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마리아가 자신을 도구로 하여 이룬 하느님의 위업(偉業) 및 인류 구원 역사(役事)에 감사하며 부른 찬미가(루가 1, 46-55). '마니피캇' 이라고도 하는 이 기도문은 구세주 예수를 낳으리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예고를 받은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몸으로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그녀의 축복의 말에 응답하면서 부른 찬미 기도이다. 불가타 역본에서 이 노래가 라틴어 '찬미하다'(magnificare)의 3인칭 '마니피캇' (magnificat)으로 시작되므로 '마니피캇' 이 이 찬미가의 이름이 되었다. 루가 복음 전사(前史, 루가 1-2장) 안에 등장하는 이 노래는 구조와 내용 및 표현에 이르기까지 사무엘 상 2장 1-10절에 매우 가깝고, 시편을 비롯하여 수많은 구약성서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다. 마리아의 노래는 과거에 이스라엘 안에서 보여 준 하느님의 위업을 제시하는 가운데 그분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보증해 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말론적 찬가' 라 할 수 있는데(H.Gunkel, 신약성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찬가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루가의 특수 사료에 속하는 이 노래는 루가 복음 6장 20-26절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노래에서 마리아는 하느님 백성이 이제 막 체험하게 된 종말론적 사건의 해설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 홀로 감사의 찬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구약의 하느님 백성의 모든 찬가가 그 절정에 이르며 동시에 그 한계선을 뛰어넘게 된다. 이 감사의 찬가를 읽는 그리스도교 신자는 누구나 마리아와 더불어 기뻐 용약하도록 초대받게 된다. 서방 교회에서는 일찍이(성 베네딕도 이래로 또는 이미 그 이전부터) 이 찬가가 성무 일도의 저녁 기도 안에, 동방 교회에서는 아침 기도 안에 도입되었다. 몇 가지 고대 라틴어 사본 및 일부 서방 교부들이 마니피캇을 '엘리사벳의 노래' 로 간주했으나, 보다 신빙성이 있는 그리스어 사본 및 대부분의 번역본들, 나아가 몇몇 학자들(A. Loisy, A. Harnack, W. Grundmann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리아의 노래' 로 보고 있다. 마르틴 루터는 마니피캇 주석에서 마리아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겸손과 하느님 경외심의 표본이라고 찬미하고 있다(1521 ; WA 7, 544).
〔구 성〕 이 노래의 운율(韻律) 구분은 학자들에 따라 다르다. 흔히 전반부(46b-50절) 및 후반부(51-55절)로, 또는 첫째 소절(46b-50절), 둘째 소절(51-53절) 및 셋째 소절(54-55절) 등으로 구분한다. 첫째 소절에서 마리아는 자신 안에서 이룬 하느님의 위업을 되돌아보는 가운데 그녀 스스로가 '찬미하는 행위의 주체' 가 되며(46b절) 그분 위업의 수혜자가 된다(49a절). 이러한 근거 위에 그녀가 사람들로부터 '복되다' 고 찬양받게 된다(48b절). 마리아가 '주님을 기리는' 찬미(46b절)는 병행구(47절) 안에서 다시금 보다 섬세하게 표현된다. 이어서 주님을 찬미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관점에 따라서 또 여러 단계에 걸쳐서 제시된다(48a. 48b. 49a-50절). 둘째 소절의 내용은 직접적으로 마리아와 관련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권능에 찬 하느님의 위업이 전면에 등장한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의롭게 행한 일 때문에 그분은 찬미받는다. 셋째 소절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룬 하느님의 일을 보다 구체적으로 상기시키는 가운데 그분이 찬미받아 마땅하다는 근거를 제시한다. "하느님이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돌보셨다"(54절)는 표현 안에서 그분의 행위가 언제나 성서 말씀에 상응한다는, 즉 그분은 조상들에게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신실한 분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문체 및 표현 방식〕 마리아의 노래는 단순하면서도 정교하게 짜여져 있다. 독자들은 이 노래가 무엇보다도 구약성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성서 각주 등을 통하여 쉽게 알게 된다. 저자는 구약성서를 직접 인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와 연관 짓기도 한다. 특히 "그분이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55절)에서 저자가 이 노래를 구약과 밀접히 연결시키고 있음이 명료하게 나타난다. 