서부터 작게는 일곱 부분으로까지 나누어진 구조로 설명되고 있다. 그 가운데 무리 없는 가설로 평가되는 것은 예수의 활동 영역과 더불어 그리스도적인 관점에 따라 분석 종합된 구조라 할 수 있다. 즉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구조인데, 제1부는 갈릴래아 지방 안팎에서 군중(유대인과 이방인)을 상대로 펼친 예수의 복음 선포 활동이요, 제2부는 예루살렘으로 향한 여정 가운데 제자들에게만 드러낸 예수의 정체 및 운명과 추종에 관한 내용이며, 제3부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예수와 유대 지도자들의 논쟁 및 충돌과 예수의 종말 담화 그리고 예수의 수난, 죽음, 부활 사건에 관한 보도 내용이다. 그러나 각 단락을 좀더 세분화시키려 할때, 제1부의 세부적인 구분과 그 설명은 관점에 따라 달리 언급된다. 제2부와 제3부에 비해서 보도 내용들이 서로 얽혀져 그 맥락을 명확하게 가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약간 인위적인 면이 없지는 않지만, 필자의 견해에 따라 마르코 복음서의 전체적인 구조를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1부 : 갈릴래아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군중에게 펼친 예수의 복음 선포 활동(1, 1-8, 26).
① 1, 1-3, 6 : 권위를 지닌 예수의 활동과 충돌(예수를 중심으로 한 세례자 요한의 활동, 예수의 복음 선포 내용, 제자들의 소명 사화, 권위 있는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 행위, 논쟁 사화) .
② 3, 7-6, 6a : 예수의 가르침, 비유 이야기와 기적 행위(예수의 활동 요약, 열두 제자 선택, 친척들의 오해와 율법학자들의 배척, 비유 이야기, 기적 사화, 고향 사람들의 거부).
③ 6, 6b-8, 26 : 특히 이방인들을 상대로 펼친 예수의 활동(열두 제자 파견과 귀환, 기적 사화, 유대인들의 전통 비판, 이방인들의 치유, 바리사이인들의 표징 요구, 제자들의 몰이해, 소경 치유).
제2부 : 예루살렘으로의 여정 가운데 제자들을 가르친 예수(8, 27-10, 52).
① 8, 27-9, 29 : 예수의 정체와 운명(베드로의 신앙고백, 수난 예고, 영광스런 변모, 제자들 특수 교육, 기적 사화).
② 9, 30-10, 31 : 예수의 말씀 및 가르침과 대담(수난 예고, 제자들 특수 교육, 대담).
③ 10, 32-52 :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수난 예고, 제자들 특수 교육, 소경 치유)
제3부 :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예수와 유대 지도자들의 논쟁 및 예수의 사건들(11, 1-16, 8).
① 11, 1-12, 44 : 메시아로서의 예수와 충돌 및 논쟁(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권위를 지닌 예수의 행동, 논쟁 사화 및 가르침).
② 13, 1-37 : 종말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성전 파괴 예고, 재난 및 환난, 종말).
③ 14, 1-16, 8 : 예수의 수난, 죽음, 부활 사화(예수를 죽일 음모, 제자들 배신 예고, 최후 만찬, 체포 및 심문, 수난 및 죽음, 빈 무덤).
※ 추가로 삽입된 부분(16, 9-20) : 부활한 예수의 발현과 제자들의 파견.
