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왕국을 이은 솔로몬 왕국은 그 번영과 풍요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933년 솔로몬의 사망과 더불어 남북으로 분단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갈릴래아 지역은 북왕국 이스라엘 중에서도 가장 북단에 속했다. 즉, 북 이스라엘국에 속한 아셀 지파(1열왕 9, 10-13)와 이싸갈 지파 또는 납달리 지파와 인접한 지역에 해당한 곳이다(1열왕 15, 29). 그러나 갈릴래아 지역의 경계가 초기에는 모호하고 일정하지 않았다. 마카베오 시대에 이르면서 그 경계가 분명해지기 시작했고, 행정 구역으로 경계가 확정된 것은 훨씬 후대인 로마 제국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갈릴래아는 상 · 하갈릴래아로 나뉜다. 즉, 가파르나움에서 지금의 아코까지 선을 긋는다면 그 북쪽은 상부 갈릴래아이고, 그 남쪽은 하부 갈릴래아이다. 갈릴래아의 남쪽 경계선은 에스드렐론 평원 남쪽에 있는 사마리아와의 접경이었고, 북쪽 경계선은 띠로와 띠로인들의 거주지와 맞닿았으며 동쪽으로는 힙포스와 가다라, 골란 고원과 요르단 강 계곡이 경계선이었다.
현재의 팔레스타인 전체에서 보면 갈릴래아는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이곳은 전체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 많아 농업이 융성했고, 갈릴래아 호수를 중심으로 어업이 성장했다. 땅이 비옥해서 소출이 많아 게으른 자들도 갈릴래아에서는 농사일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갈릴래아 땅은 휴경지가 없을 정도였다. 갈릴래아 땅의 97% 정도가 활용되었다. 자연적인 요소와 기후적인 조건 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비옥하고 풍요한 갈릴래아는, 크기에 있어서는 사해 동부 지역 베레아보다 못했지만 힘에 있어서는 베레아를 능가했다. 헤로데 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필립보 영주의 연수입이 100달란트인데 비해서 갈릴래아 지역을 통치한 헤로데 안티파스의 연수입은 200달란트였다는 것을 보아도 갈릴래아 지역의 풍요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주 민〕 예수 시대의 갈릴래아가 유대인들만의 독자적인 영역이 아니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기원전 13세기에서 12세기경 열두 지파 중 아셀, 즈불룬, 이싸갈, 납달리 그리고 후에 단 지파가 이 지역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만났고 그들과 타협하면서 살아야 했다. 가나안 땅의 정착 과정만이 아니라 예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600년 동안 갈릴래아는 외세의 강점과 지배 아래서, 순수한 인종을 보존할 수 없었다. 기원전 783년 아시리아의 왕 디글랏 빌레셀이 갈릴래아 지역과 요르단 강 건너편 길르앗 지역 및 지중해안 지역을 병합한 이래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등 열강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갈릴래아 지역은 사마리아 지역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이민족들의 이동이 빈번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맨처음 언급한 '이방인들의 갈릴래아' (이사 8, 13-9, 1 ; 마태 4, 15)는 잡다한 인종들의 거주지인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지역 주민이 순수한 유대 민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랫동안 유대인이 갈릴래아를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에 갈릴래아의 이방화(異邦化)는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에서보다 심화되었다.
이 지역이 다시 유대화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된 것은 하스몬 왕조에 의해서였다. 히르카누스 1세(기원전 134~105)는 이두매아 지역 도시들을 정복하고 그 주민들이 할례를 받고 율법 준수를 조건으로 고향에 머물게 함으로써 고향을 떠나기를 원하지 않은 주민들을 유대교 계율에 따라 살게 했다. 그의 맏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기원전 104~103)는 갈릴래아를 정복하고 할례를 강요함으로써 주민들을 유대화시켰다. 그러한 일련의 유대화 정책으로 예수 시대의 갈릴래아는 대체로 유대적인 고장이었으며 갈릴래아가 이방적이란 것은 매우 제한적인 의미에서였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예수 시대 갈릴래아의 인구에 대한 요세푸스의 기록은 과장된 숫자지만 갈릴래아의 인구가 조밀한 것은 사실이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갈릴래아에는 세포리스, 티베리아 등을 포함한 여러 도시들과 204개의 마을이 있었다. 가장 작은 마을도 1,500명 이상의 인구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시골 마을들과 내륙 지방에는 유대인들이 살았으며 서부의 헬라화된 도시들에서는 주로 이방인들이 살았다고 해도 인구 구조상으로 이방 민족은 미미했고 갈릴래아인 대부분은 유대인이었다는 결론이 가능할 것이다.
