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사회학자. 경제학자. 정치 이론가. 1818년 5월 5일 당시 반프러시아 정서와 프랑스의 진보적인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독일 라인 지방의 트리어(Trier)시에서 아버지 하인리히 마르크스(H. Marx)와 어머니 헨리에타(HenrietataMarx) 사이의 9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네덜란드에 정착한 헝가리계 유대인 출신으로 랍비였으며, 16세기 이래 트리어시의 모든 랍비들을 배출한 바 있는 전통적인 유대인 가문에서 성장하였으나 형식적으로만 유대교 신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생업인 변호사 자격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루터교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전통적인 유대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였고, 마르크스가 후일 무신론자가 되어 "종교 비판이 모든 비판의 초석이다" 라는 헤겔 좌파의 신조를 외치게 되자 자식과의 관계마저 단절하였다.
형이 네 살 때 죽자 장남이 된 마르크스는 어린 시절 훗날 장인이 된 루드비히 폰 베스트팔렌(Ludwig von Wes-tphalen)으부터 철학 · 문학 · 정치에 대하여 배웠다. 그는 독일 상류 계층으로 마르크스의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박학다식한 생-시몬(Saint-Simon)의 추종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마르크스를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있는 아이로 판단하고 책을 빌려 주거나 독서를 많이 하도록 격려하고, 함께 산보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는데, 마르크스는 후일 이때를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회상할 정도였다. 마르크스는 1843년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4년 연상의 예니 폰 베스트팔렌(Jenny von Westphalen)과 결혼하였다.그녀는 평생 동안 마르크스가 정신적으로 괴롭거나 외로울 때 기댈 수 있는 헌신적인 인생의 반려자였으며, 말년에 가난으로 시달릴 때에도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2남 4녀를 두었으나 불행하게도 두 아들과 셋째 딸을 잃었지만, 앵겔스가 자신의 임종 때에 밝힌 바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그의 가정부였던 헬레나(H. Demuth, 1820~1890)와의 사이에 아들 프레데릭 데무트(F.Demuth, 1851~1929)를 두었다고 한다.
〔사상 형성과 활동〕 헤겔 좌파의 노선 : 1835년 가을 17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본 대학교 법과 대학에 입학한 마르크스는, 당시 본 대학교 풍조를 따라 호머(Homer) · 라틴시(詩) · 신화 · 현대 예술과 같은 과목을 수강하였으며, 이듬해 보다 엄격한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역사와 철학을 공부했다. 이 대학에서 헤겔(G.W.F. Hegel)의 철학을 열심히 독파한 마르크스는 국왕, 교회, 부르주아지, 그리고 헤겔 사상을 비판하는 젊은 지성인들의 단체인 '박사 클럽' 에 가담하여, 급진적인 무신론적 물질주의와 사회 정의에 대한 신념을 확고히 하였다. 당시 철학계는 헤겔의 절대적 영향하에 있었으나, 이른바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라는, 헤겔의 《법 철학》 서문에 실린 구절의 해석을 놓고 청년 헤겔파와 노년 헤겔파 간에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졌다. 우파적 노년 헤겔파는 현상 유지와 전통 및 관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현실적인 것의 이성성 · 합리성 · 정당성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띠었다. 그러나 포이어바흐(L. Feuerbach) , 스티르너(M. Stirner), 바우어 형제들(Edgar, Bruno, Egbert)과 헤스(M. Hess), 루게(A. Ruge) 등이 중심을 이룬 좌파적 청년 헤겔파는, 맹목적인 현실 인정이나 현상 유지보다 현실은 이성에 의해 검증되어야 한다면서 헤겔 사상의 진보성과 급진성을 강조하였다. 후에 마르크스도 이들의 주장에 동참하였다.
