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용, 장 Mabillon,Jean(1632~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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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마비용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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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마비용 신부.

베네딕도회원. 17세기 프랑스 생 모르 학파의 대표적인 전기 작가. 역사가.
〔생애와 저술 활동〕 1632년 11월 23일 프랑스 상파뉴(Champagne) 지방 생 피에르몽(Saint-Pierremont)의 지주이며 상인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신부인 숙부로부터 기본 교육을 받고 1650년에 신학교에 입학한 마비용은, 성 레미지오(St. Remigius)의 무덤을 자주 순례하면서 생 모르(Saint-MaMaur) 수도원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1652년 랭스(Reims)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8월 29일 베네딕도 수도회의 생 레미(Saint Remi) 수도원에 입회한 그는 1654년 9월 첫 서원을 하였는데, 과도한 지적인 욕심에서 병을 얻어 노장(Nogent)에 있는 수도원에서 단순 노동을 하며 휴식을 취해야 했다. 1660년 3월 27일 아미앵(Amiens)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다음, 생드니(Saint Denis)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 성 디오니시오 대성당의 재무 관계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그곳에서 수사본(手寫本)을 토대로 이미 출판된 성 베르나르도(Sant Bernardus)의 저술들을 재검토하기 시작하였다.
마비용은 17세기 초부터 리슐리외(Richelieu) 추기경의 후원으로 생 모르 수도원의 타리스(Grégoire Tarrise) 총장에 의해 실행되어 프랑스 혁명 시기까지 지속되는 종교사 및 민족사에 관한 저술, 이른바 "베네딕도회 수도자의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즉 1647~1648년에 타리스 총장은 모든 수도자들에게 다세리(Luc d'Achery)의 지도하에 수도회의 일반사를 비롯하여 주요한 수도원들의 역사, 베네딕도회 소속 성인들의 삶을 다룬 방대한 전집을 편찬하는 데 필요한 모든 종류의 기록들을 수집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1664년에 다세리는 《이삭줍기》(Spicilegium)와 《성 베네딕도회의 성인전》(Acta Santorum Ordinis Sancti Benedicti, 전 9권, 1668~1701)의 출판을 위해 마비용을 베네딕도 수도회의 학문적 연구의 중심지이며 생 모르 수도원의 본원인 생 제르맹 데 프레(Saint Ger-main des Prés) 수도원 도서관장의 보조자로 임명했다. 마비용이 서문을 쓴 《성 베르나르도의 전집》(Santi Bernardini Opera Omnia)은 1667년 파리에서 전 4권으로 출간되었으며, 특히 《성 베네딕도회의 성인전》은 이전의 다른 성인전과 비교해 볼 때 독특한 체계를 갖고 있었다. 500년부터 한 세기 단위로 성인들의 삶을 통하여 11세기까지의 베네딕도 수도회 발전상을 서술하고 있는 이 책에서, 그는 현학적인 논설을 통해 서양 각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교회사에 관련된 많은 문제들을 설명하였다. 또한 1674년에 발표한 《고문서 모음》(Vetera Analecta)에는 그가 여행 중에 수집한 공의회 기록, 교부들과 성직자들의 저술, 고위 인물들의 문서나 편지, 주교들의 기록, 교회 법규집, 수도원 연대기 등과 같은 많은 양의 미발표 자료들이 수록되었다. 마비용의 이러한 저작은 다른 생 모르 수도원 수사들의 저술과는 달리 타리스 총장의 요구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제한된 범주를 고집하였는데, 그 이유는 수세기에 걸친 수도자들의 삶과 그들의 저술들에 대한 인식을 통해 수도회의 부흥을 촉진하려는 것이었다.
1685년 4월부터 1686년 말까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수천 장의 고문서들을 수집한 마비용은, 이를 기초로 《이탈리아 박물관》(Musaeum italicum) 2권을 저술·출판하였다. 상세한 설명을 덧붙인 기행문인 이 책은 로마인의 종교 의식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보비오(Bobbio)의 미사 경본' 으로 알려진 프랑스 교회의 전례서에 관련된 많은 양의 문서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1701년에 그는 '왕립 금석학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s Inscriptions etMedailles)의 회원이 되었고, 같은 해 성 베르나르도에 대한 《고찰》(De considera-tione)을 교황 글레멘스 11세(1700~1721)에게 헌정하였으며, 말년인 1693년에 《베네딕도회 연대기》(Annales Ordinis Sancti Benedicti, 전 6권)를 저술하기 시작하여 1703년부터 출판하였다(제5~6권은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이 책 제4권에는 5세기 말 베네딕도 수도회의 탄생부터 1066년까지의 모든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열성적인 연구가인 동시에 자신의 주장을 단호하지만 신랄하지는 않게 주장한 '겸손과 사랑의 수도자' 라는 평판을 받았던 그는, 사망하기 며칠 전 그를 방문한 한 젊은 신부에게 "모든 것에 진실해라. 당신의 진실함에 대해 의구심이 들 정도로"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1707년 12월 27일 사망하여 데카르트(Descartes)와 그의 경쟁자이며 후계자였던 몽포콩(Bernard de Montfaucon)과 함께 파리의 생 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에 묻혔다.
