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7년에 샤미나드(Guillaume Joseph Cha-minade, 1761~1850) 신부가 개인의 성화(聖化)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하여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설립한 수도회. 마리아니스트(Marianist)로도 불린다. 본부는 이탈리아 로마에 있으며, 한국 지구는 서울시 마포구 망원1동 403-2번지에 있다.
마리아니스트는 1800년 샤미나드 신부에 의해 평신도들의 모임인 '마리아 신심회' (Sodality)가 먼저 조직된 후, 이 가운데 수도 생활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1816년 '티없으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 (Congregation ofthe Daughters ofMary Immaculate)가, 그리고 이듬해에는 마리아회가 설립되었다.
〔설 립〕 1761년 4월 8일 프랑스 페리괴(Pengueux)에서 태어난 샤미나드는 15명의 형제 가운데 그를 포함한 4명이 사제의 길을 택할 정도로 신심이 두터운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큰형인 장 샤미나드(J.Chaminade) 신부가 뮈시당(Mussidan)의 생 샤를르(St. Charles) 신학교에서 교수와 영적 지도 신부로 있을 때, 초등학교를 졸업한 샤미나드는 큰형이 있는 이곳으로 보내져 학업을 계속했는데, 그는 이곳에서 《성 빈천시오 아 바오로의 생애》, 《심전》心戰), 《준주성범》 등의 책을 읽으면서 영적 성장을 이루었다. 또 성체 조배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 깊이 깨달았으며, 큰형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사제 성소에 대한 열망을 키우게 되었다. 1784년 사제 서품을 받은 샤미나드 신부는 1785년 생 쉴피스(St.Sulpice) 신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다음, 뮈시당으로 돌아와 생 샤를르 신학교를 관리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샤미나드 신부가 사목 중이던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여 당시 사회는 큰 혼란에 휩싸였으며, 교회 역시 국유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1790년 4월 14일 프랑스 교회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는 법률이 반포되었으며, 7월 12일 반포된 '성직자 공민 헌장' (聖職者 公民憲章, LaConstitution civile du clergé)에 의해 프랑스 교회는 교황 성좌와 분리되어 국가적 기반 위에 새롭게 구성되도록 요구되었다. 또한 혁명 정부는 그 해 11월, 모든 성직자에게 공민 헌장에 대한 선서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온갖 박해 가운데서도 샤미나드 신부는 '비선서 성직자 (non-jureur)로 남아서 몇몇 성직자와 평신도들과 함께 지하 성무 활동을 이끌어 나갔다. 1797년 9월 파리를 점령한 자코뱅당이 성직자들을 체포하는 등 매우 불안한 상황이 되자 스페인의 사라고사(Zangoza)로 망명한 샤미나드 신부는 이곳에서 틈틈이 '기등(Plar)의 성모' 성당을 방문하여 성모상 앞에서 많은 시간을 기도와 묵상 생활로 보냈다. 그리고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항하며, 마리아를 통하여 복음을 전파할 마리아 신심회와 남녀 수도회의 설립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1800년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샤미나드 신부는 1802년까지 바자(Bazas) 교구의 교구장 직무를 대행하였다. 그리고 사라고사에서 계획했던 것을 실행에 옮겨 그 해 12월 8일 보르도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봉헌 생활을 하는 '마리아 신심회' 를 조직하였다. 마리아 신심회는 사회적 신분에 의해 소수의 선별된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왔던 그때까지의 신심회와는 달리 신분 · 나이 · 성별에 관계없이 교육, 자선 사업, 불우 청소년 돕기, 교도소 방문 및 재소자들에 대한 영적 물질적 보조, 양서 보급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817년부터 1848년까지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84명의 선교사가 마리아 신심회 준회원이었으며,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조선에서 순교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 등도 마리아 신심회 회원이었다.
한편, 프랑스 전역에서 마리아 신심회가 큰 성공을 거두자 이들 중에서 수도 생활을 희망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13세 때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려 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아델 드 바츠 드 트랑켈레응(Adèle de Batz de Trenquelléon, 1798~1828)이 다른 회원들과 함께 정규적인 수도 생활을 샤미나드 신부에게 청원하였던 것이다. 이에 샤미나드 신부는 남녀 수도회의 설립을 추진하여 1816년 5월 25일 아델 수녀와 함께 '티없으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 를 아장(Agen)에서 설립하였고, 1817년 10월 12일에는 보르도에서 마리아회를 설립하였다.