1841년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 철학에 대하여>(Die Naturphiososphie von Demokrit und Epikur)라는 논문으로 예나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에서 마르크스는,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기계론적인 결정론보다 기원 전 4세기의 에피쿠로스가 강조한 자유의 윤리를 개인의 절대적인 자율성과 자의식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선호하는 입장을 전개하면서, 프로메테우스적인 도전의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원자이며 당시 베를린 대학 신학부 강사였던 바우어(B. Bauer)의 도움으로 대학 강단에서 학문적 경력을 원하였던 마르크스는, 바우어가 정부로부터 그리스도의 역사성과 복음서의 진실성을 부정하였다는 이유로 강사직을 박탈당하자, 학문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같은 해 폐가약하여 병역을 면제받게 되자 1842년 10월 쾰른으로 이주하여 정치 언론에 투신하였다.
정치 언론 활동 : 프러시아 정부의 반동적인 경제 정책을 비판하기 위하여 헤스가 라인 지방의 부호들을 충동 · 설득하여 창간한 급진적 부르주아지 신문인 <라인 신문>(Rheinische Zeitung)에 자주 기고하였던 마르크스는 이 신문 창간 10개월 만에 편집장으로 발탁되었는데, 편집장이 된 지 한 달 만에 그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구독자가 두 배 이상 늘었고 전국적인 명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헤스는 마르크스를 루소(J.J. Rousseau), 볼테르(Voltaire), 홀바하, 하이네(H.Heine), 헤겔 등이 한 사람으로 종합된 인물이라고 극찬하였다. 창간 당시 <라인 신문>은 온건한 자유주의 성향으로 출발하였으나 점차 급진화되었고, 독일 신문 중 가장 신랄하게 정부를 비판하였다. 정부의 검열 제도와 '나무 절도법' 을 공격하는 등 정부의 입장을 비난하는 기사를 자주 게재하여, 결국 1843년 3월 폐간당하였다. 마르크스는 철저한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일체의 검열을 반대하고, '나무 절도법' 에 대한 논쟁에서 죽은 나무와 살아 있는 사람들 간의 권리를 희화적으로 표현하였다.
독일에서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할 것이 없게 된 마르크스는 아내와 함께 당시 사회주의 사상의 수도나 다름 없었던 파리로 이주하였다. 파리에는 당대의 지도적인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집결되어 있었고, 다른 급진적인 사상과 단체들도 많이 몰려 있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스미스(A. Smith), 시스몽디(J.C.L.S. Sismondi) 등 여러 경제학자들의 저서를 읽고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루게와 함께 《독불 연보》(Deutsch-französishe Jahrbücher)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그리고 <헤겔 법철학 비판 서론>(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Einleitung)과 <유대인 문제>(Zur Judenfrage)가 창간호 발행으로 그친 이 《독불 연보》를 통하여 발표되었는데, 위의 두 논문 속에서 마르크스는 최초로 프롤레타리아를 사회 변혁의 주체 세력으로 등장시켰다.
[사상의 발전과 저술] 1844년 마르크스는 《1844년의경제학 · 철학 초고》 (Ökonomish-philosophische Manuskripteaus dem Jahre 1844)를 집필하였다. 1927년에 원고가 발견되어 출판된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그 이후의 독일 이데올로기를 포함하여, 특히 인간의 소외 문제를 크게 다루었는데 그에 의하면, 인간 특히 노동자는 노동의 동기 ·성과물 · 과정 · 환경 등의 영역에서 소외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저술로 마르크스가 헤겔식의 관념론을 완전히 청산하고 유물론과 공산주의로 전향한 것으로 인식하는 마르크스 연구자들도 상당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F. Engels, 1820~1895)가 만난 것은 1844년 8월 파리에서 엥겔스가 《독불 연보》에 게재한 두 편의 경제 관계 논문을 통해서였다. 두 사람은 깊은 우정을 서로 유지하면서 1845년 바우어 형제와 스티르너를 중심으로 한 청년 헤겔파를 비판하는 《신성 가족》 (Die Heilige Familie)을 공동으로 저술하고 출판하였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함께 1846년 역사적 유물론을 처음으로 완전하게 제시한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를 저술하지만 당시에는 어떤 출판사도 출판을 기피하여 금세기에 와서야 출판되었다. 앵겔스는 마르크스가 죽은 뒤 마르크스의 《자본론》(Das Kapital) 2~3권을 편집 · 출판하고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경제학과 프랑스 혁명사를 연구하면서 혁명 활동에 전념하나, 프러시아 정부의 강요에 의해 1845년 파리로부터 추방되어 아내와 함께 브뤼셀로 이주하였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프러시아 정부로부터 시인 하이네와 바쿠닌(M. Bakunin, 루게 그리고 기타 외국인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일괄 추방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바쿠닌은 스위스로, 마르크스는 벨기에로 추방되었는데, 이곳에서 마르크스는 프루동(P.J.Proudhon), 생 시몬, 푸리에(F.M.C. Fourier) 등과 접촉하고 교분을 맺었다.