위의 도식에서 볼 수 있듯이 각 단락별 특징적인 점들은 비교 언급할 만하다. 우선 예수의 활동 지역이 제1부에서는 갈릴래아 지방 안팎(특히 갈릴래아 호수)이고, 제2부에서는 갈릴래아 지방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8, 27 ; 10, 52)이며 제3부에서는 예루살렘(특히 성전)이다. 그리고 예수가 주로 상대한 사람들은 제1부에서는 민중들(유대인과 이방인들), 제2부에서는 제자들, 제3부에서는 유대 지도자들이다. 또한 서술 보도된 주요 내용들을 보면, 제1부에서는 예수의 복음 선포적인 활동(특히 기적 행위와 가르침)과 숨겨진 예수의 정체요, 제2부에서는 예수의 자기 계시 및 운명 예고와 제자들의 특수 교육이며 제3부에서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이 이루어짐으로써 예수의 정체가 밝혀지게 된다. 각 단락의 구조도 동일하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 부분에서는 예수의 정체와 운명에 관련된 내용이요, 둘째 부분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이나 말씀들이며, 셋째 부분에서는 예수의 활동 향방(向方)에 관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각 단락마다 예수의 인격(정체와 사명)으로 시작하여 예수의 가르침과 말씀이 보도되고 예수의 활동 목적과 그 운명으로 끝을 맺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제2부는 구조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중심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정체가 특히 제자들에게만 드러나고 동시에 세 번에 걸쳐 예수의 운명이 예고되면서 십자가의 길을 걷는 예수를 추종하도록 강조되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8, 34-38). 그리고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만 언급된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의미로서 언급된 것이다. 즉 갈릴래아는 예수 의 복음 선포적인 활동의 장소요, 예루살렘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이루어진 장소이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의 갈릴래아 활동은 운명의 예루살렘으로 향해져 있고, 예루살렘은 예수가 지상에서 걷는 '길' 의 종착지인 셈이다(10, 32-33). 이런 의미는 복음서의 전체적인 맥락 가운데서 잘 시사되어 있다. 예수의 갈릴래아 활동 보도 가운데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한 내용(3, 6), 예루살렘으로부터 파견된 자들이 예수에게 시비를 걸어온 내용(3, 22 ; 7, 1), 세례자 요한의 운명이 예수의 운명으로 예시된 보도 내용(8, 31 ; 9, 31 ; 10, 32-34), 예수의 수난사가 보도되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이미 결의한 내용의 보도(11, 18 ; 12, 12), 뿐만 아니라 부활한 예수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래아에서 발현하리라는 내용(14, 28 ; 16, 7)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이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갈릴래아는 하느님의 종말론적인 계시의 장소요, 예루살렘은 예수를 거부 배척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특권 내지는 은혜가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진 것으로 강조 보도된 내용(12, 1-12)도 그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추가 삽입된 부분, 이른바 긴 결문(16, 9-20)은 중요한 필사본(시나이 사본, 바티칸 사본)에 수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래서, 원래의 마르코 복음서는 16장 8절로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리고 이 긴 결문은 2세기경 어느 편집자와 필사자에 의해서 다른 복음서의 전승 자료(마태 28, 9-10. 16-20 ; 루가 24, 13-53 ; 요한 20, 11-23)에 따라 추가 삽입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원래의 마르코 복음서는 16장 8절로 끝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원래 끝 부분은 상실된 것으로 여기고서 다른 전승 자료(마태 28, 16-17 ; 마르 16, 15-20)를 바탕으로 하여 원래 텍스트를 형성하고자 시도하였다고 주장하는데, 납득할 만한 설은 아직 못 된다. 반면에 마르코 복음사가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이르는 사건으로 말하기 위해서 부활 발현 사화를 의도적으로 보도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발현에 대한 침묵은 메시아 비밀의 함구령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보는 것이다. 아무튼 갈릴래아에서 있게 될 부활한 그리스도의 발현에 대한 예고(14, 28 ; 16, 7)를 부활 발현에 관한 보도 내용으로 보는 한, 마르코 복음서의 원래 끝 부분(부활 발현 사화)은 다만 상실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V . 양식사적인 구성 요소들
〔예수의 정체에 관한 신앙 선포적인 존칭〕 ① 하느님의 아들 : 이 존칭은 하느님과 가까운 이들만을 가리키는 구약성서의 의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2사무 7, 14; 시편 2, 7 ; 89, 27-28 ; 110, 3).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조문에서 언급된 하느님의 아들은 부활한 예수(로마 1, 3-4), 수난한 예수(갈라 2, 20 ; 로마 8, 32), 재림할 그리스도(1데살 1, 9-10), 선재(先在) 및 파견된 예수(갈 라4, 4-5 ; 로마 8, 3)를 가리킨다. 그런데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 자신이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아 의식을 갖는 절대적인 의미(8, 38 ; 12, 6 ; 13, 32 ; 14, 36. 61)와 예수 자신만이 알게 되는 계시적인 의미(1, 11 ; 9, 7), 그리고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하는 신앙 고백적인 의미(1, 1 ; 15, 39)로 언급된다. 심지어 예수로부터 추방당하는 악마의 입을 통해서도 이 존칭이 나온다(1, 24 ; 3, 11 ; 5, 7).