갈릴래아인들은 종교적 · 정치적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살고 이방인들의 영향에 대해서 조심성이 덜했기 때문에 유대 전통에 무관심한 경향이 있었고, 남부 유대 지방 및 예루살렘과 긴장 관계를 갖기도 했다. 그들은 환상적인 민족주의자들이었고 자유를 사랑하는 자들로서 더러는 혁명적 성향을 보였다. 그러한 갈릴래아에 대한 남부 유대적 시각은 부정적이고 때로 경멸적이었다. '이방인의 갈릴래아' 라는 말이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도 사실이었다.
〔정치 및 경제 상황〕 정치 상황 : 이 지역이 오랜 세월 동안 외세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것은 이미 지적했다. 팔레스타인 전체가 외국의 강점과 지배하에 있었던 만큼 갈릴래아가 예외일 수 없을 뿐더러 외국과의 접경 지대이므로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기원전 734년에 갈릴래아는 아시리아 제국에 병합된 이래 줄곧 외국의 통치 아래 놓였다. 시리아 제국의 탄압에 맞서 봉기한 마카베오 가문의 하스몬 왕조에 의해서 지배된 기간을 제외하면 외세 지배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스몬 왕조의 아리스토불루스 1세(기원전 104~103)와 알렉산델 얀네우스(기원전 103~76)가 갈릴래아를 지배 영역에 넣음으로써, 한동안 갈릴래아는 유대인의 지배 하에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63년부터 로마 제국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면서 외세 하에 들어갔다.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정책을 수행했다. 그 결과 유대인들 역시 자치를 할 수 있게 됐으며 최고 의회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자치가 가능했다. 그러한 경우에도 여전히 로마는 종주국이고 엄청난 세금을 바쳐야 했다.
기원전 40년에서 4년까지 팔레스타인을 통치한 자는 본래 이두매아인이었던 헤로데이고 그는 로마의 비호 아래 팔레스타인 전역을 지배했다. 그는 죽으면서 그의 왕국을 3분해서 세 아들에게 주었다. 그중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역을 통치하게 된 헤로데 안티파스는 기원후 39년까지 정권을 유지했다. 예수가 주로 활동한 지역과 활동 기간은 헤로데 안티파스와 관련이 있다.
갈릴래아 중심지에 위치한 세포리스는 농업 도시였다. 기원전 55년 이래 세포리스는 갈릴래아의 행정 중심지였고 헤로데 안티파스는 서기전 4년에 갈릴래아의 수도로 삼았으며 인구 4만 명의 큰 도시가 되었다. 이곳은 예수의 고향 나자렛에서 불과 6km 거리에 있었고 동서 교역 도로변에 위치해 있었다. 기원후 20년경에는 갈릴래아의 수도가 세포리스에서 티베리아로 옮겨 갔다. 갈릴래아의 통치자 헤로데 안티파스에 이어서 헤로데 대왕의 손자 아그리빠 1세(41~44)가 이곳을 다스렸다.
경제 상황 : 로마 제국과 헤로데 왕의 치세에서 농민과 노동자들은 무거운 세금과 권력자의 횡포 및 지주들의 착취 때문에 심한 빈곤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당시 조세 제도는 특히 농민들을 곤궁에 처하게 하는 원인이었다. 팔레스타인에서 부과된 종교세와 로마 제국의 조세는 상호 독립적으로 운용되었다. 여기에 납세자들을 더 곤경에 빠트리는 것은 로마 식민지 관리들의 무자비한 세금 징수였고, 종교적 십일조의 부과는 비옥한 지역 농민들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헤로데 왕은 막대한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야 했다.
