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주의

主義

〔라〕Gallicanismus · 〔영〕Gallic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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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부터 프랑스 혁명 때까지 프랑스 교회가 자율권을 주창하고 교황권의 행사를 제한한 반(反)교황주의 성향의 사상과 운동. 'Gallia' 는 프랑스를 뜻하는 라틴어 형용사 'Gallicanus' 에서 나온 것이며 갈리아주의는 19세기 파리 시의회에서 피에르 피투(Pierre Pithou, 1539~1596)의 영향을 받은 한 법률가가 교황 지상주의(ultramon-tanism)에 반대하고, 프랑스 교회의 자유를 다룬 논문에서 사용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갈리아주의는 몇 시대에 걸쳐 여러 가지 형태로 등장하였지만 그 기본 정신은 프랑스 국왕은 국가 질서에 있어서 자주권을 행사하고, 공의회는 교황보다 우위에 있으며, 국왕과 성직자는 단합하여 교황청의 프랑스 내정 간섭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 왕가의 교황청 중앙 집권주의에 대한 반발, 프랑스 국가주의, 국교회 사상, 공의회주의, 주교단 우위설과 같은 여러 학설의 복합체인 갈리아주의는 프랑스 왕가의 자존심에서도 그 동인을 찾을 수 있다. 즉 교회가 국왕에게 도유(塗油)하는 데 대하여 프랑스 왕가는 왕권 신수설을 내세웠고 이는 국왕이 자신을 주교들의 왕이라고 자처하면서 주교들과 함께 교회에 대한 공동 책임감을 갖게 하였다.
역사적으로 프랑스 왕가의 자존심은 754년에 카롤링가의 프랑크 국왕 피핀 3세와 교황 스테파노 2세가 우호 동맹을 맺고 프랑크 왕가가 로마 교회의 보호자가 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이는 프랑스 국왕이 국가 교회를 주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교황청은 프랑스 국왕이 교회 내정을 간섭한다고 반대하였다. 이러한 교권과 속권의 충돌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3)와 필립 4세(1285~1314) 사이에서 표면화하였다. 이 투쟁에서 속권이 승리한 이후로 프랑스 국왕들은 그레고리오 개혁 이후 교황이 교회와 국가에 대해 주장한 전권(全權, Pleni tudo potestatis)을 배격하면서 갈리아주의를 구체화하였다. 1398년 샤를르 6세는 전국 공의회를 소집하여 아비농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대한 순명 선서를 해제하고 교황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는데 이는 앞으로 프랑스 교회가 전통적 면책 특권과 자율권을 보유하고 행사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조처였다. 국왕은 프랑스 성직자들과 일치하여 교황이 금전에 욕심이 많아서 더 이상 신자들의 공동선을 위해 고유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서구 대이교라고 불리는 교황청 대분규로, 교황권이 약화되었고 대학의 신학자들이 공의회 우위 사상을 주장하게 된 데에 원인이 있었다.
