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시를 중심으로 경상남도의 서부 지역을 관할하는 교구. 1911년 4월 8일 이래 대구 대목구(大邱げ代牧區)의 사목 관할 아래 놓여 있던 경상남도 지역은 교세의 확대로 인해 1954년 6월 18일 경남 감목 대리구(慶南監牧代理區)로 설정되었으며, 1957년 1월 21일 부산 대목구(釜山代牧區)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962년 3월 10일 한국 천주교회의 교계 제도 설립에 따라 부산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대구대교구 · 청주교구와 함께 대구 관구(大邱管區)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 경남 지역의 교세가 급성장하자 부산교구에서는 사목 활동의 어려움으로 교구 분할의 필요성을 느끼고, 주한 교황 공사를 통해 마산교구의 분할을 교황청에 요청한 결과 1966년 2월 15일자로 마산교구의 설정이 결정되었다. 교구 설정 당시 주교좌 본당은 중앙(中央, 현 남성동) 본당이었으나, 점차 성당 주변이 상가가 되면서 여러 가지 여건이 맞지 않게 됨에 따라 1979년 4월 양덕동(陽德洞) 본당으로 변경되었다. 〔관할 구역〕 마산시, 창원시, 진해시, 통영시, 거제시, 진주시, 사천시, 밀양시, 창녕군, 함안군, 의령군, 김해군, 고성군, 남해군, 하동군, 거창군, 산청군, 합천군. 〔역대 교구장〕 초대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주교(1966.2.15~1968. 4. 9), 2대 장병화(張炳華, 요셉) 주교(1968. 9. 7~1988. 12. 28), 3대 박정일(朴正一, 미카엘) 주교( 1988. 12. 28~현재) .
I . 경상도 남부의 천주교 전래와 박해
경상도 북부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충청도 남부와 전라도 북부에 있던 신자들이 보다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경상도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이어 1801년에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면서 보다 많은 신자들이 경상도로 이주하여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경상도 남부 지역에까지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다가 경상도 북부 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교우촌이 박해를 받게 되면서, 즉 1815년의 을해박해(乙亥迫害)로 청송(靑松) · 진보(眞寶) 일대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체포되고,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로 상주(尙州) · 순흥(順興) 일대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체포됨에 따라 박해를 피해 살아 남은 신자들은 안전한 신앙 생활을 위해 남부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1810년대부터 1820년대까지 경상도 남부 지역에 형성되기 시작한 신앙 공동체가 처음부터 겉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이곳의 신앙 공동체가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830년대부터였다. 즉 1831년에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고, 1835년 말부터 조선에 입국하기 시작한 프랑스 선교사들이 각처의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경상도 남부 지역에 숨어 있던 공동체들이 그 방문을 받게 된 것이다. 이때 경상도 남부 지역을 담당했던 선교사는 1836년 말에 입국한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였으며, 그가 경상도 남부 지역을 순회한 시기는 대략 1837년 말부터 1839년 초까지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확대되어 가던 전국의 모든 교우촌들을 다시 한번 위축되게 하였으며, 겨우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경상도 남부 지역의 신앙 공동체 또한 이 박해로 인해 오랫동안 기록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그 후 경상도 지역을 맡아 순방하게 된 사람은 두 번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였다. 그는 1850년 초부터 경상도 북부로부터 남부 지역까지 순회하면서 곳곳에 공소들을 설립하였는데, 경상남도 동쪽의 불당골(佛堂谷,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죽림골(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의 竹田) 등 울주군 내의 여러 교우촌들이 이때 공소로 설립되었다. 1860년의 경신박해(庚申迫害) 때 최양업 신부가 숨어 지내던 곳도 바로 죽림 교우촌이었다. 이후 천주교 신앙은 경상남도 동부 지역에서 서부 지역으로 확산되어 가기 시작하였는데, 1860년대 초에 이미 언양(彥陽) · 양산(梁山) · 기장(機張) · 동래(東萊)와 김해(金海)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철종 말에서 고종 초에 잠시 박해가 그치고 신자들이 안정을 찾게 되면서 진영(進永) · 진주(晋州) · 함안(咸安) · 거제(巨濟) 등지까지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 특히 1864년 이래로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의 뒤를 이어 경상도 남부 지역을 맡게 된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는 1865년경 복사 구한선(타대오)과 함께 거제도를 방문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전까지는 경상남도 서부 지역 여러 곳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니, 그 중심지는 진주와 함안 지역이 었다.