한 번만 읽고도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동시에 깊은 인상을 심어 주는 표현 방식에서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드러난다. 복음사가는 자신이 전해 받은 '마리아의 노래' 본문 그대로를 단순히 전승하려 하지 않고, 듣는 이들이나 읽는 이들이 따라 외워 이웃에게 다시 쉽게 구전(口傳)할 수 있도록 전형(典型)을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이 노래 안에는 구약의 기도문들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찬가의 내용들이 등장한다. 그 내용은 주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그분의 역사(役事)하심에 대한 것이다. 하느님이 이같이 배고픈 이들을 풍요롭게 해주기 때문에 그분은 찬미받는다. 오로지 그분만이 찬미의 대상이 된다. 이 감사의 노래 안에는 청원 기도가 없다. 개인의 운명을 전적으로 새롭게 뒤바꾸어 주는 하느님의 위업, 나아가 모든 믿는 이들이 체험하게 되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역사(役事)로 인해 그분이 찬양받을 뿐이다. 이 노래의 저자는 하느님을 공경하고(50절), 배고픔(53a절)과 더불어 풍요로움을 체험했던(53b절) 인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기도 양식은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 본문들 중에서 발견된다. 특히 미리암의 노래(출애 15, 21)와 드보라의 노래(판관 5장)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나아가 시편에서도 이러한 양식의 찬미 기도문이 자주 발견된다 (시편 8. 19. 29. 33. 111. 113. 136. 150편 등).
마리아의 노래를 잘 분석해 보면 이 본문의 많은 내용들이 구약성서 '칠십인역' 에서 인용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 노래가 본디 그리스어로 읊어졌음이 여기서 확인된다. 구조 면에서도 정교하게 다듬어진 그리스어로 질서 있고도 섬세하게 짜여져 있다. 이는 이 노래가 그리스어를 쓰는 초기 공동체에서 생성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마니피캇 안에서 구약의 갖가지 전승들은 예수 탄생 전승과 마리아의 신앙 및 그에 바탕을 둔 마리아의 사고(思考)에 접목되어 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찬미가를 읊는 예배에서 자신들도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 위업을 찬양한다고 보았다. 루가 복음서 저자가 자신이 전승에서 물려받은 자료에 무엇을 얼마나 첨가하였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떻게 손질하여 오늘 우리가 보는 마니피캇 본문이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수많은 논쟁이 제기되고 있으나 이 문제에 대한 보다 뚜렷한 답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 루가의 업적은 마리아의 노래를 요한의 출생과 예수 탄생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 예수의 육화(肉化)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인류 구원 예고 및 하느님의 돌보심을 루가 복음 시초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주요 본문 해설〕 첫째 소절(46b-50절) : "내 영혼이 주님을 기리고" (46b절)와 "내 영이 내 구원자 하느님을 반겨 신명났거니"(47절)는 병행 구절(parallelismus)로서 상호 보완해 가면서 서로를 해석해 주고 있다. 이 소절의 강조점은 '기리다, 찬송하다 (μεγαλυνω)와 '신명나다, 환호하다' (ἀγαλλιάω)라는 동사에 있으며 찬미의 주체는 마리아( 내 영혼' 및 내 영' )이고 찬미의 대상은 주님인 하느님이다. 마리아는 그분을 내 구원자' (σωτήρ μου)라고 부른다. 마리아는 그분이 자신에게 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복되다' (μακαρία)고 불린다(45절). 그분은 마리아에게 한 약속(다윗의 옥좌를 이을 아기의 탄생)을 성취시킨다(32절). 그분은 불가능한 것이 없는(37절),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다(68절). 바로 그 하느님께, 마리아가 자신의 모든 실존을 걸고 찬미를 드리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 (ψυχή)과 '영' (πνεῦμα)은 인간의 내적인 영역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전인격(全人格)을 뜻한다. 즉 마리아는 '살과 피' (마태 16, 17)로부터가 아니라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힘과 온 정신으로' (루가 10, 27) 주님을 찬미한다. 그녀의 찬미는 새 예루살렘을 꿈 꾼 제3 이사야의 찬가에 매우 가깝다(이사 61, 10). 하느님은 마리아 안에서 시작한 인류 구원의 위업을 지속적으로 완성해 나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분은 스스로를 구원의 주님으로 계시한다(2사무 22, 2 ; 시편 18, 3; 144, 2 ; 이사 49, 26 ; 예레 31, 33 ; 요한 3, 16-18 등). 