② 그리스도 및 다윗의 아들 : 그리스도란 말은 원래 기름 부음을 받은 임금이나 제관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메시아' 를 그리스어로 의역한 표현이다. 그리고 다윗의 아들이란 표현은 이상적인 메시아가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리라는 통념에서 연유된 말이다(1사무 7, 12-16 ; 시편 132, 17). 그런데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후 부활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주님, 다윗의 아들 로 존칭하여 신봉하였던 것이다(로마 1, 3-4). 따라서 그리스도란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한 메시아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마르 12, 35-37). 마르코 복음서에는 다윗의 아들(10, 47-48 ; 12, 35. 37)보다는 그리스도란 존칭이 더 많이 언급된다. 즉 신앙 고백적인 존칭(1, 1 ; 8, 29)과 예수의 입에서 나온 칭호(9, 41 ; 12, 35 ; 13, 21) 그리고 예수의 정체를 심문하거나(14, 61) 예수를 조롱하는 대목(15, 32)에서도 언급된다.
③ 사람의 아들과 예언자 : 예수가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 사람의 아들로 표현한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즉 지상에서 권위 있게 활동한 예수(2, 10. 28), 수난하고 부활할 예수(8, 31 ; 9, 9. 12. 31; 10, 33. 45 ; 14, 21. 41), 재림할 예수(8, 38 ; 13, 26 ; 14, 62)이다. 이에 반해서 예언자란 말은 예수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행적에 대한 놀라운 반응(1, 22. 27 ; 4, 41 ;6, 2) 가운데서 민중이 드러낸 칭호로 언급된다(6, 14-15; 8, 27-28).
〔예수의 가르침과 말씀〕 ① 비유와 우화 : 예수의 복음 선포 내지는 가르침이 비유와 우화로 설명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비유는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데에 비해서 우화는 부자연스럽고 억지가 많다. 또한 비유는 한 가지의 뜻만을 전하는 이야기(4, 3-9. 26-29. 30-32 ; 13, 28-29. 34-36)인 데 반해서 우화는 많은 뜻을 전하려고 한다(12, 1-12). 이에 대한 좋은 예는 예수의 비유 가운데 '씨 뿌리는 사람' 의 이야기(4, 3-9)를 우화로 여기고서 설명한 내용이다(4, 13-20).
② 단절어와 유행어 : 주로 짤막한 토막말들로서 상황 설명이 전혀 없이 그저 말씀만 보도되는 것을 가리킨다(2, 21-22 ; 3, 23-29 4, 11-12. 21-25 ; 7, 15 ; 8, 15. 34-38 ; 9, 1. 35. 36-50a : 10, 11. 15. 31. 43-44 ; 11, 22b-25 ; 12, 38-40 13, 30. 32) . 특히 유행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통용되어 변형체가 많다(9, 35=10, 43-44 ; 10, 31).
③ 상징어 :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된 짤막한 비유 내지는 토막말을 가리킨다(2, 21-22 ; 3, 23-27 : 4, 21. 24; 8, 15 ; 9, 42-50a ; 11, 22b-23).
④ 사후 예언 : 이미 이루어진 사건의 내용을 예언 형식으로 보도한 것을 가리키는데, 특히 예수의 수난, 죽음, 부활 예고가 여기에 속한다(8, 31 ; 9, 31 ; 10, 33-34).
⑤ 종말 묵시적인 말씀 : 묵시록의 형식을 취한 종말 담화를 가리키는데 13장의 내용이 여기에 속한다(특히 13, 5-31).
⑥ 제자 특수 교육 : 특히 마르코 복음서에도 제자들의 몰이해(4, 13. 40 ; 6, 52 ; 7, 18 ; 8, 17-21. 32 ; 9, 6.10. 32. 33-35 ; 10, 24. 26. 32. 35-45 ; 14, 32-45. 50. 66-72)의 맥락 가운데 예수가 제자들에게만 별도로 가르치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4, 10-25. 34-41 : 5, 37-43 ; 6, 45-52 ; 7, 17-23 ; 8, 14-21. 27-38 : 9, 1-13. 28-50 ; 10, 10-12, 23-45 ; 11, 20-25 ; 13장 ; 14, 22-25. 32-42).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사화〕 ① 상황어 : 단절어, 유행어, 상징어와는 달리 상황 설명이 명시된 말씀들을 가리킨다(2, 15-28 ; 3, 20-21. 31-35 ; 8, 10b-12. 31-33 ; 9, 38-39 ; 10, 13-16. 28-30. 41-45 : 12, 41-44 ; 13, 1-2).