II 본당의 설립과 분할
〔공소의 확대와 교안〕 병인박해 때 경상남도 서부 지역 출신으로 순교한 경우는 리델 신부의 복사였던 구한선뿐이다. 그는 함안 출신으로 복사 임무를 마치고 진주의 본가로 돌아오던 중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매를 맞고 석방되었으나, 이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른 교우들은 무사히 박해를 피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박해가 끝난 1880년대에는 이미 함안과 진주 등지의 교우촌들이 다시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진주의 비라실(진주시 長在洞), 구한선이 전교하여 교우촌을 일군 소촌(召村, 진양군 문산면 蘇文里), 함안의 논실(함안군 대산면 平林里의 佳燈)과 동백골(洞白谷, 함안군 대산면 長岩里의 鵝浦), 창원의 곡목(曲木, 의창군 동면 花陽里) 등이 지금의 마산교구에서 가장 오래된 교우촌이었다. 이들은 박해 이후 경상도를 전담하게 된 로베르(Robert, 金保祿)신부에 의해 1883년에 모두 공소로 설정되었으며, 훗날 비라실 공소는 옥봉동(玉峯洞) 본당, 소촌 공소는 문산(文山) 본당, 논실 · 동백골 공소는 함안(咸安)과 대산(代山) 본당의 전신이 되었다. 다만 박해 이후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83년에 공소로 설정되었던 삼가(三嘉) 지역의 공동체는 신자들의 이주로 인해 와해되었다.
이후 경상도 남부의 신앙 공동체는 계속 확대되었다. 1887년에는 거제의 옥개(장승포읍의 玉浦里)에, 1888년에는 고성의 계동(桂洞, 고성군 고성읍 基月里의 잿골)에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1893년에는 의령 덕천(의령군 유곡면 德川里)에도 일시 공소가 설립된 적이 있었다. 이 중 계동 공소는 1895년경에 장동(長洞, 고성읍 大坪里의 건천들)으로 이전되어 훗날 고성(固城) 본당의 전신이 되었으며, 옥개 공소는 1891년에 진목정(장승포읍 옥포리의 菊山)으로 이전되어 훗날 장승포(長承浦) 본당의 전신이 되었다. 그 결과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신자수는 1883년경에 237명이던 것이 1891년경에는 414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까지도 지방에서는 갈등과 사사로운 박해 즉 '교안' (敎案)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것은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이 '거제도 박해' 였다. 이 박해는 1887년 겨울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순방한 이듬해 즉 1888년 봄에 일어났는데, 이때 진목정에 살던 윤봉문(尹鷹文, 베드로)이 통영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갖가지 형벌을 받은 뒤 진주로 이송되어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어 1889년에는 '함안 교안' 이 일어나 신자들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1892년에는 '삼가 교안' 이 일어나 신자들이 재산을 탈취당했다가 되찾은 일이 있었다.