마리아가 자신의 하느님을 찬미하며 고백하는 내용은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에 의해 목자들에게 다시금 선포된다(루가 2, 11 : "구원자가 나셨으니 그분은 그리스도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 안에서 인류 구원을 완성한다. 마리아는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의 은총을 받은 여인으로서, 그분의 인류 구원 사업에 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느님은 마리아와 같이 단순하고 겸손하며 스스로가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깨닫는 이를 굽어본다(루가 1, 48a ; 18, 9-14). 마니피캇의 마리아가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음은 '당신 여종 (τῆς δούλης αὐτοῦ)이라는 표현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다(루가 1, 38 참조). 동시에 구약 시대에 '하느님의 종' 은 열심한 유대인(義人)들에게는 영예로운 칭호로 사용되었다. 사무엘의 기적적인 출생 이야기(1사무 1, 1-20)에서도 하느님이 비천한 자를 돌본다는 사상이 전면에 나타나고 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네 번에 걸쳐 자신을 '주님의 여종' 이라고 칭한다(11절에서 두 번, 16절과 18절에서 한 번씩). 마니피캇의 이 구절(48a절)은 사무엘 상 1장 11절과 거의 같다. 이 같은 비교는 48a절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즉 마리아에게 내린 하느님 구원의 손길이 예수 잉태와 탄생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하느님의 영과 지존한 분의 능력이 그녀를 감싸 준다(루가 1, 35). 구약의 신앙인(기도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또는 자신의 주변 세계 안에서 하느님이 이룬 일을 체험할 때에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이와 같이 마리아는 이미 자신 안에 내린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였다. "이제부터 만세가 나를 복되다 하리라" (48b절).
둘째 소절(51-53절) : "그분이 당신 팔로 힘을 행사하시어"(51a절)라는 말은 "권능 떨치는 분이 큰 일을 내게 하셨도다"(49a절)라는 내용을 상기시켜 준다. 이로써 둘째 소절은 첫 소절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힘이나 권능'(κράτος)을 나타내는 이 말은 신약성서에서 하느님께만 관계되어 사용되었다(1디모 6, 16 ; 1베드 4, 11 ; 5, 11 ; 유다 1, 25 ; 묵시 1, 6 ; 5, 13 등). 그분의 위력은 당신의 원수(교만한 자)들을 멸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루가 1, 51b; 민수 10, 35 ; 시편 68, 2). 이러한 표상은 구약성서 및 쿰란 문헌에 뿌리를 두고 있다(시편 89, 11). 전쟁 용어 '교만한 자들을 멸한다' 는 예수의 등장과 그분의 활동 안에서 벌어지는 하느님과 악의 세력 사이의 종말론적 싸움을 일컫는다(루가 22, 53 참조). 하느님은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태어날 예수 안에서, 인류에게 궁극적 구원을 이룬다(창세 3, 15 참조). 마리아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50절), '배고픔과 더불어 풍요로움을 체험했던'(53절) 인물로 표현되고 있다. "(그분이) 권세 부리는 자들을 권좌에서 내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올리셨으며"(52절)라는 표현 속에는 이스라엘이 수백 년에 걸쳐서 체험한 하느님 모습이 반영되어 있으며(욥기 5, 11 ; 잠언 3, 34 ; 에제 21, 31 ; 루가 14, 1) 나아가 예수의 말씀과 활동까지도 투영되어 있다(루가 6, 20-23 ; 7, 1-10 ; 14, 11 : 17, 10 : 18, 14 ; 로마 6, 18-21).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부요한 자들은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다"(53절)는 표현에서 '굶주린 이들' 이 '부요한 자들' 과는 대조적으로, 특별히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부류의 사람들로 나타난다. 앞의 52절에서 '비천한 이들' 이 여기서는 '굶주린 이들' 이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굶주린 이들' 은 '가난한, 곤경에 처한, 궁핍함을 느끼는 사람들이다(루가 6, 21. 24-25 : 16, 19-31). '부요한 자들' 은 그들의 교만 때문에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 앞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하기에 '그분의 팔이 얼마나 강한지' 를 맛보게 된다(51a절).