② 논쟁 사화 : 주로 예수의 적수들이 예수의 권위 있는 처신이나 가르침에 반론을 제기하고 논쟁이 벌어지지만 예수를 당해 내지 못한 것이 특징적이다. 즉 예수의 권위가 더욱 강하게 시사된다(2, 1-12. 15-17. 18-20. 23-28 : 3, 1-6 ; 7, 1-7. 9-13 ; 10, 1-9 ; 11, 27-33 ; 12, 18-27).
③ 대담 사화 : 예수의 상대가 적의는 품지 않고 예수를 떠보거나 예수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것이 특징적이다(10, 17-22. 35-40 ; 12, 13-17. 28-34)
④ 소명 사화 : 예수의 부름에 즉시 순응하여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1, 16-20 : 2, 14 ; 3, 13-15). 이 소명 사화와 관련된 제자들에 관한 사화도 보도된다(3, 16-19 ; 6, 7-13 ; 10, 35-45).
⑤ 기적 사화 : 예수의 신적인 권위가 드러난 사화로서 기적 내용에 따라 구마 기적 사화(1, 21-28 ; 5, 1-20 ; 7, 24-30 ; 9, 14-29), 치유 기적 사화(1, 29-31. 40-45 ; 2, 1-12 ; 3, 1-6 ; 5, 24-34 ; 7, 31-37 ; 8, 22-26 ; 10, 46-52), 소생 기적 사화(5, 21-23. 35-43), 자연 기적 사화(4, 35-41 ; 6, 30-52 ; 8, 1-9 ; 11, 12-14. 20-21)로 구분된다.
⑥ 수난 부활 사화 :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구원 사건으로 여기고서 선포한 신앙 조문(1고린 15, 3-4 ; 1데살 4, 14)에 바탕을 둔 사화로서 가장 오래되고 제일 긴 사화이다. 14장 1절부터 16장 8절까지의 이야기가 여기에 속하지만, 마르코가 전승한 사화는 적어도 예수의 체포부터 빈 무덤 발견까지의 사화(14, 32-16, 8)라고 여겨진다.
Ⅵ. 주요 전승 자료 및 신학 사상
〔편집된 주요 전승 자료들〕 마르코 복음서는 복음사가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초대 그리스도교의 전승 자료들을 복음 선포적인 의도에 따라 편집한 전승 문학 작품이다. 즉 복음사가 개인의 창안에 의해서 새롭게 기록된 창작 내지는 저작 문학 작품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마르코 복음사가는 어떤 전승 자료들을 이용하였을까? 앞서 살펴본 '양식사적인 구성 요소들' 이외에 확실한 기본 자료를 정확하게 제시할 수는 없으나, 마르코 복음서의 텍스트를 주의 깊게 살펴봄으로써 다만 추정해 낼 뿐이다. 사실상 이런 추정은 쉽지가 않은데, 텍스트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어떤 기본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서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예수의 수난 · 부활 사화로(14, 1-16, 8), 이 사화는 여러 사화 가운데에서 가장 길고 일관성 있게 잘 엮어져 있다. 이 사화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구원 사건으로 선포한 초대 교회의 복음 내용(1고린 15, 3-4)과 맥락을 같이한다. 따라서 이 사화는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두루 전승되어 온 가장 오래된 사화로 여겨진다. 그리고 하나의 독립된 단락으로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짜임새 있게 엮어진 상당히 긴 대목들도 전승된 자료로 볼 수 있는데, 가파르나움에서의 예수 활동(1, 21. 29-39), 비유 이야기(4, 2-10. 13-20. 26-33), 기적 사화(3, 7-12 ; 4, 1. 35-39. 41 ; 5, 1-43 ; 6, 32-56), 공동체 교육(10, 2-12. 17-27. 35-45), 갈릴래아 논쟁 사화(2, 1-3, 6)와 예루살렘 논쟁 사화(11, 27-12, 37), 예수의 수난 예고(8, 31 ; 9, 31 ; 10, 33-34) 종말에 대한 묵시적인 담화(13장), 베드로의 신앙 고백(8, 27-33), 예수의 영광스런 변모 사화(9, 2-13) 등이다.