〔마산 본당의 설립〕 교안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에서도 교우촌과 교세가 확대되어 가자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1890년 초에 죠조(Jozeau, 趙得夏) 신부를 부산으로 보내 로베르 신부로부터 경상도 남부 지역을 인수받아 전담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후 1893년 4월까지 부산의 초량(草梁)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전라도로 전임되었고, 이어 5월에는 우도(Oudot, 吳保祿) 신부가 초량에 부임하여 1898년 4월까지 재임하다가 황해도로 전임됨과 동시에 그 후임으로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가 부임하였다. 타케 신부는 부임 이듬해인 1899년에 진주 · 하동 · 함안 · 고성 · 산청 등지에서 일어난 교우 칭탁(稱託) 사건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서부 지역의 교세가 확대되어 나가는 것을 보고는 진주에 새 본당을 설립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이를 뮈텔 주교에게 청원하였다. 이에 앞서 서부 지역의 신자들은 1897년 이래 본당 설립을 원하여 진주읍에 집을 한 채 매입해 놓았고, 1898년에는 진주 · 양산 · 삼가 곤양 회장들이 연명(連名)으로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신부 파견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1899년 뮈텔 주교는 타케 신부의 청원을 받아들여 그에게 진주 본당을 창설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부산 본당을 드망즈(Demange, 安世華) 신부에게 맡기고, 1899년 6월 진주에 부임함으로써 '진주(晋州) 본당' 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주 본당은 비라실 · 소촌 공소 등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가 주변 상황도 좋지 못하여 본당 소재지로서는 부적당하였다. 따라서 타케 신부는 본당 이전을 결심하고, 1900년 6월 29일 개항장으로 장래가 유망한 마산포(馬山浦)로 가서 임시로 오동동(午東洞)의 한 신자 집에 정착함으로써 '마산 본당' 을 설립하였다. 그런 다음 성당 부지를 물색하여 범골(지금의 마산시 완월동)에 있던 초가집을 매입하고 이를 성당 겸 사제관으로 사용하였으니, 이것이 곧 완월동(玩月洞) 본당의전신이다.
타케 신부가 1899년 진주 본당을 설립하였을 때는 진주 · 곤양 · 고성 · 통영 · 거제 · 함안 · 삼가 등지에 있던24개 공소에 1,054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이 중에서 신자들이 가장 많던 공소는 소촌(156명), 비라실(111명), 진목정(83명) 등이었으며, 특히 거제 지역은 5개 공소에 293명이 있을 정도로 전교 활동이 활발하였다. 그 후 마산 본당의 신자수는 1900년에 1,239명, 1901년에 1,300명, 1902년에 1,446명으로 꾸준히 증가하게 되었다. 당시 완월동에는 몇 채의 가옥만 있을 뿐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이어서 타케 신부는 본당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힘쓰는 한편 각처의 공소들을 순회하며 전교하였다. 그러던 중 타케 신부는 마산에 정착한 지 1년 10개월 만인 1902년 4월 20일에 제주도로 전임되었고, 대신 제주도에 있던 무세(Mousset, 文濟萬) 신부가 마산 본당의 제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본당의 분할과 변모〕 무세 신부는 본당에 부임한 뒤 우선 성당 신축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마산포와 창원·칠원 등지에 새 공소들을 설립하였다. 그러다가 1905년에는 새로 입국한 쥴리앙(Julien, 權裕良) 신부를 보좌로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줄리앙 신부와 협의하여 '소촌 본당' 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줄리앙 신부는 1906년 1월 초에 소촌으로 가서 삼곡리(三谷里)에 있던 세 채의 초가집을 매입하여 임시 성당으로 삼아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고, 장차 성당을 지을 부지를 물색하던 중 1907년에는 마침내 소촌에 땅과 집을 매입하여 성당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경상남도 지역에는 처음으로 두 개의 본당이 있게 되었으며, 소촌 본당에서는 진주 · 삼가 · 곤양 · 사천 · 고성 · 거제 · 용남(통영) 지역의 공소들을, 마산 본당에서는 마산 · 창원 · 김해 · 함안 · 의성 · 창녕 · 밀양 등지의 공소들을 관할하였다.
그러나 줄리앙 신부는 성당을 완공하고 이전을 준비하던 중 1909년 봄에 부산 본당으로 전임되었고, 그 뒤를 이어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신부가 2대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경상남도 서부 지역에 두 개의 본당이 있게 되면서 전교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게 되었는데, 1909년의 교세 현황을 보면 소촌 본당의 신자수가 1,336명이었고, 마산 본당의 신자수가 1,444명이었다. 이 무렵 무세 신부는 전교 활동에 노력하는 동시에 인재 양성을 위해 1910년에 성지(聖旨) 학교(성지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그러던 중 1911년 4월 8일자로 조선 대목구에서 대구 대목구가 분리 설정되면서 경상도 남부 지역도 모두 새 대목구로 편입되었다.