셋째 소절(54-55절) : 첫째 및 둘째 소절에 묘사된 하느님 위업이 다시 정리되면서 셋째 소절이 서술된다. 여기서 마리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까지 체험하였던, 그리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체험하게 될 하느님을 기린다. "그분이 자비를 기억하시어 정녕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도다" (54절)에서 후반부는 "그분의 자비는 세세 대대로"(50a절)라는 내용을 상기시켜 준다. 그 곳에서 하느님의 자비의 수혜자들은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50b절)이었다. 이제 하느님 자비의 수혜자들은 '당신의 종 이스라엘' (54a절)로서 자신이 하느님 앞에 비천한 자임을 깨달은 이들, 즉 그분의 구원 위업(偉業)을 체험한 이들, 곤궁 속에서 그분이 일으켜 주시리라고(52b절) 희망하는 이들이다(루가 1, 32-33). 마니피캇 저자의 입장에서 볼 때 '하느님의 종 이스라엘' 은 '종' 의 의미를 새롭게 체험하게 한다. 구약 시대 의인에게 주님의 종' 이 된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위로와 기쁨을 전달하는 제2 이사야에서 잘 드러난다(이사 41, 8-9 : "너 이스라엘, 나의 종아 내가 선택한 야곱아...").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이 같은 하느님의 손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 스스로를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고백하며 모여들어 건설하는'새 이스라엘' 안에서 지속된다(루가1, 72 : 1고린 1, 2 ; 시편 98, 2-3) .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영원토록" (55절)에서 하느님은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스스로 계시하는 분으로 이해된다. 그분은 믿는 이들의 '선조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다(루가 1, 73 ; 미가 7, 20). 55절에서 마리아는 한편으로는 하느님이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분이 누구인지를 계시하였음을 찬미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에게 보여준 자비(하느님의 계시)를 기리고 있다. 그분은 한 번 시작한 인류 구원의 위업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55b절).
〔신학적 의미〕 루가 복음서 저자는 하느님의 돌보심을 체험한 마리아의 찬미 기도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누구나 하느님의 위업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마리아와 같이,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양한 방식으로 체험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믿는 이들은 마리아가 불렀던 마니피캇을 언제라도 힘차게 노래할 수 있다.
"주님, 나의 구원자, 권능을 떨치는 분, 거룩한 이름을 지니신 "(46-49절)이란 표현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이해하는 하느님 모습이 종합되고 있다. 마리아가 찬양하는 하느님은 한마디로 '구원의 하느님' 이다. 그분은 결코 저 멀리 떨어져 사는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로 향하는 분이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그분의 이름을 알 뿐 아니라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를, 나아가 그분이 무슨 일을 하는 분인지를 깨닫게 된다. 곧 그분은 무력한 신이 아니라 힘과 권능으로 가득 찬 살아 있는 하느님이다. 그분이 인간에게 한 번 행한 일은 언제나 효력을 발생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분을 영원토록 찬미함이 마땅하다. 또한 그분은 수많은 이들을 집단적으로 대충 바라보는 신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굽어살피는 아주 인격적인 하느님으로 나타난다(47절 : '나의 구원자' ) .