〔발전과 세계 진출〕 마리아회의 초창기 공동체는 신학생 2명, 교사 1명, 상인 2명, 공장 노동자 2명 등 각기 다른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지만, 이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차별이나 특전이 없이 똑같은 수도자로 인식되었다. 교사를 사도적인 교육자로 양성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교 방법이라고 생각한 샤미나드 신부는 마리아회를 설립한 후 곧 보르도와 아장에 사범 학교를 설립하였고, 1830년에는 생-레미(Saint-Rémy), 1834년에는 콜마르(Colmar)에도 사범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2년 후에는 알사스(Alsace) 지방에도 학교를 설립하여 마리아회의 수도자들이 가르치는 수도자로 프랑스 전역에 널리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전하여 1871년 알사스 지역 전역이 독일령이 된 후, 1872년에는 생 이폴리트(St. Hippolyte) 대학을 제외한 마리아회가 설립한 이 지역의 모든 학교들이 폐쇄되는 시련을 겪어야 하였다.
1839년 스위스에 첫 진출한 마리아회는 1849년 5월 28일에 미국 신시내티(Cincinnati)에도 진출하여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으며, 아시아 지역으로는 19세기 말엽부터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1888년 1월 5일 일본 요코하마(橫濱)로 진출한 이후 삿포로(札幌), 후쿠오카(福岡), 나가사키(長崎), 오사카(大阪), 도쿄 등지에 5개의 명문학교를 설립하는 등 일본 교육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1865년 8월 11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공식적인 승인을 얻었으며, 1891년 7월 24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회헌에 대한 최종 인가를 얻은 마리아회는 현재 스페인, 이탈리아, 벨기에, 한국, 일본, 인도, 아르헨티나, 칠레, 스위스 등 32개 국에서 2,000여 명의 수도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영 성〕 "무엇이든지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 5)라는 성서 구절을 모토로 삼고 있는 마리아회는 수도회의 설립 목적을 "우리의 목적은 그분을 똑같이 닮고 그 나라가 임하도록 일하는 데 있다"(규칙 1장 2조)는 말로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사회의 모든 악은 인간의 영혼을 마비시켜 무감각한 이기심을 갖게 하며, 윤리적인 타락 상태로 몰고 가는 '종교적 무관심' 에서 비롯된다고 한 창립자의 가르침에 따라 회원들은 '마리아의 선교사'로서 생활한다.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회원들은 마리아의 겸손과 믿음, 청빈과 단순성, 그리고 신중성을 본받아 세상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 회원들은 마리아의 표양을 따르면서 스스로 덕행을 쌓고, 복음적 권고에 따라 자신을 성장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창립자 샤미나드 신부의 독특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묵상 기도 및 정화의 덕, 완성의 덕, 대신덕(對神德)을 생활화하고 있다.
〔한국 진출〕 1908년 조선 대목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교육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마리아회를 초청한 데 이어, 1923년에는 대구 대목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도 초청 의사를 비추었으나, 자체 회원 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48년 마리아회 태평양 관구가 설정되면서 수도자와 수련자들이 많아지자 1950년대 말부터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어 선교지를 물색하던 중, 광주 대목구 헨리(H. Henry, 玄海) 주교의 한국 진출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함으로써 한국 진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60년 9월 17일 태평양 관구 소속의 계디(C. Goed-de) 수사, 추(P. Choo) 신부, 실바(M. Silva) 수사가 입국하여 광주 주교관과 대건 신학교(현 광주 가톨릭대학교)에서 임시로 거처하면서 한국어를 배웠다. 그리고 1963년 2월 목포에 수도원을 마련하여 입주하였으며, 1970년에는 서울에도 수도원을 마련하였다. 1984년 10월 2일 인천 산곡동에 150여 명이 함께 피정할 수 있는 대형 숙박실과 강의실 · 강당 · 성당 · 식당 등을 두루 갖춘 지상 4층 지하 1층의 연건평 1,040평 규모의 '샤미나드 피정의 집' 을 완공하였다. 기존의 교육관이나 피정의 집이 대부분 서울 지역에 편중되어 있어 지방의 신자들이 이용하기 힘들었는데, 마리아회가 인천 지역에 대규모의 피정 센터를 마련함으로써 지방 교구의 영성 성장을 돕는 조처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또한 1991년 11월에는 서울 망원동에 '마리아 가족 회관' 을 건립하여 마리아니스트 평신도 공동체의 모임이나 1일 피정 등을 실시하고 있다.
1973년 12월 1일 지부로 승격한 마리아회는 1980년 안병초(安秉初, 비안네) 수사가 지부장으로 임명된 이후 한국인 수도자가 지부 운영을 하고 있다. 1994년 5월 한국 지구로 승격한 마리아회는 1996년 6월 현재 종신 서원자 17명(사제 2. 수사 15), 유기 서원자 6명, 지원자 3명 등 모두 26명의 회원이 있다.