대구 대목구가 설정된 후인 1911년 7월경에 마산 본당의 무세 신부는 교구 경리 신부로 전임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카넬(Canelle, 簡弘模) 신부가 3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장차 성지 학교 교사(校舍)로 이용할 넓은 부지를 매입하는 등 본당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4년 5월 목포 본당으로 전임되고, 동시에 전라도의 되재(升時) 본당에 있던 베르몽(Bermond, 睦世榮) 신부가 4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베르몽 신부는 1943년 2월까지 재임하면서 1931년에는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였고, 1932년에는 석조 성당을 건립하였으며, 1935년에 성지 강습소를 설립하는 등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한편 '문산 본당' 으로 개칭된 소촌의 김명제 신부는 배명 학교(培命學校, 1926년에 폐교)를 설립하고, 본당 정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6년 5월 서울 대목구로 되돌아가 황해도 장연 본당을 맡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드망즈 주교는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를 문산 본당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Ⅲ . 교세의 확대와 마산교구 설정
〔본당과 교세의 확대〕 이후 경남 서부 지역에는 계속하여 본당이 신설되었다. 우선 1913년 4월 26일에는 '함양(咸陽) 본당' 이 설립됨과 동시에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임명되었고, 1926년 5월 30일에는 거제 '옥포(玉浦) 본당' (훗날 폐지되었다가 부활됨)이 설립됨과 동시에 김후생(金厚生, 바오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며, 함양 본당에 있던 정수길(鄭水吉, 요셉) 신부가 문산 본당에서 분리 · 신설된 진주의 '옥봉(玉峯)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926년에 이처럼 두 개의 본당이 함께 신설된 이유는 당시의 신자수가 증가하여 마산 본당의 베르몽 신부가 25개 공소에 3,139명을, 문산 본당의 김양홍 신부가 39개 공소에 2,595명을 사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 1928년 5월 6일에는 거창(居昌) 본당이 신설되었으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조차성(趙且成, 바오로) 신부가 병 때문에 부임하지 못하였으며, 1929년 5월에는 통영(統營) 본당' (충무 태평동 본당의 전신)이 신설됨과 동시에 송남호(宋南浩, 요셉) 신부가, 1932년 5월 22일에는 '합천(陝川) 본당' (1940년 거창으로 이전됨)이 신설됨과 동시에 장순도(張順道, 바르나바) 신부가, 1935년 6월 5일에는 '함안(咸安) 본당' 이 설립됨과 동시에 뤼카(Lucas, 柳嘉鴻) 신부가 임명되었다. 또 같은 해 6월 16일에는 옥포 본당에서 '거제(巨濟) 본당' 이 분리 · 신설되면서 이명우(李明雨, 야고보) 신부가, '황리(黃里) 본당' (통영군 광도면, 1939년 고성으로 이전됨)이 신설되면서 신순균(申順均, 바오로) 신부가, '진영(進永) 본당' 이 신설되면서 정재석(鄭在石, 요셉) 신부가, 1938년 6월 12일에 '장재리(長在里) 본당' (진주)이 신설되면서 김준필(金俊弼,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각각 임명되었다. 이어 1939년 5월 5일에는 황리 본당이 '고성(固城) 본당' 으로 변경 · 이전되면서 서정도(徐廷道, 베르나르도) 신부가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7월에는 합천 본당이 박동준(朴東俊, 마티아) 신부에 의해 '거창 본당' 으로 변경 · 이전되었다. 이로써 해방 이전까지 경남 서부 지역에는 모두 12개의 본당이 있게 되었다.
〔해방 이후의 변모〕 그 동안 대구 대목구는 1938년 드망즈 주교가 사망한 뒤 1939년에 무세 주교가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일제의 압력으로 인해 1942년에 사임하고, 이어 일본인 하야사카(早坂久兵衛) 주교가 제3대 교구장으로 재임하다가 1946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신부와 서울 대목구의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가 각각 제4 · 5대 교구장으로서 일시 교구를 관리하다가 1948년 12월 8일에 최덕홍(崔德弘, 요한) 신부가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1월 주교 성성식을 갖고 활동하게 되었다.