예수의 가르침(1, 22. 27 ; 4, 2 ; 11, 18 ; 12, 38)이라는 양식사적인 틀이나 그 맥락에 따라 볼때, 구두 전승 자료로 여길 수 있는 구절들이 상당수에 달한다(1, 7-8. 12-13 : 3, 22-50 : 4, 21-25. 30-32 ; 6, 7-11 : 8, 38 : 9, 42-50 ; 12, 38-40). 베드로와 관련된 사화들도 구전(口傳)이나 서전(書傳)으로 물려받은 이른바 베드로 전승 자료로 보는데, 즉 첫 번째 제자로 부름을 받은 베드로(1, 16-20), 베드로의 장모 치유(1, 29-31), 제자들의 대표로 신앙을 고백하는 베드로(8, 29), 예수와 가장 가까운 제자들 가운데 하나(5, 37 ; 9, 2 ; 13, 3 ; 14, 33), 열두 제자단의 대표(3, 16 ; 9, 5 : 10, 28 ; 11, 21), 통찰력이 부족한 베드로(8, 22-23 ; 14, 29-31), 베드로의 배신(14, 66-72), 갈릴래아로 파견된 베드로(16, 7)에 관한 내용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 관한 사화(6, 6b-13. 30-31 ; 9, 33-37 ; 10, 35-40), 세례자 요한에 관한 이야기(1, 2-8 ; 6, 14-29)와 고향에서 배척당한 예수의 이야기 등도 전승 자료로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활동을 간단히 요약 보도한 내용도 처음부터 문맥에 결속되어 엮어진 것으로 보인다(1, 14-15. 32-34 ; 3, 7-12; 6, 53-56). 이와 같은 예는 많이 살펴볼 수 있지만, 다만 여기서는 전승 자료로 여겨질 수 있는 부분을 배제할 수없기 때문에 잠깐 언급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물려받은 전승 자료들이 그리스어로 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아람어(히브리어)로 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이다. 전자의 견해가 통설이긴 하지만 아람어로 된 소수의 기본 자료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여러 대목에서 아람어로 된 낱말이나 문장을 원용하면서 그리스어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15, 22. 34). 원래 아람어로 쓰여진 복음서를 마르코 복음사가가 그리스어로 번역하였다는 가설도 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연구 성과가 없다. 마태오복음서와 비교해 볼 때, 사실상 마르코 복음서에는 유대적인 색채나 요소가 많이 결여되어 있고 오히려 헬레니즘적인 색채가 강한 편이며 일반 서민들이 사용한 그리스어 표현이 많다. 따라서 그 가설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또 다른 문제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수한 자료들이 구전이었는지 아니면 서전이었는지에 대해서이다. 두 가지의 가능성을 다 인정하지만 일괄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물론 일정한 틀에 따라 일관성 있게 엮어진 사화들(특히 예수의 수난 · 부활 사화)이나 상당히 긴 대담 내지는담화는 서전으로(13, 14), 짤막한 이야기나 행적 그리고 말씀은 구전으로 전해진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무튼 마 르코 복음서는 복음 선포 및 신학 사상에 따라 구전이든 서전이든 전승 자료들로 편집된 '복음서' 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요 신학 사상〕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초대 그리스도 교회의 전승 자료들을 수집하여 엮으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라는 표현을 서두에서 언급하였다(1, 1).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복음을 선포한다는 의미(1, 14-15)와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으로 선포된다는 의미(8, 35 ; 10, 29 ; 13, 10 ; 14, 9)를 동시에 가리킨다. 즉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체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뜻하며, 따라서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복음을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으로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알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서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엮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사건(세례부터 빈 무덤 발견까지 이루어진 사건)의 보도 내용이라 말할 수 있다.