〔학문적 방법론 및 영성〕 원전에 충실하는 마비용의 연구 자세는 10년 동안 계속된 논전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역사가들은 마비용의 역사 방법론을 수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근대 역사학자들의 인식론은 그의 <역사의 몇몇 법칙에 관한 간단한 숙고>(Brièves réflexions Sur quelques règles de l'histore)라는 논증문과 그의 대표작으로 1681년에 출간되어 콜베르(J-B. Colbert)에게 헌정된 《고문서학》(De re diplomatica, 전 6권, Paris, 1681)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마비용의 역사학적 방법의 규칙들은 첫 번째로 윤리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이해력의 수정을 초래하는 진실이나 성실성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방법론적으로 역사적 증언의 권위나 역사에서 증거의 체계를 정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실된 기록, 즉 원본 공문서를 열람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비용에 의해 표현된 원칙들은 인문주의 철학을 수용하는 것이었으나 권위적인 전통적 개념과는 단절된 것으로, 그는 하나의 원전을 통해 검증하는 연대기 학자와는 전혀 다른 방법론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연구 방향은 단일한 증거보다는 여러 가지의(혹은 공적인) 증거가 우위에 있으며, 일차 사료를 통해 모든 역사적 해석을 해야 한다는 사고를 제시하였다. 더구나 《고문서학》에서 마비용은 진실된 사료를 의심스러운 사료들로부터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즉 이 책은 고대의 기록들, 특히 성 디오니시오에 관한 기록들의 진실성을 옹호하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의 효시가 되는 것이었다. 전 6권으로 된 이 책에서 마비용은 고대에 사용된 각종 공문서의 문체와 서명 양식 등에 관한 연구를 통해 오래된 연대기나 기록집의 권위성을 증명하였고, 공문서가 작성된 고대 왕궁의 목록과 공문서의 격식을 통해 발견되는 모조 서류집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마비용을 영성 저술가의 한 사람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관하여》(Sur la mort chrétien-ne)는 신앙에 관한 그의 유일한 저술인데, 이 책에서 마비용은 역사가나 텍스트 편집자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원전을 기초로 주석이나 보충 없이 성인들의 죽음에 관한 진실된 이야기를 수집하고 서술하려고 하였다.
프랑스 교회 내에서 각종 연구들을 금지시키려 하였던 트라피스트 대수도원장 랑세(Rancé)는 자신의 저서 《수도 생활의 성덕과 임무들에 대하여》(De la sainteté et des devoirs de la vie monastique)를 출간하려다가 마비용과 격렬한 논쟁을 야기하게 되었다. 랑세의 주장에 맞서 생 모르 수도원에서 실행되고 있던 영적인 생활 및 묵상과 연구와의 관계에 관한 그의 생각을 명확하게 밝혀야만 했던 마비용은, 《수도자의 학문 연구론》(Traié des études monasti-ques)을 통해 랑세의 공격에 대응하였다. 학문 연구의 위치를 수도자의 영적인 생활 속에 설정하려는 기본적 태도를 재확인한 이 책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첫 번째 부분에서는 훌륭한 규율은 연구를 소홀히 하는 수도원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두 번째 부분에서는 수도자에게 적합한 연구가 무엇인지를 고찰하였고, 세 번째 부분은 수도자의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마비용은 허영심과 교만함이라는 두 가지 장애물을 특히 지적하였는데, 만약 학문 연구를 통한 모든 사고와 구상이 보다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또한 점점 더 하느님을 사랑하고보다 완전하게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하느님을 잘 아는데로 귀결된다면 이 두 장애물은 제거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학문 연구의 근본적인 목적은 겸손으로 표현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인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결국 '프랑스 영성학파' (Ecole frangçaise de Spiritualié)의 하느님 중심주의(théocentrisme)와 그리스도 중심주의(chintocemimime)로부터 물려받은 그의 역사 철학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 시대의 인식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비용에 의하면 하느님 은총의 신비는 각 인간에게 육화를 허락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에 의한 인류 구원을 이룰 수 있게 하기 위해 인간의 모든 행위에 하느님의 의식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인식은 고행이 아니라 비판적 행위인 것이다. 마비용의 역사 철학은 무한한 역사적 발전과 유한한 역사적 이유라는 이중적 관점을 타파하면서 역사주의와 회의론을 동시에 거부하였다. 결국 영성적인 삶은 지적인 방법을 통한 하느님의 추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고는 마비용 영성의 심오한 한 측면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 성인 전기학 ; 역사 ; 트라피스트회 )
※ 참고문헌  J. Daoust, 《cath》 8, pp. 91~94/ P. Roche, 《NCE》 9, pp.1~2/ G. Heer, 《LTnK》 6, pp. 1254~1255/ B. Baret-Kriegel, Dictiomaire des Philosophes, PUF, 1994, pp. 1835~1836/ G.-M. Oury, 《DSp》 10, pp.1~4/ H. Leclercq, Dom Mabillon, Paris, 1953~1957. 〔邊琪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