《공산당 선언》 : 브뤼셀에서 공산주의자 동맹에 가입하고 제2차 대회의 지도자로서 엥겔스와 함께 동맹의 강령을 기초한 마르크스는, 1848년 2월에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을 발표하였다. 처음 엥겔스가 질의 응답식의 초안을 썼으나 마르크스가 다시 새롭게 작성하여, 공동의 저작으로 출판하였다. 이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는 서문으로 시작하여, 인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요 다가오는 혁명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며, 노동자들이 잃을 것은 사슬 이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만국(萬國)의 노동자가 단결할 것을 호소하면서 끝을 맺었다.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견해에 관용적 태도를 보이던 벨기에 정부도 《공산당 선언》의 내용이 가져올 파장을 우려하여 1848년에 마르크스를 프랑스로 추방하였다. 추방된 바로 다음날 파리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프랑스 신(新)정부는 그를 파리로 초청하였으며, 같은 해 3월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마르크스는 쾰른으로 이주하여 <신(新)라인 신문>(Neue Rheinische Zeitung)을 창간하였다. 곧이어 반혁명 세력이 승리하게 되고 신보수 정부가 의회를 해산하게 되자 의회는 국민들에게 정부가 부과한 모든 과세가 불법이라고 맞대응하였다. 이 와중에서 마르크스가 의회를 지지하면서 조세 저항을 부추기자 정부는 즉각 이 신문의 폐간을 명령하였다. 이 신문의 마지막 호는 강력한 대정부 공격을 붉은 글씨로 인쇄 · 발행하여 많은 수집가들의 수집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프러시아 정부는 마르크스의 시민권이 4년 전부터 박탈된 사실을 근거로 마르크스를 국외로 추방하였다. 파리로 이주한 마르크스는 1849년 6월 시위 사태 후 재차 추방되어 8월 24일 런던으로 망명, 34년 간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다.
프랑스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후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과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을 출판하였는데, 이 두 저작은 1848~1851년의 혁명을 분석한 것이다. 혁명 후 마르크스는그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자본론》 저술에 총력을 기울였다. 1859년 마르크스는 그의 경제학 연구의 결과물로 《정치 경제학 비판》(Zu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을 출간하고, 그 서문에서 인간이란 물질적인 상황에 의해 조건 지워지거나 영향을 받는다는 명제를 피력하였다.
《자본론》 : 마르크스는 1867년 함부르크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성서가 된 《자본론》 제1권을 독일어로 출판하였는데, 이 책에서 자본주의의 출현과 발전,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파멸을 설명하였다. 마르크스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성격을 밝혀내기 위하여 상품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노동자가 상품 생산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그를 고용한 자본가에 의해 착취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산과 교환 그리고 분배의 성격과 구조를 묘사하고, 역사 발전 단계에서 자본주의가 결코 최종적이지 못하고 과도성을 띤 사회로서, 종국에는 더욱더 가난해진 노동자들의 계급 투쟁에 의해 공산주의 사회로 대체될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 하는 역사 법칙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자본론》의 출간은 사회주의 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엄청난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할 일이었다. 이후 전개된 사회주의 운동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서와 같은 비중을 갖게 되었고 비사회주의자들도 필독해야 할 사회 과학 서적의 고전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자본론》 출간에 앞서 마르크스는 진화론의 저자인 다윈이 자연 과학 분야에서 진화와 적자 생존의 법칙을 발견한 사실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고 제안하였으나 다윈은 마르크스의 이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이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추종자이자 동료였으며 <신라인 신문>을 함께 편집하기도 하였지만 이미 사망한 시레시안 출신의 공산주의자 볼프(Wilhelm Wolf)에게 이 책을 헌정하였다. 마르크스는 대영 박물관 도서관에 소장된 각종 정부 보고서의 자료를 바탕으로 이 《자본론》을 집필하였는데, 이들 자료의 효과적인 이용으로 사회 과학 연구 방식의 개선과 발전에 혁신적 공헌을 하였다.