이 무렵 경남 서부 지역에서는 1946년 4월에 '진해(鎮海) 본당' (중앙동 본당의 전신)이 설립되어 김경우(金慶佑, 알릭스) 신부가, 1949년 7월 26일에는 '창녕(昌寧) 본당' 이 설립되어 안달원(安達遠, 베드로) 신부가 각각 임명되었다. 또 완월동 본당(즉 마산 본당)에서는 성지 학교를 정식 중등학교로 인가받기 위해 노력한 결과 1947년에는 이를 성지여자중고등학교로 인가를 받게 되었다. 아울러 본당 신자들은 구마산(舊馬山) 지역에 본당을 분리 · 설립하는 데도 노력하여 1947년에는 이전부터 적립해 온 기금을 바탕으로 구마산 지역인 남성동(南城洞)에 새 부지와 가옥을 마련하고 임시 성당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1950년의 6 · 25 동란으로 인해 본당 신설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완월동 본당에서는 전란후에 다시 본당 신설에 노력하여 1952년 6월 16일에는 마침내 '구마산 본당' (훗날 중앙 본당, 그리고 다시 남성동 본당으로 개칭됨)이 설립됨과 동시에 류선이(柳善伊, 요셉)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53년 11월 19일에는 '장승포(長承浦) 본당' 이 설립되어 거제 본당에 재임하던 박문선(朴文善, 야고보) 신부가 임명되었는데, 그는 이에 앞서 1953년 9월 15일자로 해성(海星)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듬해인 1954년 6월 18일에는 경상남도 전체가 '경남 감목 대리구' 로 설정되었고, 이어 1957년 1월 21일에는 '부산 대목구' 가 설정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최재선(崔再善, 요한) 주교가 임명되었다. 이때 완월동 본당에서는 신마산 지역의 중심지에 다시 본당을 분리 · 설립할 계획을 세워 이를 최재선 주교에게 요청하였으며, 그결과 1957년 6월 20일에 '월남동(月洞) 본당' 이 설립됨과 동시에 김두호(金斗湖, 알로이시오) 신부가 초대주임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김영호(金永浩, 멜키올) 신부가 매일신문사로 전임되면서 공석이 된 완월동 본당 주임을 겸하였다. 한편 1955년 한국에 진출하여 거제도에서 생활하던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진주 · 삼천포 등지를 담당하게 되면서 1957년 6월 20일자로 '삼천포 (三千浦) 본당' 이 설립되고 칼마리니(Donato Calmarini, 강지홍)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또 진영 본당에 재임 중이던 정삼규(鄭三圭, 요한) 신부는 1957년 10월 25일에 진영 성모병원을 설립하였으며, 진주 본당에서 사목하던 주포니(Costanzo Giupponi, 주) 신부는 1959년 6월 18일 산청에 성심원(성심인에병원의 전신)을 설립하였다.
〔마산교구 설정〕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경남 서부 지역에는 1960년까지 모두 17개의 본당이 있게 되었고, 다시 교세가 늘어나면서 1965년까지 남해(南海) · 사천(泗川) · 칠암동(七岩洞) · 경화동(慶和洞) · 산청(山淸) · 하동(河東) 등 6개 본당이 신설됨으로써 모두 24개 본당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동부 지역의 본당이 모두 27개로, 당시 부산교구 전체의 교세는 본당이 51개, 신자수는 10만여 명에 달하였다. 그러자 부산교구의 최재선 주교는 사목상의 어려움을 느끼고, 주한 교황 공사를 통하여 마산교구의 신설을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이때 최재선 주교는 마산교구의 신설이 1년 후에나 실현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교황청의 결정이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져 1966년 2월 15일, 교황 바오로 6세의 교구 설정에 대한 칙서에 따라 '마산교구' 의 설립이 결정되었다. 아울러 초대 교구장으로 당시 <가톨릭 시보> 사장으로 있던 김수환(스테파노) 신부가 임명되어 같은 해 5월 31일 주교 성성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다.