앞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마르코 복음사가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의 활동은 갈릴래아 지방에서 시작하여 대부분이 이곳에서 중점적으로 이루어진다. 갈릴래아는 마치 예수의 복음 선포의 요람지 내지는 본고장인 듯 언급되어 있고, 예루살렘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장소로 언급된다. 즉 예수의 지상 활동은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끝난 셈이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의 역사적 인 사건들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르는 여정 곧 하나의 긴장된 '길' 의 틀 안에서 보도된 것이다. 이것은 마르코 복음서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관점 아래 엮어져 보도된 내용임을 시사해 준다. 이런 연유로 인해 예수의 공생활 보도 가운데 수시로 예수의 수난과 죽음(부활)에 관해서 언급된 것이다(2, 20 : 3, 6 : 8, 31 ; 9, 30-31 ; 10, 32-34 ; 11, 18 ; 12, 12 ; 14, 1-2). 물론 예수 부활의 관점은 배제되지 않고 오히려 강조된 채 더 깊은 의미를 시사해 준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여느 복음사가와는 달리 부활 발현 사화를 보도하지 않는다. 다만 빈 무덤의 발견 보도(16, 1-8)로써 예수의 부활을 가장 짧게 선포한 셈이다. 그러나 빈 무덤을 발견한 여인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나 본 것은 아니다. 천사를 통해서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들었을 뿐이고(16, 6), 그 소식도 아무에게 알리지는 않았다(16, 8). 그리고 부활한 예수가 갈릴래아에서 발현할 것이라 는 예고와 함께 제자들은 갈릴래아로 가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약속만 보도되었을 뿐이다(16, 7). 즉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의 부활 이후 사건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키는 듯하다. 달리 말하자면 복음서의 마무리를 짓기보다는 오히려 열어 놓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마르코 복음사가의 신학적인 의도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의 부활 발현에 관한 이야기를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예수의 부활은 믿음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사건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오로지 믿음의 삶 안에서 예수의 부활 발현 곧 부활한 예수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며 아울러 복음서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믿음을 갖도록 촉구한 것이다. 그리고 갈릴래아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선 갈릴래아에서 이루어진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9, 2-10)와 갈릴래아로 가라는 천사의 말과 함께, 독자로 하여금 예수의 갈릴래아 활동을 예수 부활 신앙의 관점에서 보도록 이끌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의 수난, 죽음, 부활의 관점 아래 엮어진 복음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표현(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내용인 동시에 복음을 선포한 자)은 더욱 명확해진다. 즉 이 복음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역사라는
의미가 강조 · 언급된 것이다.
그리스도론적 메시아 비밀 사상 : 예수의 정체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존칭하여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론적인 고백 내용으로서 마르코 복음서의 핵심을 이룬다. 이런 고백의 의미와 내용을 독자로 하여금 보다 더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에 대한 존칭을 첫 장에서부터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수차례나 다양한 방식으로 보도한다. 반면에 예수의 정체에 대해 침묵을 지키도록 명하는 예수의 함구령이 가끔씩 보도되기도 한다.
우선 악마에게 내려진 예수의 함구령을 볼 수 있다(1, 25. 34 ; 3, 12). 이 함구령은 기적으로 인해 알게 된 예수의 정체가 그리스도론적인 고백의 차원에 이르지 못하였음을 시사한다. 즉 기적 행위가 예수의 정체를 완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직 충분하지가 않다는 뜻이다. 또한 예수는 치유된 자(1, 44)나 목격자들에게도(5, 43 ; 7, 36) 치유 사실을 알리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린다. 이 함구령은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자로서 알리지 못하도록, 예수가 행한 기적으로써 예수의 정체를 규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역점이 있는 것으로 예수의 신비가 기적으로도 아직 드러나지 않았음을 시사한 것이다. 이런 함구령은 모두 그리스도론적인 메시아 비밀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제자들에게 내려진 예수의 함구령(8, 30: 9, 9)에서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8, 29)에 이어서 내려진 예수의 함구령(8, 30)은 그 고백 내용이 예수의 인격을 완전히 밝혀 주는 최종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예수의 수난 예고와 함께 베드로가 드러낸 반응(8, 31-33)에서도 재확인되지만 예수의 영광스런 변모를 체험한 제자
들에게 내려진 예수의 함구령은 부활 때까지 시한부로 되어 있다(9, 9). 즉 부활 때 예수의 신비스런 정체가 완전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달리 말하면 십자가 상 죽음과 부활이 예수의 신비스런 정체를 비로소 드러내 보여 준다는 뜻이다.