이러한 팔레스타인의 상황과 갈릴래아의 경제적 상황은 맞물려 있다. 갈릴래아는 비옥한 땅이어서 농업 소출이 많은 반면 유대 지역은 땅이 메말라서 자급 자족이 어려웠다. 따라서 유대 지역은 갈릴래아 지역의 생산 곡물에 의존했다. 물론 갈릴래아에 어업과 수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경시할 수 없지만 농업을 기간 산업이라고 본다면 어업 등은 보조적 경제 수단이었다. 농업 위주의 경제 구조에서 사회 계층의 구별은 토지 소유권이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 헤로데가 갈릴래아 땅을 어떻게 취급했는가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없다. 그러나 추론은 가능하다. 강제로 농민들의 땅을 약탈하거나, 좀더 합법적인 방법으로 중과세를 한 다음 소농 지주가 무거운 세금을 감당할 수 없어서 포기하게 된 땅을 헤로데가 소유하거나, 다른 귀족들과 대지주들의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갈릴래아 지역에는 한때 자기 땅을 가진 농부들이 날로 늘어나는 빚을 감당 못해 땅을 팔고 소작인으로, 그 다음에는 날품팔이로 몰락하였다. 그 대신 예루살렘 등지에는 부재 지주자들이 늘어갔다.
갈릴래아 주민 대다수를 점유한 소농의 경우 그들의 생계비는 연 200데나리온 정도였다. 농민들은 흉년, 전쟁, 기근, 자연 재해에 직면해서 재산을 팔고 소작인이 되거나 일당 노동자로 전락했고 일단 상실한 재산의 원상 회복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율법학자들은 그들을 시골뜨기들(Am-ha-arets)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멸시의 대명사였다. 바리사이들은 그들을 저주받은 자들로 보았는데 그것은 저들이 율법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로 전락한 '시골뜨기' 들은 소유가 없기에 비상시에는 무력할 도리밖에 없었다. 비상시의 물가는 상부 계층의 매점 매석으로 폭등하므로 하부층은 더욱 곤궁했다. 대지주들은 자기들의 농사 수확 외에 소농의 곡물을 매점한 후 곤궁기에 방출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과 노동자들은 대지주와 지배층에 예속되어 생존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살아야 했다.
농민들이 당하는 수탈은 부재 지주의 횡포만이 아니라 당국의 독점 통제도 가중되었다. 권력자들은 갈릴래아의 주산물인 밀, 기름, 포도주 등을 엄격하게 독점 통제해서 무역업자들과 직거래할 기회를 박탈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예수의 많은 비유에서 엿보인다. 예수의 비유들을 사회적으로 분석한 학자들에 따르면 비유들은 예수 시대의 일상 현실에 나타난 사회 전반 구조를 폭넓게 나타낸다는 것이다. 즉, 가난한 자들의 기막힌 가난, 노예들이 겪는 부자유, 그리고 일일 노동자들의 고생하는 모습과 함께 부자들의 현실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경제적 삶의 조건 하에서 갈릴래아인들, 특히 농민들은 사회적 불만 세력이 되고, 그들로 인한 저항적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가능성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부재 지주 제도로 풍요한 땅의 생산물은 오랫동안 빼앗기고 로마 제국과 성전 체제라는 종교 체제가 부과하는 무거운 세금이 갈릴래아의 농민들로 하여금 억압자들에 대항하여 일어나도록 하는 원인이라 할 것이다. 사실 갈릴래아는 불만 세력들이 은신하고 활동할 수 있는 유리한 지형 조건을 갖추었다.