제2권은 1885년에, 제3권은 1894년에 정리되지 못한 상태에 있던 원고를 엥겔스가 편집하여 발행했으며, 제4권은 카우츠키(K. Kautsky)가 정리하여 《잉여 가치 이론》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영역판은 그가 죽은 지 4년 뒤인 1887년에 출판되었다. 또 바쿠닌에 의해 러시아어로 최초로 번역되어 마르크스의 열망과 기대에 부응하는 혁명을 레닌(V.I. Lenin)에 의해 성공시켰다. 《자본론》은 러시아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어 러시아 신문들도 호의적으로 서평을 게재하였으며, 그 결과 평소 러시아를 경멸해 왔던 마르크스는 러시아인들에 대한 편견을 수정하게 되었다.
그 밖의 주저 : 1871년 파리 코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펴낸 《프랑스의 내전》에서 마르크스는, 국가가 각종 계급간의 분화와 고립을 적절히 이용하여 권력을 극대화시키는 과정을 분석하였다. 이른바 국가가 단순히 부르주아 지배 계급의 도구적 수단만이 아닌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을 보여 준 대표적인 경우를 분석해 냈던 것이다. 1875년에는 《고타 강령 비판》(Kritik des Gothaer Programms)을 발표하여 "자신의 능력에 따르는 것에서 자신의 필요에 따르는 것으로" 분배 정의의 원칙을 전환할 것을 주장하였다. 점차 노동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혁명의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있던 상황 속에서, 독일에서 는 라살레(F. Lassalle)가 주도하는 노동 운동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마르크스의 입장을 지지하는 소수파 노동 운동 세력은 리프크네히트(W. Liebknecht)와 베벨(A.Bebel)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결국 연합 전선의 필요성을 인식한 이 두 파는 고타에 모여 공동의 정강 정책을 채택하였고, 리프크네히트는 이 정책의 내용을 마르크스에게 보내 추인을 받으려 하였다. 마르크스는 이 정강 정책을 검토하고 베를린에 있는 리프크네히트에게 편지로, 고타 강령의 내용이 자본주의에 비해 진일보한 것은 틀림없으나 초기 사회주의 단계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강령이지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저급한 강령이라고 비판하였다.
〔조직 활동과 말년〕 1864년 국제 노동자 협회(제1 인터내셔널)가 런던에서 창립되었는데 마르크스는 이 대회의 창립 선언문을 기초하고 이 기구의 운영을 맡았다. 또한 이 동안에 유럽 각국 노동자들의 공동 이익을 위하여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필요한 경우 각국에서 동시적인 활동을 통해 연합체를 구성하였으며, 점차 그 연합체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운동의 확산과 조직에 전념하였다. 1872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국제 노동자 협회의 회의는 역사적 중요성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이 회의에서 영국 대표들은 부르주아 정당의 지원에 힘입은 정치 투쟁을 포기하고 노동자들만의 독자적인 정당 설립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또 비록 마르크스 생전에 그 설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사후 영국 노동당이 실질적으로 태동되어 사회주의 운동에 또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을 제공하였다. 이 회의에서 영국 대표들은 일반 평의회 대신, 각국별로 별도의 조직 결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켰는데, 마르크스는 이 같은 결정이 러시아 출신으로 혁명가이면서 무정부주의자인 바쿠닌이 자신에게 도전한 배신으로 느껴 심히 불쾌해 하였다. 제1 인터내셔널은 원래 노동 조합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하여 통일 전선을 형성하고, 효과적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끌기 위한 일반 평의회를 결성하여 마르크스의 지도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왔는데, 바쿠닌이 분파를 형성하여 조직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모습을 마르크스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바쿠닌을 이 조직으로부터 제명한 후 그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하게 평의 회의 본부를 런던에서 뉴욕으로 옮겨 이 조직과의 실질적인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럼으로써 제1 인터내셔널은 실질적으로 해체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고, 1876년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완전 해체되고 말았다.