하느님은 "굽어보시는 분, 역사(役事)하시며 또 위업을 이루시는 분, 흩으시며 내치시고 빈손으로 떠나 보내시는 분, 들어올리시며 채워 주시는 분, 자비를 기억하시는 "(48-54절)이다. 그분은 역동적이며 언제나 무엇을 이루는 '인류 구원의 주님, 공동체 건설의 주님' 이다. 그분은 언제나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는 창조의 하느님이다. 그분은 무엇이든 흘려 버리지 않고 우리 인간을 똑바로 바라보는 주님이다. 그분은 당신이 만든 창조 세계 안에, 몸소 이룬 업적들 한가운데 충실히 머무르면서 언제나 필요한 힘을 불어넣어 주는 '지속적 창조' 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하신 약속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그분은 '사랑과 자비를 통하여' 자신의 의로우심을 입증한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들어올리고 풍요롭게 해주듯이' 그분의 사랑을 외면하는 이들은 여지없이 '흩어 버리고 내치시는' 주님이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비천한 존재요, (여)종이며, 그분을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며, 비천한 이들이며 굶주리는 (구원을 비롯하여 모든 면에서 궁핍한) 이들' 이다. 하느님의 위업이 무엇인지를 깨우치고 그분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인간은 늘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달아 그분께로 돌아서도록〔悔改〕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주님이 아니라 '종' 이며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자각(自覺)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궁핍한 처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모습' 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즉 한없이 낮고 작은 모습을 깨닫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 이다. 겸손은 가장 소중한 덕(德)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겸손한 사람들' (48a절 : '여종의 비천함' ; 50b절 :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 ; 52b절 : '비천한 이들' ; 53a절 : '굶주린 이들' )을 돌보고 그들을 들어올리기 때문이다. 마니피캇의 이 같은 사상은 인간이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 (루가 10, 42)이라는 의미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자만이 하느님의 충만함에 희망을 걸고 그분이 이루는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반면 교만한 자들, 권세 부리는 자들, 부요한 자들' 은 아쉬움을 모르기에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 을 찾아나설 겨를이 없으며 풍요롭기에 무엇을 희망하기가 어렵다. 마니피캇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생각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 가득한 주님으로 그분의 모든 권리 주장은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그분은 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 세계를, 각자의 마음과 영혼을 보고 헤아린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기린다' 로 이 노래를 읊기 시작한 것이다.
하느님의 위업을 깊이 생각하거나 그 큰 의미를 헤아려 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인간은 자연스럽게 경탄(敬歎)의 찬미가를 부르게 된다. 이때 그는 단순히 입술로만이 아니라 "그분이 바로 이러한 하느님이셨구나"고 환호 하면서 자신의 실존 전체를 그분께 내맡기게 된다. 기쁨의 찬가는 어느 한 개인에게 베푼 하느님의 자비를 묘사하고 있지만,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의 자의식(自意識)을 전제로 한 찬가로 발전한다. 마니피캇에는 '마치 하느님이 내게 행하신 것 처럼' 모든 사람에게도, 모든 세대에 걸쳐서도 그렇게 행한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 마니피캇 ; → 찬가 ; 마리아)
※ 참고문헌 E. Hertzsch, 《RGG》4, pp. 602~603/ J. Sint · W. Kirsch, 《LThK》 6, pp. 1284~1286/ J. de Fraine, 《Bibelkexikon》, Hrsg. H. Haag, Zuencih-Einsiedeln-Köealn, 1982, p. 1076/ M. Jenny, Cantica,《TRE》 7, pp.624~628/ J.A.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I~IX), 《AB》, pp.356~370/ H. Schuermann, Das Lukasevangelium 1, 《HKNT》 3, pp. 64~80/ F. Bovon, Das Evangelium nach Lukas 1, 《EKK》 3, pp. 78~941 W. Kirchschlaeger, Der Lobgesang Mariens. Das Magnifikat, Freiburg Schweiz, 1986. 〔辛敎善〕
마리아의 노래
〔라〕Magnifi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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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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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피캇의 마리아>(보티첼리 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