〔갈릴래아의 예수〕 갈릴래아가 주목되는 까닭은 예수와의 관계 때문이다. 초대 그리스도교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출발하여 세계로 뻗어갔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교회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발전해 간다(1, 8). 이 같은 시각에서 보면 갈릴래아는 '이방인의 갈릴래아' 로 중요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시다가 예루살렘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그 배후 세력인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예수가 나자렛 고향에서 성장했으나 그의 공생활 동안 가르치고 기적을 행하며 중요한 선언을 한 곳은 갈릴래아였다. 특히 공관 복음서는 갈릴래아에서 예수가 활동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공관 복음서 중에서도 제일 먼저 기록된 마르코 복음서는 예루살렘보다 갈릴래아를 강조하고 있다. 사실 예수는 그의 공생활 첫 활동을 갈릴래아에서 시작했다. 광야에서 갈릴래아로 와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1, 15)라고 외쳤다. 그의 메시아 취임 설교라고 일컫는 말씀도 나자렛 고향 회당에서 행했다(루가 4, 16-18). 뿐만 아니라 처음 제자들을 부른 것을 비롯해서 많은 치유 기적 및 자연 기적을 일으킨 것도 갈릴래아에서였다. 갈릴래아 지역을 벗어나 잠시 게라사 지방, 띠로와 시돈 지방,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간 적도 있지만 주로 갈릴래아 호수 주변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말씀과 처신은 전통적인 종교 지도자들의 것과 상이했고 때로는 도전적이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기득권자들은 예수의 처신을 눈여겨 보고서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이다" (마태 11, 19)라고 욕했다. 당시 죄인들이란 도덕적인 차원에서 죄인된 사람도 있지만 가난해서 또는 병들어서 율법 조항에 따라 살 수 없어 죄인으로 낙인 찍히고 멸시와 천대를 받은 이들도 있었다. 예수는 바로 이들의 친구였다. 창녀와 세리의 친구였다. 그들 모두와 식사를 같이하면서 교제한 것은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하신 것이다. 이 유별난 예수의 행동이 종교 당국자들에게는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예수를 잡아 죽일 음모를 일찍부터 꾸미기 시작했다(마르 3, 6).
기득권자들과 체제 수호자들에게는 예수가 눈엣가시처럼 보였지만 갈릴래아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의 랍비들과 달리 권위가 있었다. 유대교의 매우 중요한 계율인 안식일 법에 대해서 예수는 이렇게 천명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는 않았습니다"(마르 2, 27). 이것은 폭탄적인 선언이다. 인간의 권리에 대한 대담한 주장이지만 당시 유대교에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모세의 법에 대해서 마치 하느님을 대리한 자처럼 예수는 말했다. "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하고 옛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마태 5, 21-48). 이것은 예언자 수준을 넘어선 선언인데 이 같은 율법의 해석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수용될 수 없었다.
이상의 간단한 내용은 예수의 행동과 교훈이 당시 기존 종교 지도자들과 체제 수호자들에게 유별났고 또 도전적인 성격의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의 언행은 주로 갈릴래아에서 이루어졌고 갈릴래아 민중에게 복음이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의 하느님 나라 도래 선포는 하느님 통치의 실현을 말하기 때문이었다. 갈릴래아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의 언급에서 갈릴래아 농민 노동자들의 궁핍한 상황을 고찰했다. 예수의 복음을 그들의 처절한 상황과 전혀 무관한 영적 복음으로 간주하는 것은 너무 쉽게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관념화하고 추상화해 버리는 것이다.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성장한 예수가, 기원후 6년에 갈릴래아 출신의 유다가 주민세 납세 거부 운동을 전개한 저항 운동에 대해서 전혀 무지했다고 단정할 수 없으며, 갈릴래아 주민이 겪는 착취와 탄압 및 멸시를 전혀 모른 채 청년으로 성장했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 학자들 사이에서 예수를 열혈 당원과 혁명적 투사로 볼 것이냐, 평화적 그리스도로 볼 것이냐로 의견이 갈라져 있기 때문에 확실한 단정은 하지 않는 것이 지혜롭다고 할 것이다. 다만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의 영광에 들어 가신 그리스도라고 할 때도, 또 초대 교회가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1고린 15, 3-5)로 고백하고 해석한 것을 수용하면서도, 예수는 나자렛에서 성장하고 갈릴래아에서 활동했다는 이 역사적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 삶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억압과 멸시 그리고 착취 등으로 인한 고통의 삶에서, 해방이 절실히 요청되는 갈릴래아적 상황에서 예수가 출현해서 하느님의 통치를 자신의 삶과 가르침 속에서 실현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갈릴래아가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 참고문헌 Willibald Bösen, Galilia als Lebensraum und Wirkungsfeld Jesu, Freiburg : Herder, 1985/ Sean Freyne, 《ABD》2. 〔黃成奎〕
갈릴래아
〔라〕Galilaea · 〔그〕Γαλιλαι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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