프랑스 국왕 샤를르 7세는 1438년 부르즈(Bourges)에서 개최된 전국 공의회에서 국헌 조칙(國憲詔勅)을 반포하였다. 이 법령은 공의회 우위설을 내세우면서 공의회는 10년마다 소집되어야 하고 교구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 주교좌 대성당 참사회와 수도원에서 선출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교황권의 행사는 프랑스 교회 안에서 국왕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프랑스 교회는 교황의 관할권에서 벗어난 국가 교회의 성격을 띠며 자율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국헌 조칙에 대한 반응에 따라 갈리아주의는 정치적 갈리아주의인 '왕가 갈리아주의' 와 '의회 갈리아주의' , 교회적 갈리아주의인 '신학 갈리아주의' 와 '주교 갈리아주의' 로 구분된다. ① 왕가 갈리아주의 : 국헌 조칙이 반포된 이후로 프랑스 국왕들은 프랑스 교회가 교황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보다는 물질적 이익 추구를 위해 교황들과 협상하기를 선호하였다. 샤를르 7세와 이후의 국왕들은 역대 교황들과 국헌 조칙의 폐기를 협상하였고 1516년에 국왕 프랑스와 1세(1515~1547)와 교황 레오 10세(1513~1521)가 볼로냐 종교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국헌 조칙을 폐기하였다. ② 의회 갈리아주의 : 의회원들은 국헌 조칙을 프랑스 교회의 특별 헌장으로 생각하고 법령 엄수를 감독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들은 의회가 교회 최고 법정과 교황과 국가 교회 사이의 조정 수단으로 설정되기를 원하였고 모든 교황 문헌과 교황 사절은 의회 허가 없이는 프랑스에 들어 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의회원들은 볼로냐 종교 협약을 공식적으로 의사록에 기록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③ 신학 갈리아주의 : 대학의 신학자들은 국헌 조칙으로 대학 졸업자들이 다른 성직자들보다 쉽게 교회록을 얻을 수 있었던 특권을 상실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그들은 교황에게 존경심을 표명하였으나, 교회를 더욱 사랑하였고 교황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나 교회는 오류(誤謬)를 범할 수 없다고 믿으며 그리스도께서 교황에게 교회 통치권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공의회 우위 사상을 내세운 이들은 교황을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지위에 있든지 공의회 안에서 일치되어 있는 교회에 순종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④ 주교 갈리아주의 : 주교들은 국헌 조칙에 대해 두 가지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이 법령이 프랑스 교회에 자율권을 부여한다는 점에서는 찬성하였으나 참사회가 주교를 선출함으로써 참사회의 세력이 확대된다는 점에서는 좋아하지 않았다. 주교들은 그들의 권리 확보에 급급하면서 행정, 재정, 사법의 자율권을 주장하였고 의회가 그들의 관할권을 침해하였을 때에 교황보다는 국왕에게 호소하였다.
1594년에 파리 시의회의 법률가였던 피에르 피투는 53면에 달하는 <갈리아 교회의 자유〉(Les libertés de I'Eglise gallicane)라는 소책자에서 프랑스 교회의 자유는 두 가지 원칙에서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교황은 프랑스 국가 문제에 대해서 명령을 내릴 수 없으며 국민은 이러한 명령을 내린 자가 성직자일지라도 순종할 의무를 갖지 않는다. 둘째, 교회 문제에 있어서는 교황이 통치자로서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프랑스 안에서 절대적 권한을 지니지 못하며 프랑스가 받아들인 공의회의 규율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피투의 주장에 따르면 프랑스 국왕은 전국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고 프랑스 주재 교황 대사의 관할권 행사를 규제할 수 있으며 교황을 공의회에 기소하고 교황 칙서의 타탕성과 그 시행에 대해 결정할 수 있다. 1663년에 파리 시의회는 소르본느(Sorbone) 대학에 교황 무류권을 거부하고 공의회 우위설을 주창하도록 강요하였다. 1682년 프랑스 성직자 총회는 프랑스 교회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의회 갈리아주의를 배격하는 <갈리아 교회의 4개 항 선언>(Déclaration des quatre articles)을 공표하였다. 이 선언의 내용은 교황권의 약화, 공의회 우위설, 프랑스 교회의 자율권 주장, 교황의 무류권의 거부로 요약되어 있는 신학 갈리아주의와 주교 갈리아주의의 선언문이었고 의회 갈리아주의의 영향을 약화시켰다.
역대 교황들은 갈리아주의를 단죄하였다. 1516년 교황 레오 10세는 프랑스 갈리아주의의 공의회 우위 사상을 비난하였고, 1690년 교황 알렉산델 6세는 교서를 통해 갈리아주의를 단죄하였으며, 1794년 비오 6세는 알렉산델 6세의 단죄를 재확인하였다. 1864년 갈리아주의는 오류표(Sylabus errorum)에 포함되었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수위권과 무류권이 선언됨으로써 갈리아주의는 교회사에서 사라졌다.
※ 참고문헌  C. Berthelot du Chesnay, 《NCE》 6/ E. Delarulle, Gallikanismus, 《SM》2. 〔金聖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