프러시아 정부에 보고된 문서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런던 망명 이후 경제적으로 극도의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육체적으로 급속하게 쇠약해지기 시작하였고, 1881년 부인이 암으로 죽자 깊은 슬픔에 빠졌으며,이듬해 딸의 급사 소식을 듣고 치명적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883년 3월 14일 마르크스는 최후의 망명지인 런던에서 가난과 투쟁으로 점철된 그의 삶을 자신의 서재에 있는 안락 의자에서 마감하였다. 그는 하이게이트(Highgate) 공동 묘지에 안장된 부인 옆에 나란히 묻혔는데, 장례식은 그 가족들과 몇 안되는 친구들 그리고 몇 나라에서 온 노동자 대표들만이 참석하여 간소하게 치러졌다. 엥겔스는 조사를 통해, 마르크스의 사명은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고 노동자들의 해방에 기여하고 이들에게 자유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고, "시베리아의 광산으로부터 캘리포니아의 해안에 이르기까지 수백만 노동자들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고 조문을 받았으며 미국이나 유럽 등 어디서나 수세기에 걸쳐 마르크스의 이름과 저술들은 지속될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영향과 의의〕 러시아뿐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이 마르크스를 만나 토론을 통해 조언을 얻었을 정도로 그의 영향은 대단하였다. 그리고 큰딸 둘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과 결혼하여 프랑스에서도 마르크스의 영향력은 점증(漸增)하였다. 그러나 전 유럽 대륙에서 유독 자신이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한 영국에서만 이 같은 사회주의 운동의 원로나 사상가로서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그의 사후 현재까지 마르크스의 사상과 그의 저술들은 사회학 · 정치학 · 경제학 · 문학 · 심리학 · 철학 · 역사학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현대 사회에서 프로이트, 니체와 함께 이해되어야 할 중요성을 갖는다. 많은 경우 그의 이론과 사상들이 과도하게 단순화되고 과장되어 이론과 실천의 영역에서 마르크스의 이름이 악용되거나 오용된 경우를 이미 붕괴된 옛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 속에서 발견한다. 우리가 실제 관찰하고 경험하였던 것들이 과연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냉정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 ; 무신론)
※ 참고문헌 K. Marx · F. Engels, Collected Works, vols. 1~44, Moscow : Progress Publishers, 1975/ Leon P. Baradat, Political Ideologies Their Origins and Impact, 2nd ed., Englewood Cliffs, N. J. : Prentice-Halll Inc., 1979/ Isaiah Berlin, Karl Marx : His Life and Enviromment, WithaNew Introduction by Robert Heilbroner, New York, Time Inc., 1963/ David McLellan, Karl Marx, New York, Vikings Press Inc., 1975/ 一, Karl Marx : His Life and Thought,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Inc., 1973/ P.N. Fedoseyev et al, Karl Marx : A Biography, trans. from the Russian by Yuri Sdobnikov, 4th ed.,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89/ Tom Bottomore, Interpretations ofMarx, ed. Oxford, Basil Blackwell Ltd., 1988/ N. Mcinnes · K. Marx, 《EP》 51 Maximilien Rubel · K. Marx, David L. Sills ed., 《IESS》 10/ Hal Draper, The Marx-Engls Cyclopedia, with the Assistance of the Center for Socialist History 1~3, New York, Schocken Books, 1985~1986/ G. 셀레브리아코바, 김석희 역, 《소설 마르크스 프로메테우스》 1~9, 공동체, 1989. 〔朴炳垣〕
마르크스, 카를 하인리히 Marx, Karl Heinrich(1818~1883)
글자 크기
4권

1 / 3
카를 마르크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