사실상 메시아 비밀 사상에 관련된 여러 요소들(특히 함구령)은 역사적인 관심보다는 독자를 염두에 두고서 보도된 것이다. 즉 독자로 하여금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의 정체와 사명을 총괄적으로 충분히 이해하도록 이끌고자 하는 데에 의미가 있다. 이 사상은 또한 예수의 권위가 드러난 기적 사건과 예수의 나약하고 비천한 모습이 드러난 수난 사건을 복음서 안에서 연결시키는 데에 기여하였다. 특히 부활 때까지 시한부로 내려진 함구령의 보도(9, 9)가 이런 역할을 명시해 준다. 십자가 상 죽음을 지켜보고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 백부장에 관한 보도(15, 39)도 십자가 신학의 한 요소로서 그 맥락을 같이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수난 예고(8, 31 ; 9, 31 ; 10, 32-34)와 십자가를 따름에 관한 예수의 말씀(8, 34-9, 1) 역시 마르코 복음서의 십자가 신학의 주요한 요소들이다. 물론 이런 요소들은 기적의 능력을 갖춘 인물로서 고정된 예수상이 그릇된 것임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론적인 메시아 비밀 사상은 십자가 신학과 관련되어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은 곧 십자가 추종이다. 예수 자신이 앞서 이 길을 걸어감으로써 믿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제자상(像) : 마르코 복음서에도 제자들의 모습이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몰이해나 오해, 확고한 신념이나 믿음이 부족하여 불안해 하거나 배신하는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로부터 부름받은 자들, 다시 받아들여진 자들, 특별히 선택된 자들로서 특수 교육을 받고 권능을 갖추어 파견되는 모습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제자들의 이런 양면적인 모습들을 알려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신원과 현재 모습을 돌이켜보도록 촉구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항구한 추종으로 이끌고자 한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추종의 길은 곧 십자가의 길로서 언급되며 특히 제자들의 몰이해 상황에서 예수의 가르침이나 방향 제시가 보도된다(8, 34 ; 9, 35-36 ; 10, 45). 그리고 수난 때 예수의 곁을 떠나가 버린 제자들에 관한 보도는 그 자체로 끝나 버리지 않고 오히려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모이게 된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즉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는 흩어진 제자들을 찾아 불러모으기위해서 그들보다 앞서 갈릴래아로 간다고 보도한 것이다(14, 27-28 ; 16, 7).
제자들 가운데 형성된 열두 제자단은 독특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들은 예수의 권능을 갖춘 증인들이요, 예수의 과업을 계속 수행하도록 파견된 자들이다(3, 14-16 ; 6, 7-13). 즉 그들은 예수의 시대와 마르코의 공동체 곧 교회의 시대를 잇는 사도들로 시사된다(6, 30). 그들 가운데 시몬 베드로의 위치는 돋보인다. 그는 예수의 첫 번째 제자요(1, 16), 제자단을 대표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8, 29). 그리고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이름만 별도로 언급된다(16, 7).
아무튼 제자들의 실존은 믿음으로 인해 각색되어 있으며, 이 믿음은 곧 복음에 대한 것이다(1, 15). 예수는 이 복음을 몸소 선포하는 그리스도이다. 사람들은 믿음과함께 복음을 인정하고 그 내용이 참되다고 받아들이며, 믿음은 특히 기적 사건을 통해서 더욱 명확해진다. 이런 믿음은 구체적으로 예수 자신과 권능에 대한 신뢰이며,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고(9, 23), 하느님께서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의 믿음, 예수와 하느님과의 유일무이한 관계도 이런 믿음의 맥락 안에서 보도한다(14, 36). 예수는 바로 이런 믿음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도 이런 초대에 응하면서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9, 23-24)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그리스도의 공동체 : 마르코 복음서에는 '교회' 내지는 '공동체' 라는 표현은 없지만, 하느님의 백성이란 개념은 그 기조를 이루고 있다. 이 주제는 두 가지 관점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하나는 폐쇄되고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이요 다른 하나는 모든 민족에게 개방된 이른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펼친 예수의 복음 선교 활동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에게로 넘어가는 과정의 맥락 안에서 서술 묘사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수의 복음 선포적인 활동은하나의 비유적인 말로써 잘 표현되어 있다. "먼저 자녀들이 배불리 먹어야 합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7, 27). 여기서 '자녀들' 은 이스라엘 백성을, '강아지들' 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예수가 '다윗의 아들' 로서 예루살렘 도시나 그 인근에 나타나 활동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며(10, 48 ; 11, 10 ; 12, 35-37), 다윗의 아들은 유대 민족을 위해서 예정된 메시아이다. 그러나 다윗의 아들인 예수에 대한 그들의 불신은 매우 컸다. 예수는 자기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까지 당한 것이다(6, 1-6). 예수는 유대인들의 전통을 비판하고(7, 1-23), 무화과나무의 저주 및 성전 정화(11, 12-19)와 성전 파괴 예고(13, 2)로써 유대인들의 성전 예배의 마지막을 알리는 반면,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빌라도에게 요구함으로써(15, 13)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아들, 예수를 완전히 거부하고 배척하였다.