IV . 마산교구의 정착과 성장
〔정착과 안정〕 교구 설정 이후 주교좌 본당은 중앙(현 남성동) 본당으로 결정되었지만, 김수환 주교는 완월동 본당 구내에 마련된 임시 교구청에 거처하였다. 이에 따라 교구청 직할 본당이 된 완월동 본당에서는 완월동 지역만을 관할하고 이외의 지역을 월남동 본당으로 이관하게 되었다. 교구 설정 당시 마산교구의 교세는 신자수 약 28,000명, 성직자 22명(한국인 16, 외국인 6), 본당 20개, 공소는 100개였다. 한편 서부 지역의 24개 본당 중에서 장승포 · 진영 · 거제 · 창녕 등 4개 본당의 관할 구역인 창녕군 · 거제군과 김해군 · 밀양군 일부 지역이 부산교구 소속이었다가 1973년 7월 15일에 있은 교구 관할 구역 재조정에 따라 마산교구로 편입되었다. 이 밖에 교구 관할 구역 안에 있는 기관으로는 성지여자중고등학교와 성모 의원, 성심인애병원, 프란치스코회에서 운영하고 있던 '성 프란치스코 양로원' 등이 있었다.
초대 교구장 김수환 주교는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를 위하여"를 사목 표어로 삼고, 새로 출발한 마산교구의 기반 조성을 위해 초기부터 교회 조직과 교구 체제를 정비하는 데 전념하였다. 또 교구의 모든 사목 행정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한 교회의 쇄신 정책에 따라 펴나갔는데, 우선 1966년 10월 11일 교구 사목 협의회를 발족시킴으로써 보다 체계적으로 교구를 운영하고, 본당 및 공소 설립도 효율적으로 시행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 일환으로 1967년에는 교구 지도자 강습회를 개최하였으며, 1968년 2월에는 교구 전례위원회도 조직하였다. 특히 교구 설정과 함께 맞이한 병인박해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한국 순교 복자 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1966년 12월 28일 남성동 본당에서 상남동 본당이 분리 · 설정되었다. 그러나 김수환 주교는 처음의 계획을 실현하기도 전인 1968년 4월 9일, 노기남 대주교의 은퇴로 공석이 되어 있던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됨에 따라 마산교구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설립된 지 2년 만에 교구장이 공석이 된 마산교구는 당시 부산교구장이었던 최재선(요한) 주교가 교구장 서리로서 잠시 교구 행정을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8년 9월 7일 부산교구 부주교인 장병화(張炳華, 요셉) 몬시놀이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그 해 10월 7일 로마에서 주교 성성식을 갖고 돌아와 10월 30일에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다. 당시 마산교구에는 21개의 본당과 3개의 준본당, 24명의 성직자(한국인 22, 외국인 2), 60명의 수도자, 28,685명의 신자가 있었다. 이때 장병화 주교는 "사랑으로 서로 봉사하자"를 사목 표어로 삼고 우선 교세 확대에 노력하였으며, 1969년에는 교구 숙원 사업인 가톨릭 문화원 겸 교구청 건립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앞서 1969년 9월 1일에는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의 주선으로 대성동에 파티마 병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교구 차원의 의료 사업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파티마 병원은 마산을 비롯한 인접 지역의 의료 복지 향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마산교구는 재정적인 기반이 취약하였다. 이에 교구에서는 1971년에 오스트리아 부인회 및 그라츠 교구 등과 자매 결연을 맺었으며, '가톨릭 문화원' 신축을 위한 기금을 지원받아 오동동에 부지를 마련한 뒤 1972년에 기공식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교구 산하에 여러 평신도 사도직 단체들을 조직하는 한편 1972년 6월 29일에는 요셉회 연합회로부터 창원의 땅을 기증받아 신자들을 위한 교구 묘지를 조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1973년에는 부산교구와 협의하여 관할 구역을 재조정하고 4개 본당 구역을 인수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3일에는 <가톨릭 마산교구보>를 창간하였다. 이어 1974년 5월 31일에는 가톨릭 문화원을 완공하고, 6월 21일에는 완월동의 임시 교구청사를 문화원 안으로 이전한 뒤 10월 26일에 낙성식을 가짐으로써 이곳이 교구 행정의 중심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 무렵 교구에서는 사회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여러 차례 구국 기도회를 개최하였고, 한국 순교 복자들을 위한 현양 대회도 개최하였다.