한편, 1988년 구성된 마리아니스트 평신도 공동체는 1989년부터 공식적으로 봉헌 생활을 시작하여 현재 150여 명이 서울과 인천의 마리아니스트 평의회 산하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마리아회의 영성에 따라 생활하면서 매년 봉헌을 갱신하고 마리아회 수도자들로부터 영성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양로원, 병원, 고아원 및 소년소녀 가장 등을 방문하여 소외 계층을 돕는 것을 주요 활동으로 하고 있다. 최근에는 무공해 세제를 만들어 각 가정에 보급하는 등 환경 보존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사도직 활동〕 1966년 학교 법인 목포 마리아회의 설립 인가와 1967년 9월 목포 마리아회 중학교의 설립 인가를 받아 1968년에 2개 학급 80명 정원으로 목포시 용당동에 마리아회 중학교를 개교하였으나, 7회 졸업생 배출을 마지막으로 폐교하였다. 이와 동시에 1975년 3월 목포 마리아회 고등학교를 설립하여 1996년 현재까지 7,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목포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낙도의 학생들을 많이 받아들였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도서 지방의 학생들과 어려운 환경에 있는 학생들을 위하여 기숙사를 운영하였다.
1972년 11월 15일에는 서울 망원동과 성산동 일대의 불우 청소년들을 위해 '효성 중등 학원' 을 개원하여 중학교 전 과정은 물론 교리 교육과 직장 알선까지 담당하였다. 개원 초기에는 교사(校舍)를 마련하지 못해 합정동에 있는 요한 보스코 기술 교육원의 빈 교실을 빌려 사용하는 등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으나 1975년 망원동에 부지 400여 평을 매입함으로써 본격적인 무료 교육 사업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 직장 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는 학생들이었지만, 이들 가운데 고입 검정 고시 합격자는 물론 대학 진학자가 나올 만큼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활 여건의 향상으로 입학자가 줄고, 또 3년 과정을 모두 마치고 졸업하는 학생 수가 점차 감소함에 따라 1985년 2월 28일 폐원하였다. 한편, 1945년 재단 법인 전성 학원이 설립한 '영화(永化)중고등학교' 가 재정난에 처하자 1962년 3월 10일자로 이를 인수받은 인천교구는, 이듬해 2월 학교 이름을 '인천 대건중고등학교' 로 변경하고 메리놀회 및 인천교구 소속 신부들이 교장을 역임하면서 인천 지역의 명문 사립 학교로 발전시켰는데, 마리아회가 1983년 2월 21일 이 학교의 운영권을 넘겨받았다. 이어 1988년에 중학교를 폐지하고 현재 고등학교만 운영하고 있다. 5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학교 건물이 노후되고, 또 주변에 계속해서 공단이 들어서는 등 학교 입지 조건으로 부적합한 점이 많아 1998년경에 인천 연수동으로 학교 부지를 이전할 계획이다.
또한 교육을 통한 청소년들의 참된 인간성 형성이라는 목적으로 1993년 11월 19일 망원동의 마리아 가족 회관 내에 '가톨릭 교육 문화원' 을 개원하여, 학생들의 종합적 사고 능력을 길러 주는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학부모와 교사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및 정보 제공, 청소년 상담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1995년 9월 11일에는 가톨릭대학교 협력 연구 기관으로 지정되어 연구 및 교육 활동 분야에 대한 협력과 기술을 지원받고 있다. 이러한 교육 사업 외에 출판 사도직으로 1984년부터 '계성출판사' 를 운영하면서 <현대 영성 생활》, 《마리아론》, 《한국 가톨릭 문화 문고》(총 10권), 《가톨릭 성인 사전》, 《마리아 사전》, 《주여! 나를 약하게 하소서》, 《우정 일기》 등 다수의 서적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회원의 부족과 사도직 업무의 과중으로 1993년에 작은 예수회에 운영권을 이양하였다. (⇦ 마리스트 ; 마리아니스트 ; 샤미나드)
※ 참고문헌 한국 남녀 수도자 장상 협의회 편, 《오늘의 수도자들》, 분도출판사, 1992/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가톨릭출판사, 1984/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인천교구 25년》, 천주교 인천교구, 1987/ 마리아회 편, 《마리아의 사도들- 마리아회 25년사》, 계성출판사, 1985/ 아우구스트 프란츤, 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90, pp. 379~382/ 《경향잡지》, 1130호(1962. 5), p. 6/ 《생활성서》, 152호(1996. 4), p. 81/G.J. Ruppel, 《NCE》, 9, pp. 214~215. [金成喜]
마리아회 - 會
〔프〕Société de Marie (S.M.) · 〔영〕Society of Mary (Maria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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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자 샤미나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