예수의 복음 선포적인 활동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에게로 넘어가는 과정은 예수에게 대답한 이방인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비유적인 말 가운데 잘 묘사되어 있다. "상 아래 있는 강아지들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7, 28). 그리고 예수의 성전 정화로 인해성전도 이제 모든 민족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11, 17). 또한 예수는 "우선 복음은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게 마련입니다"(13, 10)라고 가르치며, '포도원 농부들의 우화' 에서도 구원의 혜택이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에게로 넘어간다고 시사한다(12, 9). 이와 같이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새로운 공동체 곧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에 관한 전망이 서술되어 있다. 이 공동체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해 맺어진 예수와 영적인 형제 자 매의 관계 곧 예수의 가정 공동체로 이해되고(3, 35),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 : 마르코 복음서의 '하느님의 나라' 는 순수 미래적인 개념만이 아니라 현재적인 의미도 내포된 개념이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1, 15)라는 말은 이제부터 예수의 복음 선포적인 활동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왕정)가 시작된다는 근접적인 관점의 표현이다. 하느님 나라의 현재적인 의미와 미래적인 의미의 관계는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 (4, 26-29)와 '겨자씨의 비유 (4, 30-32) 이야기로써 잘 설명되어 있다. 즉 현재적인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잘 안 보일지라도 영향력(하느님의 왕정)을 꾸준히 발휘하고 있으며, 미래로 지향하면서 그 미래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 종말은 분명히 오지만 인간이 계산할 수 있는 그런 것은 결코 아니며(13, 28-30) 종말이 오기 전에 우선 복음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고(13, 10), 종말에는 사람의 아들이 구름에 싸여 큰 권능과 영광을 갖추고서 오게 된다(8, 38 ; 9, 1 ; 13, 26). 그러나 그 날과 시간은 아들도 천사도 아무도 알 수는 없고, 오로지 아버지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13, 32). 이렇게 볼 때,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의 구원 행위와 함께 이미 시작되어 있지만, 그 완성은 최종적이고 미래적이며 또한 보편적인 구원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사가가 보도한 종말론적인 교육 내용 곧 순교할 준비(13, 9. 11), 온 세상으로의 복음 선포 활동(13, 10), 조심하면서 깨어 기다리는 삶(13, 23. 33. 35-37)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열려져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종말의 완성을 향한 긴장된 삶인 것이다(1, 15). (⇦ 마르코 ; 말구 복음 ; → 공관 복음서 ; 복음서)
※ 참고문헌  정양모 역주, 《마르코 복음서》, 분도출판사, 1981, pp. 7~231 이영헌,《마르코가 전하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생활성서사, 1992, pp. 19~40/ R. Pesch, Das Markusevangelium 1, Freiburg, 1976, pp. 1~68/ J. Gnilka, Das Evangelium nach Markus 1, Zürich, 1978, pp. 17~35/ W.G. Kümmel, 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Heidelberg, 1973, pp. 53~73/ A. Wikenhauser · J. Schmid, 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Freiburg, 1973, pp. 207~224/ J. Ernst, Das Evangelium nach Markus, Regensburg, 1981, pp. 7~23/ U. Schnelle, 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Göttingen, 1994, pp. 234~256/ J. Gnilka,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Freiburg, 1994, pp. 151~174. 〔李永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