〔체제 정비와 성장〕 마산교구에서는 교구 설정 10주년이 되는 1976년부터 교구 성장의 밑거름을 마련하고자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우선 1월 9일에 교구 사목국을 신설하였으며, 3월 1일에는 석전동에 건립된 가톨릭 여성 회관을 축성함으로써 여성들을 위한 교육 터전을 마련하였고, 5월 11일에는 천주교 마산교구 유지 재단의 정관을 변경 · 인가받았으며, 5월에는 3차에 걸쳐 교구 차원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묵상회(M.B.W.)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0월에는 그 동안의 교구 발전상과 변모 상황을 기록한 《교구 설정 10주년 기념》 책자를 발간함과 동시에 경축 행사를 개최하였다.
이후 교구에서는 1980년대 말까지 신자들의 신심 함양을 위해 공동체 묵상회와 특별 강연회, 성령 기도회 등을 정기적으로 실시하였으며, 1976년 이후에는 진영 본당에서 조성한 신 마르코 순교자 묘지에서 순교자 현양대회를 해마다 개최하였다. 뿐만 아니라 레지오 마리애, 꾸르실료 운동, 가톨릭 농민회 등 평신도 사도직 단체를 활성화해 나가는 한편 지구별로 신앙 대회와 공동 피정을 실시하였다. 한편 장병화 주교는 꾸준히 교세 확대와 본당 증설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는데, 그 결과 교구장 취임 이후 20여 년 동안 부산교구에서 편입된 4개 본당을 포함하여 모두 24개 본당이 설립됨으로써 1988년 말에는 45개 본당, 신자수 9만 1,000여 명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988년 12월 정년으로 교구장직을 사임하였으며, 1990년 8월 3일에 사망하였다.
장병화 주교의 사임에 따라 교황청에서는 1988년 12월 28일자로 전주교구장으로 있던 박정일(朴正一, 미카엘) 주교를 제3대 마산교구장으로 전보 · 발령하였다. 이에 박정일 주교는 1989년 2월 21일 마산 성지여자고등학교 강당에서 교구장 착좌식을 갖고 "충성과 온유" 를 자신의 사목 표어로 삼아 먼저 교구 기구를 체계화했으며, 소공동체 운동 · 복음화 운동 등을 통한 교구 발전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결과 1990년과 1991년에 걸쳐 교구 홍보국 · 성소국 · 사회 복지국 등이 신설되었고, 1992년 6월에는 '세계 레지오 창설 70주년 및 교구 도입 35주년 기념 복음화 대회' 가 개최되었으며, 1993년 5월에는 2000년대 복음화를 위한 교구 발전 기획위원회가 신설되었다. 한편 1991년 10월에는 교구 차원에서 시행하는 해외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에콰도르 선교 후원회'가 창립되었고, 1993년 12월에는 교구 평신도 사도직협의회에서 선교 대상(宣敎大賞)의 운영 규정을 마련하여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또 1993년 4월에 '우리 밀 살리기 운동 경남 협의회' 가 창립된 데 이어 1995년 11월에는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 마산교구 본부 창립 대회'가 개최됨으로써 교구 차원에서 농촌 돕기 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처럼 마산교구에서는 박정일 주교 착좌 이후 교구 성장에 노력하여 1995년 말 현재 총 신자수가 12만 1,851명으로 증가하였고, 본당 57개, 공소 86개, 주교 1명, 몬시놀 2명, 신부 114명(한국인 113, 외국인 1), 병원 2개, 중학교 2개교, 고등학교 2개교, 수도 단체 26개의 교세를 갖는 교구로 성장하게 되었다.
※ 참고문헌 김구정, 《천주교 경남 발전사》, 부산교구 주교관, 1967/ 천주교 마산교구 설정 10주년 기념 경축 준비위원회 편, 《교구 설정 10주년 기념》, 천주교 마산교구, 1976/ 一, 《마산교구보500회 기념집》, 1983/ 부산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教區年報》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천주교 문산 교회 편, 《文山聖堂八十年 史》, 1985/ 천주교 진영 교회 편, 《進永本堂五十年史》,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드망즈 주교 일기》, 가톨릭신문사, 1987/ 마백락, 《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 대건출판사, 1989/ 天主教 釜山教區 편, 《釜山教區三十年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90. 〔車基真 · 李裕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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